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에 찌든 필자는 라디오 방송을 그만둔 어느 날 홀연히 비행장으로 달려갔다. 교습 등록을 하고 내친김에 중고 비행기를 질러버렸다. 그리고 40여 일의 교습 끝에 홀로 하늘을 날았다. 모형 비행기를 가지고 놀던 소년이 30여 년 만에 비행의 꿈을 이룬 순간, 구름과 바람은 그의 친구가 됐다. 광활한 자연을 향한 외경, 그는 황홀함에 빠져든다. 운전면허는 없지만 비행면허는 있다는 진중권씨. 그가 우리에게 하늘 소풍을 권한다.
시동을 걸기 전에는 큰 소리로 외쳐 주위 사람들에게 경고를 한다. 시동이 걸리면 활주로로 진입한다. 그러려면 먼저 활주로 양쪽 하늘을 보며 착륙하는 비행기가 있는지 살펴야 한다. 활주로의 어느 쪽 끝에서 이륙할지는 윈드색을 보고 바람의 방향에 따라 결정한다. 이륙이나 착륙은 당연히 맞바람을 받으며 하는 게 유리하다.
왼손으로 스로틀을 밀어 서서히 출력을 올리면, 엔진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비행기가 달리기 시작한다. 최대출력에 도달하면 활주 속도가 빨라지면서 기체의 진동도 심해진다. 그러다가 오른손으로 스틱을 가볍게 당기면, 심하던 진동이 갑자기 사라진다. 기체가 땅에서 떨어지고, 드디어 비행이 시작된 것이다. 마침내 중력을 이겼다는 느낌. 이처럼 황홀한 쾌감이 또 있을까.
이륙하면 곧바로 상승선회를 해야 한다. 일정한 고도에 도달하면, 양력을 더 받기 위해 내려놓은 플랩을 해제해야 한다. 플랩은 양력만이 아니라 항력도 늘리기 때문이다. 플랩을 해제하면 약간 속도가 빨라진다. 고도계의 바늘이 600피트를 가리키면 출력을 내리면서 기수를 약간 숙여 수평자세로 돌아간다. 이를 ‘순항’이라고 한다. 내 비행기의 순항속도는 90마일, 즉 시속 144km 정도.
구름아, 바람아 놀자!
시속 90마일은 지상에서라면 꽤 빠른 속도라 할 수 있을 게다. 하지만 정작 하늘에 올라가면 속도감을 느끼지 못한다. 투명한 공기말고는 주위에 비교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순항할 때 비행기는 마치 잔잔한 호수에 뜬 나룻배 같은 느낌이다. 불어오는 바람에 가끔 출렁이는 정도랄까. 물론 그러다가 돌풍이 불어 기체가 크게 흔들리면 화들짝 놀란다.
원래 초경량 비행기는 규정상 600피트의 고도로 날게 되어 있다. 하지만 산이나 철탑 같은 지상 장애물이 있는 경우 거기에 600피트를 더하게 된다. 비행장 근처에 500피트짜리 송전탑이 있으므로 원래 규정에 따르면 1100피트까지 올라갈 수 있는 셈. 하지만 가끔은 그보다 좀 더 올라가보기도 한다. 고도가 높아지면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지상의 풍경도 달라진다.
비행기를 몰고 구름 속에 들어가본 적이 있다. 구름이 낮게 깔린 날 고도를 2000피트까지 올려보았다. 하지만 구름은 아직도 머리 위에 있다. 포기하고 내려가려는데, 바로 캐노피 옆으로 조각구름이 한 자락 흘러간다. 거기서 다시 500피트 정도 더 올렸더니, 드디어 눈앞에 거대한 뭉게구름 덩어리가 나타난다. 하지만 구름과 오래 놀 수는 없는 일. 구름 속에서는 시계(視界)가 0이기 때문에 빨리 나와야 한다.
