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타 검사는 클린턴 깎아내리려는 정치적 음모의 집행자
- 화이트워터 사건, 스캔들 부각시키기 위한 명분일 뿐
- 클린턴 ‘고백’에 목 비틀어 죽이고 싶었다
- 대국민 사과성명 직후 빈 라데의 아프간 훈련캠프에 미사일 발사
- 섹스관련 단어 581회 등장… 천박한 ‘스타 보고서’읽지도 않았다
- 부시 당선은 사법권력이 유권자 권리행사 방해한 결과물
회고록에서 그녀는 남편 클린턴이 뒤늦게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 고백할 때 “그의 목을 비틀어 죽이고 싶었다”고 썼다. 하지만 그녀는 1994년 ‘화이트워터’ 비리수사 특별검사로 임명된 후로 남편 클린턴을 집요하게 괴롭혔던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에 대한 분노가 클린턴과의 이혼을 막아주었다고 밝혔다. 남편이 한 일은 도덕적으로 나쁘지만, 케네스 스타 검사가 권력을 남용해 남편을 압박하면 할수록 남편을 동정하게 됐다는 것.
모두 합해 562쪽, 본문만 528쪽, 총 38장으로 구성된 회고록은 “나는 퍼스트 레이디나 상원의원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1970년대초 예일대 법대에서 처음 만나 30년 이상 이어온 클린턴과의 애증 관계를 그녀 나름의 정치적인 잣대로 섬세하게 그려간다. 아울러 자신의 실수(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어떻게든 인정하지 않고 곤경을 피해보려 했던 상황에서 클린턴이 보였던 인간적인 한계와 고민도 그녀의 글에 잘 묘사돼 있다.
이 책은 힐러리가 책 속에서 고백했듯 ‘전투적’인 측면이 강하다. 그 대상은 남편 클린턴의 정적들이다. 책을 읽다보면 남편 클린턴이 낙관론자인데 비해 아내 힐러리는 여전사처럼 비쳐진다.
그녀는 정적들이 ‘광범한 우익 음모’로 남편과 자신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다고 주장한다. 힐러리의 시각에선, 스타 검사는 미 공화당 우파들이 클린턴을 깎아내리려고 꾸민 음모의 집행자에 지나지 않는다.
친(親)부시 정치평론가들은 힐러리의 회고록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부시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였고 부시의 일방주의 대외정책을 찬양하는 책 ‘올바른 남자(Right Man)’를 써낸 데이빗 프럼은 힐러리를 가리켜 ‘새로운 악의 축’이라 규정했다. 힐러리의 2008년 대선 출마를 겨냥한 포석이란 견해도 나온다. 어쨌든 1990년대 미국 정치판에서 민주·공화 양대 세력이 벌여온 치열한 권력쟁투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힐러리의 회고록. 도대체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다음은 ‘살아 있는 역사’를 발췌, 요약한 것이다.
PART 1. 공화당 극우파의 음모, 화이트워터 사건
1993년 10월31일 ‘워싱턴 포스트’ 일요일판의 한 기사를 읽은 후 소름이 돋는 듯한 두려움을 느꼈다. 1970년대 말 남편 클린턴과 내가 아칸소주에서 투자했다가 손실을 입었던 화이트워터(Whitewater) 부동산 개발회사가 다시 우리를 괴롭힐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익명의 ‘정부 소식통’을 인용한 기사의 내용은 부정 금융거래를 조사하는 연방정부기구인 ‘RTC’가 ‘메디슨담보저축대부’ 회사의 범법 행위를 조사하도록 권고했다는 것이었다. 메디슨의 경영자 짐 맥두걸과 그의 부인 수전은 화이트워터의 동업자였다. 하지만 맥두걸이 화이트워터 사업에 투자했던 것은 메디슨을 인수하기 4년 전의 일이었다. 따라서 화이트워터와 메디슨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맥두걸과 동업했었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 부부는 불행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1978년 클린턴이 32세 최연소의 나이로 아칸소 주지사가 된 후 친구이자 정치적 후원자인 짐 맥두걸과 함께 화이트워터 부동산 개발회사에 공동투자를 했으나 2만5000달러 손해를 보고 물러났다.-역자)
1992년 대선 과정에서도 일부 언론에서 혐의를 제기했다. 혐의의 요점은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로 있을 때 맥두걸이 주(州)정부로부터 특혜를 받지 않았느냐’는 것. 하지만 우리가 화이트워터에 투자했다가 금전적 손실을 입었다는 사실을 증명했고, 클린턴이 주지사로 있을 때 주정부가 맥두걸의 메디슨 회사를 퇴출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우리에게 쏠렸던 혐의는 사라졌다.
