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호

“올라갈 땐 인기를 얻지만 내려올 땐 깊이를 찾지요”

록, 발라드, 국악 넘나든 ‘음악작가’ 김수철

  • 글: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www.izm.co.kr

    입력2003-03-25 13: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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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딴따라 취급을 면치 못하는 대중음악가가 ‘거인’이라는 칭호를 듣는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물며 가요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형편없었던 1980년대임에랴. 그 시기 한국가요계에는 ‘작은 거인’이라 불리는 두 사람, 조용필과 김수철이 있었다.
    • 인기곡 수나 명성에서 조용필과 비교할 수 없는 김수철에게 ‘작은 거인’의 칭호가 아깝지 않은 것은, 가 구축해온 음악세계가 ‘거대하다’는 말이 아니고는 형용할 수 없는 까닭이다.
    “올라갈 땐 인기를 얻지만 내려올 땐 깊이를 찾지요”
    김수철이 ‘작은 거인’으로 불리게 된 건 그가 학창시절이던 1970년대 말 활동했던 밴드 이름이 ‘작은

    거인’이었던 데 있다. 1978년 전국대학가요축제 경연대회에 나가 강렬한 록음악인 ‘일곱 색깔 무지개’로 청중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는 ‘못다 핀 꽃 한송이’ ‘내일’ ‘나도야 간다’ ‘왜 모르시나’ 등의 히트곡을 터뜨리며 ‘1980년대의 중요한 음악작가’로, ‘가장 성공한 캠퍼스출신 록 뮤지션’으로 팬들의 뇌리에 저장됐다. 1984년 공전의 흥행을 몰고 온 배창호 감독의 영화 ‘고래사냥’에 주연배우로 출연한 것 또한 이 시기 그가 대중에게 남긴 중요한 이미지 중 하나다.

    하지만 대중가수로 성공한 뒤 그의 행보는 기대와 사뭇 달랐다. 마치 방랑자처럼 종잡기 어려운 활동의 연속이었다. 가요를 부르는 가수에 만족하지 않고 인기와는 거리가 있는 영화와 드라마음악, 국악연주음악, 행사음악, 무용음악의 작곡가로 내달렸다. 음반판매량과 방송순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한국의 가수들에게서 일찍이 찾아보기 어려운 ‘자기 전복’이었다.

    비록 히트가요를 만들어내는 인기가수로는 팬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갔지만 그의 이름은 영화 ‘서편제’의 국악음악으로, 1988년 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 개막식 음악 등으로 늘 우리 곁에 자리해 있었다. 특히 국악과 양악의 조화를 통해 국악의 대중화에 기여한 그의 업적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1980년대 음악을 추억하는 일부 팬들은 심지어 그를 조용필 옆에 놓으며 비등한 점수를 매긴다. MBC 프로듀서 조형재는 “김수철은 1980~90년대 한국음악을 풍요롭고 다채롭게 그려낸 기념비적 자취이자 지금도 재생산이 계속되는 영원한 음악 탯줄이다. 드물게 1인 밴드를 추구했다는 점부터 그는 위대하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음악가의 소임이 대중이 주는 명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힘들고 괴롭지만 ‘개척과 실험’이야말로 예술가의 의무임을 그는 잊지 않았다. 신중현과 송창식이 그랬듯 한국인은 한국의 전통소리로 향해야 한다는 명제를 그는 한국 대중음악계에 다시금 일깨웠다. 지난 겨울 서양의 전기기타로 우리의 전통가락을 연주해 발표한 ‘기타산조’ 앨범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적 노력은 한번도 멈춘 적이 없다.



