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호

“정규-비정규 아닌 상시-임시 근로자로 접근해야” “정부·재계가 노조의 합리적 리더십 유도하라”

|대담| 경제학자-사회학자가 제시하는 ‘고용 불안’ 해법

  • 패널 : 김태기·이병훈 | 사회 : 강지남

    입력2015-01-21 16:1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고용 돌파구’ 찾지 못하면 경제성장동력 상실
    • 비정규직 4년 연장은 ‘지록위마(指鹿爲馬)’
    • 사회안전망 카드로 대기업 노조 설득해야
    • 중소기업·서비스업·창업이 새 영역
    ■ 일 시 : 1월 8일 오후 2시

    ■ 장 소 : 동아일보사 충정로사옥 6층 회의실

    ■ 패 널 :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 사회·정리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사회 고용·노동 문제가 올 한 해 중요한 이슈가 될 것 같습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드라마 ‘미생’ 얘기를 해볼까요. ‘장그래’는 정규직이 됐어야 했을까요.



    김태기 당연히 정규직이 되면 좋겠지만…. 정규직으로의 전환율은 워낙 낮습니다. 한번 비정규직에 빠지면 정규직이 잘 안 됩니다. 이걸 ‘비정규직의 함정’이라고 하는데, 드라마에 그대로 반영됐더군요.

    ‘미생’의 배경을 중소기업으로 바꾸면 문제가 훨씬 더 많아집니다. 비정규직 문제엔 착시 현상이 있어요. 대기업 비정규직은 중소기업 정규직보다 나은 편이죠. 장그래 같은 친구도 대기업 비정규직을 택하지, 중소기업 정규직을 원하지 않아요. 또 중소기업 비정규직은 대기업 비정규직보다 수적으로 훨씬 많은데, 이분들은 정규직이 되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아니에요. 회사 자체가 많이 흔들리니까.

    우리 안의 불안 심리

    모두 이 드라마를 보고 가슴 찡했던 건, 희망이 단절된 우리 현실을 장그래에게 투영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겠다는 희망을 갖기가 어려운 만큼,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이직할 수 있는 길도 차단돼 있거든요. 장그래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우리 노동시장에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병훈 동의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고용불안이 단순히 일자리에 국한된 게 아니라고 봐요. 장그래뿐 아니라 오 과장이나 임원들도 치열한 경쟁을 견뎌내야 하고, 한번 잘못하면 훅 갑니다. 자영업자도, 구직자도 살벌한 경쟁에 시달리는 건 마찬가지고요. 이런 풍토 속에서 우리 안에 불안 심리가 자리하는 거죠.

    이처럼 미생(未生)인 우리 삶을 완생(完生)으로 만들려면 좁게는 비정규직 문제를, 넓게는 고용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엊그제인가 어느 신문에 ‘미생 시즌2에서는 장그래가 노동조합을 결성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가는 장면이 나오면 좋겠다’는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드라마 한 편을 계기로 을(乙)이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바뀌면 좋겠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현상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회 지난해 12월 23일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이하 노사정위)에서 노(勞)·사(使)·정(政)이 노동시장 구조를 개혁하기로 큰 틀에서 합의했습니다. 왜 이 시점에서 노동시장 구조개혁이 시급할까요.

    김태기 우선 정부가 경제동력의 상실을 실감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창조경제 등 여러 얘기를 해봤지만, 결국 고용 부문에서 돌파구가 열리지 않으면 경제 전망이 어둡다는 거지요. 또 소득격차가 커지고 빈곤 문제도 악화되는데 뾰족한 해결수단이 없어요. 이걸 복지로 해결할 수도 없고요. 결국 고용이 문제다, 이렇게 본 것 같습니다.

    이병훈 저도 우리 노동시장이 ‘구조적 적폐’라고 할 만큼 문제가 상당하다, 이걸 방치하면 앞으로 우리 사회에 큰 장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은 경제 및 사회의 핵심적 투입 요소이자, 삶의 근거가 되는 면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경제 몸집, 산업구조, 인구구조, 복지정책 등이 압축적으로 변화했는데, 그에 비해 노동시장이나 노사관계는 이런 변화를 담아내기에는 굉장히 구태에 가까운 면이 있어요.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내수·수출 등 소위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심각하다보니 경제 선순환이 안 되고, 사회적으로는 갈등과 위화감 등 여러 비용이 늘었습니다. 과연 우리 사회는 지속가능한가. 많은 이가 이런 의문을 갖기 시작했는데, 노동시장의 구조적인 문제가 그 뿌리라고 봅니다.