그런데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RTC 조사관들이 맥두걸이 메디슨 회사를 창구 삼아 1986년 주지사 재선 캠페인을 비롯한 클린턴의 아칸소주 정치 캠페인에 불법적인 자금을 댔는지 여부를 파헤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캐낼 게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부부는 메디슨 회사에 저금을 하거나 대출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클린턴은 아칸소 주법(州法)에 매 선거에서 1인당 정치자금의 한도를 1500달러 이하로 제한하는 규정을 넣자는 캠페인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맥두걸은 클린턴이 대통령선거에 나서기 전 이미 메디슨 경영과 관련된 혐의로 기소됐고 재판을 거쳐 연방정부의 사면을 받은 상태였다.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와의 악연
클린턴과 나는 이 사건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화이트워터 사건이 급작스럽게 터진 데는 정치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의 정적(政敵)들이 이를 오랜 기간 질질 끌어가며 이용해먹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케네스 스타를 우두머리로 한 특별검사팀(Office of Independent Counsel, 약칭 OIC)은 ‘화이트워터’와 관련해 우리 부부를 끊임없이 조사했다. 조사하는 데 7000만달러의 예산을 사용했지만 우리에게서 어떤 범죄도 찾아내지 못했다.
조사 과정에서 클린턴과 나는 OIC 조사관들에게 적극 협력했다. 하지만 그들은 매번 새로운(그러나 전혀 근거가 없는) 혐의를 언론에 흘리곤 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민주당과 극우성향이 짙은 공화당의 대립 전선으로 내몰리고 있음을 느꼈다. 아울러 우리의 적군(공화당)은 풍부한 자금과 우익언론 및 우익조직이라는 다양한 정치투쟁도구들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해 우익 언론들은 우리 부부에 대한 말도 안 되는 거짓 이야기들을 국민에게 들려줬다. 만약 1994년에 전파를 타고 나간 이야기들이 사실이라면, 미국 대통령은 ‘공산주의자’이고 퍼스트 레이디는 ‘살인자’가 됐어야 했다(1993년 6월 힐러리의 동료 변호사 빈스 포스터가 의문의 자살을 했다. 그는 화이트워터 관련서류를 보관하고 있었다. 공화당 일각에선 화이트워터 사건에 관련된 클린턴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힐러리가 그를 죽이고 서류를 파기했다는 주장을 폈다.-역자).
1994년 1월20일 클린턴 정부 출범 1년을 맞는 기념일에 자넷 르노 법무장관은 로버트 피스크를 특별검사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피스크는 공화당 지지자였지만 검사로 일할 때는 철저하고 공평무사한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특별검사 임명 당시 뉴욕 월가의 한 법률회사에 근무중이던 그는 “화이트워터 사건에 대해 중립적으로 신속하게 수사를 마무리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특별검사 일에 전념하기 위해 다니던 법률회사를 그만뒀다. 만약 그가 계속 특별검사로 있었다면 화이트워터 사건으로 우리 부부가 받았던 공연한 오해가 풀리고 이에 공화당의 정치적 공세도 명분을 잃어 제풀에 가라앉았을 것이다.
