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화 같은 영화를 만들어온 팀 버튼 감독은 어릴 적 환상을 통해 현실의 공포를 이겨냈다고 고백한다. 환상 그 자체가 현실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나, 미쳐버리지 않도록, 주저앉지 않도록 잠시잠깐 자유를 불어넣는 건 분명하다. 눈을 감고 더 참혹한 순간을 상상하면, 뜬눈으로 이 악물고 버티게도 도와준다.
‘판의 미로’
신화 속의 왕 미트리다데스는 매일 밤 조금씩 독약을 복용했다고 한다. 이유는 혹시나 모를 독살에 대비해 면역력을 기르기 위해서였다. 누군가는 예술의 효용을 미트리다데스 왕의 처방에서 찾곤 한다. 매일 밤 조금씩 독약을 먹듯이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악에 대한 면역력을 기른다는 얘기다. 살아가는 일 자체가 독처럼, 가혹한 형벌처럼 느껴질 때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들이 이 불가지한 삶에 조금의 힘이 되어줄까? 어떤 이야기들이 답답한 현실의 갑갑한 미로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줄까? 간혹 이야기는 치료약이 아닌 독약이 되어 강한 면역의 힘을 주기도 한다.
이 남자의 일상은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다. 오전 7시면 정확하게 일어나 스물일곱 번 칫솔질을 하고 사과 하나를 들고 출근한다. 의도적으로 맞춘 일상일까? 도리도리. 그저 매일을 그렇게 살다 보니 이제는 알람시계처럼 몸이 알아서 움직일 따름이다. 남자에게 생각이 있을지, 짐작이 안 간다. 그런데 이 남자의 귀에 내레이션이 들려온다. 누군가 이 평범하고 따분한 남자의 일상을 중계한다. 남자는 혼란스러워진다.
영화 ‘소설보다 이상한’은 소설보다 이상한 삶에 맞닥뜨린 한 남자를 그리고 있다. 일분일초의 어긋남도 없이 정해진 일상의 질서를 따라가는 세무공무원 해럴드 크릭(윌 페럴 분). 그의 삶에 침투한 낯선 목소리는 마치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듯 그의 심리와 일거수일투족을 예견하고 기록하고 보고한다.
그럴듯한 소설, 삶다운 삶
문제는, 그 목소리가 “해럴드 크릭은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을 것이다”고 예고한 데서 비롯된다. 전지적 작가 시점의 목소리가 살아 있는 인물 해럴드의 죽음을 밝혀버린 것이다. 그는 왜 자신이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아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찾아다닌다. 그런데 거기에 이유는 없다. 해럴드 크릭은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그 목소리의 정체를 알아내려 애쓴다. 해럴드는 결국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내는데, 바로 ‘작가’의 것이었다.
영화의 재미는 목소리의 주인공인 작가가 쓰고 있는 이야기가 바로 해럴드 크릭의 진짜 삶이라는 데 있다. 혼란을 줄여 조금 더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한 여류 소설가가 쓰고 있는 소설의 내용대로 해럴드 크릭이 살고 있고, 또 살아갈 것이다. 영화는 소설 속의 인물이면서 실존인물인 해럴드 크릭의 삶과,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의 고민을 함께 보여준다. 작가의 고민은 이런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해럴드 크릭의 죽음을 ‘그럴듯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답답하고 지루한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남자의 죽음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할 것인가 말이다.
영화 ‘소설보다 이상한’은 ‘그럴듯함’으로 설명되는 소설의 세계와 달리 개연성을 넘어선 사건들로 가득찬 우리의 실제 삶을 대비시킨다. 소설가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합리적으로 죽음을 선사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일관성 있게, 개연성 있게 죽이면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꾸며낸 인물이 실존하면서부터 개연성과 일관성의 문제는 책임과 맞닿는다. 이제 그녀의 선택에 따라 진짜 죽음이 다가올 수도 있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시곗바늘처럼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던 해럴드 크릭이 자신의 죽음을 예고받자 다르게 살기 시작하는 모습이다. 그는 잠옷처럼 편안했던 규칙성을 깨뜨리고 말할 수 없는 예외성에 자신의 삶을 맡기기도 한다. 일상은 새로운 의미로 격상돼 매 순간이 중요한 지점으로 고유의 의미를 지닌다. 죽음에 대한 경고가 그의 삶을 삶다운 것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자 해럴드 크릭의 인생은 달라진다. 매일매일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현재는 아껴도 좋을 절제의 대상이다. 하지만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 발전과 개발, 축적으로 생각해온 절제의 삶은 향유해야 할 무엇으로 바뀐다. 결국 이 작품은 관객의 무감한 신경을 건드리는 데 성공한다. 아무리 황당한 이야기도 현실보다 더 황당하지는 않다. 해럴드처럼 하루하루를 견디던 일상적인 자아, 소설가처럼 자신의 일상을 스스로 조종한다고 믿었던 자아는 영화를 보는 내내 조금씩 무너진다. 그렇게 무너진 끝에 소설보다 이상하지만, 결국 내 것일 수밖에 없는 삶과 만난다. 인생에는 플롯도 개연성도 필연성도 없지만 알 수 없는 우연성 속에서 그 자체로 빛난다. 빛나는 인생의 우연성, 어쩌면 그 안에 신이 존재할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보다 이상한’
‘혐오스런 마츠코 일생’이란 영화가 있다. 우선 궁금증이 생긴다. 혐오스러운 마츠코일까? 마츠코라는 인물의 혐오스러운 일생일까? 엄밀히 말해 비문이라고 할 수 있을 이 수식어 ‘혐오스런’은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아이러니와 모순을 함축하고 있다. 혐오스러운 일생을 살다 보니 혐오스러운 사람이 되고 만 마츠코, 아름다운 외모와 착한 성격을 지녔음에도 험악한 일생을 살다갈 수밖에 없었던 마츠코, 그러니 마츠코의 혐오스러운 일생이 마츠코를 혐오스럽게 만들고 만 셈이다.
