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요한 호주 동포사회에 한국발 ‘감동 폭풍’이 몰아쳤다. 교민들의 메마른 가슴을 촉촉이 적신 이는 ‘국민가수’ 조용필도, ‘문화대통령’ 서태지도 아니다. 오랜 무명시절을 거쳐 생의 아픔과 분노, 그리움을 화산처럼 노래하는‘라이브 황제’ 박강성이 그 주인공이다. 호주 교포들의 친목모임 ‘콰도쉬12’가 기획한 ‘북한 어린이 돕기 박강성 시드니 콘서트’는 최다 청중동원, 최다 성금모금 기록을 갱신하면서 뜨거운 ‘사랑 바이러스’를 전파했다.
나무들 사이로 감빛 노을이 타오르는 언덕길을 거닐며 ‘북한 어린이 돕기 박강성 시드니 콘서트’를 기다렸다. 공연장은 다운타운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힐스 센터(Hills Center). 카슬힐은 보큼힐, 세븐힐 등 힐스 타운(Hills Town)의 중심으로, 시드니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노을과 그 노을만큼이나 아름답고 고급스런 공연장 힐스 센터가 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카슬힐은 전통을 중시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아름다운 동네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보수적인 기질이 강한 호주 동포사회에서 ‘박강성 시드니 콘서트’는 전혀 예상치 못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예상외의 매진사례
감빛 노을에 취해, 시드니의 한가로운 저녁나절 기운에 취해 숲길을 천천히 걸어가 공연장 입구에 선 필자는 참으로 믿기 어려운 풍경과 마주쳤다. 힐스 센터 앞에 깜짝 놀랄 만큼 많은 사람이 줄을 지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어르신네부터 철부지 어린아이까지 과연 저 사람들이 다 입장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길고 긴 행렬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총 좌석 수 1760석인 힐스 센터는 진작부터 ‘입석금지’를 선언하고, 안전사고에 대비해 긴장상태에 들어갔다.
주최측에 따르면, 자선공연이라 혹시 입장권을 구입하고도 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티켓을 정원보다 조금 더 풀었다는 것.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입장하지 못해 발길을 돌리는 사람이 속출했다.
시드니 동포사회에선 흔치 않은 광경이라 필자는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며 입장을 늦추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남들의 상황을 살필 처지가 아니었다. 필자는 공연 취재차 왔음을 설명하고 신분확인을 거친 후에야 겨우 입장할 수 있었다. 극장 안은 4층까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제1부의 막이 올랐고, 호주 동포 그룹인 ‘메일 팀’ ‘J-디아즈’ ‘진이, 선이’ 등이 랩과 고스펠 곡들을 선보였다. 이어서 주최측을 대표해 진용씨가 ‘북한 어린이 돕기 박강성 시드니 콘서트 취지문’을 낭독했다.
“최근 북한은 핵개발 문제로 주변국들과 대립하고 있습니다. 문호는 닫혀 있고, 국제사회와의 인적, 물적 교류 또한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자유와 문화생활은 고사하고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습니다. 언론매체를 통해 식량난에 허덕이는 북한 주민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비영리단체인 콰도쉬12(Qadosh12)는 이번에 북한 어린이를 돕기 위한 ‘박강성 시드니 콘서트’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비록 작지만 나눔의 첫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마침내 메인 이벤트인 제2부의 막이 올랐다. 박강성은 첫 곡으로 ‘새벽’을 불렀는데 어찌나 열정적인지 객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라이브 황제’ 박강성의 멋진 가창력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환호와 갈채 속에 이어진 그의 히트곡 ‘장난감 병정’을 들으면서, 필자의 그날 현장취재는 사실상 끝이 났다. 마치 전류에 감전되기라도 한 듯 감동이 밀려와 객석의 반응을 살피고 무대상황을 체크하는 일 등이 뒷전으로 밀려난 것이다.
그의 호소력 짙은 창법 때문만은 아니었다. 필자는 18년 동안 호주에 살면서 세계적인 가수들과 그룹의 라이브 공연을 섭렵했기에 어떤 상황에서 감동적인 무대가 연출되는지 잘 안다.
