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지금의 직업과 연관을 맺은 시기가 비슷하다. 김종필은 1961년 35세의 나이로 5·16을 통해 정계에 데뷔했고, 앙드레김은 1962년 25세의 나이로 ‘살롱앙드레’라는 의상실을 오픈하면서 패션계에 데뷔했다. 두 사람은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쉽지 않은 일임에도 늘 정상자리에 있었다. 장수하는 직업인의 대표적인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또 자신의 직업세계에서 낭만주의를 근간으로 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김종필이 로맨티스트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앙드레김 역시 음악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소재로 낭만주의가 근간이 되는 작품을 추구하는 디자이너로 알려져 있다.
인간을 중시한다는 삶의 방식이나 직업관도 같다. 앙드레김은 무엇보다 인간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고 말한다. 인간의 아름다운 심성과 따뜻한 가슴을 울릴 수 있는 패션휴머니스트가 자신의 소망이라고 강조한다. 김종필 역시 누구보다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이다. 정치인이라는 직업이 ‘사람장사’이긴 하지만 김종필은 직업적 의미 이상으로 사람이라는 개념을 중시한다. 그들은 또 철저하게 대중을 상대로 하는 직업인이면서도 별반 대중을 의식하지 않는 특이한 사람들이다.
정말로 희한한 공통점은 두 사람이 디자이너와 정치가라는 전혀 다른 직업에 종사하면서도 국가와 민족을 인생의 화두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종필은 우리나라 정치인 가운데 국가와 민족을 가장 많이 거론하는 사람이다. 그의 모든 선택 기준은 국가와 민족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앙드레김은 예술계통에 종사하는 사람답지 않게 애국애족의 정신을 강조하며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다. 수십 년간 100% 국산옷감을 고집하고 있으며, 자신의 아들에게도 나라에 대한 애착을 가져야 가정의 행복도 있다고 말할 정도다.
그러나 직업적 성취도와는 무관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두 사람의 직업의식에는 큰 차이가 있다. 직업인으로서 김종필과 앙드레김의 삶을 한번 들여다보자.
김종필의 직업의식
김종필의 직업은 정치인이다. 70년대 초와 90년대 말, 두 번에 걸쳐 국무총리를 했고, 현재 9선의 국회의원인 그의 직업이 정치인이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5·16이라는 충격적이고 극적인 무대를 통해 데뷔한 그의 정치인생이 어느덧 40년이다. 한 사람이 40년을 한 직종에 종사했다는 건 결코 간단하게 보아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거의 예술의 경지라고 할 만한 직업적 노하우,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성실성이나 끈기 등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감히 넘보기조차 어려운 기록이다.
40년을 근속한 직장인에게는 100돈쭝의 황금열쇠를 선사해도 과하지 않으며, 데뷔 후 40년이 넘도록 왕성한 활동을 하는 예술가가 있다면 국민적 찬사를 보내야 한다. 그렇다면 40년의 정치경력을 자랑하는 김종필도 직업적 예찬론의 한 대상자가 되어야 마땅한데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왜 그럴까?
1980년 5월 초 당시 공화당 총재로 대권을 꿈꾸던 김종필에게 한 언론인이 대통령직이 직업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대통령도 일을 하고 월급을 받으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이었다.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직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직업인이라고 봐서도 안 된다고 강조한다. 대통령은 국민의 뜻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어느 경우든 사심(私心)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게 대통령직 직업 불가론의 핵심이다.
직업의 사전적 의미는 ‘생계를 위하여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다. 김종필은 직업의 이러한 일반적 개념을 자신이 업으로 삼고 있는 정치에 적용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의아한 생각이 든다. 혹시 김종필의 마음속에는 직업의식이라는 틀이 원천적으로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 말이다. 어떤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그 순간부터 ‘자신의 생계를 위한 사심’으로 공정성이나 합리성을 상실한다고 믿는 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으로 인해 대단한 스트레스를 받고 살지만, 또 그 반대로 일을 통해서 직업적 보람이나 삶의 의미, 이타심을 충족시키면서 살아간다. 전문가란 결국 투철한 직업의식이나 최소한 직업윤리에 대한 인식의 틀이 확고한 사람에 다름 아니다.
40년 경력의 직업적 정치인 김종필이 오너로 있는 정당의 지지율이 겨우 3%대에 머물고 있으며, 그가 정계에서 은퇴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60%에 달한다는 건(금년 2월 총선시민연대 조사자료), 어떻게 보면 김종필의 애매한 직업관에서 비롯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한 가정을 전제로 ‘인간 김종필’과 ‘직업인 김종필’과의 함수관계를 통해서 김종필이라는 인물을 분석해보는 것도 그렇게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기회주의, 애매모호, 2인자…
작년 이맘때 한 잡지사에서 한국 정치학회와 공동으로 국회의원과 정치학자 280명을 대상으로 유력 정치인 몇 명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다. 조사 결과 김종필의 정치스타일에 대한 불만으로는 기회주의·변신·편법·생존적 처세 등의 단어가 1위(17.9%)로 꼽혔다. 다음으로는 애매모호함·어물쩍·의뭉·선문답식(10.7%), 현실안주·미온적·2인자 처세(9.6%), 구시대·수구적(7.5%) 등의 순서로 지적됐다. 아마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이미지 조사를 해도 거의 비슷한 대답이 나올 것이다.