    월드컵 열기가 일깨운 자신감

    인터뷰를 위해 서울 강남구 학동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책상 위에는 행사음악을 만들기 위한 악보 여러 장이 널려 있었다. “행사음악을 맡으면 돈은 얼마나 받느냐”고 묻자 그는 “돈 얘기는 하지 말아달라”고 잘라 말했다. “돈에 치이면 음악 못하지…”라는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기성세대한테는 아직도 젊은 가수라는 느낌을 주는 동안(童顔)이지만 그의 이력은 어느덧 25년에 달한다. 짧지 않은 세월은 그의 눈가에 슬그머니 주름을 새겨놓았다. 그러나 웃음기 가득한 그의 말투는 데뷔 때 그대로 여전히 발랄했다. 모처럼 지나간 시절과 음악을 회고하는 게 즐거웠던지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때로 자리에서 일어나 코믹한 제스처를 곁들이며 속사포처럼 얘기를 쏟아놓았다. 필자가 노트에 받아 적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인터뷰 내내 연신 폭소가 터졌다.

    김수철은 지난해 작곡가에서 가요를 부르는 가수로 돌아와 오랜만에 앨범 ‘팝스 앤 록’을 발표했다. 이 앨범에는 본인 이외에도 신해철 장혜진 박미경 이상은 등 후배가수들이 대거 참여해 헌정하듯 그를 위해 노래를 불렀다. 그 음반이 어느 정도 호응을 얻었는지 묻는 것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오랫동안 작곡만 하다가 지난해에는 직접 노래도 부른 대중가요 음반을 내놓았습니다. 12년 만에 낸 가요 앨범인데다 ‘저기를 봐’ ‘잊을 수 없어요’ 등의 곡은 좋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언론에도 많이 소개되고 활동도 열심히 한 것으로 아는데, 결과는 어땠습니까?

    “실적은 좋지 않았어요. 제 것만 안 나간 게 아니라 음반시장 전체가 워낙 어려우니까…. 음악가는 앨범이 나올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거죠. 판이 팔리고 히트곡이 나오는 것은 대중의 몫이니까요.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요. 그래서 딱히 실망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김수철이 다시 가요로 돌아와 기타를 잡았다는 것은 상당히 알려졌고, 그 점에서는 성공했다고 봅니다.”

    -다시 가요로 돌아온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지난해 초반 뉴스를 장식했던 이혼도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월드컵의 영향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그 한달 동안 붉은악마의 열렬한 응원에 감동을 받았고, 특히 그들이 고맙게도 내 노래 ‘젊은 그대’와 ‘나도야 간다’를 불러줘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앨범은 록의 열정을 팬들과 나누고 싶어서 내놓은 거예요. 앨범을 낼 때부터 된다 안 된다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상업적인 이유는 전혀 없었고, 이혼문제와는 더더욱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더 열심히 홍보하고 공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데 월드컵 때 시청 앞 응원단에 참여한 젊은 세대가 김수철이란 존재를 알던가요?

    “월드컵 축하무대에 섰을 때 일입니다. 응원단이 처음에는 제가 누군지 모르다가 ‘젊은 그대’를 연주하고 ‘치키치키차카차카’를 노래하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저 사람이 김수철이구나!’ 하더군요. ‘치키치키차카차카’는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반에 TV로 방영된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의 주제곡이어서 신세대들도 잘 알고 있는 곡이었어요.”

    -12년 만에 가요계로 돌아와 보니 소감이 어떻던가요? 혹 격세지감은 없었습니까? 그간 워낙 환경이 달라져 생경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후배들과 작업하는 게 어렵지 않았는지도 궁금합니다.

    “특별한 차이는 없었어요. 다만 그동안 영화 행사 TV드라마 음악을 맡아 곡만 쓰다가 직접 노래를 부르려니 대중가수로서의 호흡을 찾는 게 어려웠습니다. 앨범을 내면서 두 곡이나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는데 과거에 비해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들더라고요. 전에는 뮤직비디오를 만들지 않았잖아요. 사실 음악 자체와는 상관이 없는 돈이지만 현실이 그렇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하기는 해야 되고.

