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맞선도 보지 않고 결혼했어요. 젊은 예술가에게 누드는 로망이었죠. 혼례 3일 후 아내를 찍었습니다. 승강이하다 촬영용 램프가 바닥으로 떨어져 깨졌는데, 아내가 당황했죠.”
그가 소리 내 웃으면서 오래된 기억을 꺼낸다. 호랑이 만난 사슴처럼 놀란 신부는 그날 맨발로 뛰어나가 시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가 한달음에 달려와 갓 결혼한 아들을 꾸짖었다.
“미친놈.”
부부는 72년 해로(偕老)했다. 아내 건강이 전만 못해 걱정이다.
“다 벗고 찍었어야죠”
이명동은 한국 사진계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사진예술 개척자면서 방향타였고 조타수였으며 저널리스트로서도 거인의 발자국을 남겼다.
‘먼 역사 또렷한 기억.’
서울 송파구 한미사진미술관에서 7월 5~31일 열린 ‘이명동 사진전’ 주제다. 1949년의 백범 김구 선생, 6·25전쟁 종군 기록, 이승만 정권 시절 조병옥·신익희 선생, 4·19혁명 현장, 1950~60년대 한반도의 섬이 사진예술로 오롯하게 남았다.
72년 전 아내 사진은 전시를 준비하면서 필름을 정리하다 발견한 것이다. 딸은 필름에 담긴 소싯적 어머니 모습을 보면서 까르르 웃었다.
“다 벗고 찍었어야죠, 아쉽다.”
‘먼 역사 또렷한 기억’이 이명동의 첫 개인전. “70년 넘게 사진예술에 헌신하면서도 자신을 앞세운 적이 단 한번도 없다”면서 월간 ‘사진예술’ 발행인 김녕만(65)은 이렇게 말했다.
“6·25전쟁 때 사진가로 종군해 화랑무공훈장을 두 차례나 받을 만큼 열심히 사진을 찍으셨습니다. 4·19 때는 목숨을 걸고 혁명의 현장을 촬영했고요. 안타깝게도 선생이 찍은 사진 대부분이 유실됐습니다. ‘먼 역사 또렷한 기억’은 전설의 그림자나마 엿볼 수 있는 자리였어요.”
‘전설’이라는 낱말은 누구에게나 붙이는 게 아니다. 이명동은 한국 사진의 지평을 연 선구자면서 한국 사진예술의 아버지다.
그는 ‘동아일보’가 창간된 1920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카메라가 소년의 첫사랑이었다. 보통학교 다닐 적 하굣길마다 일본인 상인이 판매대에 진열한 카메라를 들여다보면서 설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이명동(왼쪽)이 7월 21일 첫 개인전 ‘먼 역사 또렷한 기억’을 찾은 4·19혁명공로자회 이기택 회장(가운데)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