    “정규-비정규 아닌 상시-임시 근로자로 접근해야” “정부·재계가 노조의 합리적 리더십 유도하라”


    급여 체계 바꿔야

    김태기 크게 세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첫째, 우리 노동시장이 지나치게 고비용 저효율의 모순에 빠져 있습니다. 고학력자가 많다는 것은 투자를 많이 했다는 건데, 실제 활용도는 매우 떨어지죠. 대표적인 게 청년과 여성이에요. 또 인구구조 측면에서 은퇴하는 베이비부머의 지식과 경험을 활용할 준비가 전혀 안 돼 있고요.

    두 번째는 노동시장의 관행이나 제도 자체가 고용 불안을 더 자극합니다. 전형적인 문제가 급여 체계예요. 호봉제로 인해 생산성과 급여 간 괴리가 생기면서 근속연수가 길어질수록 고용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어요. 고용이 지속될 수 있는 급여 체계를 만들지 못하는 점이 모순입니다.

    세 번째는 정부의 잘못인데, 고용·노동 정책이 대기업 및 제조업 중심으로 됐다는 점입니다. 제조업 비중은 20%가 안 됩니다. 서비스업이 70%고요. 전체 근로자 중 90%가 중소기업에 있고, 대기업에는 10%만 있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고용 관련 법제도가 근로자에게 별로 도움이 안 돼요. 보호 기능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요. 서비스업이나 중소기업에 필요한 인력 양성에도 도움이 안 되고요.

    이 지점에서 일본 얘기를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과거 일본이 대기업 및 수출 중심으로 경제가 성장했다는 점에서 우리와 유사점이 많습니다. 최근 일본 위기를 고령화 탓이라고들 하는데, 제가 보기엔 노동구조 개혁에는 손대지 않고 재정 투입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한 것이 더 큰 원인이에요. 대규모 재정 투입으로 국가부채가 늘어 신용등급이 하락했고요. 이런 경제적 위기가 정치적으로는 아베 정권과 같은 민주주의 후퇴로 나타나고 있어요. 지금 일본은 최악의 시나리오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자꾸 재정에 의존하다보면 점점 수렁에 빠져 결국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해요.

    사회 지금까지 말씀하신 위기의식이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추진하는 배경이 아닌가 합니다. 노사정위는 3월까지 대타협을 이끌어내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재정의 유혹, 일본의 실패

    이병훈 정부가 이미 자기 손에 답을 쥐고 있으면서 노사정위라는 형식을 통해 밀어붙이기 식으로 진행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과거 정권에서도 사회적 동의나 지지가 없어 해프닝으로 끝난 경우가 많았고요. 노동시장 개혁은 절실합니다. 하지만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방식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우리나라 역대 정권의 개혁 방식은 늘 이랬습니다. 최고지도자만이 답을 갖고 있고, 나머지는 ‘무조건 쫓아와라’ 하는 게 우리의 현대사였습니다. 정부가 몰아간 사례 중 하나가 1998년 외환위기 때의 노사정 대타협이었고요. 이번에도 먼저 정부가 안을 만들었는데, 노사정위를 통해 합의 모양새를 갖추면 여론이든 국회에서든 일처리가 더 쉬울 거라고 본 것 같아요.