    그래서 금년에는 밴드를 결성해 라이브에 주력할 생각입니다. 뮤직비디오에 쓸 돈을 차라리 여기에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후배들은 생각보다 협조적이고 열심이었어요. 전혀 작업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선천적 방랑자 기질?

    김수철에 대해 떠오르는 첫 번째 의문은, ‘못다 핀 꽃 한송이’나 ‘내일’을 히트시키며 전성기의 명성을 누리던 중에 왜 가요에 집중하지 않고 국악 영화음악 행사음악 등 대중적으로 승산(?)이 없는 방향으로 달려갔느냐는 점이다.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히트가요를 써낼 능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받았던 음악인으로서는 의아한 행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수철은 1984년 한해동안 KBS 최고가수상, MBC 10대가수상 등 언론이 주는 상만 16개를 받았다. 당대 최강이었던 조용필이나 1990년대의 서태지가 부럽지 않은 슈퍼스타였던 셈이다. 아이러니컬하게 그가 잘해도 본전이라는 국악에 몸을 던진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팬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던 이 ‘인기가수’는 밤이면 밤마다 남몰래 여러 국악연주자를 찾아가 열성적으로 사사했다.

    -돌이켜보면 대단한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런 음악적 선회를 결심한 겁니까? 당시 일각에선 가요계 메커니즘에 동화하지 못하는 ‘선천적 방랑기질’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던 걸로 압니다.

    “활동을 열심히 할 때 저에 대해서 많은 얘기가 있었습니다. 정착하는 기질이 못 되어 음반 기획사를 이곳저곳 옮겨다닌다느니, 결국에는 회사가 공중 분해됐다느니, 김수철이 잠적했다느니 하는 연예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저와 직접 만나 얘기를 듣고 쓴 기사는 없었어요. 대부분 매니저나 회사의 얘기만을 듣고 제 이야기인 것처럼 포장했을 뿐이죠. 그 기사들 때문에 제가 가요계에 동화하지 못했다는 시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당시 전 오로지 음악만 생각했습니다.

    특히 기획사와 관계된 일들은 참 답답했어요. 저는 그들에게 항상 ‘나를 길게 지켜봐달라. 절대로 배반하거나 실망시키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지요. 하지만 당시 기획사는 음악가의 사고와는 차이가 많았습니다. 전 지금 그때를 ‘사회 레슨’을 받았던 기간으로 여깁니다. 그때는 뜻대로 되지 않아 더러 화도 났지만 지금 생각하면 세상이 돌아가는 현실을 배웠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왜 하필 국악을 택했습니까.

    “먼저 시기적으로 틀린 점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가 한참 활동할 때 국악으로 돌아섰다고 하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국악공부를 시작한 것은 인기가수로 뜨고 나서가 아니라 ‘못다 핀 꽃 한송이’ 훨씬 이전인 1980년 8월이었어요.

    그때 저는 워낙 영화를 좋아해서 ‘뉴 버드’란 이름의 영화 소모임에서 활동하고 있었어요. 친구 진유영도 있었고 나중에 CF감독이 된 김종원씨도 그 멤버였습니다. 우리끼리 자비를 털어 8mm 영화를 만들곤 했지요. 그러다가 ‘탈’이란 습작을 장난삼아 프랑스청소년영화제에 출품했습니다. 그랬는데 그 영화가 떡하니 본선에 진출한 겁니다. 제가 음악 담당이었는데, 그렇게 되니 영화음악도 신경 써서 다시 만들게 되더군요. ‘우리 것을 보여줘야 한다. 양악을 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고유의 전통을 표현하고 싶다는 욕심에 그때 처음 기타로 산조를 시도했지요.”

    -한국인이 왜 외국음악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일종의 부끄러움, 수치심이 생겼다는 말이군요.

