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호

기로의 ‘대표 사학’ 연세대 정창영 총장

“슬럼프? ‘좋은 대학’ 넘어 ‘위대한 대학’ 으로 가는 성장통이죠”

  • 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 사진·김성남기자

    입력2006-04-03 11: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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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대 ‘세계 200대 대학’ 진입 소식에 연세대 동문들 동요
    • “고려대의 ‘선택과 집중’에 한방 먹었다”
    • “연세대는 보수적…가진 것조차 드러내기 조심스러워해”
    • “주인 없는 학교? 모두가 주인인 사학의 모범”
    • “아이비리그 진학 가능한 우수 학생들 ‘언더우드국제학부’ 선택”
    • “송도캠퍼스 기숙학교, 학습 시간 늘려 한국 대학문화 바꾼다”
    기로의 ‘대표 사학’ 연세대    정창영  총장

    ●1943년 충북 충주 출생<br>●연세대 경제학과 졸업<br>●미국 남캘리포니아대 박사(경제학)<br>●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재무처장, 기획실장, 행정·대외협력부총장<br>●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br>●한국경제학회장<br>●저서 : ‘경제학 원론’ ‘경제발전론’ ‘한국경제의 내실 있는 성장’

    연세대와 고려대는 어느 자리에서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어떤 식으로든 계기가 마련되면 두 대학과 아무런 인연이 없는 사람들도 양쪽으로 편이 갈려 이야기를 쏟아내곤 한다. 100년 넘게 한국을 대표하는 양대 사학(私學)으로 자리매김해온 두 대학에 대한 관심은 동문들의 것만이 아니다.

    요즘 연세대 동문들은 곤혹스러운 질문을 받곤 한다. “입시에서 고대 커트라인이 연대보다 높았다는 얘기가 맞는 거야?” “고대가 세계 200대 대학 안에 들었다며? 그럼 연대는?” “고대가 확 달라졌다는데, 그러다 연대가 발목 잡히는 거 아닌가?”….

    연세대를 졸업한 대기업 부장 김모씨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연대를 고대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쁘다’며 웃어넘기지만, 고대가 정말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건가 싶어 신경이 쓰인다”고 말한다.

    연세대 동문들이 이러한 위기의식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해 10월,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가 펴낸 ‘고등교육 부록(Higher Education Supplement)’에 실린 세계 200대 대학 순위다. ‘더 타임스’가 전세계 2375명의 교수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하고, 연구논문 인용 횟수, 학생 대 교수 비율, 외국인 교수 임용 수 등을 종합해 순위를 매겼는데, 국내 대학 중엔 서울대가 93위,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143위에 올랐으며, 고려대가 184위로 세계 200대 대학에 처음 포함됐다.

    ‘더 타임스’의 발표가 국내 언론에 인용 보도되고, 고려대가 이를 학교 홍보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자 연세대 및 연세대 동문회 사무실에 문의전화가 잇달았다고 한다. 다음은 연세대 동문회 관계자의 말이다.



    “고대가 세계 200대 대학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연대 동문들이 ‘연대는 어떻게 된 거냐’며 문의를 해왔다. 동문회측은 ‘고대가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하면서 세계 여러 대학의 총장을 초청했는데, 그때의 인연으로 외국 대학 교수들이 고려대에 좋은 점수를 준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일부에선 ‘그러한 사정을 제대로 알릴 수 있도록 학교 광고를 하자’고 제안했고, 일부에선 ‘그런 식으로 맞대응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꼴’이라며 ‘광고비로 쓸 돈이 있으면 차라리 재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자’고 했다. 표면화된 ‘맞대응’은 없었지만, 내부적으로 충격이 컸던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지난해 고려대의 비상(飛上)은 눈부셨다. 지난해 5월, 영국 옥스퍼드대와 프랑스 파리4대학(옛 소르본대), 일본 도쿄(東京)대, 중국 베이징(北京)대 등 세계 100여 개 대학의 총장과 부총장이 참여한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와 개교 100주년 기념 와인 ‘라 까르도네’는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단 며칠간의 행사를 통해 100년을 이어온 투박한 민족대학 이미지를 세련된 글로벌 대학으로 바꿔놓은 고려대의 ‘글로벌 KU프로젝트’는 ‘2005년 히트상품’으로까지 불린다.