기회주의적 처신과 애매모호한 말과 행동, 그게 김종필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다. 인식이라는 게 반드시 실체와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연관성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김종필은 40년의 정치인생 중 20여 년은 박정희라는 절대권력자 밑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2인자로 지냈고, 80년 이후에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2인자의 위치에서 20년을 살아왔다. 표면적으로는 같아도 질적으로는 굉장한 차이가 있을 수 있는 2인자의 위치였지만, 희한하게도 김종필의 행보에서는 내용상 아무런 차이가 발견되지 않는다.
5·16과 관련된 자료를 살펴보면 김종필은 박정희의 참모들 중 혁명이 성공한 뒤 권력구조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에 대해 정리된 구상을 갖고 있던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공화당 사전조직의 실무 지휘자가 되는 강성원은 “당시 김종필을 대면만 해도 국가 개조에 대한 열기를 느낄 수 있었고, 그는 사심없이 국사에 몰두하고 있었다. 엄청난 결정들을 담담하고 또 대담하게 내려가면서 상황을 끌고 나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패기만만한 혁명아의 한 전형이었다”고 전한다.
62년 김종필의 중앙정보부는 단순한 정보기관이 아니라 “정부 안의 또 다른 정부”였다. 그 때문에 실세 김종필은 박정희의 냉혹한 견제를 받기 시작한다. 그는 63년 공화당 사전 창당작업 시비를 빌미로 외유를 강요당한다. 그때 유럽으로 간 김종필은 자동차를 직접 몰고 다니면서 공산권이 아닌 나라는 모두 다녀봤다고 한다. 외유 8개월간 자동차로 달린 거리가 무려 9800km나 되었단다.
혁명 직후 2년간 권력의 한복판에서 경험한 무소불위의 권력과 살벌한 견제 그리고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유럽으로 날아온 김종필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너무 일찍 권력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알아버린 30대 후반의 사내에게 8개월간의 유럽여행은 남다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1차 외유에서 돌아온 이후 그는 권력자 앞에서 자신의 뜻을 세우는 일을 중단하게 된다. 일부 정치평론가들은 권력의 비정한 속성을 일찌감치 터득한 김종필의 예기 불안 심리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김종필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알아서 긴다는 것이다. 확실히 자기보다 막강한 힘을 가진 대상에 대한 그의 공포심이나 고개숙임은 상식선에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지나치다.
80년 5월 초 동아방송의 대담프로에서 사회자로부터 중앙정보부의 월권행위에 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
“내가 중정을 창설했을 때 생각했던 것과는 많은 변질이 있었어요. 최근 전두환장군이 정보부장서리가 되면서 정보부가 본연의 기능에 맞는 운영을 해나가고 있는 것을 퍽 고무적으로 봅니다. 우리 국가를 위해서도 아주 좋다는 생각을 해요.”
실제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지만 이미 혁명군의 실세로 떠오른 전두환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한 발언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100만 당원을 가진 정당의 총재로서, 또 당시 유력한 대권후보 중의 한 사람으로 거론되던 김종필의 무게를 감안한다면 지나치게 비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5월17일, 그는 보안사에 연행돼 46일 동안 감금되었다. 그는 그곳에 끌려간 모든 사람들이 지금도 몸서리를 치며 기억하는 보안사의 소위 ‘서빙고호텔’ 시절을 회상하면서도 담담하다. 46일 동안 별로 큰일없이 독서를 하면서 비교적 조용한 시간들을 보냈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차피 모든 것은 혁명하는 사람들의 뜻대로 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뭐든지 요구하는 대로 다 승인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때의 조서를 토대로 발표된 권력형 부정축재자 순위에서 자신이 1위로 발표된 사실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분통을 터뜨린다. 신군부가 정권을 탈취하자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 기간 동안 그가 했다는 말은 “젊은이들이 잘해주기를 바란다”는 딱 한마디다.
90년대에 들어서서는 더 당황스럽고 민망한 발언들을 수도 없이 쏟아놓는다. 그 중 압권은 3당 합당 직후에 한 말이다.
“내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은 노태우 대통령이다. 그 다음은 김영삼 최고위원이다. 최고위원도 다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김영삼 최고위원과 나란히 걷지 않고 뒤따라간다. 민주화가 됐다지만 무릇 사회와 조직에는 아래위가 있어야 한다.”
YS가 정권을 잡은 후에는 그 유명한 ‘홍작과 연작’의 발언을 비롯,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명언’들을 줄줄이 쏟아낸다. 김대중정권 창출의 한 축이었으면서도 97년 12월의 국회연설은 그의 깍듯한 몸가짐을 잘 보여준다.
“김대중 당선자께서 정계에 봉사하시려는 참뜻을 보람있게 나눠 가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합시다.”
김종필은 기본적으로 자기보다 힘이 센 사람에겐 대들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한 정치인의 지적이 헛말은 아닌 듯싶다.
김종필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그 특유의 ‘순리주의’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다. 그는 스스로 순리주의자라고 자부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걸핏하면 이 논리를 구사한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으며 물 흐르듯 순리에 따라야 한다는 한자숙어인 ‘상선여수(上善如水)’는 김종필의 좌우명이다. ‘순천자(順天者)는 생(生)이고 역천자(逆天者)는 사(死)다’는 게 그의 굳은 믿음이다. 오죽했으면 학교 이름을 지어달라는 지인의 부탁에 대학 이름을 ‘순천향대학’으로 지어주었겠는가.