    중소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 민주노총, 비정규직 등의 목소리까지 수렴하는 자리에서 개혁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합의를 발표하고, 구체적인 개혁과제가 논의됐다면 정말 국가사회적 차원의 개혁 드라이브라고 의미를 찾을 수 있을 텐데…. 과거 정부와 마찬가지로 현 정부도 청와대에서 오더가 떨어지면 기획재정부를 경유해 고용노동부 또는 노사정위가 움직이는 방식이에요. 따라서 ‘반쪼가리’ 사회적 합의다, 혹은 사회적 합의 따로 정책 따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김태기 저는 구조개혁 방식으로 노사정 합의가 가장 바람직하다는 데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다만 합의가 쉽지 않아요. 1998년 대타협 이후 노사정위가 열리기만 했지, 성과가 없었어요. 표면적인 이유야 노사정이 서로 신뢰가 부족하다는 것인데, 사실은 각자의 한계 때문이죠. 노동계는 권리는 주장해도 책임지기 싫거든요. 경영계는 대기업 입김하에 있기 때문에 대립적인 각도를 갖고 있고요.

    정부도 문제예요. 정부가 둘로 갈라져 있어요. 경제부처는 ‘고용의 유연성’이라는 굉장히 단순한 논리를 내세우고, 고용부처는 국가 전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문제로 바라보고 ‘비정규직 문제’ 등 협상의 특정 의제 쪽으로만 관심이 있습니다. 따라서 청와대도 오락가락합니다. 노무현 정부의 집권 초반과 중후반의 정책이 다른 이유가, 초반에는 사회적 관점이었다고 하면 중후반에는 경제적 관점으로 가버렸거든요. 이런 면에서 이번 개혁도 쉽지 않다고 봐요.

    하지만 저는 결국 정부가 이 합의를 끌고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경영계나 노동계, 누가 하겠습니까. 따라서 정부가 경영계와 노동계가 가진 불안을 해소해줘야 해요. 또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카드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 개혁에 자발적으로 동참할 만한 강력한 인센티브를 주는 거죠.

    잘릴 것이냐, 2년 더 일할 것이냐

    사회 무엇이 노사에 강력한 인센티브로 작동할 것이냐는 추후에 논하기로 하고요. 이번 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인 노동시장 이중구조에 대해 짚어볼까요.

    김태기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방향성에 대한 합의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 철학의 문제로까지 올라가는데요, 현시점에서 자본주의는 공유자본주의(Shared Capitalism)의 성격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협력과 공유가 이뤄져야 해요.

    한국은 굉장히 좁은 땅에 인적 자원이 밀집한 나라입니다. 정부, 기업, 노동계가 네트워크를 촘촘하게 짜지 않으면 미국이나 중국, 일본의 등쌀을 배겨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 지론이, 공유자본주의하의 고용 문제와 관련해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의 고용의 질이 높아지지 않는다면 한국의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쪽의 고용의 질을 개선한다는 방향 아래 대기업 노사의 과도한 기득권을 줄여야 합니다. 줄인 부분을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이 공유해야 하고요. 이와 같은 공감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개혁을 지속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정규-비정규 아닌 상시-임시 근로자로 접근해야” “정부·재계가 노조의 합리적 리더십 유도하라”
    이병훈 공유자본주의 얘기가 굉장히 흥미롭네요. 노동시장 이중구조, 양극화의 다른 표현이 독식자본주의가 아닌가 싶어요. 갑이 좌지우지하고 강자가 독식하는 것에서 더불어 나누고 함께 공유한다는 것이 노동계를 포함해 우리 사회에 유익한 제안이 될 것으로 들리는군요.

    사회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2년에서 최장 4년으로 연장하는 안에 대한 비판이 거센데요.

    이병훈 참여연대가 성명에서 표현했듯 지록위마(指鹿爲馬)예요.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100만 실업 대란설’이 제기됐습니다.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하 기간제법)이 2007년 제정됐으니 2년이 지난 2009년 기간제 근로자 모두가 실업자로 내몰릴 것이란 얘기였죠. 이런 배경에서 당시 노동부가 내놓은 대책이 ‘4년 연장’이었는데, 이 안을 추진한 사람이 바로 현 고용노동부 장관인 이기권 당시 근로기준국장이었어요. 그런 점에서 이 장관이 이걸 필생의 작품으로 만드는 데 꽂혀 유령을 되살린 게 아닌가 싶어요. 장그래가 바라는 것이 계약을 한두 해 연장하는 겁니까? 불안한 고용 상태를 벗어나 열의를 갖고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의미가 크고 사회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인데 말이죠.