마츠코는 혐오스러운 표정 짓기의 달인이다. 눈을 사팔뜨기처럼 모으고 코와 입을 찡그리고 찍은 사진 속 마츠코는 희극 배우라기보다 혐오 연기의 대가처럼 보인다. 혐오스러우면서도 코믹한 마츠코의 분위기는 영화 전반의 분위기와 일맥상통한다. 인생은 혐오스러운데 순간순간의 장면은 형형색색 알록달록, 고통스러워 죽겠는데 음악은 달콤하기만 하여 혐오스러운 모순이 좌충우돌 증폭된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지지리 복도 없는 한 여자의 삶에 대한 재조명이다. 지지리 복도 없는 여자들은 과연 무엇을 꿈꾸었기에 그토록 처절하게 인생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것일까? 토머스 하디의 ‘테스’, 김동인의 ‘감자’에 이르기까지 지지리 복도 없는 여자들은 예술가들이 궁금해 하는 대상이었다. 그러면 이쯤에서 한번 묻자. 왜 지지리 복도 없는 여자들은 예술가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일까?
흥미롭게도 희망이라는 처방전은 눈 깜짝할 사이 병세를 완화해주는 항생제나 스테로이드처럼 효과적이다. 그것이 비록 점점 역치를 높여 건강을 망가뜨리고 나를 무너뜨릴지라도 효과는 늘 고통을 앞서 나간다. 마츠코의 일생도 그렇다. 눈앞의 조그만 행복에 기대를 거는 여자, 마츠코. 어쩌면 마츠코의 일생은 그 사소한 희망과 행복 때문에 엉망이 되고 만 파본인지 모른다. 마츠코가 벽에다 오래도록 쓴 유언,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는 그런 점에서 가슴 아픈 고백일 수밖에 없다.
마츠코의 인생이 처음부터 엉망진창 쓰레기 소굴이었던 것은 아니다. 좋은 시절 마츠코는 여교사로 일했다. 그런데 반 아이의 절도 사건을 해결하려다 절도범으로 오인 받고 학교에서 쫓겨난다. 그런 그녀를 집안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 이 영화가 ‘테스’나 ‘감자’와 다른 것은, 마츠코의 일생이 가볍고 경쾌한 원색 찬란한 소극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형형색색 캔디 컬러 속에서 마츠코의 혐오스러운 일생이 부지런히 흘러간다. 마치 그런 게 인생이라는 듯 화면은 그녀를 동정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경쾌한 리듬과 원색 속에서 그녀의 삶은 새롭게 조형된다. 열심히 살려고 애쓸수록 마츠코의 삶은 더 나빠지기만 한다. 그녀는 마약 거래와 성매매에 가담하고 수감생활까지 한다. 폐허가 된 마츠코의 삶은 점점 더 엉망이 되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스스로를 방기해 폐인이 되고 만다. 아무것이나 먹고 아무 데나 버리고 씻지도 움직이지도 꾸미지도 않는 그녀, 이제 그녀를 일어서게 할 희망은 없다. 희망이 사라진 끝에 그녀는 결국 죽어버린다. 아버지의 말처럼 ‘쓸모없는 인생’을 살다 간 마츠코. 과연 그녀의 삶은 그렇게 ‘쓸모없는 것’이었을까?
한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고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던 외톨이 마츠코. 세상은 외로움을 호소하는 고독하고 불쌍한 영혼에게 관대하지 않다. 외롭다고 말할수록 마치 복수라도 하듯 세상은 그에게 외로움을 더한다. 마츠코, 사랑받기 위해 얼굴을 찡그릴수록 그 찡그린 얼굴 때문에 세상과 더 멀어지고 만 지지리 복도 없는 여자, 불쌍한 마츠코의 혐오스러운 일생. 어쩌면 마츠코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삶의 숙제일지도 모른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제목 ‘태어나서 죄송합니다’가 반복되는 영화의 저류에는 삶에 대한 깊은 허무와 배반감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다쓰야 감독의 숨결 속에서 이 허무는 찬란한 인생의 순간들과 조우한다. 벚꽃은 결국 지지만 아름다운 한때가 있기에 치명적이듯 인생의 아름다움과 행복도 마찬가지다. 순간순간의 행복을 노래하는 낙천적 희망이 고통이 되는 현실에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사랑스러운 희비극임이 분명하다.