문제는 그의 ‘순리’라는 개념에 자의적인 해석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차라리 87년에 관훈클럽에서 언급한 ‘팔랑개비론’이 훨씬 솔직하고 인간적이다. 김종필은 자신을 종이 팔랑개비에 비유한다. 팔랑개비는 바람이 세차게 불면 힘차게 돌고, 약하게 불면 천천히 돌며, 바람이 멎으면 함께 멎어버리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개인이란 한 나라의 바람이 세차게 불 때 그에 따라 돌아갈 수밖에 없는 팔랑개비 같은 존재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10월에는 10월의 논리가 있고 11월에는 11월의 논리가 있다.”
지난 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와의 단일화 작업을 재촉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했던 김종필의 말인데, 그의 상황론을 절묘하게 보여주는 인상적인 구절이다. 오죽했으면 ‘상황론자’라는 별호(別號)까지 얻었겠는가.
김종필은 누구보다 모호함을 생명선으로 하는 정치인이다. 딱 부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상황론자들의 가장 큰 특징이기 때문이다. 원래 말을 많이 하지도 않지만 설사 말을 해도 풍부한 어휘력과 은유를 사용, 듣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해석을 하게 하는 것이 김종필의 특기다. 당 운영에 대해서도 간접화법이나 두루뭉실하게 알 듯 모를 듯한 태도를 취해 당 관계자들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한다. 한 정치학자는 “지도자는 명쾌해야 하는데 김종필은 모호하다. 이것이 젊은층에서 인기가 없는 중요한 이유”라고 진단한다.
김종필의 정치는 어떤 면에선 ‘쇼당패 스타일’이다. 점잖지 못하게 고스톱 용어를 쓰게 돼서 좀 그렇긴 하지만 더 적절한 비유가 생각나지 않는다. 고스톱에서 쇼당이란 내가 1등을 할 수 없을 때 선택하는 차선의 전략이다. 쇼당패를 만들려면 판세를 읽는 절묘한 감각과 나머지 두 사람이 필요로 하는 패가 내 손에 있도록 고스톱판을 몰아가는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 김종필은 천부적인 재질이 있다. 나한테는 별 필요가 없지만 상대편 누구도 내가 가진 패 때문에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드는 게 김종필 정치 전략의 핵심이다. 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1등을 하려면 자신의 도움이 절실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균형을 파괴할 수 있는 타이밍까지 맞춘다면 그의 파괴력은 10배 이상 증폭된다.
한계중량을 들어올린 채 다리를 부들거리면서 버티고 있는 역도선수는 새의 깃털 하나에도 균형을 잃고 쓰러지고 만다. 이럴 때 새의 깃털은 코끼리가 덮쳐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김종필이 늘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몫을 누릴 수 있는 건 이런 메커니즘에 기인한다.
정치기술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거의 예술의 경지다. 말이 쉽지 단순히 현란한 정치 기술만으로 이런 경지에 오르기는 쉽지 않다. 자신의 성향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인간 김종필의 내면세계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르네상스적 교양으로 무장
김종필은 인간의 전체 근수를 달았을 때 3김씨 중 가장 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이며, 정치인 가운데 르네상스적 교양으로 무장된 유일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가수 패티김은 그녀가 새해 인사를 가는 유일한 정치인이 김종필이라고 하며, 대중예술에 대한 김종필의 깊은 애정과 전폭적인 후원에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 소설가 홍성유는 JP라는 인물은 가까워질수록, 친분이 두터워질수록 알 수 없는 매력을 느끼게 해준다고 말한다. 87년 당시 언론인 오효진은 몇 개월에 걸쳐 김종필을 밀착취재하는 과정에서 그가 이룩한 정치적인 성과보다는 인간적인 능력 면에서 경이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만돌린, 피아노, 전자 오르간, 아코디언 같은 악기를 수준급으로 연주한다. 예그린 악단도 만들어 후원해주었고, 서예와 그림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어 그의 작품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을 정도다. 한때는 일요 화가회를 이끌기도 했고, 지금도 시인묵객들과 넓은 교유를 유지하고 있다. 더구나 그는 비행기도 탱크도 배도 몰 수 있다. 그의 집엔 장서가 자그마치 2만 권이나 된다. 지금도 날마다 책을 읽고 있다. 그와 얘기를 하다보면 동서의 고사와 일화, 수많은 시구들이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온다.”
그밖에도 그의 예술적 감각이나 재능을 보여주는 일화는 수없이 많다. 68년 3선개헌 반대를 주도하다 모든 공직에서 사퇴한 뒤 한라산 기슭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담배를 문 채 그림을 그리는 김종필의 사진은 로맨티스트라는 이미지를 많은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킨 것이었다.
김종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낭만적 정치인으로 불린다. 필자는 김종필을 생각할 때마다 고급요정에서 기생의 속치마에 글씨를 써주거나 난을 쳐주는 정치인의 이미지가 그려지곤 했는데, 실제로도 그에겐 그런 풍모가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정치란 복잡한 산수 문제를 푸는 것처럼 하는 게 아니야. 이렇게 여인네 궁둥이 슬슬 만져가며 하는 거여.”
그가 언젠가 요정에서 한 말이란다. 낭만의 뿌리는 인간이다. 그는 늘 인간 중심의 사고를 강조한다. 이게 김종필 정치스타일의 최대 장점이자 치명적 약점이다. ‘인간중심의 사고’란 분명 누구도 함부로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만큼 강력하고 근원적인 삶의 명제다. 문제는 이 잣대를 너무나 무차별하게 적용한다는 것이다.