    “그렇죠. ‘탈’이란 영화를 계기로 머리 속에 계속 그 의문이 맴돌았습니다. 정말 창피했어요. 왜 우리가 허구한 날 서구음악만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 것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국악을 알아야겠다는 판단이 섰어요. 순전히 음악적인 이유 때문에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정적으로 본다면 ‘나는 국악을 한다’는 영웅주의적 소재주의로 비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행여 ‘예술가’로서의 이미지를 위해 의도적으로 ‘기획’한 것 아니냐는 겁니다.

    “저는요,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는 것만 해왔습니다. 성격이 단순해서 무엇을 꾸미거나 기획할 줄 모르지요.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그런 종류의 ‘기획력’은 제게 애당초 없습니다. 국악을 싫어하면서 열중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아직도 잊지 못하는 ‘537장’

    -그래도 서구 록이나 포크를 주로 듣고 음악을 해온 상태에서 국악이 바로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이후 앨범에도 여러 국악기들이 등장하는데 어떻게 배웠는지도 궁금합니다.

    “국악을 배우려는 마음은 가득했지만 체계적으로 배울 길은 없었어요. 당시만 해도 변변한 학원도 없던 시절이니까요. 그래서 일단 산조부터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음반을 사다가 듣는데, 아닌게아니라 왜 그렇게 졸리던 지 고통스러웠습니다. 심각하게 폼잡고 듣다 보면 어느새 잠들어있는 거예요. (웃음) 우리 것이 훌륭한 줄은 알겠는데 너무나 재미가 없더라고요. 인내심을 갖고 계속 들으면서 저 나름대로 국악을 현대화하고 대중화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거문고 가야금 아쟁 등의 국악연주자들을 찾아다니며 배울 때도 선생님들 앞에서 졸다가 혼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분들 성격이 또 좀 까다로운가요. 어떤 경우에는 ‘그런 정신머리로 무슨 국악을 하느냐’고 퇴출당하기도 했어요.

    그러던 어느날 한참을 졸다가 문득 살아 있는 소리, 깊은 소리 한 음을 경험했습니다. 선생님의 거문고 연주 마지막 음이었는데, 이거다 싶더군요. 그때 난생 처음 귀가 조금 뚫렸던 거죠. 이후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국악공부에 매달렸습니다.”

    공인된 것이든 아니든 김수철이 국악 관련 대중음악으로 보유한 ‘최초’ 타이틀은 한둘이 아니다. 1980년에 이미 기타산조를 실험한 것을 위시해 이듬해 작은 거인 2집에는 최초의 국악가요라 할 ‘별리’를 수록했다. 가야금과 아쟁, 각종 타악기 장단을 양악과 협연한 것도 대부분 김수철이 처음 시도했다.

    지금도 높이 평가받는 1987년의 ‘김수철 활동 12주년 기념 앨범’수록곡 ‘변심’에서 들을 수 있는 목관 5중주도 가요로는 효시이고, 이어 1989년의 국악연주앨범 ‘황천길’에서는 최초로 태평소 연주를 실험했다. 서태지가 ‘하여가’에서 태평소 연주를 삽입한 때가 1993년이었으니 시기적으로 상당히 앞선 셈이다.

    김수철의 실험적인 시도는 국악 이외에도 여러 곳에 뻗어 있다.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김수철은 1987년 영화 ‘칠수와 만수’ 음악에서 이미 랩을 시도했다. 역시 랩과 관련해 대부분의 영예를 오로지하고 있는 서태지의 데뷔보다 5년을 앞선 작업이었다.

    “올라갈 땐 인기를 얻지만 내려올 땐 깊이를 찾지요”

    고등학생 시절 명동성당 강당에서 공연하는 김수철

    -대중가수가 국악을 한다는 사실에 무모하다는 주변의 비아냥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실제로 음반 판매량도 시원치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음악가로서의 자기만족 한편에 고통도 상당했을 듯싶은데요.

