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호

“올라갈 땐 인기를 얻지만 내려올 땐 깊이를 찾지요”

록, 발라드, 국악 넘나든 ‘음악작가’ 김수철

  • 글: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www.izm.co.kr

    입력2003-03-25 13: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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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딴따라 취급을 면치 못하는 대중음악가가 ‘거인’이라는 칭호를 듣는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물며 가요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형편없었던 1980년대임에랴. 그 시기 한국가요계에는 ‘작은 거인’이라 불리는 두 사람, 조용필과 김수철이 있었다.
    • 인기곡 수나 명성에서 조용필과 비교할 수 없는 김수철에게 ‘작은 거인’의 칭호가 아깝지 않은 것은, 가 구축해온 음악세계가 ‘거대하다’는 말이 아니고는 형용할 수 없는 까닭이다.
    “올라갈 땐 인기를 얻지만 내려올 땐 깊이를 찾지요”
    김수철이 ‘작은 거인’으로 불리게 된 건 그가 학창시절이던 1970년대 말 활동했던 밴드 이름이 ‘작은

    거인’이었던 데 있다. 1978년 전국대학가요축제 경연대회에 나가 강렬한 록음악인 ‘일곱 색깔 무지개’로 청중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는 ‘못다 핀 꽃 한송이’ ‘내일’ ‘나도야 간다’ ‘왜 모르시나’ 등의 히트곡을 터뜨리며 ‘1980년대의 중요한 음악작가’로, ‘가장 성공한 캠퍼스출신 록 뮤지션’으로 팬들의 뇌리에 저장됐다. 1984년 공전의 흥행을 몰고 온 배창호 감독의 영화 ‘고래사냥’에 주연배우로 출연한 것 또한 이 시기 그가 대중에게 남긴 중요한 이미지 중 하나다.

    하지만 대중가수로 성공한 뒤 그의 행보는 기대와 사뭇 달랐다. 마치 방랑자처럼 종잡기 어려운 활동의 연속이었다. 가요를 부르는 가수에 만족하지 않고 인기와는 거리가 있는 영화와 드라마음악, 국악연주음악, 행사음악, 무용음악의 작곡가로 내달렸다. 음반판매량과 방송순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한국의 가수들에게서 일찍이 찾아보기 어려운 ‘자기 전복’이었다.

    비록 히트가요를 만들어내는 인기가수로는 팬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갔지만 그의 이름은 영화 ‘서편제’의 국악음악으로, 1988년 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 개막식 음악 등으로 늘 우리 곁에 자리해 있었다. 특히 국악과 양악의 조화를 통해 국악의 대중화에 기여한 그의 업적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1980년대 음악을 추억하는 일부 팬들은 심지어 그를 조용필 옆에 놓으며 비등한 점수를 매긴다. MBC 프로듀서 조형재는 “김수철은 1980~90년대 한국음악을 풍요롭고 다채롭게 그려낸 기념비적 자취이자 지금도 재생산이 계속되는 영원한 음악 탯줄이다. 드물게 1인 밴드를 추구했다는 점부터 그는 위대하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음악가의 소임이 대중이 주는 명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힘들고 괴롭지만 ‘개척과 실험’이야말로 예술가의 의무임을 그는 잊지 않았다. 신중현과 송창식이 그랬듯 한국인은 한국의 전통소리로 향해야 한다는 명제를 그는 한국 대중음악계에 다시금 일깨웠다. 지난 겨울 서양의 전기기타로 우리의 전통가락을 연주해 발표한 ‘기타산조’ 앨범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적 노력은 한번도 멈춘 적이 없다.



    월드컵 열기가 일깨운 자신감

    인터뷰를 위해 서울 강남구 학동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책상 위에는 행사음악을 만들기 위한 악보 여러 장이 널려 있었다. “행사음악을 맡으면 돈은 얼마나 받느냐”고 묻자 그는 “돈 얘기는 하지 말아달라”고 잘라 말했다. “돈에 치이면 음악 못하지…”라는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기성세대한테는 아직도 젊은 가수라는 느낌을 주는 동안(童顔)이지만 그의 이력은 어느덧 25년에 달한다. 짧지 않은 세월은 그의 눈가에 슬그머니 주름을 새겨놓았다. 그러나 웃음기 가득한 그의 말투는 데뷔 때 그대로 여전히 발랄했다. 모처럼 지나간 시절과 음악을 회고하는 게 즐거웠던지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때로 자리에서 일어나 코믹한 제스처를 곁들이며 속사포처럼 얘기를 쏟아놓았다. 필자가 노트에 받아 적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인터뷰 내내 연신 폭소가 터졌다.