87년 대통령 후보로 나선 김종필은 박정희 전대통령의 궁정동 안가의 연회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국민들의 시각이 못내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것이라고 이해해주시면 될 걸로 봐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다면 공자님이나 부처님을 모시는 게 낫지요. 또 그래 가지고는 세상이 다스려지지 않아요. 나는 어떤 면에서는 완벽한 것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약한 면에서 그 인간을 다시 볼 수도 있는 게 아니냐 싶어요.”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도 최소한 갖춰야 할 복장이나 규칙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정치인 김종필에겐 그런 의식이 전혀 없다. 인간 사이의 따뜻한 유대관계만 공고하면 만사가 오케이라고 한다. 그는 애초부터 인간 김종필과 정치인 김종필을 나누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경계선이 전혀 없는 것이다.
총론만 있지, 각론이 없다
그럼에도 김종필은 늘 절대선(絶大善)이나 중립자의 시각을 선점(先占)하고 있어서 적극적인 비판을 펼치기가 쉽지 않다. ‘세상에는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는 일들이 많다’라거나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다’는 따위의 명제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건 농담을 하는 상대에게 정색을 하고 반론을 펼치는 것처럼 어색한 일이다.
김종필은 자신을 비판하려고 마음먹은 상대방에게 그런 허탈한 느낌을 안겨주는 사람이다. 그는 최고 권력자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시심(詩心)을 꼽으며 감성적 우월감을 과시하고는 한다. 그렇지만 필자는 그의 삶을 보고 있노라면 평소 그렇게 중요하다고 믿어 왔던 인간의 감성이란 것에 대해서 강한 회의를 품게 된다.
그에게는 늘 총론만 있고 각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는 인간의 야수성에 대해 철학적 고민에 빠진 병사보다는 사격술이 능한 병사가 더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김종필은 평화시의 잣대로 전시의 상황까지를 재단하려 한다. 그런 잣대는 위기의 상황에선 효용성이 거의 없다. 그가 고비마다에서 쉽게 포기하고 주저앉아 버리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거기에 있다.
얼마 전 자민련을 원내교섭단체로 만들어주기 위한 날치기 법안 현장에서 국회의원들이 벌이는 몸싸움을 보며 우울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들이 한심해서가 아니었다. 평소의 사상이나 그 인품에 반해서 필자가 개인적으로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몇몇 의원이 육탄돌격을 하는 장면 때문이었다. 여당의 한 초선의원은 자민련의 교섭단체 요구에 대해 “시험에 떨어져 놓고 커트라인을 낮춰서 붙여달라고 요구하는 꼴”이라고 비난했다가 지도부의 압력을 받고 몸싸움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들의 내면에서 일렁이고 있을 자아분열적 괴로움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럴 때도 아마 김종필은 저 뒤에서 두 눈을 꾹 감은 채 입술을 내밀고 있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화선지 위에 ‘부대심청한(不對心淸閑: 사소한 일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으면 마음이 맑고 여유롭다)’을 휘갈기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좋아도 한세상이고 미워도 한세상인데 저렇게까지 거칠고 빡빡하게 할 필요가 무에 있을꼬. 요즘 애들의 세태에 끌끌 혀를 차는 낭만파 주먹의 큰형님, 그게 김종필이다.
김종필은 조선시대 영조(英祖) 이래 가장 오랫동안 권력의 핵심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언제나 양지만을 좇아 변신하는 권력형 인간이라고 한다. 그런데 필자는 오히려 김종필이 권력욕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에게선 권력 그 자체가 1차적인 목적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두 가지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첫번째 남편과 사별한 여자가 있다. 남편이 남긴 약간의 재산을 그녀는 자식들에게 넘겨주지 않는다. 돈이 있어야 자식들이 자기를 무시하지 않을 것이며 노후도 보장될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기제로 돈을 활용하는 것이다.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김종필은 중정부장을 그만둔 다음 날부터 검은 지프에게 미행당한 두려운 경험을 가지고 있다. 권력에서 멀어질 때 곧 닥쳐올 뿌리깊은 공포상황 때문에 그는 악착같이 권력 주변에서 맴돌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 번째, 재벌이었던 선친에게서 충분한 재산을 물려받은 기업인 아들이 있었다. 그는 예술적 소양이 뛰어나서 음반회사도 하고 문화 잡지를 발행하기도 하며 육영사업 등을 벌인다. 그는 영리를 추구하는 사업가라기보다 오히려 문화예술인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에게 사업이란 자신이 원래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벌어주는 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김종필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김종필에게 권력이란 김종필이란 한 개인이 추구하는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삶을 실현시켜 주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김종필이 자신있게 내놓을 만한 정치적 업적은 별로 없다. 그렇지만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운정(雲庭) 김종필이 문화계에 끼친 공로는 만만치 않다. 또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그는 개인적인 삶의 즐거움이나 윤택함도 동시에 챙겼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한 한 방편으로 그가 정치를 이용했다면 과장된 해석일까.
그는 박정희 정권하에서 역임한 4년6개월간의 총리 시절에 대해서 거의 의미를 두지 않는다. 국무총리라는 게 대단한 자리가 아니라 대통령이 임명하면 아무나 되는 자리라고까지 폄하한다.