    사회 정부의 비정규직 종합대책에는 노조에 차별시정 신청대리권을 주고 3개월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에게도 퇴직금을 지급하는 등 기업에 부담을 주는 안도 포함돼 있습니다.

    이병훈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두 가지, 비정규직 4년 연장과 고령자 파견직 확대입니다. 둘 다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는 안이에요. 특히 괘씸하게 생각되는 게, 고용노동부가 했다는 비정규직 설문조사입니다. 설문을 어떻게 디자인하고 묻는지에 따라 조사자가 원하는 답이 나오거든요. 비정규직에게 ‘2년 후에 잘릴지 모르는데 4년 하는 게 좋니?’ 하고 물으면 당연히 ‘4년 하는 게 좋다’고 답하지요. ‘당신이 원하는 것이 정규직 전환이냐, 비정규직 4년이냐’ 하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2007년 기간제법을 제정하면서 사용기한을 2년으로 한 것은 ‘사업체가 2년 이상 일을 맡기는 것은 상시적인 업무다. 그러므로 정규직으로 바꿔서 계속 사용하는 게 맞다’라는 취지였습니다. 그래서 정규직은 아니더라도 무기계약직으로 바꿔주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어요. 그런데 말뚝을 2년에서 4년으로 툭 키워놓으려는 정부 제스처라니요. 이건 시장에 ‘굳이 정규직으로 바꾸지 않아도 되겠네?’ 하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고령자 파견직 확대도 그래요. 일본이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을 통해 파견을 대폭 확대하면서 전에 없던 격차사회가 됐어요. 정부에선 55세 이상에 한정해 파견직을 확대하겠다고 얘기했죠. 베이비부머들은 은퇴 후 살기 막막하니까 파견직에 몰려나올 텐데, 그러면 어떤 기업이 청년을 정규직으로 뽑겠습니까. 이게 또 우리 사회에 비정규직이 철철 넘치는 결과를 가져올까봐 걱정됩니다.

    “정규-비정규 아닌 상시-임시 근로자로 접근해야” “정부·재계가 노조의 합리적 리더십 유도하라”
    김태기 제 생각에는 정규직 전환에 일정 부분 기여할 순 있겠지만, 정부가 기대한 만큼의 효과는 없을 겁니다. 왜냐면 기업은 비용이 싸고 고용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어서 비정규직을 쓰는 거거든요. 그렇다고 4년 연장이 비정규직 양산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도 생각하진 않습니다. 2년에서 4년이 되면 턴오버(turnover)가 작아지기 때문이죠. 일각에선 비정규직 양산법이라고 쏘아붙이던데, 제가 보기엔 그냥 뚱딴지법이에요.

    이병훈 구체적인 현장 사례를 듣다보면 끔찍하고 치가 떨리는 일이 한둘이 아니에요. 그것을 오늘 논의를 위해 추려서 얘기한다면,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문제는 크게 네 가지로 모아집니다.

    첫째는 남용의 문제입니다.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되는 나라는 한국 빼고 세계에 없죠. 둘째, 차별의 문제입니다. 임금 차이가 50%가 좀 넘는다는데, 복지까지 포함하면 격차가 더 커지고요. 셋째, 4대 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비정규직이 여전히 많다는 점입니다. 1인 이상 사업장이면 4대 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하도록 돼 있음에도 현장에 나가보면 절반이 가입돼 있지 않아요. 그분들은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고용 불안 때문에 부당한 현실에 대해 말을 꺼내지 못해요. 이런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분들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 불법을 저지르는 사업체를 어떻게 감독·시정할 것인가. 정말 중요한 과제입니다.

    네 번째가 비정규직이 ‘덫’이라는 겁니다. ‘비정규직이 가교냐, 징검다리냐, 덫이냐’는 연구가 세계적으로 이뤄지는데 한국에선 김태기 교수님이 가장 선구적으로 연구하셨죠. 저도 비슷한 결과를 확인했는데, 이런저런 데이터를 다 분석해봐도 1%만이 비정규직에서 탈출해 정규직으로 갑니다. 한번 비정규직에 들어오면 그냥 갇히고 맙니다.

