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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포도 전래자 앙투안 공베르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

안성포도 전래자 앙투안 공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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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포도 전래자 앙투안 공베르
공베르 신부에 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일이 바로 3·1만세운동을 측면에서 도운 사실이다. 안성은 3·1만세운동 당시 전국 3대 실력 항쟁지로 꼽힐 정도로 격렬한 반일항쟁이 펼쳐진 곳이다. 당시 일경주재소를 불 지르고 우체국 등 식민통치기관을 습격하는 등 격렬한 항쟁으로 순국하신 분만 24분이요, 옥고를 치른 열사가 127분이나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공베르 신부는 일경에 쫓기는 만세운동 가담자들을 성당으로 피신시켰으며, 성당이 치외법권지역임을 들어 이들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비록 외모는 이방인이었으나 평생 한국을 사랑하고 나라 잃은 설움을 함께한 진정한 한국 사람이었다.

그렇게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그는 응당 행복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고단한 우리 근현대사는 그를 편안히 놓아주지 않았다.

32년간의 안성 생활을 마치고 서울에서 사제들을 교육하던 공베르 신부는 6·25전쟁이 터지자마자 불행히도 인민군에 체포돼 중강진까지 끌려가게 된다.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꼽히는 중강진 포로수용소에서 그는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그만 숨을 거두고 만다. 그 때 나이가 75세이니 25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에 온 지 50년 만의 일이다.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함께 끌려갔던 동생 줄리앙 공베르 신부도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으로의 머나먼 선교길에 동행했던 형제가 하루 사이에 순교의 길을 떠나고 만 것이다. 보답은 못할지언정 그들 형제에게 그러한 죽음을 안긴 우리 역사가 너무도 한스럽고 죄송할 따름이다.

안성포도 전래자 앙투안 공베르
金學容

1961년 경기 안성 출생



중앙대 경제학과 졸업

내무부장관 비서관

경기도의원, 경기도의회 부의장

안성포럼 대표

18대 국회의원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6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는 우리 곁에 남아 있다. 풍성하고 탐스러운 포도송이로 남아 있으며, 100년을 넘긴 전통의 명문 학교로 남아 있다. 수만리 이역 땅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평생을 헌신한 그를 우리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감미로운 안성 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에 안성의 은인, 아니 대한민국의 은인인 그를 생각한다.

신동아 201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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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용│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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