음악이 연주되는 순간과 현장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기에 연주 녹음을 무척 싫어했던 오케스트라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경우를 굳이 들지 않아도, 음악은 ‘지금’과 ‘여기’를 직조하는 ‘순간의 예술’이다. 그런 관점에서 박강성은 2005년 1월22일의 시간성과 시드니의 공간성을 절묘하게 아우르고 있었다. 악보에 그려진 대로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보다는 자신의 신산(辛酸)했던 젊은 날들을 절규하는 듯한 창법과 절절한 몸짓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4층까지 객석을 꽉 채운 관객들. 그들이 누구이던가. 낯설고 물 선 외국으로 떠나와 제2의 생을 뿌리내리느라 제대로 된 공연 한 번 감상할 기회조차 없었던 사람들 아니던가.
박강성은 메마를 대로 메마른 호주 동포들의 강퍅한 가슴을 화산이 폭발하는 듯한 열정으로 녹여냈다. 강물이 흘러가는 듯한 정감 어린 노래로 그들의 가슴을 촉촉이 적셨다. 그의 공연은 마치 ‘감동 바이러스’를 감염시키는 종교집회 같았다. 객석의 남녀노소는 숨을 죽이다 소리지르고,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가열 찬’ 박수를 치다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곤 했다. 그 순간의 박강성은 컬트집단의 교주 같았다.
호주 시드니 ‘힐스 센터’를 뜨겁게 달군 박강성의 열정적 무대.
‘상처받지 않은 사람은 먼 길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처럼 해외동포들 대부분이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잘 아는 박강성은 ‘사랑하는 그대에게’ 등의 노래로 따스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하긴, 그 누구의 삶인들 쓸쓸하고 고단하지 않겠는가.
그 다음은 박강성이 위로받을 차례였다. 그는 히트곡 ‘문밖에 있는 그대’를 부른 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던 자신의 젊은 날을 담담하게 회상했다. 오랜 무명시절을 겪으며 술과 담배에 절어 살던 얘기를 신음하듯 털어놓았다. 잘나가는 동료와 후배를 보면서 좌절했던 얘기도 들려주었다. 자살을 생각할 만큼 심각한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애’에 속절없이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얼음장보다 더 차갑게 반응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박강성 자신을 죽여야 했다.
얼마나 죽고 못살았던사랑이기에, 저토록치명적인 어둠이 되었을까?
널 죽이고 싶어
치사량에 가까운 극약처방; 비상(砒霜)독을 품은 칼끝으로독을 잘라내야 하는 슬픔을
알겠니? 독약의 전신(前身)은따뜻한 돌가루, 죽고못사는 사랑이었다는 걸
-윤필립의 시 ‘독약(毒藥)’ 전문
아무런 꾸밈 없이 자신의 속이야기를 털어놓은 사람에게선 청량감이 배어나온다. 그런 점에서 박강성은 ‘산소 같은 남자’다. 그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잡초처럼 견뎌낸 무명시절
[ 화려한 중앙무대를 일부러 외면했다면 그건 거짓말이지요. 제가 지금은 라이브 가수로 자리매김했지만, 솔직히 원해서 된 게 아닙니다. 그 길밖엔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도 있지만,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단 한 차례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남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일에 서툴렀고, 누구에게 사랑받는 일도 두렵게 느껴졌습니다.
1982년 MBC신인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으며 비교적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그건 잠깐일 뿐이었습니다. 동료나 후배들은 펄펄 날아가는데 저는 혼자서 바닥을 박박 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설 수 있는 무대는 술집밖에 없었습니다. 온갖 상처가 제 젊은 날을 할퀴었습니다. 때로는 술집에 온 손님들과 주먹질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자꾸만 안으로 움츠러들었고, 모든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어준 게 있다면 술과 담배였습니다. 혼자 취하고, 혼자 앉아서 흩어지는 담배연기를 망연히 바라보는 날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냥 담배연기처럼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에 아침부터 술에 취해버렸지요.
그러다 문득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내려설 곳이 없다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왔다는 절망감이 오히려 나에게 힘을 준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상처만 받고 살아야 하는가?”
저는 그렇게 막 울부짖었습니다. 눈물범벅이 되어 이를 악물었습니다.
“나는 지금부터 다시 태어난 박강성이다. 어제의 박강성은 가라! 죽어버려라!”
