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게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그는 응당 행복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고단한 우리 근현대사는 그를 편안히 놓아주지 않았다.
32년간의 안성 생활을 마치고 서울에서 사제들을 교육하던 공베르 신부는 6·25전쟁이 터지자마자 불행히도 인민군에 체포돼 중강진까지 끌려가게 된다.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꼽히는 중강진 포로수용소에서 그는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그만 숨을 거두고 만다. 그 때 나이가 75세이니 25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에 온 지 50년 만의 일이다.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함께 끌려갔던 동생 줄리앙 공베르 신부도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으로의 머나먼 선교길에 동행했던 형제가 하루 사이에 순교의 길을 떠나고 만 것이다. 보답은 못할지언정 그들 형제에게 그러한 죽음을 안긴 우리 역사가 너무도 한스럽고 죄송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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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6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는 우리 곁에 남아 있다. 풍성하고 탐스러운 포도송이로 남아 있으며, 100년을 넘긴 전통의 명문 학교로 남아 있다. 수만리 이역 땅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평생을 헌신한 그를 우리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감미로운 안성 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에 안성의 은인, 아니 대한민국의 은인인 그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