조사를 벌인 후 피스크 특별검사는 화이트워터 사건에 대한 예비보고서를 발표했다.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클린턴 행정부 내의 어느 누구도 RTC의 조사에 압력을 가한 적이 없고, 둘째 빈스 포스터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미 연방수사국(FBI)의 발표에 이견이 없다는 것. 포스터의 죽음을 둘러싸고 온갖 억측을 부채질해오던 공화당 우파들에게는 실망스런 일이었지만 피스크 특별검사는 화이트워터 사건과 관련해 아무도 기소하지 않았다.
하지만 1994년 8월 피스크가 물러나고 케네스 스타가 새 특별검사로 임명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개정된 법에 따라 특별검사는 연방대심원이 추천하는 연방판사들로 구성된 3인 패널의 특별부가 임명하도록 돼 있다. 그런데 3인 패널의 구성원이 한마디로 극보수 공화당 지지자들이었다. 이들은 피스크를 갈아치우고 그 자리에 스타를 내세웠다. 임명 당시 48세였던 스타는 담배회사들을 위해 변론을 하면서 큰 수익을 올려온 커를랜드&엘리스 법률회사에 근무중이었고 골수 공화당 지지자였다.
1993년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의 취임식 모습. 힐러리는 퍼스트 레이디가 된 후 남편을 둘러싼 온갖 스캔들에 시달려야 했다.
PART 2. 클린턴, 르윈스키 그리고 분노
1998년 1월21일 클린턴은 아침 일찍 나를 깨웠다.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더니 “오늘 신문기사를 읽기 전에 당신이 알아둬야 할 게 있어”라고 말했다. ‘클린턴이 전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 정사를 나눴다’ ‘클린턴에게 르윈스키가 폴라 존스의 변호사에게 위증할 것을 요구했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각 신문에 실렸다는 것(케네스 스타 특별검사는 1998년 1월 자넷 르노 법무장관으로부터 존스 소송에서 클린턴이 위증을 했는지 여부를 조사할 권한을 부여받았다.-역자).
클린턴은 모니카 르윈스키가 2년 전 공무원들이 파업중일 때 백악관 서관에서 일한 인턴사원이었고 자신이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해줬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르윈스키와 몇 차례 얘기를 나눴는데, 그녀가 자신에게 일자리를 구하는 문제로 도움을 청했다고 했다. 자신은 르윈스키와 어떤 부적절한 행위도 저지르지 않았으며 다만 자신의 친절을 그녀가 잘못 해석한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클린턴은 나뿐 아니라 참모들, 친구들에게도 “어떤 부적절한 일도 하지 않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는 지난날 여러 차례 있었던 섹스 스캔들이 전혀 근거가 없었던 것처럼 이번 르윈스키 건도 비슷한 음모일 것이라고 믿었다. 지난 6년 동안 폴라 존스 소송 건과 관련해 스타 특별검사팀이 만들어낸 근거 없는 주장들을 참고 견뎌왔던 터였다.
당시 나는 르윈스키 스캔들 역시 정치적 반대자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악랄한 스캔들로 여겼을 뿐이었다. 클린턴은 공직에 나선 이래 ‘마약을 복용했다’ ‘창녀 사이에 애를 두었다’ 등 온갖 종류의 스캔들에 시달려왔다. 나 역시 도둑이니 살인자니 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르윈스키 건도 그저 타블로이드 신문들에 자그맣게 다뤄지는 정도로 그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폴라 존스 진영과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팀 쪽에서는 “클린턴이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선서했지만 그의 르윈스키 관련 증언이 다른 참고인들의 증언과 다르다”는 이야기를 계속 언론에 흘렸다. 나는 이 모든 상황을 오로지 클린턴을 위증죄로 옭아매 대통령직에서 사퇴시키거나 탄핵을 이끌어내려는 함정으로 여겼다.
외롭고 힘든 체험
스캔들이 터진 당일에도 클린턴과 나는 예전과 똑같이 일상적인 업무에 매달렸다. 그런 우리를 보고 클린턴의 백악관 측근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문을 닫은 채 속삭였고 휴대폰에 대고 무언가를 이야기하면서 걸어다니곤 했다. 백악관의 모든 사람들은 내가 이번 스캔들과 관련해 어떤 조치를 취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캔들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려면 좀더 많은 시간과 준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나는 스캔들이 터진 그 날 오후 볼티모어에 있는 고우처 대학에서 ‘시민의 권리’를 주제로 연설을 해야 했다.