    김수철은 지난해 작곡가에서 가요를 부르는 가수로 돌아와 오랜만에 앨범 ‘팝스 앤 록’을 발표했다. 이 앨범에는 본인 이외에도 신해철 장혜진 박미경 이상은 등 후배가수들이 대거 참여해 헌정하듯 그를 위해 노래를 불렀다. 그 음반이 어느 정도 호응을 얻었는지 묻는 것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오랫동안 작곡만 하다가 지난해에는 직접 노래도 부른 대중가요 음반을 내놓았습니다. 12년 만에 낸 가요 앨범인데다 ‘저기를 봐’ ‘잊을 수 없어요’ 등의 곡은 좋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언론에도 많이 소개되고 활동도 열심히 한 것으로 아는데, 결과는 어땠습니까?

    “실적은 좋지 않았어요. 제 것만 안 나간 게 아니라 음반시장 전체가 워낙 어려우니까…. 음악가는 앨범이 나올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거죠. 판이 팔리고 히트곡이 나오는 것은 대중의 몫이니까요.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요. 그래서 딱히 실망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김수철이 다시 가요로 돌아와 기타를 잡았다는 것은 상당히 알려졌고, 그 점에서는 성공했다고 봅니다.”

    -다시 가요로 돌아온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지난해 초반 뉴스를 장식했던 이혼도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월드컵의 영향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그 한달 동안 붉은악마의 열렬한 응원에 감동을 받았고, 특히 그들이 고맙게도 내 노래 ‘젊은 그대’와 ‘나도야 간다’를 불러줘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앨범은 록의 열정을 팬들과 나누고 싶어서 내놓은 거예요. 앨범을 낼 때부터 된다 안 된다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상업적인 이유는 전혀 없었고, 이혼문제와는 더더욱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더 열심히 홍보하고 공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데 월드컵 때 시청 앞 응원단에 참여한 젊은 세대가 김수철이란 존재를 알던가요?

    “월드컵 축하무대에 섰을 때 일입니다. 응원단이 처음에는 제가 누군지 모르다가 ‘젊은 그대’를 연주하고 ‘치키치키차카차카’를 노래하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저 사람이 김수철이구나!’ 하더군요. ‘치키치키차카차카’는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반에 TV로 방영된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의 주제곡이어서 신세대들도 잘 알고 있는 곡이었어요.”

    -12년 만에 가요계로 돌아와 보니 소감이 어떻던가요? 혹 격세지감은 없었습니까? 그간 워낙 환경이 달라져 생경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후배들과 작업하는 게 어렵지 않았는지도 궁금합니다.

    “특별한 차이는 없었어요. 다만 그동안 영화 행사 TV드라마 음악을 맡아 곡만 쓰다가 직접 노래를 부르려니 대중가수로서의 호흡을 찾는 게 어려웠습니다. 앨범을 내면서 두 곡이나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는데 과거에 비해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들더라고요. 전에는 뮤직비디오를 만들지 않았잖아요. 사실 음악 자체와는 상관이 없는 돈이지만 현실이 그렇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하기는 해야 되고.

    그래서 금년에는 밴드를 결성해 라이브에 주력할 생각입니다. 뮤직비디오에 쓸 돈을 차라리 여기에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후배들은 생각보다 협조적이고 열심이었어요. 전혀 작업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선천적 방랑자 기질?

    김수철에 대해 떠오르는 첫 번째 의문은, ‘못다 핀 꽃 한송이’나 ‘내일’을 히트시키며 전성기의 명성을 누리던 중에 왜 가요에 집중하지 않고 국악 영화음악 행사음악 등 대중적으로 승산(?)이 없는 방향으로 달려갔느냐는 점이다.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히트가요를 써낼 능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받았던 음악인으로서는 의아한 행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수철은 1984년 한해동안 KBS 최고가수상, MBC 10대가수상 등 언론이 주는 상만 16개를 받았다. 당대 최강이었던 조용필이나 1990년대의 서태지가 부럽지 않은 슈퍼스타였던 셈이다. 아이러니컬하게 그가 잘해도 본전이라는 국악에 몸을 던진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팬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던 이 ‘인기가수’는 밤이면 밤마다 남몰래 여러 국악연주자를 찾아가 열성적으로 사사했다.

    -돌이켜보면 대단한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런 음악적 선회를 결심한 겁니까? 당시 일각에선 가요계 메커니즘에 동화하지 못하는 ‘선천적 방랑기질’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던 걸로 압니다.

