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 도시락’ 싸서 다닌 어린이 조방헌
일식당 서빙하며 받은 명함이 인생 바꿔
치매 걸린 아내 5년째 간병하는 ‘사랑꾼’
매사 최선 다하고 결과는 하늘에 맡겨
다시 태어나도 ‘옥경이’와 결혼하고파
“운 좋게 정말 많은 상을 탔어요. 그런데도 상을 탈 때마다 설레고 기뻤어요.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죠.”
올해 데뷔 51주년을 맞은 가수 태진아(본명 조방헌·71)는 가장 행복했을 때를 묻자 이렇게 말하며 아이처럼 수줍게 웃었다. 입가에 머금은 미소는 이내 얼굴 전체로 번졌다. 2시간 넘게 인터뷰하는 동안 그가 가장 환하게 웃은 순간이다.
사실 국내에서 그보다 많은 상을 탄 가수를 찾기는 쉽지 않다. ‘가요톱10’ 같은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1등을 한 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골든디스크상에 각종 가요제 수상까지 합쳐 지금까지 받은 트로피가 200개를 훌쩍 넘는다. 대중적 사랑을 받은 히트곡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많다. ‘옥경이’ ‘거울도 안보는 여자’ ‘미안 미안해’ ‘노란 손수건’ ‘사모곡’ ‘사랑은 아무나 하나’ ‘잘났어 정말’ ‘동반자’ ‘진진자라’가 대표적이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 앨범을 발표하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가수는 흔치 않다. 70대에 원색의 화려한 슈트를 맵시 있게 소화하는 가수도 극히 드물다. 그런 면에서 태진아에게는 ‘독보적’이라는 수식어가 과하지 않게 느껴진다. 6월 신곡 ‘서울 간 내님’을 발표하고 다양한 채널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니 말이다. 무대 위에서 그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패션을 선보인다. 기자를 만난 날도 원색 슈트에 알록달록한 넥타이를 매치한 복장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음은 그와 주고받은 문답.
유산소운동과 긍정 마인드로 건강을 다진다는 가수 태진아. [이상윤 객원기자]
국민 MC 총출동한 뮤비의 파급력
패션 센스가 돋보입니다. 젊게 사는 비결이 뭔가요.
“유산소운동을 많이 합니다. 특히 걷기요. 많이 걸으려고 해요. 식사량 조절도 병행하고요. 저도 많이 먹으면 배가 나오거든요. 한때는 술을 즐기고 담배도 하루 4갑씩 피웠는데 다 끊었습니다. 무엇보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패션은 저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이지요. 넥타이를 이렇게 불룩 튀어나오게 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남의 노래를 할 때도 제 노래처럼 만들려고 연습을 무진장 합니다. 자칫 모창처럼 들려선 안 되니까요.”
신곡 ‘서울 간 내님’을 아들 이루 씨가 만들었다죠.
“좀 웃으며 살라고 이루가 선물한 곡이에요. 치매에 걸린 아내를 간병하다 보니 우울한 노래만 부르게 되더라고요. 무대에서 웃으며 노래할 자신이 없어서요.”
재미있게 만든 뮤직비디오로 화제가 됐어요. 유재석, 강호동, 이경규, 김구라, 김국진 등 이른바 ‘국민 MC’가 총출동해 챌린지 형식으로 노래를 이어가더군요. 누구 아이디어인가요.
“실은 뮤비(뮤직비디오)를 만들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데 유재석이 노래를 듣고 나서 챌린지 형식으로 만들어보라고 아이디어를 줬어요. 첫 스타트도 유재석이 끊었고요. 같이 있던 조세호와 함께 찍은 영상을 보내놨죠. 그것을 시작으로 다른 후배들에게도 보냈는데, 너무 감사하게도 다들 우리 집사람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십시일반 기꺼이 참여했어요.”
연예계 후배들에게 인기가 좋습니다. 비결이 뭔가요.
“인간관계에 최선을 합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은혜를 입은 건 잊지 않아요. 대신 내가 남에게 베푼 건 바로 잊어버리고요. 그게 제 인생 모토입니다.”
아내 위한 애교 필살기
5년째 아내를 간병하고 있습니다. 힘들지는 않나요.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큽니다. 미국에 갔을 때 내 주머니에 16만 원밖에 없었어요. 그걸 알고도 날 받아준 사람이 아내예요. 이루도 낳아줬고, 인생의 밑바닥부터 동고동락했죠. 그런 아내가 제법 살 만해진 지금의 안락한 생활을 몹쓸 병 때문에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애처로울 뿐이에요.”
간병에 몰두하려고 소속 가수도 내보냈다고 하던데.
“어떤 사람은 너무 헌신적으로 간병하는 게 아니냐고 하는데 아내는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잘해야 할 의무가 있고요. ‘옥경이’라는 노래처럼 내 곁을 지켜준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태진아도 없었을 겁니다.”
‘옥경이’는 그가 아내에게 바치는 헌정곡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의 아내 이름을 ‘옥경이’로 아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진짜 이름은 ‘이옥형’이다. 발음상 이옥경으로 들리다 보니 태진아도 혼인신고를 하기 전까지 ‘이옥경’으로 알았다고 한다.