처음에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긴장해 스틱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곤 했다. 바람이 드센 날 비행을 마친 초보 비행사의 손은 땀으로 젖어 있고, 그의 어깨는 뻐근하다. 하지만 비행에 익숙해지면 외려 바람을 즐기게 된다. 바람이 없는 날 호반을 미끄러지듯이 비행하는 것도 환상적이지만, 스틱으로 불규칙한 바람의 난동을 제압하면서 날아다니는 재미도 쏠쏠하다.
바람이 초속 5m 이상으로 부는 날에는 되도록 하늘에 올라가지 않는다. 그런 날에는 막사에서 바람이 잦기를 기다려야 한다. 거센 바람도 오후 4시쯤 되면 대개 얌전해진다. 아무리 바람에 익숙해져도 바람이 아찔할 때가 있다. 가령 착륙하다가 돌풍을 맞는 경우. 그때는 당황해 실수할 수 있으므로, 웬만하면 착륙을 포기하고 복행을 하는 게 좋다.
비행에 꽤 익숙해졌지만, 바람은 아직도 사람을 놀라게 한다. 지난주의 일이다. 바람이 좀 거센데도 하늘에 올라갔다. 고도 1200으로 날고 있는데, 낮게 깔린 구름이 섹시한 자태로 나를 유혹한다. 그녀의 품속에 안기려 고도를 올리다가 돌풍을 만났다. 기수가 들린 상승자세에서 거센 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그만 심한 요동에 캐노피에 머리를 연거푸 두 번 찧고 말았다.
하늘 소풍, 그리고 면허 따기
진중권씨의 비행기 CH601. 그는 자동차와 운전면허는 없지만 비행기와 비행면허는 있다.
비행을 가로막는 또 다른 적은 안개다. 안개가 낀 날 이륙하면 땅이 보이지 않는다. 땅이 보이지 않으면 비행기는 공중에서 미아가 되어버린다. 게다가 지상에서 보는 안개와 하늘에서 보는 안개는 다르다. 안개가 옅어서 지상에서 꽤 멀리까지 보이는 날에도, 하늘에 올라가면 시계가 그보다 훨씬 짧아진다.
비행하기에 환상적인 날씨도 있다. 비가 그치고 맑게 갠 날. 그런 날은 비가 공기 중의 부유물을 말끔히 씻어내 아주 멀리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그런 날은 고도를 높여서 하늘 소풍을 하는 게 좋다. 그런 날은 경기도 화성의 하늘에서 인천시는 물론이고, 저 멀리 충남 당진의 화력발전소까지 볼 수 있다. 그런 날 저녁 낙조에 물든 서해의 섬들은 그야말로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비행면허를 따는 데 필요한 법정 교육시간은 20시간이다. 하지만 이는 면허시험을 볼 때 채워야 할 자격요건일 뿐, 실제로 솔로 비행까지는 대개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나이가 들수록 몸이 둔해지는 모양이다. 비행 감각은 나이에 반비례하는 경향을 보인다. 20대들은 대부분 20시간대에 솔로 비행을 하나, 30~40대는 30시간 정도는 잡아야 한다.
처음 하늘에 올라가면 정신이 하나도 없다. 고도계 봐야지, 속도계 봐야지, 바깥 풍경 살펴야지. 한 손으로는 스로틀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스틱을 조종하면서 발로는 러더를 밟아줘야 한다. 이 중에 어느 하나만 생각하면 다른 쪽이 흐트러지고 만다. 고도만 신경 쓰면 속도가 문제가 되고, 속도만 신경 쓰면 고도가 떨어진다. 따라서 주의력을 적절히 분산시켜야 한다.
처음에 배우는 것은 공중조작. 여기서는 에일러론(좌우선회), 엘리베이터(상승하강), 러더(수평선회)의 이른바 ‘삼타일치 조작’을 배우게 된다. 훈련은 고도와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 비행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하늘에는 차선이 없지만, 착륙하려면 당연히 폭이 좁은 활주로의 중간에 기체를 갖다대는 정교한 조작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비행의 꽃 ‘착륙’
비행의 꽃은 역시 착륙. 자동차 운전에서도 주차가 가장 어렵다고 하지 않던가. 2차원이 아니라 3차원 좌표 속에서 기계를 제 위치에 갖다대는 게 어디 쉽겠는가. 비행기는 자동차와는 속도가 다르고, 하늘에 떠 있어 바람의 영향까지 받는다. 이 어려움 때문에 20시간이 넘는 교육기간 중 네댓 시간의 공중조작 훈련을 마치면 그 다음부터는 계속 착륙 연습만 하게 된다.