그건 밟히면 밟힐수록 더욱 강하게 일어서는 잡초의 생리였고, 열패자의 끈질긴 생명력이었습니다. 때늦은 참회였지만, 그날 아침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뒤돌아보니 저는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세상 탓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허황한 꿈만 꾸고 있었을 뿐, 그 꿈을 펼치기 위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더군요. 그야말로 준비되지 않은 가수 그 자체였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선 삶을 바꾸어야 했고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열심히 해야 하고, 누가 나를 열심히 하도록 만드는가를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청중이었습니다.
그때 제 노래를 들어줄 사람들은 술집 손님들이었습니다. 생각을 바꾸니 갑자기 그들이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청중이 술집의 손님이든 교회의 교인이든 무슨 차이가 있단 말입니까. 며칠 동안 열심히 노래를 불렀더니 청중의 반응이 확 달라지더군요. 그때 생각해보니 청중은 진작부터 제게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걸 몰랐을 뿐이죠. 제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날부터 희망의 끈을 다잡았습니다.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더군요. 그것도 아주 빠르게 폭발적으로.
저는 이렇게 해서 라이브 가수가 됐습니다. 본디 원하던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청중과 직접 호흡하고 대화할 수 있는 라이브 가수인 것이 너무 행복합니다. ]
聖과 俗 넘나드는 신앙고백
그는 감출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지난 일을 무대 위에서도 친구에게 얘기하듯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크리스천이 된 후 신앙간증집회에 몇 번 초청된 적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살아온 그대로를 다 얘기했다. 그의 신앙고백은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불륜 같은, 교회에서 터부시되는 내용도 걸러내지 않고 다 말한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가수에게 팬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팬은 팬의 자리를 지켜야 하고 가수는 가수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게 박강성의 지론이다. 당연한 얘기다.
그러나 중년여성이 팬의 주류를 이루는 박강성에겐 이 당연한 얘기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가끔 있다. 은밀하고 집요한 유혹이 그의 공연장 주변에서 벌어지는 것. 그는 “신앙심이 아니었다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고 한다.
‘박강성 매니아 클럽(www.kspark. com)’의 오경숙 회장은 필자와의 채팅에서 “박강성님은 건실한 생활인이다. 불륜뿐 아니라 무절제한 낭비, 지나친 음주와 흡연 등을 단호하게 비판하는 등 여느 연예인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고 했다. “회원들을 만나면 늘 ‘중심을 잃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특히 가족 중심의 생활을 강조한다. 그의 조언으로 흔들리던 가정이 정상으로 돌아간 경우도 있다”고도 했다.
한마디로 박강성은 믿음이 듬뿍 가는 ‘맘짱’이란 것. 시드니에서 직접 만나본 박강성도 ‘속이 꽉 찬’ 사람이었다. 끼는 넘치는데, 그 끼를 무대 위에서만 발산하는, 무게중심이 제대로 잡힌 중년남자였다.
필자는 18년 전 호주로 이민을 왔기에 그의 최근 활동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다. 솔직히 그의 노래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시드니로 쳐들어와 동포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은 그의 정체를 알고 싶어서 ‘박강성 매니아클럽’ 홈페이지를 두드렸다.
그런데 ‘매니아클럽’ 가입은 쉽지 않았다. 연예인의 홈페이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폐쇄형 ‘홈피’였다. 취재를 위해 박강성에게 미리 부탁을 했는데도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의 팬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운영하다 보니 홈페이지의 주인공인 박강성의 ‘빽’조차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
박강성의 수호천사들
어렵사리 회원이 되어서 탐색전을 펼쳐보니, 박강성이 본인의 홈페이지에서 손님 대접받는 것만큼이나 이상한 일이 또 있었다. ‘박강성 매니아클럽’은 순수 국내용이 아니라 월드 네트워크를 형성한 다국적 홈페이지라는 것이다.
자유게시판에 글을 올려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니 여러 곳에서 답장이 왔다. 한국은 물론 미국과 일본, 대만, 호주에서도 정보를 보내줬다. 본부는 서울에 있는데 회장 오경숙씨는 대전에 사는 직장인이고, 홈페이지 운영자인 신여진씨는 일본에서 IT(정보기술) 전문가로 일하고 있다는 것.
또한 전국에 7개의 지부가 형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대구, 광주·순천, 서울, 대전, 수원, 인천, 부산 등이다. 거기엔 지방색도 없고, 계층간 불화도 없고, 이념적 갈등도 없다. 다만 박강성의 노래를 좋아하고, 좌절을 딛고 일어선 한 인간을 통해서 상처를 치유받는 보통사람들이 모였을 뿐이다.