    “당연하죠. 본격적인 첫 국악앨범인 1987년 앨범은 ‘0의 세계’라는 무용음악으로 사용된 것을 음반으로 만든 것인데, 레코드사(서울음반) 집계로 537장이 팔렸어요. 나머지는 폐품처리됐지요. 내 돈 주고 내가 찍어서 많은 빚을 졌으니 상처를 입지 않을 수가 없지요. 오죽하면 지금도 그 판매량 숫자를 외우고 있겠습니까?

    이듬해 ‘나그네’ ‘변심’이 있는 12주년 기념 앨범은 어려운 음악치곤 그런 대로 나갔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바친 ‘황천길’ 앨범(1989)은 철저히 망해 또 1억원을 빚졌습니다. ‘서편제’ 이전까지는 좌절의 연속이었지요. 그나마 제가 비교적 빨리 잊어버리는 성격이라 견딜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그때 참 술 많이 먹었습니다.”

    “언젠가는 된다고 그랬잖아요”

    -말씀하신 대로 1993년 당시 관객동원 신기록을 세운 ‘서편제’는 영화음악이지만 국악앨범으로는 처음 성공을 맛본 셈입니다. 연속된 실패 끝의 개가였으니 감격이 대단했을 것 같습니다.

    “13년 만에 국악으로 인정을 받은 거지요. 그 앨범은 제가 알기로 국내에서 거의 최초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에요. 극장에서 나오는 소리를 그대로 디지털테이프로 떠서 담은 거니까요. 영화가 흥행에 성공해 덕을 봤지만 앨범을 만들어 처음부터 시장에 출시한 것은 아닙니다. 계속되는 실패로 판매는 이미 포기한 상태였으니까요. 임권택 감독님이 하도 권하시길래 ‘그냥 영화관객을 위한 기념음반으로 만들자’는 뜻에서 제작했을 뿐이에요. 처음에 겨우 200장만 찍어서 극장에서만 팔았습니다.

    그러고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관객들이 다 사갔다는 거예요. 농담인 줄 알았어요. 300장, 500장, 1000장 하다가 결국 나중에는 판매량이 70만장까지 불어났습니다. 레코드회사측도 전혀 기대하지 않다가 대박이 터지니까 무척 놀랐어요. 나중에 음반사 사장이 ‘자네가 이겼네!’ 그러더군요. 저는 ‘거 봐요, 저를 오래 보면 언젠가는 된다고 그랬잖아요’라고 답해줬죠.”

    한밤중 이불을 덮어쓰고

    김수철은 1957년 개인사업을 하는 김기암씨(1984년 작고)와 서순자씨(올 2월 작고) 사이에서 4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고향은 서울 초동. 어렸을 적에는 운동을 좋아했지만 중학교 때부터 음악에 관심을 가져 통기타와 일렉트릭기타를 독학했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내 인형’이란 가요를 작곡하는 등 일찍부터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음악교사는 AFKN 라디오와 미군부대 주변의 레코드점에서 구입한 해적판(이른바 ‘빽판’)이었다.

    용산공고에 진학한 후에는 더욱 기타에 매진했지만 완고한 아버지는 그가 음악을 하는 것에 강하게 반대했다. 때문에 그는 식구들이 모두 잠든 한밤중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기타연습을 해야 했다. 그 시절 김수철의 별명은 ‘김석봉’. 한석봉에 빗댄 것이었다.

    어느 시대나 어른이 반대하면 더 반발하는 것이 젊은이들의 생리이듯, 김수철도 음악을 그만두기는커녕 도리어 더욱 강한 록음악에 집착했다. 대학(광운공대 통신과)에 입학해서는 그룹 ‘작은 거인’을 결성했지만 음악이 너무 시끄럽다는 이유로 줄곧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1978년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전국대학가요축제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일곱 색깔 무지개’로 그룹부문 대상을 수상하면서 마침내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하지만 이때까지 김수철에게 음악은 취미의 연장일 뿐이었다. 대학졸업 후 ‘작은 거인’ 멤버들도 생업을 좇아 뿔뿔이 흩어졌다. 방위 생활을 마친 뒤 수년을 막막하게 보낸 그는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때 부친과 한 약속이 ‘음악을 그만두고 공부에 매진하겠다’는 것이었다.

