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호

자본 패권 흐름 뒤엔 유대인 있었다[‘돈’으로 본 세계사] 

세계 금융·유통 등 장악했지만 이란 전쟁으로 달라지는 인식

  • 강승준 신용보증기금 이사장·경제학 박사

    입력2026-06-11 0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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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세기 초 유대인, 상인·학자로 왕성한 활동

    • 스페인, 유대인 추방으로 ‘황금알 낳는 거위’ 배 갈라

    • 중상주의 시대는 무역·금융 귀재 ‘유대인 전성시대’

    • 美 전체 유대인의 30%, 현재 뉴욕시 거주

    • 이란 전쟁 승리하면 이스라엘 생존 보장될까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 ‘베니스의 상인’은 근세 초 유대인에 대한 유럽인의 정서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Gettyimage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 ‘베니스의 상인’은 근세 초 유대인에 대한 유럽인의 정서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Gettyimage

    2세기 초 고대 로마제국이 유대인의 정치적 기반을 해체하면서 유대인의 나라는 지도에서 사라졌다. 유대인들은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지만, 기독교 사회에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는 중세를 거쳐 근세 초까지 지속됐다. 그러나 근세에 들어 절대왕정과 중상주의가 확산하면서 유대인의 위상은 조금씩 변화한다. 국부(國富)가 최고의 가치가 되면서 상업과 금융에 강점을 지닌 유대인들이 점차 경제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며 역사 전면에 다시금 등장한 것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 ‘베니스의 상인’은 근세 초 유대인에 대한 유럽인의 정서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1596년경에 쓰인 것으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던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특정 거주지역에 유대인을 강제 격리하는 게토(ghetto)가 처음 생겨난 곳이 바로 베네치아였다. ‘베니스’는 베네치아의 영어 표현이다. 그 당시 영국에는 유대인이 없었고, 셰익스피어가 이탈리아를 여행한 경험도 없었기에 ‘베니스의 상인’이 중세 말 무명 이탈리아 작가가 쓴 단편집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내용은 이렇다. 바사니오는 사랑하는 연인 포시아에게 청혼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친구인 안토니오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러나 안토니오도 무역에 전 재산을 투자한 상태라 수중에 돈이 없었기에 두 사람은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찾아간다. 샤일록은 그동안 자기를 무시했던 안토니오에게 기한 내에 돈을 갚지 못하면 가슴에서 살 1파운드를 베어낸다는 조건을 내건다. 그렇게 빌린 돈으로 바사니오는 포시아로부터 결혼 승낙을 받아낸다. 하지만 안토니오가 파산하면서 샤일록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안토니오가 목숨을 잃을 위험에 빠지자 바사니오의 약혼녀 포시아가 재판관으로 변장해 법정에 등장한다. 여기서 “살은 베어 가더라도 피는 한 방울도 흘리면 안 된다”라는 유명한 판결이 나온다. 이로써 안토니오는 위기에서 벗어나고, 샤일록은 재산 몰수와 기독교 강제 개종 명령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네덜란드의 발흥을 이끈 유대인

    이베리아반도에는 유대인이 많이 살았다. 8세기 초 이슬람의 우마이야 왕조가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하면서 북아프리카에 살던 유대인들이 같이 이주했다. 이슬람 세계에서 유대인들은 상인, 학자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어색하겠지만 중세 때 이슬람 세계에서 유대인은 전성기를 누렸다. 11세기 이후 카스티야 왕국 등 기독교 왕국들은 이베리아반도를 되찾으려는 국토회복 전쟁(레콩키스타)을 시작했다. 카스티야 왕국은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유대인을 받아들였다. 14세기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종교재판 등으로 많은 유대인이 처형되기도 했지만, 유대인들의 경제활동과 그들이 축척한 부는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반도에서 몰아내고 통일 왕국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을 줬다. 

    하지만 통일과 함께 유대인들은 토사구팽 신세가 된다. 이사벨라 여왕은 이베리아반도 내 이슬람 최후의 보루였던 그라나다를 정복한 직후인 1492년 3월 31일에 유대인 추방령(알함브라 칙령)을 공표한다. 이는 여왕이 기독교 수호자로서 종교적 순수성과 가톨릭 공동체를 강화하는 한편, 유대인 재산 몰수를 통해 왕실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콜럼버스의 선단이 신대륙을 향해 에스파냐에서 출항한 때도 1492년 8월이다. 스페인의 희망과 유대인의 절망이 같은 해에 교차한 것이다. 유대인에게는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추방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하지만 유대인을 추방한 것은 이사벨라의 크나큰 실책이었다. 당장은 그들의 재산을 몰수해 이득을 얻었지만 그것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것이다.