그런데 아무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던 김대중 정권하의 파워총리로서 재임한 1년 6개월의 기간에도 그가 뭔가를 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집권 여당의 대표를 한번에 사퇴시키고 장관 임명과정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지분을 요구하고 관철시키는 파워를 가졌지만, 국정 현안에 대해 어떤 중요한 발언을 하거나 결단을 내렸다는 얘기는 전혀 없다.
자신의 개인적 삶을 즐기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힘은 좋은데 일은 안하는 머슴’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왔을까. 그에게는 애초부터 특정한 자리가 주는 무게나 의미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직접적으로 그와 관련된 1차 집단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9선 국회의원의 신분으로 4·13 총선 후 거의 6개월 동안 골프만 치러 다니면서도 늘 당당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보통 사람들이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을 하는 것이나 JP가 골프를 치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라고 자민련 총재대행이 했다는 말과 “왜 유독 우리집 양반이 골프치는 것만 그렇게 비난하느냐. 박세리나 박지은이 골프치는 것은 국위선양이라고 하면서”라고 그의 부인이 했다는 말은 평소 김종필의 생각을 잘 대변해주는 듯하다. 구분이 없다는 건 확실히 무서운 일이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고약한 사람이로고’하는 김종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고약하다’는 건 김종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욕이란다. 그렇다면 내친김에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하고 끝을 맺자.
61년 10월에 김종필은 정보부장의 자격으로 대만의 건국기념일인 쌍십절 행사에 참석한다. 그때 장개석 총통이 35세의 이 혁명아(革命兒)에게 했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혁명을 해본 노인으로서 충고를 한마디 할까 합니다. 혁명을 한 사람은 대개 불행해집니다. 혁명을 한 사람은 하루에 한 번씩 자신을 혁명하지 않으면 안 되니 이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김종필은 다른 혁명동지들처럼 불행해지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가 애송하는 시구처럼 아직도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몇 마일의 길이 남아 있다’면 그 동안만이라도 장총통의 충고처럼 하루에 한 번씩은 자신을 혁명할 수 있어야 되는 게 아닐까. 칠십 중반의 노인에게 터무니없는 요구라고 느껴진다면 몇 마일의 길을 더 가지 않고 책을 보면서 쉬거나 편안하게 잠을 청하면 될 일이다.
앙드레김만 보면 웃는 이유
얼마 전 부산영화제에 관련된 TV 프로그램 중에서 재미있는 장면을 보았다. 리포터가 부산영화제 현장에서 만난 스타들의 축하메시지를 보여주었는데, 영화배우 강수연·진희경·문성근 등의 축하메시지가 나오고 있었다. 그들 다음에 앙드레김이 화면 가득 나타났다.
그의 얼굴이 나타나자마자 스튜디오에 앉아 있던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가 아무런 멘트도 하지 않은 상태였고 특별히 전과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랬다. 그 장면이 필자에겐 인상깊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왜 앙드레김을 보는 순간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렇게 웃음을 터뜨리는 걸까.
이 대목에서 필자는 작년 8월의 옷로비 청문회를 떠올렸다. 앙드레김이 “이 땅을 떠나고 싶을 만큼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는 사건이었음에도 청문회장에 나온 그를 묘사한 대부분의 신문기사들은 지나치게 감각적이었다. 그가 어떤 옷을 입고 나왔는지, 어떻게 화장을 했고, 어떤 식으로 말을 했으며, 어떻게 웃었는지를 상세하게 전해주었다. 그게 대중들의 주된 관심사일 거라는 나름의 계산된 편집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일반인들이 그 사건을 보는 시각도 그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필자는 앙드레김에 대한 관련 자료들을 보면서 그가 섬뜩할 만큼 치열한 장인정신으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고집하고 있는 예술가 중의 하나라고 믿게 되었다. 그는 또 실생활에서 믿기지 않을 만큼 진지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웃음을 터뜨리거나 실없이 희화화(戱畵化)하는 일에 대단한 흥미를 보인다.
이런 현상은 단지 그의 독특한 스타일이나 말투만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인간 앙드레김의 내면세계를 정교하게 살펴보는 작업이 선행된 다음에야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비단 그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겠지만 어떤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할 수 있다. 패션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앙드레김의 패션철학이나 작품세계가 주된 관심사겠고, 야망을 불태우는 젊은 친구들은 그의 성공 스토리에 촉각을 곤두세울 것이며, 여성잡지를 뒤적거리는 어떤 여성은 그가 유명 연예인들과 맺고 있는 폭넓은 교우관계나 그가 말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에 더 마음이 끌릴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앙드레김의 독특한 성향이 그의 치열한 직업의식이나 뛰어난 예술적 감각과 어떤 식으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 문제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우리들에게 일이란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동감있게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앙드레김이기 때문이다.
국민디자이너, 패션대사(大使), 남성디자이너 1호, 올림픽디자이너 등등 앙드레김에겐 별칭이 많다. 그의 작품이 가진 대중성이나 개인적 선호도를 별개로 한다면, 우리나라 패션 분야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은 브랜드는 ‘앙드레김’이라는 자연인의 이름일 것이다.