    음악과 이별을 결심한 그는 마지막으로 자작곡을 모아 기념음반을 만들었다. 그것이 1984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못다 핀 꽃 한송이’가 수록된 첫 솔로앨범이다. 기념으로 만든 음반이 뜻밖에 빅히트를 기록하자 그는 음악을 그만두겠다는 결심도 접고, 다시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불렀다.

    -첫 솔로앨범 수록곡들은 모두 조용합니다. ‘작은 거인’ 때와는 기조가 완전히 달라서 팬들도 놀랐던 기억이 나고요. 기념으로 만든 것이라고는 하지만 일말의 기대도 없었나요?

    “기조가 달라진 것은 아니에요. 그 앨범의 수록곡은 모두 작은 거인 시절, 혹은 그 이전에 써놓은 곡들입니다. ‘내일’은 대학에 입학해서 만든 것이고 ‘별리’는 작은 거인 앨범에 실려 있던 곡이고요. 그룹 시절에도 하드록뿐 아니라 국악이나 부드러운 노래도 했어요. 음악가가 한 장르만 할 순 없잖아요. 록만으로 음악욕구가 다 해소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지만 어떤 결과를 기대했던 건 아닙니다. 정말 기념으로 내놓았을 뿐이니까요. 아까도 말했듯 기획의 요소라곤 조금도 없어요. 팬 중에는 ‘록 음악을 배신했다’는 항의편지를 보낸 이도 있었지만 그 앨범은 그때까지 ‘공부’해온 것을 정리한 음반일 따름이었습니다.”

    “올라갈 땐 인기를 얻지만 내려올 땐 깊이를 찾지요”

    1984년 영화 ‘고래사냥’ 촬영 당시 안성기, 이미숙과 함께

    -앨범이 성공하면서 영화 ‘고래사냥’에도 출연하여 배우로 외도하게 됩니다. 아버님의 반대가 심했을 텐데, 어떻게 해서 영화에 나오게 된 건가요?

    “그 또한 잘못 알려진 건데, 영화 출연은 앨범이 히트한 뒤에 이뤄진 게 아니에요. ‘고래사냥’의 촬영이 한참 진행 중이던 때 앨범이 히트한 거죠. 둘은 완전히 별개의 사건이었습니다. 저도 놀랐으니까요.

    기념음반 내놓은 것도 잊어버린 채 대학원에 열심히 다녀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안성기 선배가 만나자고 전화를 했어요. 다방에 들어가다 문턱에 걸려 기우뚱했는데 앉아 있던 사람들이 수근수근하더군요. ‘완전 병태다!’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모두 영화관계자였고 ‘고래사냥’의 어벙한 대학생 병태 역을 물색하고 있었던 거죠. 영화음악 하다가 알게 된 안성기 선배가 저를 추천한 거였고, 저도 모르는 사이 ‘면접’을 본 셈이었습니다. 영화 캐릭터에 딱 맞는 모습을 보여줬으니 면접은 대성공이었죠.

    어찌어찌 술자리가 마련됐고 그 자리에 배창호 감독은 물론 작가 최인호씨도 나온 겁니다. 그 시절 최인호씨는 우리들의 영웅 아니었습니까. 마주앉은 것만으로도 기분이 들떠서 술잔을 부딪치다 보니 어느 틈에 출연에 동의한 게 돼버렸죠.”

    -그런데 왜 한동안 영화는 다시 하지 않은 겁니까? ‘고래사냥’으로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신인상도 받았고, 이후 출연요청도 쇄도했던 것으로 아는데요. 역시 배창호 감독 작품인 ‘고래사냥 2’에도 출연하지 않았습니다.

