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군 중령 피우진(皮宇鎭·50). 한국 최초의 여군 헬기조종사인 그는 ‘더 이상 군복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전역 판정을 받고 이에 불복해 국방부에 인사소청을 한 상태다. 그리고 자신이 건강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려는 듯 도보로 전국 종주를 하고 있다.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땅끝마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 언제 종주를 시작했습니까.
“10월31일 땅끝마을에서 출발해 하루 40km 정도씩 걷고 있습니다. 23박24일 일정으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걸어갈 예정인데, 좀 무리하겠다 싶지만 아직까지는 컨디션이 괜찮습니다.”
▼ 하루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대개 오전 6시30분 출발해서 해 지기 전까지 다음 지점에 도착하려고 합니다. 밤에는 걷지 않으려 해요. 비상용 손전등을 준비하긴 했지만 차들이 마구 내달리는 밤에 국도를 걷는 건 여간 위험하지 않더군요. 밥 먹고 쉬는 시간 빼고 하루 평균 10시간 정도 걸어요.
힘들지만 재미있어요. 제가 군대라는 조직에 너무 오래 갇혀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다른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어 좋아요. 여자 혼자 모텔이나 여관 들어가는 게 좀 뭣해서 돈도 아낄 겸 찜질방에서 자곤 하는데, 그곳에서 만난 분들이 뜨겁게 응원해주세요. 그런 분들을 만나면 피로가 확 풀립니다. 경찰들도 친절하고요.”
▼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합니까.
“걷다보면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들어와요. 어제는 순창 오는 길에 세 살쯤 된 아이를 업은 젊은 여성과 그 어머니로 보이는 제 나이 또래의 여성이 걸어오더군요. 너무나 행복하고 맑은 웃음을 머금고. 정말 가족끼리만 나눌 수 있는 웃음을 오랜만에 본 것 같았습니다. 저는 결혼을 안 했어요. 병사들을 아들로 여겼죠. 하지만 병사들과 저렇게 맑고 행복한 웃음을 주고받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는 결혼도 안 하고 제 모든 걸 군에 바친 것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여성의 상징인 유방을 절제할 때도 아무렇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제 그 사람들을 보면서 ‘아, 내겐 가족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묘해졌어요.”
▼ 군에서 완전군장 하고 행군하신 적도 많겠지만, 20여 일 동안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는 게 보통 일은 아닐 텐데요.
“여행가 한비야씨가 쓴 책을 보니까 ‘배낭의 무게는 최대한 줄여라, 최대 10kg을 넘기지 마라’고 했더군요. 짐을 줄이고 줄였는데도 10kg이 조금 넘었어요. 처음에 메봤을 때는 느낌이 딱 좋았는데 사나흘 걸으니까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속옷도 한 달치 넣었던 것을 빨아가며 입을 생각하고 최소한으로 줄이고, 찜질방에서 잠을 자면 잠옷도 필요 없을 것 같아 한 벌만 남겨뒀어요. 심지어 칫솔도 무겁게 느껴져 두 개 중에 한 개는 버렸습니다(웃음). 그러고 보면 여행은 정말 버리기 위해 하는 것 같아요. 출발하면서 고생 좀 해보자고 마음먹었어요. 나하고의 싸움을 치열하게 해보자, 그래서 내가 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버리자고 생각했습니다. 미련, 한(恨), 분노, 이런 것들을 버리기 위해 길을 떠난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