82년 전 세계 패션을 주도하는 패션강국 이탈리아 대통령은 앙드레김에게 문화공로 훈장을 수여했다. 97년엔 패션디자이너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 문화훈장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지난 88년 서울올림픽에서의 기념패션쇼 이후 이번 시드니올림픽까지 연거푸 4차례나 올림픽무대에 서왔는데,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등 각국마다 내로라하는 유명 디자이너가 많지만 올림픽 행사에 초청받기는 그가 유일하단다. 올림픽디자이너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경력이다. 샌프란시스코시는 99년 11월 6일을 ‘앙드레김의 날’로 선포했다. 해외에서 패션외교사절이라고 할 만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그의 위상을 보여주는 놀랄 만한 사건이다.
오해와 편견들
그럼에도 국내에선 작품활동 이외의 터무니없는 루머와 오해로 마음에 상처를 받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게 앙드레김의 고백이다.
“남자가 만든 옷이라고 입지 않으면 어떡하니?”
여자 옷을 만들겠다고 나선 아들이 걱정스러워 그의 부친이 했다는 말이다. 그게 4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 일부의 남자들은 그런 편견의 잔재를 드러낸다. 때로는 자신의 옷을 ‘작품’이라고 표현하는 그의 태도에 코웃음을 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국민디자이너’라고까지 하는 그의 명성에 비추어 지나치게 대중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그에 대한 앙드레김의 패션철학은 확고하다. 그는 자신의 옷을 상품으로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말한다. 오페라나 발레, 연극과 같은 예술 장르에서 감동을 느끼듯 패션 의상도 충분히 감동을 자아내는 창작예술이라는 것이다. 패션으로 새로운 예술적 장르를 개척해왔다고 자부하는 사람의 말답다. 실제 그의 옷은 거리에서 볼 수는 없지만 유명스타들에게 입혀져 많은 사람에게 보여진다. 꼭 자신이 입을 수 있어야 ‘그게 바로 옷’이란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겐 갑갑한 말일 수도 있다. ‘의상에는 꿈과 환상이 있어야 한다’는 앙드레김의 지론과는 사이클이 맞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오해나 편견의 대부분은 이러한 직업적 특수성(?)보다는 그의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이나 성향에서 시작된다. 간단하게 한번 살펴보자.
60대 중반이 넘은 앙드레김은 아직도 미혼이다. 젖먹이 때 입양한 아들을 직접 기저귀를 갈아가며 키웠고, 요즘에도 아침마다 대학생 아들이 입고 나갈 옷을 3세트씩 침대 위에 놓아주는 지극한 모성성을 발휘한다. 아들을 향한 그의 애정 혹은 집착은 유명하다. 그런 면에서 앙드레김은 인간의 감각적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인터뷰 사진을 위해 시작했다는 그의 화장술도 구설수에 오른다. 정성껏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짙은 마스카라와 그리 진하지 않은 립스틱을 섬세하게 바르는 그의 메이컵은 여장(女裝)이라는 평가까지 받는다.
그는 날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국내외 14개 신문을 정독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해외 패션쇼가 없는 경우 그는 대부분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7시까지 그의 의상실에서 작품구상과 제작에 매달린다. 자신의 직업에 지나치리만큼 엄격한 사람이라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 스케줄엔 변동이 없다. 저녁에는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87개 나라 대사관에서의 중요기념일 리셉션에 참가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바쁘다. 또 국내에서 열리는 음악회 무용 연극 콘서트 등을 즐겨 관람하며, 그 나머지 시간에는 주로 TV를 본다.
그는 안하는 게 많다. 술과 담배, 커피는 물론이고 골프도 치지 않고 헬스클럽도 다니지 않는다. 포커나 고스톱을 해본 적도 없고 노래방을 가본 적도 없다. 또래의 친구도 없다. 5남매 중 넷째지만 부모형제가 모두 세상을 떠나서 명절 때는 꼼짝없이 아들과 둘이서만 지내야 한다. 그에게는 문화적 풍성함과 일상적 가난함이 공존한다.
흰색이나 청결에 대한 그의 집착은 거의 결벽증 수준이다. 손님이 앉을 자리에는 미리 향수를 뿌리고 대화 중에는 10분마다 한번씩 크리넥스로 입가를 닦는다. 스탠드나 필통 같은 물건들이 놓여 있던 자리에서 10cm 이상 어긋나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또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알려진 흰색 옷을 그는 하루에 세 번씩 갈아입는다. 만나는 사람은 많은데 집중해 일하다 보면 땀이 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25년 전부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흰색 옷만 입는다. 얼핏 보기엔 늘 똑같은 옷처럼 보이는데 디자인이나 소재가 조금씩 다르다는 게 그의 말이다. 이런 옷이 한 30벌쯤 된단다. 맨날 똑같은 양복만 입고 다니는 부호의 옷장에 거의 구별이 안 가는 양복들이 100벌쯤 있다는 에피소드를 연상케 한다. 그런 성향은 그의 작품활동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그는 일부 사람들로부터 언제나 똑같은 옷만 만든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의 대답을 들어보자.
“제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담기 때문에 제가 만드는 작품 역시 언제나 통일된 느낌을 주겠죠. 하지만 늘 똑같은 옷만 만들면 누가 제 옷을 사러 오겠습니까?”
디테일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실제로 그는 디테일을 대단히 중시하는 사람이다. 그의 작품마다 빠지지 않고 들어가 있는 꼼꼼한 자수 문장(刺繡紋章)은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낸다. 디테일하게 수를 놓아 옷감을 디자인하는 게 큰 즐거움이라는 그의 말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다. 디테일 중시, 완벽주의, 반듯함, 결벽증, 도덕주의자는 정신의학적으로 보면 하나의 뿌리에서 나타난 여러 잎새들이다. 앙드레김도 예외가 아니다.