    고대 100주년 vs 연대 120주년

    “TV 뉴스로 고대 100주년 기념행사를 볼 때만 해도 ‘고대가 좋아졌구나’ 하고 생각했지, 연대와 연관지어선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동문이 여럿 낀 자리에 갔다가 ‘연대가 저렇게 기를 못 펴고 있으니 큰일이야’ 하는 소리를 듣고 문제가 있다 싶었다. 2005년이 고대 개교 100주년일 뿐 아니라 연대 개교 120주년이란 사실도 그날 처음 알았다. 동문인 나도 몰랐으니 일반인은 어떻겠나. 무관심의 문제가 아니다. 학교가 홍보에 너무 신경을 안 썼다.”

    외국계 회사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는 20대 후반의 연세대 졸업생이 한 이야기다.

    모교에 대한 연세대 동문들의 위기의식은 그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연세대 출신의 한 검사는 지난 가을 “연대가 경영대마저 고대에 밀렸다는 얘기가 들린다. 연대가 이렇게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건 주인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가 확실한 근거를 갖고 이야기한 건 아니다. 두루뭉술한 두 문장은 다만 연·고대와 관련된 두 가지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앞 문장은 8월31일 고려대 경영대 학부와 대학원이 모두 세계경영대학협회(AACSB) 인증을 받은 사실, 두 번째 문장은 2004년 말, 연세대 창립자인 언더우드 일가가 모두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에서 유추한 것이다.

    고려대의 AACSB 인증 소식은 “고려대 경영대 학점, 하버드도 인정”이라는 제목하에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AACSB는 미국 내 주요 경영대학이 모여 설립한 비영리기관으로 경영학 교육 품질을 평가하는 단체다. 교수진, 학점, 커리큘럼, 연구업적 등 21개 분야를 평가하는데, 하버드·코넬 등 미국 400여 개 대학이 인증을 받았고, 아시아권에서는 홍콩 과학기술대, 일본 게이오대, 싱가포르 국립대 등이, 국내에서는 서울대 학부와 KAIST 경영대학원에 이어 고려대가 세 번째로 AACSB 인증을 획득했다. AACSB 인증을 받은 대학끼리는 학점 교류가 가능하다. 고려대 경영대 출신이 하버드 등 AACSB 인증을 받은 외국 대학으로 유학하면 고려대에서 받은 학점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AACSB 인증이 경영대학의 우열을 가리는 절대적인 잣대는 아니다. 그러나 고려대의 AACSB 인증 획득 소식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외국 명문대가 인정한다’는 식으로 해석되면서 90년 전통을 자랑하며 절대 우위를 차지해온 연세대 경영대학의 명성에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사실 AACSB 인증을 신청한 건 연세대가 먼저다. 연세대가 실사(實査)를 받는 과정에서 한 가지 문제점이 발견됐고, 그것을 개선하는 사이 고려대가 먼저 인증을 획득한 것이다. 오는 가을 AACSB 인증을 획득할 것으로 보이는 연세대로선 “한방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만도 하다.

    이명박의 상승, 김우중의 몰락

    연세대 경제학과 출신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온 이명박 서울시장을 대조하며 위기의식을 드러내는 연세대 동문도 있다. 연세대를 졸업한 한 방송사 라디오 PD는 “김우중 회장이 몰락한 게 최근의 일은 아니지만, 이명박 시장이 대권(大權) 후보로 거론되는 상황에서 김 회장의 참담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연대와 고대의 위상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져 섬뜩할 때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연세대 동문들 사이에 푸념처럼 떠돌던 이야기가 수치화되어 나타나고 말았다. 입시전문학원 청솔교육평가연구소가 2006학년도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정시 합격자 1411명을 표본 조사한 결과 연세대 경영대 합격자 수능 평균점수(537.3점)가 고려대 경영대(538.9점)보다 1.6점 낮았다.