    에스파냐에서 추방된 유대인 중 일부는 이슬람 세계로 갔지만 일부는 플랑드르 지방(주로 브뤼헤와 안트베르펜)에 정착했다. 이 지역은 오늘날의 벨기에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안트베르펜은 ‘플란다스의 개’의 무대가 되는 곳이다. 이 작품은 원래 1872년 영국의 작가 마리아 루이즈 라메(필명 위다)가 쓴 동화인데, 여기서 플란다스(Flanders)가 바로 플랑드르의 영어 표현이다. 16세기 후반 에스파냐의 용병이 플랑드르를 공격하자, 플랑드르에서 활동하던 유대인들은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네덜란드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신교를 받아들인 나라로 다른 종교와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탄압이 없었다. 근세와 더불어 상업과 무역이 중시되는 중상주의 시대로 접어들자, 무역과 금융의 귀재인 유대인들의 시대가 열렸다. 암스테르담에서는 근대 자본주의가 발아하면서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 그리고 최초의 근대식 은행과 증권거래소가 세워졌다.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경제 중심지로 부상했다. 

    게다가 17세기 초 발발한 30년 전쟁은 유럽의 유대인에게 새로운 기회를 안겼다. 각국은 전쟁 수행을 위해 물자와 자금이 필요했는데 유대인들은 이를 성공적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근대 유대인 군수산업 발전에 소중한 밑거름이 된다. 네덜란드가 1648년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중계무역과 가공무역으로 이룩한 국부(國富)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여기에 큰 역할을 한 집단이 유대인이었다. 에스파냐의 유대인 추방 이후 100년이 지나면서 유럽의 패권은 에스파냐에서 네덜란드로 넘어가고 있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 그리고 최초의 근대식 은행과 증권거래소가 세워졌다. 보이만스 판 뵈닝언 미술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 그리고 최초의 근대식 은행과 증권거래소가 세워졌다. 보이만스 판 뵈닝언 미술관

    美 전체 유대인의 30%, 뉴욕시 거주

    17세기 초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를 따라 브라질로 건너간 유대인들은 브라질 헤시피(레시페)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했다. 유대교 회당인 시나고그를 세우고 유대인 마을을 건립했다. 하지만 17세기 중반 포르투갈이 스페인으로부터 다시 독립하고 브라질을 탈환하자 그곳에 살던 유대인들은 서인도제도(카리브해 제도)로 옮겨가 사탕수수 농장을 세웠다. 일부는 북아메리카의 맨해튼섬에 가서 뉴암스테르담에 정착하고, 인디언과 모피 무역을 하는 등 무역업에 종사했다.

    17세기 중반 이후 영국과 네덜란드 간 해상권 다툼이 격렬해졌다. 1665년에 대서양에서 2차 영란전쟁이 발발했다. 공식 선전포고는 1665년에 했지만 1664년에 이미 영국이 네덜란드 영토인 북아메리카의 뉴암스테르담을 공격했다. 이 전투로 맨해튼섬에 방어벽을 쌓은 것이 지금의 월가(Wall Street)의 효시다. 1667년 두 나라는 브레다 조약을 체결, 네덜란드는 향신료가 많이 나는 인도네시아의 룬섬과 남아메리카의 수리남을 가져가는 대신 뉴암스테르담을 영국에 넘긴다. 영국은 뉴암스테르담의 이름을 뉴욕으로 개명했다. 이렇게 뉴욕은 네덜란드 땅에서 영국 땅으로, 그리고 100여 년 뒤 미국의 독립과 함께 미국에 편입됐다.

    현재 뉴욕시에는 미국 전체 유대인 인구의 30%가 거주하는데, 이들 대부분은 맨해튼과 브루클린에 살고 있다. 특히 맨해튼 인구의 20% 이상이 유대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유대인 인구가 2%에 불과한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숫자다. 맨해튼에만 100개 가까운 시나고그가 있다고 한다. 그만큼 뉴욕에서 유대인 커뮤니티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뉴욕은 미국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지이고, 이 땅을 처음 개척한 사람은 유대인이다”라고 말해 주는 듯하다.

    영국의 유대인 이민 허용, 그리고 영국의 발전 

    1290년 에드워드 1세는 영국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면서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국가의 단합을 꾀했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정복 전쟁을 일으켜 윌리엄 월리스를 처형한 왕으로도 유명하다. 

    17세기 중반 청교도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올리버 크롬웰은 국가 발전을 위해 유대인의 유입 이민을 허용한다. 350년 만에 유대인이 다시 영국에 들어온 것이다. 올리버 크롬웰은 식민지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항해조례를 공포했는데, 이 조례는 영국이 네덜란드의 독주를 막고 해상무역권을 장악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청교도혁명 이후 40여 년이 지난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 네덜란드의 오렌지공 윌리엄 3세가 영국 왕으로 추대된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총독이 영국 왕이 되자, 네덜란드의 유대인들이 윌리엄을 따라 대거 영국으로 이주한다. 