부부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서로 아끼며 함께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요.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해야죠. 집에 들어갔을 때 아내 기분이 언짢아 보이면 저는 애교도 부리고 어깨를 주물러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스스로 털어놓게 해요. 그러면서 아내가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게 도와줘요”
그는 아내에 대해 “정말 속이 깊은 사람”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걱정할 만한 일이 있으면 절대 내색을 하지 않고 가수 활동에 매진할 수 있게 뒷바라지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을 묻자 그는 주저 없이 아내를 떠올렸다.
“내가 가수 활동으로 바빠 집을 비울 때가 많았어요. 아내를 좀 더 세심하게 챙겼다면 치매에 안 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것이 가장 후회됩니다. 다음 생이 있다면 아내와 다시 부부로 만나고 싶어요. 이런 후회가 들지 않도록 잘 챙기고 싶습니다.”
목소리가 특이해 얻은 기회
태진아는 1953년 충청북도 보은군 탄부면에서 4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14세에 상경해 구두닦이, 중국집 배달원, 식당 종업원 등 온갖 직업을 전전했다. 유년기부터 노래를 흥얼거리며 부르기를 좋아했지만 가수를 꿈꾼 적은 없다고 한다. 당장 먹고사는 일이 다급했고, 돈을 버는 목적도 동생들의 학비를 대기 위해서였다. 그런 그에게 가수가 될 기회가 운명처럼 우연히 찾아왔다.
“일식당에서 서빙하며 여느 때처럼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한 손님이 제게 명함을 줬어요. ‘네 목소리가 특이해. 가수가 될 수 있겠다’며 한번 찾아오라고 했죠. 그분이 제 노래 ‘사모곡’을 작곡한 서승일 작곡가세요.”
그 인연으로 서승일 작곡가 사무실에서 청소를 도맡으며 노래를 배운다. 1년 넘게 연습생 생활을 한 끝에 1983년 ‘추억의 푸른 언덕’이라는 노래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태진아라는 이름도 그즈음 얻었다. 태진아는 당대 최고 스타 태연실, 남진, 나훈아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서 만든 예명이다. 이후 그는 발표하는 노래마다 히트시키며 1990년대 트로트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트로트는 2000년대 이후 조성모 등 발라드 가수를 비롯해 여러 아이돌 그룹에 밀려 한동안 인기가 시들했다. 2019년 이후 종합편성채널 TV조선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 시리즈의 선풍적 인기에 힘입어 다시금 트로트 전성시대가 열렸다. 태진아는 트로트 전성시대의 부활을 이끈 청년 가수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임영웅·영탁·이찬원 같은 젊은 후배들 덕에 트로트가 다시 큰 사랑을 받고 있고, 설 무대가 많아졌어요. 이들이 어디를 가든, 날씨가 어떻든 간에 개의치 않고 응원하는 팬들을 보면 존경심이 들 정도예요. 무대에 서면 그분들이 서로 다른 가수를 좋아하더라도 한마음으로 저를 응원해 줍니다. 가슴이 벅찰 정도로 고맙고 감동적이죠.”
태진아는 자신을 성장시킨 원동력은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함”이라고 말했다. [이상윤 객원기자]
진인사대천명의 진리
14세에 상경한 소년 조방헌을 끊임없이 성장하게 한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함이 아니었나 싶어요. 초등학교 때 너무 가난해서 도시락에 밥 대신 진흙을 싸서 다녔어요. 점심시간에는 나가서 진흙을 버리고 물로 배를 채웠죠. 나중에 그런 사정을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된 아이들이 십시일반 밥을 나눠줬어요. 자기네 집에 데려가 어머니에게 제 도시락까지 챙겨주도록 한 친구도 있고요. 그 시기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 때였어요. 미국에서 지낼 때보다 더 막막한 시절이었죠. 그럴 때 내가 밥을 준 친구들을 어찌 잊겠어요. 친구 찾기 프로그램에 나갔을 때도 그 친구들을 가장 먼저 찾았고요.”
힘들 때 마음을 다잡아 준 인생의 나침반 같은 좌우명이 있나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에요. ‘사람의 일을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에 그 결과는 하늘의 뜻에 맡긴다는 의미지요. 저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에 힘들어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 말을 꼭 해줘요. ‘미스트롯3’ 우승자인 양지은에게도 이 말을 해줬어요. 준결승에 우여곡절 끝에 진출한 양지은도 그 말이 큰 힘이 됐다고 하더군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지금 제게도 가장 절실합니다. 그러다 보면 아내에게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고요.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응원해 주세요.”
태진아를 만난 건 유튜브 ‘매거진동아’ 채널에서 격주로 업로드하는 ‘김지영의 트롯토피아’를 통해서다. 트로트 스타로부터 음악과 인생 이야기를 듣는 토크쇼 형식의 이 코너에서 태진아는 그동안 방송에서 들을 수 없었던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놨다. 더 자세한 내용과 라이브 노래 실력은 유튜브와 네이버TV에 공개된 ‘김지영의 트롯토피아’ 시리즈 태진아 1, 2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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