기차를 타고 볼티모어로 가던 중 클린턴의 개인 변호사인 데이빗 켄달의 전화를 받았다. 데이빗은 남편을 제외하고 내가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다. 그는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가 조만간 르윈스키 스캔들과 연관된 모든 사람들을 소환하려고 한다고 알려줬다. 아울러 그는 1998년 1월16일 르노 법무장관이 특별검사 감독배심원 모임에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가 르윈스키 건 수사권한을 더 많이 갖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도 확인해줬다. 스타 특별검사가 확인도 되지 않은 다수의 거짓 정보를 르노 장관에게 건넸기 때문에 르노가 그런 요청을 하게 된 것이다. 남편 클린턴은 방심하다가 허를 찔린 셈이었다. 이런 공평치 못한 일들은 나로 하여금 남편의 편에서 세간의 비방에 보다 단호하게 맞서도록 만들었다.
당시 사람들이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 지 궁금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클린턴에 대한 섹스 스캔들 혐의를 그녀(힐러리)가 믿지 않더라도 그런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참담할 텐데….” 글쎄, 사실은 그랬다. 엘러너 루스벨트(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부인) 여사는 “정치가의 부인들은 코뿔소 가죽처럼 단단한 피부를 지녀야 한다”고 말했다. 잇달아 이런저런 위기를 맞으면서 나는 루스벨트 여사의 말을 하나의 주문처럼 떠올리곤 했다. 아침마다 ‘내게 아무리 부도덕하고 비열한 음해를 가해와도 흔들리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나로서는 외롭고 힘든 체험이었다.
클린턴은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주장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NPR 라디오 방송과 PBS TV 인터뷰에서도 같은 말을 반복했다. 우리의 오랜 친구이자 TV 프로듀서 출신인 해리 토머슨이 우리를 돕겠다고 했다. 그는 클린턴의 발언이 지나치게 법률적인 틀 속에 있다고 지적하면서 “대통령이 자신에게 쏠린 혐의에 대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충고했다. 클린턴은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1998년 1월26일 어린이 기금 모음을 위한 기자회견에서 앨 고어 부통령과 리처드 라일리 교육부장관, 그리고 내가 옆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클린턴은 강한 어조로 르윈스키와의 성관계 혐의를 부인했다. 그때 나는 그가 분노를 나타내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광란의 한복판에서
다음날 나는 NBC TV 아침 프로그램인 ‘투데이 쇼(Today Show)’에 출연했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었지만 출연을 취소할 경우 엄청난 억측들이 쏟아질 게 분명했다. 그런 까닭에 대통령과 나의 보좌역들도 내가 출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뉴욕 록펠러센터 안에 있는 NBC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아침 7시 뉴스가 끝나자마자 나의 인터뷰가 생방송으로 진행됐다. 투데이 쇼 진행자인 매트 로어가 바로 직설적인 질문을 던졌다.
“미국 국민들은 그동안 한 가지 의문을 품어왔습니다. 당신의 남편 클린턴과 모니카 르윈스키는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클린턴은 당신에게 그들 사이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까?”
“그 부분에 대해 우리는 상당히 길게 이야기를 나눴어요. 우리는 점점 거세지는 광란의 한복판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소문을 만들어 주고받으며 빈정거리기도 하죠. 여러 해 동안 정치에 관계하면서, 특히 내 남편이 대통령이 되면서 배운 게 하나 있어요. 그저 잠자코 심호흡을 하면서 참는 게 가장 현명한 대처방안이라는 거죠. 그러다 보면 진실은 밝혀지니까요.”