    “영화 촬영하면서 어찌나 힘들었던지 ‘왜 음악을 해가지고 이 고생을 사서하나. 아버지 말씀 듣고 공부나 열심히 할걸’ 하며 단단히 후회했어요. 극중 찬물에 들어가던 장면에서는 잠깐 심장이 마비되어 거의 죽을 뻔했다니까요. 한참 영화를 찍고 있는데 방송에서 ‘못다 핀 꽃 한송이’가 떠버린 거예요. 그 때문에 다시 음악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영화는 애초부터 제 길이 아니었어요. 외도는 한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했죠.

    ‘고래사냥’ 이후 한 영화제작자가 가방에 돈을 싸들고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거절했죠. 그랬더니 ‘듣던 대로 또라이구만!’ 하고 돌아가더군요. (박장대소하며) ‘고래사냥 2’ 때도 완강히 출연을 거절해서 배창호 감독과 안성기 선배도 손들었습니다.”

    -영화 출연중에 주연여배우 이미숙씨와 분홍빛 스캔들이 보도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같이 영화를 찍다 보니 가까워진 사이일 뿐이었습니다. 이미숙씨가 워낙 성격이 좋고 화통한 스타일이니까요.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니에요.”

    -영화와 음악을 동시에 정복한 1984년 겨울,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굉장히 낙담했을 것 같습니다.

    “그럼요. 제가 음악을 하는 것에 그렇게 반대하셨지만, 그래도 저한테는 삶의 든든한 버팀목이었지요. 처음에는 돌아가셨다는 소식도 믿어지지 않았고 갈수록 아버지가 그리웠습니다. ‘음악공부도 공부니까 열심히 하겠다’고 속으로 아버지와 약속했죠. 1989년 발표한 ‘황천길’은 아버지에 대한 헌정 앨범이었습니다.”

    -그동안 참으로 다양한 음악을 해왔습니다. 가요, 국악, 영화음악, 대형행사음악 등등… 손이 뻗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품격과 심도가 있는 음악인데, 왜 후반기 가요는 ‘정신차려’ ‘치키치키차카차카’처럼 코믹 풍자 스타일이 많은지 궁금합니다. 작년 신보의 곡 ‘난 왜 이럴까?’ ‘왜 그래?’도 그렇고요. ‘못다 핀 꽃 한송이’나 ‘내일’ 같은 진지한 곡을 써달라는 팬들의 주문은 없습니까?

    “코믹하다고요? ‘치키치키차카차카’의 경우는 어린아이를 위한 음악이 없다는 판단에서 만든 곡입니다. 그때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들 것은 한편씩 꼭 한다고 다짐했죠. 작곡가로서의 사회적 소임이라고 생각해요. 그 노래들이 코믹하다는 견해는 제 일부만 본 거예요. 전 물론 그 곡들을 ‘재미’로 쓴 거지만 그 재미는 음악적 재미, 진지한 재미였습니다. 물론 제가 정신연령이 어린 시절에 머물러 있긴 해요. (웃음) 그러나 제 노래가 웃긴다는 시각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올라갈 땐 인기를 얻지만 내려올 땐 깊이를 찾지요”

    지난해 뉴욕 유엔본부 총회의장 공연 모습

    -우리 음악 대중을 어떻게 봅니까? 한때는 김수철씨에게 열광했지만 지금은 미지근하지요. 많은 고참가수들이 이런 편차에 대한 아쉬움을 호소하는데.

    “우리 대중에겐 ‘기다림’이 없다고 봅니다. 문화나 예술에 대한 기대수준은 높은데 진중하게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부족한 듯싶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음악인이 팬들의 요구를 전부 만족시켜줄 수는 없지요. 그래서 아티스트는 자신의 길을 고집스럽게 가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해요.

    대중은 바람과도 같습니다. 바람은 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아티스트는 입산하면 하산하는 게 순리입니다. 올라가면 내려오는 거죠. 자신의 위치를 억지로 유지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요?”