그들은 사회봉사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한다. 회원관리를 깐깐하게 하고, 사회생활도 건실하게 하자는 게 그들의 생각이지만, 이웃돕기만은 아낌없이 넉넉하게 한다. 회원의 성금으로 운영하는 ‘이웃사랑 계좌’가 구체적인 예다. 장옥환 총무가 회원들에게 보낸 메시지를 잠깐 엿보았다.
[ 이웃사랑 계좌를 통해 모인 여러분의 귀한 성금을 굿네이버스에 전달, 학대받는 아동을 위해 썼습니다. 이후로는 금산 장애우학교를 후원하기로 했습니다. 정부 보조 없이 현재 여덟 분이 모여 사시는데, 개인 앞으로 나오는 생계 보조비와 홍삼액 판매 수익금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학교의 지출이 생각보다 많더군요. 생활터전인 폐교의 1년 임차료가 480만원이나 되더라고요. 잘 알려지지도 않고, 정부의 지원 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가는 분들께 아주 작은 힘이라도 되어 드리고 싶어 임원회의를 통해 결정했습니다.
여러분도 다 동의해주시는 거죠? 박강성님도 잘했다고 칭찬해주었어요. 그곳 금산 장애우학교는 정말 멋진 곳이에요. 올 여름 정기모임은 가족 동반으로 그곳에서 가질까 합니다. 가든파티는 물론 공놀이도 할 수 있어요. 아이들과 함께라면 산교육이 되겠지요. ]
‘북한 어린이 돕기 박강성 시드니 콘서트’를 관람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선 호주 동포들.
예의 없으면 바로 야단치고 경제적으로 무절제하면 곧바로 쓴소리를 던진다. 미사리의 라이브 공연장을 거의 날마다 드나드는 회원에겐 “자기 생활부터 잘 챙기라”고 질타한다.
박강성에 관한 소책자 ‘은하에서 찾아낸 그리움의 별’을 만든 정학주 교수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음악인이다. 그는 박강성의 라이브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일본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 부산, 광주로 날아간다. 일본 국내선-국제선-한국 국내선을 갈아타면서 공연장으로 달려가는 것. 그가 쓴 책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대중과 호흡하고 대중의 사랑을 받는 예술인이라면 누구든 스타가 되어 그들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을 것이다. 박강성. 그에게도 왜 그런 소망이 없겠는가.
그러나 그는 스타이기 이전에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진정한 인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에겐 젊은 날의 분노와 좌절, 노여움과 그리움이 주렁주렁 매달린 생의 잔가지들을 편안하게 정리해두는 넉넉한 연륜이 있다.
나는 언제부턴가 그의 노래를 조금씩 훔쳐보았고 가슴 깊이 느꼈다. 너무나 큰 위로를 받으면서 마침내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를 알게 된 나의 행복한 고백이다.
국적 초월한 ‘월드 네트워크’
열창의 무대를 선보인 박강성(위). <br>톨로라야 러시아 총영사와 악수하는 박강성(중간). 왼쪽은 김창수 총영사.
[ 어느 분에게서 박강성님의 CD를 선물받아 차에서 듣게 되었어요. 유난히 마음에 와닿는 노래가 있더라고요. 노랫말이 내 현재 상황과 비슷하기 때문이었죠. 그 노래가 ‘오랜 그리움’입니다. 그 노래만 몇 번을 반복해서 들었어요. 그러다 강성님에 대해 궁금해졌죠. 그래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노래는 국적을 불문하고 환영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 회원들이랑 미사리로 박강성님을 뵈러 갔지요. 제게 “내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상처가 있는 사람들인데…”라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뜨끔했습니다. 박강성님은 노래로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능력을 가진 것 같아요. ]
박강성의 ‘월드 네트워크’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폭을 넓히고 있다. ‘박강성 사랑 바이러스’는 조만간 러시아까지 진출할 것 같다. 1월21일 그레오기 톨로라야 시드니 주재 러시아 총영사가 김창수 한국 총영사와 함께 한국식당에서 박강성을 만난 것. 김창수 총영사는 ‘북한 어린이 돕기 시드니 콘서트’ 소식을 듣고 평소 친하게 지내는 톨로라야 총영사에게 박강성에게 북한의 실상을 전해달라고 부탁한 바 있다. 톨로라야 총영사는 학업을 마치자마자 북한에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고, 6년 동안 북한에 근무(한국에서도 5년간 근무)하는 등 러시아 최고의 북한 전문가다.