    이와 함께 네덜란드의 선진적 금융시스템과 제도가 영국에 들어오면서 점차 유럽의 경제 중심이 암스테르담에서 런던으로 바뀐다. 18세기에 들어서면 크롬웰이 조성한 시티오브런던(The City of London)은 이후 세계 경제와 금융의 중심지로 부상한다. 이곳에서 금융 사업을 시작한 로스차일드가는 19세기 초 나폴레옹전쟁 이후 세계적인 금융가로 성장한다. 유대인은 이제 세계경제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부상했다.

    미국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유대 권력

    현재 미국은 이스라엘을 제외하고 유대인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스라엘 1000만 명, 미국 750만 명)이다. 미국 건립 100여 년 전에 처음 이베리아반도 출신의 세파르디 유대인이 뉴욕(뉴암스테르담)에 왔지만, 현재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19세기 중반부터 유럽의 아시케나지 유대인들이 정치적 혼란과 탄압을 피해서 대거 미국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1848년은 자유주의와 공화정을 외치면서 빈 체제에 저항하는 혁명의 불꽃이 유럽을 휩쓸었는데, 사회적 약자였던 유대인은 대거 혁명에 가담하거나 동조했다. 하지만 혁명이 실패로 끝나면서 유대인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했다. 금융 재벌 골드만 삭스 가문도 이때 넘어온 유대인이다. 1881년 러시아의 개혁 군주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은 또 다른 유대인 이동을 불러왔다. 암살의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러시아의 유대인들은 폭행과 학살에 방치됐고, 이때 수많은 러시아계 유대인이 미국으로 도피했다. 마지막으로 1930~40년대 독일 나치의 유대인 탄압으로 유럽의 유대인 지식인과 예술인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해 왔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한나 아렌트, 에리히 프롬 등 이때 들어온 유대인들은 전후 미국의 경제·사회·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대 권력이 지금의 미국을 움직인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미국에서 유대인의 영향력은 막강한 것은 사실이다. 정·관계, 학계, 영화계, 예술계, 언론계 등 전 분야에서 유대인이 활약하고 있다. “이 사람도 유대인이야?”라고 놀라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매년 열리는 AIPAC(American Israel Public Affairs Committee·미국-이스라엘 공공문제위원회)에서 연설하는 사람들을 보면 미국의 정치인들이 유대인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잘 알 수 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숱한 여론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스라엘 편을 드는 것도 같은 맥락인 것으로 보인다.

    디아스포라 이후 동아시아로 이주한 유대인은 소수였지만, 19세기 이후 많은 유대인이 상하이나 홍콩으로 이주했다. 19세기 중반 아편전쟁 이후 조계지가 형성되면서 유대인 상인들이 상하이로 들어왔다. 서순(Sassoon) 가문과 커두리(Kadoorie) 가문이 대표적이다. 

    서순 가문은 인도를 거쳐 중국에 진출한 바그다드계 유대인 가문이다. 이들은 아편 무역으로 큰 부를 축적한 뒤, 상하이에 진출해 부동산·무역·금융·호텔업 등을 일으켜 ‘상하이의 유대인 제국’을 이뤘다. 이들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 상하이가 국제도시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상하이의 권력자였다. 

    상하이의 유대인 제국 건설한 서순·커두리 가문

    커두리 가문도 바그다드계로 서순 가문과 인척으로 연결되면서 성장했다. 엘리 커두리는 서순 가문 밑에서 경험을 쌓은 뒤 독립해 홍콩과 상하이에서 사업을 확장했다. 서순 가문이 중국공산당 집권 이후 동아시아를 떠난 데 반해, 커두리 가문은 홍콩에 집중했다. 커두리 가문은 지금도 CLP 홀딩스와 페닌슐라 호텔 체인 등 홍콩의 주요 기업을 지배하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과 동유럽에서 유대인에 대한 박해와 폭력이 심해지면서 유대인들이 대거 상하이로 들어왔다. 이들은 시베리아나 만주를 거치거나 일본 등을 통해 상하이에 왔다. 1930년대 후반에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독일과 오스트리아 유대인 난민이 들어왔다. 대부분 국가에서 유대인 난민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빈의 중국 공사였던 허펑산의 도움 등으로 많은 유대인이 유럽에서 탈출해 상하이에 정착했다고 한다.