로어는 CNN 출신의 정치평론가 제임스 카바일이 당시 상황을 ‘클린턴 대통령과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의 전쟁’으로 묘사한 것을 상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당신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것은 마지막 큰 전투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어느 한 쪽이 질 것이다’라고 말했다는데요.”
“글쎄, 영화에나 나오는 얘기처럼 들리지만 지금 상황은 전투나 다름없다고 봐요. 이는 누가 봐도 거대한 우익의 음모예요. 내 남편 클린턴이 대통령에 오른 날부터 지금껏 그들은 터무니없이 남편을 비방해왔어요. 몇몇 저널리스트들이 그런 우익의 음모를 들춰내고 비판했죠. 하지만 그런 음모가 아직 국민들에게 낱낱이 폭로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 나는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의 업무 성격을 대수롭잖게 여기고 방관했었다. 또 그 시점에서는 클린턴에 대한 비난이 사실인지 아닌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1998년 2월5일 우리 부부는 워싱턴을 방문한 토니 블레어 영국 수상을 위해 만찬 모임을 열었다. 두 나라의 특별한 유대관계를 고려해 나는 모든 일정을 블레어 부부에게 맞췄다. 만찬이 끝난 후 우리들은 엘튼 존과 스티비 원더의 합동 공연을 즐겼다. 그 공연은 매우 대단한 ‘영미 음악동맹’이었다.
당시 미 하원의장이자 공화당 지도자인 뉴트 깅리치가 백악관 만찬에서 내 왼쪽 자리에 앉았다. 나는 클린턴을 향한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의 비난에 대해 깅리치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싶었다. 그 무렵 많은 정치평론가들은 ‘대통령 탄핵’을 입에 올렸다. 나는 공화당이 대통령 탄핵을 시도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깅리치는 공화당의 핵심인물이었다. 만약 그가 탄핵을 밀어붙이는 쪽으로 간다면 미국은 흔들거릴 게 뻔했다. 깅리치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이렇게 말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과 섹스 스캔들을 일으켰던 모니카 르윈스키(왼쪽)
물론 내가 그로부터 듣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런 거였지만, 정작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남편 클린턴과 변호사 데이빗 켄들에게 그의 말을 전하면서 “깅리치는 클린턴이 받고 있는 혐의들을 대단치 않은 것으로 믿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공화당의 클린턴 탄핵을 이끌면서 완전히 다른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몇 달 뒤 깅리치 자신의 불륜행위들이 드러났다. 나는 처음에 왜 깅리치가 르윈스키 건을 정치적으로 문제삼지 않으려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1998년 봄 무렵 국민들은 케네스 스타 검사의 조사에 흥미를 잃은 듯했다. 많은 사람들은 스타 특별검사팀이 제기하는 외설적이고 센세이셔널한 폭로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클린턴 대통령이 설사 개인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런 도덕적인 죄가 대통령직 업무수행능력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는 논리에 많은 미국인들이 동조했다.
1998년 8월6일 모니카 르윈스키는 이제 더 이상 ‘화이트워터’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화이트워터 대배심(White water Grand Jury)’ 앞에서 ‘섹스 스캔들’ 관련 증언을 했다. 스타 검사는 클린턴에게 소환장을 발부하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클린턴은 이에 응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클린턴의 법률자문팀은 소환에 응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폈다. 수사대상자(클린턴)가 대배심에서 증언할 경우, 어떤 발언을 하더라도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당신과 첼시를 지키려고 그랬어”
1998년 8월15일 클린턴은 7개월 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침 일찍 나를 깨웠다. 이번에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지 않고 침실 안에서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그는 내게 르윈스키와 아주 짧은 관계를 맺었다고 실토했다. 7개월 전에 털어놓지 않았던 이유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너무도 부끄러웠고, 내가 화를 내고 상처를 받을까 두려워서였다고 말했다.
나는 거의 숨을 쉴 수 없었다. 울음을 터뜨리면서 나는 그에게 고함을 질러댔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왜 내게 거짓말을 했어?”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더욱 화가 났다. 그는 단지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당신과 첼시(대통령의 딸)를 지키려고 그랬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 나는 클린턴이 단순히 젊은 여자에게 눈길을 던졌던 것뿐인데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고 믿었다. 말문이 막혔고 가슴이 찢어지듯 화가 났다.