    모집인원의 20.5%를 표본 조사한 것이라 실제 성적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고, 1.6점으로 대학의 순위를 매긴다는 게 사실 무리다. 청솔교육 평가연구소측도 “수험생들 사이에선 여전히 연세대 경영대에 대한 선호도가 높으나 2006년 정시모집에서 연세대가 수리탐구 4과목을 모두 반영한 데다 논술의 높은 변별력 등이 수능 고득점자들로 하여금 고려대 경영대로 안정 지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그럼에도 고려대는 내부적으로 AACSB 인증 획득에 이은 쾌거로 평가하며 고려대 경영학과가 국내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고 자축하는 분위기다.

    연세대측은 “내신 성적과 수능 점수, 논술 실력 등이 다양하게 반영되는 입시에서 수능 점수 1, 2점이 높았다고 해서 ‘고려대 경영대가 연세대 경영대를 눌렀다’는 식으로 보도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선택과 집중’을 앞세운 고려대의 놀라운 추격이 연세대에 자극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고 인정한다. 연세대 경영학과의 한 교수가 한 말이다.

    “고대의 전략이 좋았다. 이공계열이나 의과대는 따라잡기가 어려우니까 경영대를 선택해 ‘장하성 브랜드’를 만드는 등 노력을 집중했는데, ‘고대는 법대(法大), 연대는 상대(商大)’라는 오랜 선입견을 깬 덕분에 결과적으로 경영대 하나만으로 마치 고대가 연대를 꺾은 것처럼 비쳐지고 있다. 고대로선 선택과 집중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고려대 장하성 교수(경영학)는 삼성 등 ‘재벌의 저격수’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그가 경영대학장에 임명된 것만도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장 교수는 지난해 고려대 경영대학장이 된 뒤, “고려대는 법대, 연세대는 상대라는 선입견을 깨겠다”고 공언했다. 삼성과 대립각을 세워온 장 교수가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겸임교수로 위촉한 것도 화제가 됐다.

    그렇다면 고려대가 분발할 때 연세대는 유유자적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1월 송도캠퍼스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교육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올해 3월 첫 강의를 시작한 ‘언더우드국제학부(UIC)’는 강남지역 우수 학생 및 특목고 학생들로부터 큰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게 입시전문 컨설턴트의 전언이다.

    적극적인 홍보 마인드

    기로의 ‘대표 사학’ 연세대    정창영  총장

    연세대는 신촌캠퍼스의 녹지를 훼손하지 않고 지키기 위해 2010년 개교를 목표로 ‘송도캠퍼스’를 설립하고, 교육의 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한다는 계획이다.

    학교를 떠난 동문들이 느끼는 위기의식을 학교 안에선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3월13일 오후, 연세대 정창영(鄭暢泳·63) 총장을 만났다. 정 총장은 4월이면 임기 3년째로 접어든다. 정확히 임기 절반을 넘겼다.

    정 총장은 그날 오전 처음 시도한 일본 게이오대, 중국 칭화(淸華)대와의 화상토론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한국과 중국, 일본을 대표하는 3개 대학 관계자들이 디지털 미디어 콘텐츠(DMC)를 주제로 화상토론을 했는데, 이야기가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등 기술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어 앞으로 세 학교의 교류 증진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것. 정 총장은 학생간 교류도 활발할 것으로 전망했다.