그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목숨을 건다고 할 만큼 치열하고 엄숙하다. 진검 승부의 연속이다.
그는 해마다 2∼3회씩 외국에서 패션쇼를 갖는다. 한번 패션쇼를 할 때 필요한 옷이 150∼175벌이란다. 그렇다면 일 년에 최소한 300벌 이상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리적인 제작시간을 전혀 감안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거의 하루에 한 개씩의 작품 구상과 아이디어 스케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퇴근 후 사람들과 어울려 호프집에도 가고 노래방에도 가는 따위의 평범한 생활은 해볼 짬이 없다. 일 년에 절반 정도의 저녁시간을 각국 대사관 리셉션 참가로 보낼 수밖에 없다는 그의 라이프 스타일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정식 디너파티에는 가지 않는다. 저녁 시간을 몽땅 빼앗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신 언제건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나올 수 있는 스탠딩파티에만 참석한단다. 점심식사도 대부분 의상실 근처에서 간단하게 해치우며 그것도 30분을 넘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룹전을 하면서 서로의 패션쇼를 축하해주는 디자이너 세계의 최소한도의 예의조차 무시해버린다. ‘예술은 고독 속에서 탄생된다’는 글을 읽고 마치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낯간지러운 고백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건 38년의 생활이 실제로 그렇게 일을 중심으로 치열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열리는 패션쇼를 준비할 때면 그는 이미 7∼8개월 전에 사전답사를 다녀올 만큼 패션쇼에 애정을 가진다. 실제로 그가 생각하는 패션쇼란 단순히 디자이너가 만든 옷을 선보이는 1차원적인 개념을 넘어선다. 그는 패션쇼란 오페라나 클래식 콘서트처럼 웅장하고 감동적이어야 하며, 의상과 음악과 미술이 한데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패션쇼를 기승전결로 1시간 30분 동안 펼쳐지는 ‘패션오페라’라는 특별한 용어로 붙인다. 온 가족이 관람하는 예술공연이라는 생각으로 기획을 한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아직 한번도 그의 패션쇼를 정식으로 감상하지 못했다. 아마 많은 사람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옷을 입어본 사람이 극소수임에도 그가 국민디자이너로까지 불리는 것처럼 앙드레김의 패션쇼는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의 새로운 장르로 인식되고 있다. 백남준이 ‘비디오아트’라는 예술장르를 처음 만든 것처럼 앙드레김은 ‘패션오페라’라는 예술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있는 것이다.
96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스핑크스를 배경으로 펼쳐진 그의 패션쇼는 패션이 독창적 예술이자 문화상품이며 중요한 외교수단임을 입증한 무대라는 평가를 받았다. 일곱 벌의 옷을 겹쳐 입은 모델이 한꺼풀씩 벗을 때마다 한국 전통색의 의상이 하나씩 드러나는 1인무(一人舞)는 전해만 들어도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무공해 감정’ 가진 앙드레김
작년 8월 한 일간지에 앙드레김이 패션디자이너가 아니라 무대의상 디자이너라는 내용의 컬럼이 실렸다. 연예인과 일부 사모님을 위해 파티옷, 결혼식 옷과 같은 조명발 받는 옷을 만드는 앙드레김 같은 사람은 무대의상 디자이너라고 불러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앙드레김은 이 컬럼에 대해 저질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격렬한 감정을 드러낸다.
앙드레김 인터뷰 기사 중 필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탁월하게 평가하는 것은 작년 9월 ‘신동아’의 김현미 기자가 쓴 ‘앙드레김과의 5시간 격정 인터뷰’란 기사였다. 이 기사에는 앙드레김의 독특한 감정적 프로필을 잘 보여줄 수 있는 흔치 않은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앞서 말한 무대의상 디자이너와 관련된 대목에서다. 김기자의 글을 그대로 옮겨보자.
“‘스타들이 제 옷을 입고 무대에 서는 것이 잘못됐나요?’ 대답 도중 갑자기 감정이 격해지는 듯 목소리가 떨리더니 벌떡 일어나면서 ‘도저히 인터뷰를 할 수 없다’고 소리를 질렀다. ‘37년 동안 디자이너로 살아왔는데 또다시 이런 대답을 해야 한다니 지겹다’고까지 했다. 지나치리만큼 예의바르고 손짓 하나하나까지 조심하던 태도와는 180도 달랐다. 검은 마스카라로 강조한 눈은 이글이글 분노로 불타고 있었고 ‘지겨워 지겨워’를 외치며 자신의 의상실 안을 서성이는 그는 흡사 성난 황소처럼 보였다. 10여분 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서성거리더니 자리로 돌아와서 휴지 한 장을 꺼내더니 번져버린 립스틱을 신경질적으로 닦았다. 화장을 지운 그의 맨 입술선은 매우 뚜렷했고 입매는 단호했다.”
그는 늘 자신의 오늘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기자들의 역할이 컸다며 평소 기자를 존경한다고 얘기해온 사람이었다. 사적인 관계가 아닌 유력 언론사 기자와의 인터뷰 장소에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모습을 보인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앙드레김은 처음 만나는 사람이 오히려 불편하게 느낄 정도로 깍듯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다. 그런데 겉으로 보이는 객관적이고도 완벽한 통제 속에서 그의 속감정은 기복이 매우 심하고 불안정한 것이었으며, 기회만 있으면 튀어오르려는 움츠린 용수철과 같았던 것이다. 그러한 성향은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동전의 양면이다.