나는 우리 부부가 첼시에게 사정을 털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클린턴에게 내 생각을 말하자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그 무렵은 우리 모두에게 참 힘든 나날들이었다. 당시 나로서는 클린턴과의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지, 또는 지속해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감정을 잘 조절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나에게 조언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카운슬러로 일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생애에서 가장 참담하고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순간이었다.
이틀 뒤인 1998년 8월17일 클린턴은 백악관에서 4시간에 걸쳐 스캔들 관련 증언을 했다. 증언이 끝난 후 그는 차분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나는 증언 자리에 가지도 않았고 그에게 말을 건넬 준비도 돼 있지 않았다. 클린턴의 증언은 녹취돼 대심원에서 비공개리에 회람됐다. 이에 클린턴은 ‘대법원 소환’이라는 불명예를 피할 수 있었다.
데이빗 켄들은 TV 방송사들에 대통령이 밤 10시에 짧은 성명을 발표할 것이라 통보했다. 그리고 대통령의 최측근들이 백악관에 모여 클린턴이 연설문을 작성하는 걸 도왔다. 첼시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알려는 듯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모임에 가지 않았다. 내 사생활의 존엄성을 침해한 일로 대국민 연설문을 만드는 데 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모임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자 누군가가 TV 볼륨을 황급히 줄였다. 내가 차마 르윈스키 관련 뉴스를 듣지 못할 것이란 점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클린턴은 연설문안을 어찌 해야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클린턴이 연설을 통해 밝히고자 했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미국을 잘못 이끈 점을 깊이 뉘우친다. 둘째 폴라 존스의 성학대 소송 건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셋째 르윈스키 건에 대해서는 큰 실수를 저질렀고 그에 대해 사죄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성적 추문이 정적들이나 외국의 적에게 약점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대통령과 나, 그리고 외교팀은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성명 몇 시간 후 오사마 빈 라덴의 아프간 훈련캠프를 향해 미사일을 발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케냐와 탄자니아주재 미대사관에 폭탄 테러공격을 저지른 빈 라덴과 그의 핵심참모들이 아프간의 모처에 숨어 있었다. 전세계가 야단법석을 떨며 TV를 지켜보는 상황에서 클린턴은 미국 대통령이 허약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연설시간이 다가오자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의견을 내놓았지만 결코 클린턴에게 도움이 되진 못했다. 그는 이 기회를 빌려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의 월권과 횡포를 지적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특별검사를 공격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냐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나는 그가 얼마나 스타 검사에게 화가 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침내 내가 끼여들었다.
“빌, 이건 당신의 연설이에요. 이런 혼란에 당신이 뛰어들었으니 무얼 말할 지도 당신만이 결정할 수 있어요.” 그리고는 첼시와 난 그곳을 떠났다.
결국 클린턴 혼자 남아 연설문을 작성했다. 대국민 연설 바로 뒤 클린턴은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가 스타 특별검사를 비판했기 때문에 그의 사과가 덜 진지하게 보였을지 모르겠다. 언론은 대체로 클린턴의 연설에 비판적이었지만 상당수 국민들은 대통령의 르윈스키 건은 개인의 사생활이며 대통령이 직무수행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와는 무관하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여론조사 결과 클린턴에 대한 지지율도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그와 나의 관계는 암초에 부딪친 것과 다름없었다.
당시 나는 워싱턴을 벗어나고 싶었다. 첼시는 마아 섬의 포도농장으로 가길 원했다. 그래서 클린턴과 나, 첼시는 다음날 오후에 그 섬으로 떠났다. 개 버디도 함께 데려갔다. 임시로 빌린 집에 짐을 풀고 자리를 잡자 위기감은 무디어졌고, 나는 깊은 슬픔과 실망 그리고 풀리지 않는 분노에 빠져들었다. 나는 남편에게 거의 말을 건네지 않았지만 일단 말을 하면 마구 쏘아붙였다. 나는 책을 읽거나 해변을 거닐었다. 밤에 남편은 아래층에서, 나는 위층에서 잤다. 밤보다는 차라리 낮 시간이 지내기가 편했다.