    “활동을 열심히 할 때 저에 대해서 많은 얘기가 있었습니다. 정착하는 기질이 못 되어 음반 기획사를 이곳저곳 옮겨다닌다느니, 결국에는 회사가 공중 분해됐다느니, 김수철이 잠적했다느니 하는 연예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저와 직접 만나 얘기를 듣고 쓴 기사는 없었어요. 대부분 매니저나 회사의 얘기만을 듣고 제 이야기인 것처럼 포장했을 뿐이죠. 그 기사들 때문에 제가 가요계에 동화하지 못했다는 시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당시 전 오로지 음악만 생각했습니다.

    특히 기획사와 관계된 일들은 참 답답했어요. 저는 그들에게 항상 ‘나를 길게 지켜봐달라. 절대로 배반하거나 실망시키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지요. 하지만 당시 기획사는 음악가의 사고와는 차이가 많았습니다. 전 지금 그때를 ‘사회 레슨’을 받았던 기간으로 여깁니다. 그때는 뜻대로 되지 않아 더러 화도 났지만 지금 생각하면 세상이 돌아가는 현실을 배웠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왜 하필 국악을 택했습니까.

    “먼저 시기적으로 틀린 점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가 한참 활동할 때 국악으로 돌아섰다고 하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국악공부를 시작한 것은 인기가수로 뜨고 나서가 아니라 ‘못다 핀 꽃 한송이’ 훨씬 이전인 1980년 8월이었어요.

    그때 저는 워낙 영화를 좋아해서 ‘뉴 버드’란 이름의 영화 소모임에서 활동하고 있었어요. 친구 진유영도 있었고 나중에 CF감독이 된 김종원씨도 그 멤버였습니다. 우리끼리 자비를 털어 8mm 영화를 만들곤 했지요. 그러다가 ‘탈’이란 습작을 장난삼아 프랑스청소년영화제에 출품했습니다. 그랬는데 그 영화가 떡하니 본선에 진출한 겁니다. 제가 음악 담당이었는데, 그렇게 되니 영화음악도 신경 써서 다시 만들게 되더군요. ‘우리 것을 보여줘야 한다. 양악을 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고유의 전통을 표현하고 싶다는 욕심에 그때 처음 기타로 산조를 시도했지요.”

    -한국인이 왜 외국음악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일종의 부끄러움, 수치심이 생겼다는 말이군요.

    “그렇죠. ‘탈’이란 영화를 계기로 머리 속에 계속 그 의문이 맴돌았습니다. 정말 창피했어요. 왜 우리가 허구한 날 서구음악만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 것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국악을 알아야겠다는 판단이 섰어요. 순전히 음악적인 이유 때문에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정적으로 본다면 ‘나는 국악을 한다’는 영웅주의적 소재주의로 비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행여 ‘예술가’로서의 이미지를 위해 의도적으로 ‘기획’한 것 아니냐는 겁니다.

    “저는요,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는 것만 해왔습니다. 성격이 단순해서 무엇을 꾸미거나 기획할 줄 모르지요.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그런 종류의 ‘기획력’은 제게 애당초 없습니다. 국악을 싫어하면서 열중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아직도 잊지 못하는 ‘537장’

    -그래도 서구 록이나 포크를 주로 듣고 음악을 해온 상태에서 국악이 바로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이후 앨범에도 여러 국악기들이 등장하는데 어떻게 배웠는지도 궁금합니다.

    “국악을 배우려는 마음은 가득했지만 체계적으로 배울 길은 없었어요. 당시만 해도 변변한 학원도 없던 시절이니까요. 그래서 일단 산조부터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음반을 사다가 듣는데, 아닌게아니라 왜 그렇게 졸리던 지 고통스러웠습니다. 심각하게 폼잡고 듣다 보면 어느새 잠들어있는 거예요. (웃음) 우리 것이 훌륭한 줄은 알겠는데 너무나 재미가 없더라고요. 인내심을 갖고 계속 들으면서 저 나름대로 국악을 현대화하고 대중화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거문고 가야금 아쟁 등의 국악연주자들을 찾아다니며 배울 때도 선생님들 앞에서 졸다가 혼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분들 성격이 또 좀 까다로운가요. 어떤 경우에는 ‘그런 정신머리로 무슨 국악을 하느냐’고 퇴출당하기도 했어요.

    그러던 어느날 한참을 졸다가 문득 살아 있는 소리, 깊은 소리 한 음을 경험했습니다. 선생님의 거문고 연주 마지막 음이었는데, 이거다 싶더군요. 그때 난생 처음 귀가 조금 뚫렸던 거죠. 이후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국악공부에 매달렸습니다.”

    공인된 것이든 아니든 김수철이 국악 관련 대중음악으로 보유한 ‘최초’ 타이틀은 한둘이 아니다. 1980년에 이미 기타산조를 실험한 것을 위시해 이듬해 작은 거인 2집에는 최초의 국악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