활주로만 길다면 착륙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활주로의 폭과 길이는 제한되어 있기에 정확한 지점에 착지하는 게 중요하다. 일단 활주로에 들어서면, 무조건 시선을 정면으로 돌려 지평선을 봐야 한다. 활주로에 눈을 빼앗기면, 기체가 얼마나 하강하는지 감을 못 잡게 된다. 기수를 배경으로 지평선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기체가 하강하는 정도를 가늠해야 한다.
기체가 하강하면, 기수를 조금씩 들어줘야 한다. 상승조작으로 기체의 하강을 상쇄해 되도록 부드럽게 착륙하기 위해서다. 이것을 ‘플레어’라고 하는데, 착륙을 배울 때에 가장 어려운 조작이다. 플레어를 못 만들면 하드 랜딩을 하게 되고, 이것을 반복하면 당연히 기체에 무리가 간다. 플레어를 못 만드는 이유는 대개 기체를 활주로에 갖다대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이다.
솔로, 그 황홀한 체험
진중권씨의 비행기 계기판. 오른손으로 스틱을 당기면 비행기는 이륙한다. 착륙할 때는 지평선을 봐야 한다.
오늘 됐다가도 내일 안 되는 게 착륙이다. 법정 시간인 20시간을 넘기면 교습생의 마음은 슬슬 초초해지기 시작한다. 교관의 짜증도 늘고, 교육기에서 내리는 교습생의 표정도 똥빛으로 변해간다. 해도해도 안 되면, ‘나는 영원히 안 될 것 같다’는 절망감에 빠지기도 하나, 초조해 할 것 없다. 개인차가 좀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다 해내게 되어 있다.
내 경우에는 솔로까지 무려 40시간이나 걸렸다. 처음에 이탈리아제 빙고로 교육을 시작했다가, 직접 비행기를 구입하는 바람에 도중에 기종을 전환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소유한 CH601은 고급 기종이라 초보자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날개가 조종석 아래에 붙은 저익기라 속도가 고익기인 빙고보다 10~20마일 빠르고, 스틱의 감도 훨씬 민감하다.
하지만 내게도 마침내 그날은 왔다. 2006년 12월26일. 그날도 못한다고 실컷 야단을 맞았는데, 갑자기 교관이 묻는다.
“혼자 올라갈 수 있겠어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하늘로 올라갔다. 첫 시도에는 너무 긴장해서 착륙을 포기하고 다시 복행을 했다가, 두 번째 시도에서 무사히 착륙을 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캐노피를 열고 나오니, 교관이 꽃다발을 안겨준다.
혼자 비행기를 몰고 하늘에 올라갈 때의 그 긴장감. 교관이 없는 조종석에 혼자 앉아 있을 때의 그 고독감. 이는 비행을 하면서 딱 한 번만 경험할 수 있는 황홀한 체험이다. 스로틀을 밀어 중력의 무게를 벗고, 스틱을 움직여 바람을 제어하며 혼자 날아다니는 기분. 이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이해하고 싶은 분은 비행을 배워 직접 몸으로 느껴보시기를.
“위험하지 않아요?”
비행을 한다고 하면, 제일 먼저 날아오는 질문이다. 거기에는 늘 이렇게 대꾸하곤 한다.
“비행은 결코 위험한 게 아니다. 위험한 것은 추락일 뿐이다.”