    이처럼 비정규직은 남용되고, 차별받고, 탈·불법적인 처우를 받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각한 것이 내일의 희망이 없다는 겁니다. 비정규직은 고용 형태의 하나일 뿐인데, 현장에서 이런 분들을 만나면 “나는 대한민국의 이등국민이에요”라고들 말씀하세요. 이들의 좌절감, 박탈감이 보통 문제가 아니거든요. 현실이 이런데도 정부가 내놓는 대책은 너무나 한가롭거나 엉뚱할 뿐이죠.

    2년이나 4년이나…

    제가 생각하는 해법은 계단론입니다. 바닥에 있는 비정규직을 한 계단, 한 계단 끌어올리는 일을 정부가 해야 하고 우리 사회가 챙겨야 합니다. 대략 3분의 1이 정규직 또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고, 3분의 1은 자발적으로 이직하고, 나머지가 비자발적으로 회전문 돌아가듯 그 자리에 계속 머물고 있어요. 바로 이 회전문에 있는 사람들을 한 계단 위로 끌어올려줘야 해요.

    기간제법이 시행되자 상당수 사업체가 비정규직 일자리를 도급·하청 등 간접고용으로 대체했습니다. 일자리가 더 열악해진 거죠. 그렇다면 정부는 이들을 어떻게 끌어올릴 것인지를 고민해야죠. 제가 요즘 정부가 하는 일에 열불 나는 게, 오히려 계단을 허물고 비정규직을 아래로 끌어내리려 하기 때문이에요.

    김태기 제 생각에는 2년이나 4년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기회에 비정규직 문제를 제대로 다뤄보면 좋겠는데요, 일단 용어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정규직이 아니면 다 비정규직이라고 하죠.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지 말고, 상시적으로 일하는 상시근로자와 일시적으로 일하는 임시근로자로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합니다.

    사실 정규직, 비정규직은 외국어로 번역이 안 돼요. 그러나 상시근로자(permanent employee)와 임시근로자(temporary employee)는 명확한 용어로 성립되거든요. 예를 들어 시간제 근로자도 상시적으로 일하면 상시근로자입니다. 그동안 정규직· 비정규직을 지나치게 선과 악의 개념으로 나눠버렸어요. 비정규직을 ‘있어선 안 될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죠. 이래서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는 절대 해결이 안 됩니다.

    선진국은 무기계약직이 대세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가지 말씀드릴게요. 먼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와 옆으로 갈 수 있는 가교를 만들라는 겁니다. 정규직으로 전환되거나, 더 나은 비정규직으로 옮겨갈 수 있게 하라는 거죠. 이를 위해서는 기간 규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상시적으로 일하는 비정규직은 무기계약직이죠. 선진국에서는 거의 다 무기계약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무기계약직 활용을 촉진하는 쪽으로 비정규직 문제의 가닥을 잡아야 해요.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는 너무 높습니다. 그에 비해 무기계약직은 정규직 전환이 훨씬 용이하고요.

    그다음으로 저는 고용 불안을 야기하는 장본인이 대기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비정규직을 못 쓰게 하니까 간접고용 등을 남용해요. 이 점에 대해서는 대기업 노사에 공동책임, 즉 공동의 비용 부담을 물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는 현재 우리나라의 모든 고용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고용 문제에 너무 관심이 없어요. 이 회사 노조는 담벼락을 쌓아도 보통 쌓아놓은 게 아니고요. 우리나라에 노동운동을 일으킨 공적도 있지만, 지금 와서는 노동운동을 굉장히 초라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해법은 비정규직 문제, 간접고용 남발 등 객관적 통계를 가지고 정부가 ‘공정노동기준’을 정하는 거예요. 이 공정노동기준에 미달하는 회사에 대해서는 정부 조달 자격에 감점을 주거나 아예 박탈하는 거죠. 고용보험도 그래요. 비정규직을 남발하면 실업수당 등 사회적 비용이 늘잖아요. 그 비용을 당사자가 물게 하는 겁니다. 해당 회사의 레코드를 추적해서 고용보험 경험료율을 확 올리는 거죠.