    이 대목에서 그의 목소리 톤이 강해졌다. 음악가의 길을 말하면서 그는 “올라갈 때는 ‘인기’를 얻지만 내려올 때는 ‘깊이’를 찾는다”고 말했다. 자신도 한때는 인기가 있었지만 이미 하산했고, 하산해서야 비로소 본인의 음악을 열심히 했다는 것. 지금도 새 앨범을 내면서 최선을 다해 음악을 할 뿐이지 그 다음은 듣는 사람의 몫이므로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후배에 대해서도 물었더니 ‘후배들에게 뭐라고 지적하기 전에 그들을 긍정적으로 격려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랩을 하는 후배에게 ‘왜 그런 음악만 하느냐’고 다그치기 전에 먼저 그것을 칭찬하는 자세를 보여줘야 합니다. 신세대들이 비록 단기(短期)적이라는 특성을 보이지만 그들 탓을 하기 전에 그들 입장이 되어야 하고 그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어른을 따를 것 아닙니까? 우리 사회 전체가 그렇지만 특히 음악계에서는 ‘(신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포용’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두 세대간의 벽을 깨야 할 시간이고 그러기 위해선 먼저 윗사람의 강제와 권위가 없어져야 할테니까요.”

    -25년 동안 활동하면서 발표한 앨범이 몇 장이나 되지요? 그 중 마음에 드는 작품을 꼽아주시죠.

    “1979년 여름에 ‘작은 거인’ 첫 앨범을 낸 이래 지금까지 모두 37장입니다. 가요가 12장이고 나머지는 국악, 영화음악, 연주음악 앨범이에요. 가요보다 비(非)가요가 훨씬 많죠.

    그 중 ‘별리’가 수록된 작은 거인 2집은 작곡과 편곡이 괜찮아서 기억이 새롭고, 김수철 솔로 1집은 제가 인기를 얻게 해준 앨범이지요. 따지고 보면 여기 앉아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것도 그 앨범 덕분이니까요. 영화 ‘서편제’ 음악앨범은 전통소리를 대중화했다는 점에서 소중하고, 88서울올림픽 음악과 작년 월드컵 개막식 음악도 마음에 듭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가 꼽은 앨범들은 하나같이 대중에게 ‘인정받은’ 것들이다. 대중의 갈채를 소중히 여긴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대중가수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많이 팔려서 좋은 것이 아니라, 내가 최선을 다한 만큼 대중들도 인정해준 축복의 사례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미 음반이 안 팔리는 것에 대해 섭섭해 하지 않게 된 지 오랜데, 그런데도 대중의 환영을 받았다면 정말 행복한 것 아니냐는 풀이였다.

    마지막으로 ‘김수철의 음악이 대중에게 무엇을 의미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그는 실망스러운 듯 불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혀 뜻밖이었다.

    “대중에게 내 음악이 무슨 의미였느냐고요? 생각해본 적도 없고, 내가 말할 부분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듣는 사람, 대중의 몫 아닌가요? ‘신동아’의 그런 질문도 틀 속에 갇혀 있는 것 아닐까 합니다.

    저는 음악 만드는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했고 그 이후는 제가 답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아까도 말했듯 대중은 바람 같은 존재라 잡을 수 없지만, 결국에는 대중도 성실하게 자기 길을 간 음악가의 손을 들어줄 거라 믿습니다. 그게 일찍 올 수도 있고,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아니면 살아 생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겠죠. 음악가는 결과가 어찌 됐든 성실과 진실을 다하면 됩니다.”

    김수철은 인터뷰를 마치면서 A4용지 두 장을 전해주었다. 음악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글이라고 했다. 예정된 인터뷰 시간을 한참이나 넘겨가며 그렇게 많은 말을 했지만, 아직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은 모양이었다. 그 글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지구촌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음악을 작곡할 때까지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고 싶다. 앞으로도 음악작업을 계속하는 것이 나의 꿈이다. 난 오늘도 음악을 한다. 갈 길은 멀지만 내일도 음악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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