토머스 하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쥬드’
환상은 언제 필요할까? 기이하고 독특한 상상력을 보여온 감독 팀 버튼은 어린 시절, 외톨이로 느끼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더 끔찍한 상황과 인물을 상상해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팀 버튼의 말처럼 환상은 두려움과 대적할 만한 힘을 준다. 비록 그 힘이 현실을 이겨낼 수 없을지언정, 환상은 참혹한 현실 앞에 무력한 개인에게 한 움큼의 자유를 줄 수는 있다. 눈을 감고 현실을 떠나 꿈꿔온 세상과 접촉할 수 있는 자유, 현실이 아닌 제 4의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이상과의 조우, 그곳이 바로 환상의 세계인 셈이다.
여기 참혹하다 못해 지옥과 같은 현실에서 부러진 분필로 환상의 출구를 만드는 소녀가 있다. 그 소녀의 이름은 오필리어. 처참한 권력 싸움을 광기 어린 자살로 횡단해버린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오필리어가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판의 미로’는 기이하고 잔혹한 환상 동화다. ‘아름답다’거나 ‘따뜻하다’는 형용사와 어울릴 법한 ‘동화’ 앞에 붙여진 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들이 영화 ‘판의 미로’의 성격을 짐작케 한다.
영화의 배경은 반(反)정부 항거 집단과 폭력적인 군부 독재정권의 대립이 최고조를향해 치닫고 있는 접전지, 숲 속에 은거하는 항거 집단들은 목숨을 건 투쟁 중이다. 군인의 아이를 밴 엄마를 따라온 오필리어에게 숲은 전쟁보다 더한 긴장과 두려움이 존재하는 곳이다.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냉정하고 잔인한 대위와 임신으로 인해 힘겨워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오필리어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요정 이야기. 그녀는 자신의 현실 속에 숨어 있는 환상과 접촉을 시도한다.
영화 ‘판의 미로’의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호소력은 현실만큼이나 잔혹한 환상의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에 있다. 실제 ‘판의 미로’는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정권이라는 현실과 소녀의 성장의식을 씨줄과 날줄로 교차시킨다. 여느 판타지 영화와 달리, 오필리어에게 주어진 선택의 기로나 과제는 고통스러울 만큼 힘들다. 환상의 세계에서 온 전령, 판의 명령을 어겨 엄마를 잃고 자신의 목숨까지 잃게 되는 소녀의 처지는 현실의 완강한 위력을 절감하게끔 한다.
오필리어에게 펼쳐지는 환상의 공간은 현실의 곤혹함을 잊게 하는 달콤한 안락의 공간이 아니라 현실의 아픔을 견디게 하는 항생제 같은 공간이다. 현실이 더 아파질수록 환상도 지독해진다. 마치 고통이 더할수록 항생제의 강도가 높아지듯이. 지독하고 처참한 환상 속에서 소녀는 희생 없이 결코 나아지지 않는 현실을 목도한다. 그 어떤 환상도 현실을 전복할 수 없다는 좌절 속에서 ‘판의 미로’는 판타지의 새 지점을 개척해낸다. 삶의 유희로서의 판타지가 아닌, 삶의 축약으로서의 판타지 말이다. 환상이 결코 현실로부터의 도피처가 될 수 없음을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강변한다. 현실이 지옥일 때 환상 역시 무시무시한 악몽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낯설고도 기이한 환상 동화, 어쩌면 현실이야말로 안락한 환상으로 채워진 도피처일지도 모를 일이다.
희극과 비극의 갈림길
어떤 사람은 열심히 살아가려 하면 할수록 삶이 나빠지기도 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복수는 나의 것’에 등장하는 인물만 해도 그렇다. 착한 유괴를 해서 누나의 목숨만 구하겠다는 ‘착한’ 동생의 계획은 한번 어긋나기 시작하더니 결국 죽음의 회오리로 뒤바뀐다. 예측할 수 없는 삶의 아이러니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희극으로도 비극으로도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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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하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쥬드’는 삶의 예측 불가능성을 최대한 비극으로 끌고 간 작품이다. 서로를 사랑한 근친 남매가 사랑의 도피를 하지만 이 도피는 자식들의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귀결되고 만다. 토머스 하디의 상상력 속에는 신의 원대한 계획 안에서 인간의 노력이란 하잘것없음을 강조한다. 운명이란 그토록 잔혹하고 엄정한 계획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상상력을 조금 뒤집으면 가이 리치 감독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스’와 같은 스릴러 영화의 발랄함이 생산되기도 한다. 발사된 총탄이 어디에 어떻게 박힐지 모르기 때문에 상상은 즐거워진다. 삶의 예외성은 이렇게 희극과 비극의 중간 어디쯤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결국 희극이냐 비극이냐는 미로 속에 갇혀 있는 불쌍한 인생들, 우리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닐까? 인생을 독으로 보고 매일매일 조금씩 독약을 먹든, 즐거운 지옥 속을 살아간다고 여기며 그 예외성을 모험으로 즐기든, 그것은 선택의 문제다. 그리고 선택은 가치관이라는 말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