    나라를 잃은 지 2000년이 지난 1948년 이스라엘은 다시 가나안 땅에 나라를 세운다. 이스라엘 건립 운동의 불씨는 프랑스에서 시작된다. 1870년 프랑스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패한 뒤 한 프랑스인 스파이의 편지를 찾아내고는 유대계 프랑스 장교인 드레퓌스 대위에게 혐의를 덮어씌웠다. 필적이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로 그를 범인으로 몬 것이다. 유럽의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보고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자유와 인권의 나라 프랑스에서 이런 일을 당한다면 유럽에서 유대인이 살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때 유대계 오스트리아 기자인 테오도어 헤르츨은 이스라엘 국가의 건립 운동, 즉 시오니즘(Zionism)을 주창한다. 시온(Zion)은 예루살렘에 있는 언덕의 이름으로, 이는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자는 운동이었다. 헤르츨은 먼저 유대인들의 투자 이민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유대인 금융 가문인 로스차일드가가 자금을 지원하면서 팔레스타인에 정착하는 유대인 수는 점차 늘어갔다.

    1917년 영국 정부가 발표한 밸푸어 선언은 유대인 국가 설립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중요한 문서다. 위키피디아 커먼스

    1917년 영국 정부가 발표한 밸푸어 선언은 유대인 국가 설립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중요한 문서다. 위키피디아 커먼스

    처음에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이들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문제는 영국이었다. 1917년 영국이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 건국을 지지한다는 ‘밸푸어 선언’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영국은 중동에 아랍인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맥마흔 선언’으로 아랍인들이 오스만제국에 대항하도록 공작을 한 바 있다. 이중 계약을 한 셈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오스만제국은 지금의 튀르키예로 영토가 쪼그라들고, 나머지 영토는 영국과 프랑스가 나눠서 위임 통치를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하기 전 팔레스타인의 아랍인은 60만 명, 유대인은 20만 명 수준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대인들은 영국을 지원했고, 아랍인들은 나치 독일에 협력했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새로 발족한 유엔(UN)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떠넘겼다. 1947년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인의 나라와 아랍인의 나라로 나누자는 유엔 결의안이 채택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결의안을 거부했지만, 유대인들은 이 결의안을 근거로 1948년 5월 14일 다비드 벤구리온(이스라엘 초대 총리)이 텔아비브 박물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면서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했다.

    끝나지 않는 분쟁의 땅, 이스라엘

    이스라엘 건국은 바로 전쟁으로 이어졌다. 건국 당일 이집트 전투기들이 이스라엘을 폭격했고, 이튿날 영국인이 떠난 것을 계기로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로 진격했다. 1차 중동전쟁이 터진 것이다. 그 뒤로도 2차, 3차 중동전쟁이 계속 터지면서 이스라엘 지역은 중동의 화약고가 됐다. 1973년에는 이집트-시리아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써 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아랍 산유국들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석유를 무기화하면서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석유파동의 여파로 전 세계는 경기침체 속에 물가까지 치솟는 스태그플레이션의 늪에 빠졌다. 1979년 이란혁명으로 팔레비 왕조가 물러나고 이슬람 원리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2023년 10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침공하면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했다. 2년 반 넘게 전쟁이 계속되면서 사망자 7만 명 이상, 부상자 17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가자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220만 명) 대부분이 집을 잃었으며, 병원·학교·상수도·전력망 등 주요 인프라 시설이 파괴됐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2026년 2월 미국-이란 전쟁이 터졌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무기 개발 저지를 명분으로 이란을 선제 타격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란이 이스라엘과 주위 아랍 국가들을 공격하고 호르무즈해협을 봉쇄했다.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원유 가격은 상승하고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은 가중되고 있다.

    4월 1일 이란 테헤란 시내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다. 뉴시스

    4월 1일 이란 테헤란 시내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다. 뉴시스

    과거와 비교할 때 유대인들의 위상은 크게 격상됐다. 이들은 세계의 금융·유통·영화산업·언론 등을 장악하고 있고, 과학·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류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이번 미국-이란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세계의 여론은 상당히 비판적이다. 오랜 세월 박해와 탄압을 받았던 유대인에게 공감하던 사람들도 이번 이스라엘의 공세를 지켜보면서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다시 생각하는 듯하다.

    여전히 종전협상이 교착을 거듭하는 미국-이란 전쟁은 어떻게 끝날 것인가. 이번 전쟁이 유대인과 이스라엘, 그리고 중동과 세계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전 인류적 관심이 집중돼 있다. 과거 데이터를 사용해 미래를 예측하는 관점에서 역사라는 빅데이터는 유대인을 탄압한 나라와 민족은 쇠퇴한 반면, 유대인과 협력하고 공존한 세력은 번영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이후 중동 지역 내 어떤 세력과 싸우든 지금까지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이번 이란과 벌인 전쟁은 어떨까. 미국과 손잡은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승리로 이스라엘의 생존은 더욱 확실히 보장될 수 있을까. 아니면 상처뿐인 영광에 머물까. 

    강승준
    ● 1965년 출생
    ● 서울대 경제학과, 美 미주리대 경제학 박사
    ● 행정고시 제35회
    ● 前 기획재정부 재정관리관
    ● 前 한국은행 감사
    ● 前 서울과기대 대외국제부총장
    ● 現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 저서 : ‘역사는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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