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티글리츠 사진 속 조지아 오키프.
기자는 2005년 8월 샌타페이에 갔다. 국제선은커녕 가장 가까운 공항이래야 도심에서 100km나 떨어져 있는 인구 7만의 작은 도시지만 대학이 4곳, 출판사가 27개, 대형 박물관과 미술관이 8개, 갤러리가 250개나 되는 지적(知的)인 도시다. 시민 여섯 명 중 한 명이 예술산업에 종사하고 있고 지금도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예술가가 모여 산다고 한다.
이곳의 중심에 미국 현대미술의 거장 조지아 오키프(1887~1986)의 치열한 삶과 그녀의 화업(畵業)을 집대성한 오키프 미술관이 있다. 기자가 오키프미술관(www.okeeffemuseum.org)을 찾은 날은 평일인데도 붐볐다. 1997년 한 독지가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이 미술관은 오키프 작품이 불과 70여 점 전시되어 있는 작은 공간이지만, 워낙 대표작들이 망라되어 있어 매년 각국에서 17만여 명이 찾는다고 한다.
허름한 폐광촌이던 이 도시를 예술인 도시로 자리 잡게 한 것은 오키프의 덕이 크다. 20세기 미국 미술계의 독보적 존재로 추앙받는 그녀는 서른 살 때인 1917년 기차여행 중 이곳을 처음 만난 뒤 기회만 있으면 몇 년에 한 번씩 이곳을 찾았다. 62세 때인 1949년부터는 아예 정착해 죽을 때까지 살았다. 그녀의 강렬한 꽃 그림은 이곳 거주를 기점으로 풍경화와 뼈, 식물기관, 조개껍데기, 산 등 자연물에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그림들로 변모한다.
바버라 불러 오키프 미술관장은 “예술에 관심이 있고 특히 오키프의 드라마틱한 삶에 매료된 세계인들은 샌타페이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예술가 정신을 세례 받는 느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예술가 정신이란 한마디로 일탈이자 탈속이다. 반복적인 일상에 묶여 있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것은 위험한 도전이다. 하지만 일탈의 미학이란 게 있다. 떠나봄으로써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들을 다시 보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미술교사를 꿈꾼 소녀
샌타페이와 샌타페이에 녹아든 오키프의 탈주적 삶이 주는 메시지는 그런 것들이다. 모두가 그녀처럼 살 수는 없지만 그런 삶을 간접 체험하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과 삶을 더 넓은 시선으로 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조지아 오키프는 1887년 11월15일 위스콘신 주 선 프레리 농장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재배한 옥수수를 기계로 수확하고 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꺼렸던 담배 농사를 지은, 요즘으로 따지면 벤처 농업가였다. 일곱 형제 중 장녀였던 오키프는 어릴 적부터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다. 본격적으로 그림 수업을 받기 시작한 건 열한 살 때. 비교적 여유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일찍이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부모가 여동생과 함께 한 달에 한번 미술교사를 붙여주어 과외수업을 받게 한 것이다.
오키프는 그림에 빠졌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친구들이 무도회에 다니며 구혼(求婚) 대상을 물색하기에 바쁠 때도 오로지 그림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녀의 그림솜씨는 학교에서도 유명해 졸업 앨범에 삽화를 그려내기도 했다. 부모는 오키프를 시카고 예술대학에 입학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대단한 화가가 되리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잘해야 미술교사나 되면 좋겠다고 바랐다.
이런 소박한 기대는 오키프도 마찬가지였다. 여자가 그림을 그려 생계를 이어갈 정도의 역할모델이 없던 시절, 그녀는 지금으로 치면 교사자격증을 주는 사범대학 과정에 등록해 교사수업을 받는다. 이후 집안 형편이 기울자 학업과 임시교사 일을 반복하며 그림을 그리는 생활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