이것이 이른바 ‘창공의 법칙’ 중의 셋째 조항이다. ‘창공의 법칙’이란 비행하는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농담인데, 모두 열두 개의 조항으로 이뤄져 있다. 그중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여섯째, 프로펠러란 비행기 앞에 달린 큰 선풍기다. 그게 멈추면 조종사는 진땀을 흘리기 시작한다.…여덟째, ‘양호한 착륙’이란 당신이 비행기에서 걸어 나올 수 있는 착륙을 말한다. ‘우수한 착륙’이란 다른 사람들이 비행기를 다시 쓸 수 있는 착륙을 말한다. 아홉째, 다른 사람들의 실수로부터 배워라. 그 실수를 모두 해볼 만큼 당신이 오래 살아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마지막 열두째, 즉 ‘생존의 법칙’이라 하는 조항이다. “항상 이륙 횟수와 착륙 횟수가 일치하도록 관리하라.” 이것이 생존을 보장하는 최고의 준칙이다. 실제로 비행하다가 사망한 경우를 살펴보면, 모두 착륙 횟수보다 이륙 횟수가 하나 더 많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창공의 법칙
사실 초경량 항공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 총 중량 225kg 미만의 가벼운 기체를 갖고 있어, 엔진이 꺼져도 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엔진 달린 글라이더라고 할까. 초경량 비행기는 대개 1:10 이상의 활공비를 갖고 있다. 이는 설사 엔진이 멈춰도 기체가 100m 하강할 때 앞으로 1km를 비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비행 중 엔진이 멈추면 일단 기체부터 숙여야 한다. 그러면 하강하면서 속도가 붙어, 엔진이 꺼진 상태에서도 실속(失速)에 빠지지 않는다. 기체가 실속을 먹으면 조종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단 기수부터 숙여놓고 하강하면서 착륙하기에 좋은 평탄한 곳을 찾아야 한다. 이 때문에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비행기의 고도가 높을수록 안전한 착륙에 유리하다.
활주로가 아닌 곳에 내릴 경우에는 물론 어느 정도 기체 손상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엔진고장으로 활공을 해서 착륙하다가 사람이 죽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가끔 큰 부상을 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가벼운 부상에 그치거나,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기체에서 제 발로 걸어 나오는 게 대부분이다. 이 정도면 ‘우수한 착륙’은 못돼도 ‘양호한 착륙’이 아닌가.
프랑스의 미디어 이론가 폴 비릴리오는 언젠가 “비행의 발명과 더불어 추락도 발명된 것”이라고 말한다. 비행을 하다 보면 당연히 추락사고도 발생하는 법. 내가 타는 초경량 항공기의 경우에도 1년에 한두 차례 사망사고가 일어나곤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고는 조종사의 과신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자기 능력을 넘어서는 곡예비행을 하다가 추락하는 것이다.
까불면 죽는다
곡예비행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면허증. 면허 없이 책으로 독학해 곡예를 시도하는 이들이 있다. 대개 비행에 비교적 능숙한 사람들이 반복되는 비행의 일상에 지루함을 느껴 뭔가 색다른 체험에 도전하게 된다. 이들의 문제는, 어쩌다 한번 성공한 운이 자신에게 영원히 따라줄 거라고 믿는다는 것. 운이 어떻게 한 사람만 따라다닐 수 있겠는가.
다른 하나는 곡예용으로 디자인된 비행기. 공중에서 루프를 돌다가 회복할 때 기체는 몇 기압의 압력을 받는다. 교관의 말에 따르면 금속제 날개가 휘는 게 눈에 보일 정도란다. 초경량 비행기는 대개 최악의 상황에서 받는 압력의 1.5배를 견디도록 설계된다. 하지만 그 여유분은 ‘조종사가 사용할 수 없는 것(not available for pilots)’. 초경량으로 곡예를 하는 행위는 사용이 금지된 여유분을 사용하는 셈이다. 그러다가 비행기가 만세를 부르면(날개가 부러지면), 조종사는 100% 사망이다.
600피트 고도 규정을 어기고 저공비행을 즐기는 이들도 있다. 비행기의 속도감을 만끽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러다가 엔진이 멈추면 비행기는 위험한 상황에 처한다. 고도에 여유가 없기에 아무 데나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물위를 저공으로 비행하는 간 큰 사람들도 있다. 비행기 바퀴가 물에 닿기라도 하면, 기체가 저항을 받아 바로 물속으로 곤두박질치고, 조종사는 익사하게 된다.
