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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게 밴 향기 취해 서가에서 길을 잃다

책, 그리고 기억을 찾아서

짙게 밴 향기 취해 서가에서 길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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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과 ‘낡은 책’

독자로서는 반가운 현상이지만, 출판계 전체로서는 위기의 한 증후라고도 한다. 약삭빠른 출판사에서는 반품되어 들어온 책은 물론 반응이 꽤 괜찮은 새 책을 따로 빼내 이곳에 내다판 적도 있다고 한다. 이 경우, 저자 인세를 비롯한 비용이 대폭 줄어든다. 온라인에서 새 책을 구매하면 곧바로 중고로 얼마에 되팔 수 있다는 안내문이 뜬다. 책 상태가 아주 좋으면 정가 대비 25~35%에 팔 수 있고 신간이나 베스트셀러는 기본적으로 50% 수준의 매입가를 보장한다. 이렇게 책이 두세 번만 돌아도 저자 인세는 3분의 1로 줄어든다. 출판계의 숙원 사업인 ‘도서정가제’가 중고서점에 의해 유명무실화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그래서 나온다.

오래된 헌책방을 정신적 고향으로 삼으면서, 서울의 주요 헌책방은 물론 지방의 소도시로 일을 보러 갈 때도 시간을 빼내 그곳의 헌책방이나 오래된 서점을 반드시 들르곤 했던 나로서는 이러한 풍경이 기이하면서도 신선한다.

헌책방에 가면, 그 퀴퀴한 냄새마저도 정겹고, 사방에 꽂혀 있는 책 무더기 속에서 원하는 책 한 권을 찾았을 때의 기분은 흡사 보물을 얻은 격이었지만, 아주 전문적인 곳을 빼놓고는, 주인마저 서점 안에 무슨 책이 있는지 모르는 수가 있고, 어떤 곳은 말이 좋아서 ‘헌책’이지 실상은 그저 ‘낡은’ 책만 쌓여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저러나 그런 헌책방마저 점점 사라지는 판국이니, 책 구경을 다닐 만한 곳이 확실히 줄고 말았다. 모든 것이 정갈해지고 세련돼졌다. 이러한 국면에서도 사람들은 사랑을 하고 책을 읽고 또 책을 사러 나온다. 지금의 이런 중고서점은, 이런 분위기를 자신의 문화로 여길 만한 세대에게는 언젠가 추억의 장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 내장된 저 가난했던 시절의 헌책방만큼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기억 하나를 어루만져보고 싶다.



짙게 밴 향기 취해 서가에서 길을 잃다

경기 고양시 일산구 ‘알라딘중고서점’.

가난했던 시절의 추억

오래전 일이다. 그때는 모두가 가난했으므로 책다운 책을 보는 것 자체가 귀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친구네 집을 전전했고 중학교 때는 공립도서관을 들락거렸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교보문고를 시작으로 종로서적과 양우당을 거쳐 귀가하는 게 일이었다. 그곳에 책은 많았고, 내게는 책값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집 가까이에 있는 헌책방을 도서관 삼아 다녔다. 그 시절에는 가난한 동네마다 헌책방이 대여섯 군데씩 꼭 있었다.

그 시절, 내가 살던 곳은 지하철 4호선 미아역 부근이었는데, 미아역에서 삼양시장으로 통하는 큰길가에 헌책방이 다섯 군데 있었다. 역에서 내리면 곧장 만나는 곳의 헌책방은, 그야말로 헌책방이었다. 헌책보다는 낡은 책이 많았다. 레퍼토리는 빈곤했다. 그럼에도 자주 갔는데, 월간 ‘문학사상’이 창간호부터 거의 전권이 있었다. 매번 갈 때마다 한 권씩 읽었다. 돈이 없어서 사지는 못했다. 낡은 난로 위에 찌그러진 주전자를 올려놓고 꾸벅꾸벅 졸던 주인 할아버지는 내가 들어와서 한참이나 책을 읽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그때는 그런 풍경이 많았다.

거기서 스무 걸음쯤 가면 또 헌책방이 있었는데, 그 길가에 있던 헌책방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버텼다. 올해 초, 트위터에서 낯선 사람의 쪽지를 받았다. 그 헌책방 주인의 딸이었다. 부친께서 이따금 신문이나 방송에서 내 글을 읽거나 나를 보게 되면 “아, 저 친구. 우리 가게에 자주 오던 양반인데…” 하더란다. 그래서 부친 안부를 물으니 헌책방을 닫은 지는 오래됐고 이제는 해가 지는 방향으로 자주 고개를 돌린다고 한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앞에 있던 헌책방이 이 거리로 이사 온 적도 있다. 학교 다닐 때, 후문 아래에 있던 그 헌책방을 나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찾았다. 그 모습이 기특했던지 주인아저씨는 꽤 오래된 시집 몇 권을 보여주면서 그중 한두 권을 가지라고 했다. 내가 문학에 조예가 깊었더라면 젊은 날의 시인 김수영이 김경린, 박인환과 함께 1948년에 만든 시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집어 들었을 텐데, 그 대신 김화영, 황동규, 정현종, 김주연 그리고 김현이 함께 만든 동인지 ‘사계’ 1, 2권을 골랐다. 지금 그 동인지는 내 서가에서, 그때보다 더 많이 바스라지면서 버티고 있다. 책이 나온 지 50년이 다 되어가고 내가 그것을 선물로 받고 고이 모셔두기 시작한 지도 30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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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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