    이병훈 김 교수님이 아주 흥미로운 제안을 하셨습니다. 프랑스에 ‘블랑 소샬(Bilan Social)’이란 게 있어요. 기업으로 하여금 재무제표처럼 고용이나 임금 등에 관한 정보를 의무적으로 공개하도록 한 제도예요. 우리도 청년 일자리를 얼마나 창출했고 비정규직은 몇 명이고 보수는 어떤지 등을 공개하도록 한다면, 기업 스스로 고용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모멘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체인지 매니지먼트’

    사회 최근 이케아(IKEA)가 국내에 들어와 직원 대부분을 무기계약직으로 뽑았죠.

    김태기 무기계약직은 선진국이 우리보다 훨씬 많이 활용해요. 바람직한지 아닌지보다는 현실적으로 이쪽으로 나아갈 거예요. 특히 시간제 무기계약직이 많아질 것으로 봅니다. 정규직·비정규직 틀에서 보자면 시간제는 비정규직입니다. 이케아가 많은 가정주부를 시간제로 고용했죠. 그런데 이 분들은 ‘내가 왜 비정규직이야?’ 하고 반문할 겁니다. 이케아의 고용 형태가 앞으로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봐요. 국내 기업들에 자극제도 될 것이고.

    이병훈 사용자가 비정규직에 대해 못된 짓을 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가 고용 불안이거든요. 그런데 고용이 안정되면 뭔가 개선될 여지가 만들어질 수도 있어요. 제가 주장한 계단론에 비춰볼 때 무기계약직은 한 계단 올라간 것이라고는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무기계약직은 비정규직이 아닙니다.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대비해 차별받는다고 주장할 수 있는데, 무기계약직은 그 중간에 끼어서 하소연할 수 없어요. 법적으로는 정규직에 포함되니까요. 그러나 현실에선 단순히 기간제에서 무기계약직으로 바뀌었을 뿐, 다른 처우에서는 여전히 정규직과 차이가 존재하거든요. 이런 경우에도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해나갈 수 있게끔 해야 합니다.

    사회 노동시장 양극화도 심각합니다. 이에 정부는 정규직 과보호를 거론합니다.

    이병훈 노동시장 양극화라고 단순하게 표현하지만 실제로 노동시장은 굉장히 중층적이에요. 대기업 정규직-대기업 비정규직-중소기업 정규직-중소기업 비정규직 순이고 그 안에서도 여러 겹으로 나뉘어 있어요. 이 중 과보호되는 사람은 대기업 정규직에 한정됩니다. 대표적인 게 역시 현대자동차죠. 이들은 고임금에 고용이 굉장히 경직돼 있어요. 저는 솔직히 이 부분은 좀 풀어도 된다고 생각해요. 나머지 90%를 위해서요.

    그런데 양보를 이끌어내려면 이 사람들이 가려워하는 게 뭔지 따져본 뒤 선제적인 접근을 해야 합니다. 실업과 구직에 관련한 사회안전망이죠. 해고되더라도 먹고살 걱정이 들지 않는 시스템, 지금 못지않은 일자리로 옮겨갈 수 있는 직업 알선 시스템을 갖춘다면 정규직이 일자리를 놓고 죽기 살기로 싸우진 않을 거예요. 정부가 대기업 노조를 그저 개혁의 대상으로 몰아갈 게 아니라, 이런 식의 체인지 매니지먼트를 해줘야 합니다.

    물론 대기업 노조에도 조직 이익만 좇지 않고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합리적인 리더십이 서야 합니다. 그런데 노조가 합리적인 리더십을 갖도록 정부와 경영계가 도와야 해요. 정부는 그저 적대시하고, 사용자는 때려잡으려고만 하니 목소리 큰 사람이 노조 지도자가 돼 투쟁을 외치는 패턴이 만들어진 셈이거든요.

    일자리 기준 너무 높아

    김태기 중요한 말씀입니다. 아까 노사정 합의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 조건 중 하나가 결국 노동계의 리더십입니다. 지금은 노동계 리더십이 현장의 기득권에 발목 잡혀 있어요. 정부가 관여할 틈이 별로 없고, 경영자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바람직한 노동조합 리더십을 만드는 것은 당사자 스스로가 자각하는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사회 요즘 청년 구직난이 심각합니다. 대학에서 보고 느끼는 바는 어떻습니까.