자신의 꾸중에 눈물만 흘리는 아들의 모습이 가슴 아파서 며칠씩 디자인 작업을 전폐할 만큼 여리고 감정적인 사람이 앙드레김이다. 옷로비 청문회의 이름 시비와 관련하여 ‘선비는 호(號)로 작가는 필명으로 부르는 것이 예의이듯 패션디자이너 앙드레김은 앙드레김으로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쓴 어떤 기자의 글을 읽다가 눈물이 핑 돌 만큼 뭉클했다고 고백한다.
앙드레김이 말할 때 보면 묘한 특성이 있다. 한 단어 앞에 그 단어를 수식하는 형용사가 여러 개 따라 붙는다는 것이다. “엘레간트하고 노블하며 인털렉추얼한….” 그렇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그가 쓰는 단어의 갯수는 그다지 많은 것 같지 않다. 아름다움, 우아, 고독, 환상, 꿈, 희망, 꽃, 눈, 무지개, 사랑, 평화, 그리움, 애잔함 등 사춘기 소녀의 일기장에나 나옴직한 단어들이다.
60대 중반의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 단어들을, 그것도 매우 진지하게 구사하니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코믹할 수도 있고 멋쩍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때론 예술가라는 그의 타이틀을 감안해도 유치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천진무구한 감정의 소유자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무공해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앙드레김은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을 에둘러 말하지 않고 무공해 상태로 쏟아낸다. 작고한 시인 천상병과 닮은 대목이다. 앙드레김이 TV 프로그램 중 원시부족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가장 좋아한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받아들일 수 있겠다.
섹시함을 터부시
그의 감정이 사춘기 소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성적매력을 무의식적으로 억압하는 심리구조가 그 원인이 아닐까 싶다. 그는 섹시함을 터부시하는 흔치 않은 디자이너다. 앙드레김은 아직 한번도 미니스커트를 만들지 않았단다. 지나치게 선정적인 의상은 한순간 남자들에게 섹스어필할 수는 있겠지만 교양미가 없어 보여 영원한 매력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대학생인 아들에게 여자친구가 생긴 것 같자 “들뜨거나 허영스러워 보이지 않는” 여자를 사귄다면 얼마든지 좋으며, 다만 “섹시함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디자이너가 아니라 마치 수사(修士)를 지망하는 청교도같다.
섹시함이란 인간의 감성 중에 가장 진화된 형태, 즉 세련된 형태의 감성이며 성에너지는 인간 창의력의 근원이라는 게 정신의학적 견해다. 인간의 창의력을 극대화시킬 수도 있는 성적 상상력을 억압하는 앙드레김이 필자는 못내 아쉽다.
앙드레김은 ‘성공시대’라는 TV 프로그램의 출연을 두 번씩이나 거절했다. ‘사람들이 인식하는 성공의 잣대’라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아직 자신의 빌딩조차 없는데 성공했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가 자주 밝히는 그의 재산은 의상실이 세든 건물의 전세금, 자신의 아파트, 연구소 설립을 위해 마련해 둔 교외의 작은 땅이 전부란다. 국위선양을 위해 해외 패션쇼에 쏟아부은 에너지나 비용을 아껴서 국내에서 의상실을 여러 개 내고 고객수를 늘리는 데 몰두했다면 엄청난 돈을 벌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나 업적에 대해서 좀더 프라이드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그게 그를 아끼고 지지하는 팬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그의 팬클럽을 자처하는 젊은 친구들의 홈페이지를 방문한 적이 있다. 앙드레김의 사인도 받고 잠깐이었지만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었다는 친구, 어렵게 얻은 그의 작품집을 보면서 잠을 설쳤다는 흥분된 목소리, 가정사정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앙드레김을 생각하면서 꿈을 키우고 있다는 스무 살의 청년, 언젠가 의상실을 찾아가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 쉬지 않고 아이디어 스케치를 하고 있다는 지방의 어느 여고생…. 이런 젊은 친구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의무가 있지 않겠는가.
드디어 적당한 사업파트너를 찾았는지 내년부터는 앙드레김 상표를 써서 청소년을 위한 캐주얼 의류와 홈패션 그리고 골프의류도 준비 중에 있으며, ‘앙드레김’ 향수를 비롯한 화장품도 나올 예정이란다. 이제 자신의 스튜디오가 있는 자그마한 빌딩을 갖고 싶다는 그의 꿈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20대에 가졌던 패션에 대한 열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80세가 넘어서도 계속 디자인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단다. 내년에는 필자도 설레는 마음으로 ‘앙드레김’ 향수를 뿌릴 수 있기를 바란다.
밥 위에 카레를 부어 먹을 때 카레를 부은 부분이 5, 흰밥이 보이는 부분이 3일 때 카레라이스의 맛이 가장 좋게 느껴진다고 한다. 미술에서도 5 대 3의 비율을 황금비라고 한다. 사람은 이 구도에서 가장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일과 삶에서도 이 원칙은 그대로 적용된다. 다만 무엇이 5가 되고 무엇이 3이 되어야 황금비인가에 관한 선택권은 전적으로 당사자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