정학주 교수가 박강성을 주인공으로 발간한 책, ‘은하에서 찾아낸 그리움의 별.’
콰도시12 멤버들은 콘서트 두 달 전부터 생업에 지장이 있을 만큼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주도면밀하게 행사를 준비했다. 30∼50대 남성 12명으로 구성된 콰도쉬12는 시드니새순교회를 모태로 탄생한 친목단체다. 교회 안에서의 봉사활동에 머물지 말고, 세상으로 나가 자선활동을 벌이자는 취지에 의기투합한 이들의 모임이다.
일단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는 생각에 아마추어 연주단을 만들기로 하고 12명 모두가 한두 가지씩 악기를 연주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콰도시12는 상인, 회계 전문가, 컴퓨터 전문가, 회사원, 노동자 등으로 구성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모임인데. 물론 회원들은 음악학원을 다니거나 레슨을 받으면서 정기적인 연습을 통해 실력을 연마했다.
박강성과 함께 즐겁게 노래하는 ‘콰도쉬12’ 회원들.
‘콰도쉬12’의 꿈
그러나 ‘속없는 중년들’은 자기들만의 자선공연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모임의 살림꾼인 컴퓨터 전문가 한명철 회원이 이렇게 제안했다.
“당장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가 어느 세월에 연주실력을 키워서 대규모 자선공연을 연단 말인가. 우선은 진짜 가수를 초청해서 판을 벌이자. 나중에 콰도쉬12가 유명해지면(?) 그때 가서 자체 공연을 열자!”
그들은 콰도쉬12를 비영리법인으로 호주 정부에 등록하고, 안종혁 회원의 친구이기도 한 라이브 가수 박강성을 초청해서 대형공연을 열기로 했다. 그동안 미국이나 유럽 동포사회와는 달리 북한 돕기 행사가 활발하지 않은 호주 동포사회에서 그들은 무모하다 싶을 만큼 큰 보폭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대중적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은 박강성의 단독공연으로 첫 행사를 기획한 것도 무리인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대책 없어 보이는 이 제안에 회원들은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철없는 사람들’의 특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 물론 이 공연을 위해 콰도쉬12는 갖가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내일을 기다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박강성은 동포사회에 ‘박강성 신드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열정적인 무대를 선사했고, 북한 어린이 돕기 모금액은 목표를 초과달성했다. 비록 역사가 길지 않은 호주 동포사회이지만, 이번 행사에서 많은 기록이 갱신됐다. 자선공연 최다 청중동원, 최다 성금모금, 최다 후원자 참여 등이 그것. 무려 88개의 업체와 개인이 콘서트 후원자로 나섰다.
후원자 중 오래 전부터 북한관련 사업을 벌여온 코오스트 그룹의 천용수 회장은 가장 많은 성금을 기탁했다. 그는 최근 한국에서 열린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총회에서 이사장으로 선출된 바 있다. 박강성도 성금모금에 빠질 수 없었다. 그는 개런티 한푼 받지 않고 무대에 선 것은 물론, 1000호주달러(약 80만원)를 콰도쉬12에 기탁했다.
콰도쉬12의 최연장자인 진용 회원은 “이렇게 말하면 비판받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번 행사를 통해서 호주 동포사회의 속마음을 알아보고 싶었다. 그 동안 북한 돕기에 소극적이던 동포사회가 이번 행사를 통해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어 큰 보람을 느낀다”며 행사를 무사히 마친 소감을 밝혔다. 티켓관리를 담당한 컴퓨터 전문가 조흥승 회원은 “행사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초대권은 단 한 장도 발행하지 않았다. 회원들도 자신과 가족의 티켓을 구입했다”고 밝혔다.
박강성은 콘서트 마지막 곡으로 ‘내일을 기다려’를 불렀다. 무대를 마무리하는 극적인 효과만을 노린 게 아니었다. 그는 콰도쉬12와 함께 북한 어린이 돕기 프로젝트를 계속 이어갈 예정이다. 공연을 끝내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박강성에게 소감을 물었다.
“어쩌면 지금부터가 시작인지 모릅니다. 제 노래가 계속해서 북한 어린이를 돕는 일에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그리고 북한 어린이들에게는 노래 제목과 똑같은 말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내일을 기다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