    이병훈 청년 노동시장의 수급 불균형은 어제오늘 문제가 아니라 매우 구조적으로 고착화된 문제입니다. 어느 통계에 따르면 1995년부터 2004년까지 대학진학률이 45%에서 80%로 가파르게 올라가요. 그러나 같은 기간 ‘좋은 일자리’로 대표되는 대기업 일자리는 240만 개에서 160만 개로 80만 개가 줄었습니다. 해마다 10만 명 정도가 잉여로 누적되다보니 이제는 구직 단념자, 니트족(청년 무직자) 등이 생겨나는 거지요. 사회학은 기초학문이고 기업친화적인 학문이 아니다보니 전공으로 택하는 학생이 크게 줄고 있어요.

    김태기 제가 학생 한 명을 수도권에 있는 꽤 좋은 중소기업에 소개했어요. 전망도 좋고 연봉도 꽤 높은 회사예요. 그런데 다음 날 그 학생 부모에게 항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좋은 일자리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아요. 요즘 학생들은 공무원, 공기업, 대기업만을 선호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일자리를 더 만들 수 있는 시절은 끝났어요.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으로 눈을 돌려야 해요. 그런데 이 부문에서 좋은 일자리 만들려는 노력은 전무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아요. 서비스업 규제를 없애 일자리를 창출한다? 그런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면 좋겠습니다.

    노사가 미래가치를 공유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종업원주주제도를 중소기업에 맞게 확실하게 도입하자는 거죠. 기존 우리사주제도는 자본시장 육성의 일환으로 주식시장에 상장되는 대기업 위주로 도입된 겁니다. 미국, 독일, 영국 등은 주식시장과 상관없이 회사 오너가 직원과 주식을 공유하거나 종업원이 회사 주식을 취득하는 데 대해 세금 혜택을 줍니다. 우수한 인재가 10년, 20년 지나면 자기 회사의 주주, 주인 근로자가 되는 거죠.

    ‘선(先)취업 후(後)교육’ 프로그램도 도입하면 좋겠어요. 고등학교든 대학교든 졸업한 뒤 먼저 취업하고, 회사와 논의해서 진학 계획을 세우는 겁니다. 회사에서 장학금 받아 회사가 원하는 교육을 받고, 졸업 후 일정 기간 그 회사에서 근무하는 거죠. 학기 중이나 방학 때도 짬짬이 회사에 나가고요. 이러면 회사는 신기술 정보를 빠르게 얻게 되고, 근로자는 학비 부담을 줄일 수 있어요.

    先취업 後교육

    이병훈 한 가지 덧붙이자면, 창업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에요. 과거 산업시대와 다르게 아이디어만 있으면 손쉽게 창업할 수 있는 시대가 됐잖아요. 정부가 에인절 펀드 등을 지원하고, 실패하더라도 재기할 수 있는 여러 프로그램을 갖춘다면 청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회 대담을 마무리할 때가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노사정위 참여 주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김태기 3월 내 합의가 쉽지 않을 거예요. 협상에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인데, 하세월로 놔둘 수 없으니 정부가 강력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각 주체에게 인센티브를 팍팍 주며 같이 가자고 해야 해요.

    이병훈 많은 사람이 지금은 위기라고 얘기해요. 그런데 IMF 외환위기 때는 눈앞에서 집이 무너질 것 같은 급박함을 체감했는데, 지금은 여러 위기적인 징후를 만성적으로 느끼기만 하는 상황입니다.

    김태기 만성질병인 거죠.

    이병훈 맞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놔두면 안 되니, 결국 정부가 열쇠를 쥐고 있다는 건 인정해야 합니다. 정부가 여러 사항을 충분히 고려해 리더십을 갖고 뚫고 나간다면 저도 한 표를 던지겠지만, 3월 내 합의하겠다는 것 자체가 답을 갖고 몰고 가는 것으로 비칩니다. 정부가 키맨 구실을 할 능력이 없다면 올 한 해 또 나라만 시끄럽다가 골든타임이 흘러가버리진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사회 긴 시간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