600피트로 난다고 안전한 것은 아니다. 다음은 지난해 내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고도를 700까지 올리고 B활주로를 지나, 기수를 남서쪽으로 돌렸다. 요트와 어선들이 정박된 선착장이 보이고, 거기서 U턴하여 돌아오는데, 고도가 600 언저리까지 떨어진 모양이다. 밑에 송전탑들이 있어 그 사이로 지나가려는데, 갑자기 그 사이로 늘어진 고압선들이 눈에 들어온다. 탑만 피한다고 될 문제가 아님을 화들짝 놀라며 깨닫다. 앞으로 그쪽으로 갈 때에는 고도를 1000 이상으로 유지해야겠다.” (5/24)
이 글을 올린 지 일주일 후 방송에서 우연히 이런 뉴스를 들었다.
“경비행기 한 대가 갯벌에 추락해 심하게 찌그러졌습니다. 어제 오후 5시 반쯤 27세 김모씨가 몰던 경비행기가 인천 송도비행장을 이륙한 지 20분 만에 경기 화성 제부도 갯벌에 추락해 김씨가 머리를 크게 다쳤습니다. 경찰은 경비행기 꼬리부분이 100m 높이의 고압 철선에 걸려 사고가 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가 내 블로그의 글만 읽었더라면, 죽지 않았을 터인데….
비행의 꿈, 그리고 스핏파이어
비행기를 갖고 있다고 말하면 대개 놀란다. 사실을 말하자면 초경량 비행기는 승용차 한 대 값밖에 안 한다. 비행기를 사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꽤 오래전의 일. 독일 유학 중이던 1996년 어느 서점에서 항공 관련 잡지를 보다가 우연히 비행기 광고를 봤다. 꽤 근사해 보이는데 가격이 10만마르크, 우리 돈으로 약 6000만원이라고 한다. 그 정도면 언젠가 살 수 있겠다 싶었다.
2005년부터 1년 동안 라디오 방송의 진행을 맡은 적이 있다. 새벽방송으로 지친 데다 그 밖의 여러 일로 번거로워, 방송을 그만둘 때쯤에 내게는 지친 몸과 우울한 마음, 그리고 방송으로 번 돈이 남아 있었다. 방송을 그만두자마자 바로 비행장으로 달려가 교습 등록을 하고, 내친김에 방송으로 번 돈으로 마침 매물로 나와 있던 괜찮은 중고 비행기를 질러버렸다.
물론 서민의 처지에 몇천만원씩 하는 비행기를 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우선권(priotity)이다. 어린 시절부터 가졌던 꿈을 위해 현실의 안락함을 조금만 포기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내 경우에 비행기와 비행면허는 있지만, 자동차와 운전면허는 없다. 화성의 비행장까지 가려면, 버스와 전철을 다섯 번 갈아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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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장난감에 들어가는 돈의 차이라고 할까. 어릴 때는 플라모델로 비행기를 조립하다가, 이제는 직접 비행기를 몰고 하늘로 올라간다. 하지만 그것으로 어릴 때의 꿈이 다 이뤄진 것은 아니다. 원래 내 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군 공군의 주력기였던 스핏파이어를 조종하는 것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죽기 전에 꼭 그 비행기를 몰아보고 싶다.
얼마 전 스핏파이어를 그대로 본뜬 복제품이 나왔는데, 가격이 무려 10억원. 평생을 모아도 만들 수 있는 돈이 아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독일에 있을 때 방송에서 봤는데, 미국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클래식 전투기로 공중전을 하는 시스템을 갖춘 비행클럽이 있다고 한다. 언젠가 거기서 스핏파이어를 몰아볼 생각이다. 그러려면 먼저 세스나 면장과 곡예면허를 따야 한다.
“날지 못하는 돼지는 그저 돼지일 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에 나오는 대사다. 이상도 잃고, 희망도 없이 그저 돈이나 버는 돼지가 되어버린 느낌. 그 느낌이 나만의 것일까? 세상의 돼지들이여, 그대들도 한번 날아보지 않으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