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저우의 자랑, 시후
요새 중국에서 유행하는 여행 코스는 크게 두 가지다. 그중 하나가 역사적 명승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 여행 코스에서 항저우(杭州)는 단연 첫머리에 있다. 또 다른 여행 코스는 ‘붉은 혁명’의 성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마오쩌둥의 고향이나 공산당의 해방구가 있던 옌안(延安)을 찾는 이른바 ‘홍색 여행’이 대유행이다. 고대 중국의 뿌리와 현대 중국의 고향을 찾는 셈이다.
인문적 향기 가득한 명승지
항저우는 예전 월나라 땅이다. 오나라에 패한 월왕 구천이 쓸개의 쓴맛을 보며 복수의 의지를 가다듬었다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성어가 나온 고장이자, 왕소군, 양귀비, 초선과 함께 중국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서시의 고장이다. 하지만 항저우의 얼굴은 역시 시후(西湖)다. 항저우는 시후가 있어서 비로소 항저우다. 항저우에 가서 항저우 음식이 소문만 못하다고 불평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항저우 사람들 앞에서 시후를 나쁘게 이야기해서는 절대 안 된다. 항저우 사람들에게 시후는 자존심 그 자체다.
항저우는 3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古都)다. 마르코 폴로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극찬한 곳이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산과 나무, 호수, 강이 어우러져 경치가 좋다. 더구나 쌀과 물고기의 고향이라고 할 정도로 먹을거리가 풍부하다. 그래서 예부터 쑤저우(蘇州)와 함께 항저우를 인간 세계의 천당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돈 있는 상하이 사람들의 꿈이 항저우에 별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처음 시후를 본 것이 1993년 5월인데, 10여 년이 지나 다시 시후를 찾았다. 처음 시후에 왔을 때 호수 주변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는 맛이 일품이었다. 마침 비가 내렸는데, 비안개 속에서 바라보는 호수가 한 폭의 동양화였다. 그런데 지금은 인파가 몰려 사람들 발길에 치일 정도다. 이렇게 복잡하고 소란스럽다면 시후를 제대로 감상하기란 애초에 틀렸다. 시후는 조용한 때 호수 주위를 산책하거나 호수에서 배를 타면서 느껴야 제격이고, 그중에서도 아침, 특히 안개 낀 아침이나 저녁 노을이 질 무렵, 그리고 달밤에 보는 것을 최고로 친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눈 덮인 시후를 제일로 꼽기도 한다.
세상에는 모두 36개의 시후가 있다고 한다. 경치 좋은 호수는 모두 시후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그중에서 항저우 시후가 최고다. 아마 최근에 시후를 둘러본 한국인이라면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후를 보고 실망스럽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단체 관광객, 신경을 거스르는 관광안내원의 메가폰 소리, 게다가 호수의 물은 썩은 것처럼 더럽고 호수 주변에는 바가지 씌울 기회만 노리는 장사꾼들이 지천이라 시후를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다. 사정이 이러니, 왜 중국인들은 시후를 평생에 한 번은 꼭 가야 할 곳으로 여기는가, 이곳이 정말 그렇게 유명한 시후가 맞는가 하고 의문을 가질 법도 하다.
시후는 처음에는 경치가 빼어난 자연 명승지였지만 수천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문화적인 명승지, 인문적 향기가 가득한 명승지가 되었다. 역사가 새겨지고, 숱한 전설과 시와 노래, 이야기가 탄생하고, 사람의 발길과 혼(魂)이 시후 물결에 켜켜이 쌓이면서 시후는 이제 문화적인 명승지가 되었다. 시후는 그 자체로 시이자 역사이고, 문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