나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외로웠고,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되풀이해서 사과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용서는커녕 그와 같은 침대를 쓸 마음의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워싱턴에 돌아오자마자 클린턴은 오사마 빈 라덴의 아프간 훈련캠프를 겨냥했던 미사일이 불과 몇 시간 차이로 빈 라덴을 놓쳤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사실을 발표하자 클린턴은 빈 라덴을 놓친 것에 대한 비판보다 스캔들에서 벗어나고자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고 한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런 비난을 했던 사람들은 테러리즘, 빈 라덴, 그리고 알 카에다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했다.
아무튼 남편과 나는 침묵으로 둘러싸인 백악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 답답한 상황은 우리에게 견딜 수 없는 시련이었지만 탈출하기도 쉽지 않았다. 우리가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이자 취재진들은 다시 접근해왔다. 전 CBS 앵커맨 월터 크롱카이트와 그의 부인 베치는 우리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는 “좋은 결혼도 때때로 고난을 겪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아무도 완벽하지 않아요. 낚시나 하러 갑시다”고 제안했고 우리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탁 트인 바다에 가니 마음이 어느 정도 상쾌해졌다.
탄핵위기 때 결혼생활 지속키로 결심
1998년 8월말까지 우리 부부관계는 평화롭진 못했어도 일종의 긴장완화(detente) 상태였다. 비록 남편에게 실망했지만 오랫동안 혼자 지내면서 내가 남편을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지, 혹은 지속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워싱턴에 돌아온 후 우리는 정적들과 끝없는 대결을 해야 했다. 남편과 나의 결혼생활 문제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지만, 대통령 클린턴을 위해서는 싸울 각오가 돼 있었다.
내 개인적 감정과 정치적 신념이 서로 맞부딪쳤다. 아내로서 나는 남편 클린턴의 목을 비틀어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었고, 다른 모든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껏 내가 지지해온 방식대로 미국과 세계를 이끌었다. 또 클린턴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간에 그가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로부터 받았던 것과 같은 형편없는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남편과 우리 가족 그리고 모니카 르윈스키의 프라이버시는 너무도 잔인하고 터무니없이 유린됐다.
남편 클린턴은 도덕적으로 잘못했다. 내게 거짓말을 하고 국민들을 오도한 것은 더 큰 잘못이었다. 하지만 그의 잘못이 미국을 배반한 것은 아니었다. 케네스 스타와 그의 정치적 동맹자들이 대통령을 물러나게 하려고 자신들이 갖고 있는 권한을 남용한다면 자칫 미국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결혼생활뿐 아니라 클린턴의 대통령이란 지위와 미 헌법의 통합성마저 불안해지는 상황이었다.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남편과 나의 앞날뿐 아니라 미국의 앞날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감정은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1998년 9월 데이빗 켄들은 스타 특별검사 쪽에서 대통령 탄핵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하원 법사위원회에 보내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럴 경우 하원 법사위는 탄핵 안건을 하원 전체 투표에 부쳐야할지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9월9일 스타 검사의 대리인들이 밴 차량 두 대에 무려 11만 단어로 이뤄진 ‘스타 보고서’를 싣고 미 의사당으로 갔다. 보고서의 보충자료만도 36개 상자 분량이 었다. 화려한 박수갈채를 노리는 스타 검사 쪽의 전략은 보기에도 소름 끼쳤다. 하원 규정위원회는 보고서 전문을 인터넷에서 열어볼 수 있도록 했다.
나는 그 보고서를 읽지 않았다. 하지만 445페이지 분량의 보고서에 ‘섹스’ 또는 그런 뜻을 지닌 변종의 단어가 무려 581번 나온다고 들었다. 스타 검사가 원래 조사하려 했던 화이트워터(Whitewater)란 단어는 겨우 네 번 나올 뿐이었다. 그 보고서는 그렇듯 불필요한 묘사로써 미 대통령직과 헌법을 훼손했다. 보고서를 인터넷에 띄워 대중에 공개한 것은 미 역사상 가장 천박한 짓이다. 클린턴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국민들에게 걸었다. 그는 국민들에게 도와달라고 호소했고 그들을 위해 일을 했다.
그 무렵 나는 우리의 결혼생활을 이어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1998년 12월 미 하원은 클린턴을 대통령직에서 탄핵할지 여부를 묻는 투표를 했고 1999년 2월 미 상원은 그를 탄핵에서 풀어줬다.
PART 3. 퍼스트 레이디에서 상원의원으로
2000년 11월7일. 남편 빌 클린턴과 딸 첼시, 그리고 나는 뉴욕주 상원선거 투표를 했다. 오랫동안 투표용지에서 남편의 이름만 보다가 내 이름을 보니 무척 가슴이 떨렸다. 나는 뉴욕주 상원의원이었던 다니엘 패트릭 모이니언이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치러진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표 차이로 당선됐다. 나의 득표율은 55%인데 상대후보는 43%에 그쳤다.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나는 뉴욕을 대표해 일할 수 있게 됐다. 또 새로운 역할로 미국에 이바지할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고맙게 여겼다.
새 대통령선거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요동쳤다. 대선에서 앨 고어 후보가 이겼는지 졌는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상원의원에 당선됐다는 기쁨에 마냥 의기양양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불확실한 대선 소식도 당선 축하파티의 열기를 식히지는 못했다. 무도장은 선거 캠페인 실무자들, 친구들, 지지자들로 가득 메워졌다. 남편 빌, 딸 첼시, 그리고 나의 어머니도 참석했다. 지난 8년 동안 ‘퍼스트 레이디’라는 타이틀말고는 이렇다 할 직위가 없었던 내가 ‘상원의원 당선자’가 된 것이다.
당선된 지 이틀이 지난 후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백악관 200주년 기념식을 주관하기 위해서다. 앨 고어 후보와 조지 W 부시 후보 사이의 대선 결과는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 있었다. 그런 정치적 긴장 탓에 백악관 행사는 다소 어색한 분위기 속에 치러졌다. 생존한 전직 대통령 부부와 작고한 전직 대통령들의 자손, 친척들이 초대됐다. 노인성 치매를 앓고 있는 레이건 전 대통령 부부만이 빠졌다.
마침내 대선 공방은 앨 고어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유권자 득표에서 50만 표를 앞서고도 그는 대통령 자리를 잃었다. 2000년 12월12일 최고법원은 플로리다주의 재검표를 중지시켜 사실상 부시의 승리에 도장을 찍어줬다. 미국사(美國史)에서 이처럼 사법권력이 유권자들의 권리 행사를 훼방놓은 일은 처음이었다.
남편이 섰던 그 자리에서 의원 선서
클린턴과 나는 선거결과에 당혹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울러 지난날 실패했던 공화당 정책들이 되살아날 경우 미국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를 걱정했다. 내가 상원의원으로 일을 하면서 뉴욕과 미국을 위해 최선이라 여긴 가치와 정책들을 발언하고 투표할 수 있게 된 것으로 그나마 위안을 삼았다.
2001년 1월3일 상원의원 취임식 날 나는 전직 대통령인 남편 클린턴과 첼시, 그리고 가족들이 방청석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의원 선서를 했다. 지난 8년 동안 나도 그 방청석에 앉아 클린턴 대통령이 그의 비전이 담긴 연설을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라 안팎의 적들에 맞서 미국의 헌법을 지지하고 수호한다”는 선서를 한 뒤 방청석 위를 쳐다보자, 나의 어머니와 딸 첼시 그리고 남편 클린턴이 나를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그리고 2주일 후 지난 8년 동안 ‘살아 있는 역사’를 보낸 백악관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