    인터뷰 하루 전날인 3월12일엔 미국 뉴욕대(NYU) 비즈니스스쿨 학부 학생 176명이 연세대를 방문해 한국 기업의 재무와 마케팅 현황 수업을 들었다고 한다. NYU는 최근 학부학생을 200여 명씩 그룹으로 나눠 해외 탐방을 시키는데, 그중 한국을 택한 학생들이 일주일 일정 중 하루 동안 연세대를 방문해 교수들로부터 한국 경제의 현황에 대해 듣고 간 것이다.

    -그런 얘기들이 언론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 같은데요.

    “진작 홍보실에 자료를 넘겨줬어야 하는데…. 연세대가 굉장히 보수적이에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걸 충분히 못 알리죠. 과장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가진 것조차 드러내는 것을 조심스러워합니다. 화상토론이며 NYU 학생들의 방문 모두 밖에 알려도 될 만한 것들인데 그렇게 잘 못해요. 대외 홍보를 홍보부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조직의 모든 일원이 홍보 마인드를 가져야 하는데 그 점이 부족하죠.”

    -홍보의 필요성을 인정한다면 총장께서 강력한 의지를 보이면 되지 않을까요.

    “예, 요즘은 저부터 적극적인 홍보 마인드를 가지려고 합니다.”

    -연세대를 설립한 언더우드 일가가 2004년 11월에 모두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그후 연세대엔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언더우드가(家)는 연세대를 세운 것 외에 선교, 교육, 연구, 의료, 봉사 등 여러 면에서 한국 근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요. 순수한 섬김, 봉사,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숭고한가 하는 정신적인 유산을 남기고 떠났죠. 이분들은 학교를 세웠지만, 처음부터 ‘운영은 한국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원칙 아래 행정에 전혀 간섭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분들이 떠난 다음에도 학교 운영엔 아무 영향이 없습니다. 언더우드 4세인 원한광 교수가 재단 이사직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1년에 4번 한국에 오시고, 미국에서도 연세국제재단(Yonsei International Foundation) 이사로서 여전히 연세대를 위해 일하고 계세요.”

    -연세대 재단 이사회의 위상과 역할은 어떻습니까.

    “연세대는 주인이 없는 학교죠. 이사회는 동문, 교단, 사회유지 등 다양한 인사가 참여하는 협의체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원한광 교수도 여러 명의 이사 중 한 명일 뿐이에요. 설립자의 후손이라고 해서 권한이 더 크거나 학교 행정에 관여하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이사회는 오로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창립정신이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지 살필 뿐, 학교 운영에 관한 모든 것을 총장에게 위임합니다. 지원만 할 뿐 행정에는 전혀 간섭하지 않는, 사학재단의 가장 바람직한 형태가 아닌가 싶어요.”

    조용하지만 추진력은 강해

    -‘주인 없는 학교’라서 추진력이나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평도 있는데요.

    “그렇지 않아요. 연세대와 마찬가지로 주인이 없는 연세의료원(세브란스병원)을 보세요. 주인이 없으니 모든 구성원이 ‘이건 내 병원이다’ 하는 주인의식을 갖고 있어요. 기관에 대한 헌신도나 충성심이 다른 조직과 비교할 바가 못 되죠. 그 에너지가 정말 대단합니다. 그걸 모으면 못할 일이 없다고 봐요.”

    -총장의 역할이 크겠습니다.

    “크죠. 학교뿐만 아니라 어떤 집단이든 성공의 75%가 우두머리, CEO에게 달렸다고 하잖아요. 대학은 합의에 의해 운영되는 기관이에요. 학생, 교직원, 교수 등 모든 구성원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게 총장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죠. 연세대는 우수한 학생과 교수진, 조직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교직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제가 할 일은 다져진 신뢰의 기반 위에서 구성원의 힘을 한군데로 결집해서 학교가 지향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정 총장의 성향은 어떤 쪽입니까.

    “조용하게 일하지만 추진력은 강합니다. 요란하지 않지만 행동은 빠른 편이죠.”

    2004년 정 총장 취임 당시 교수평의회의 일원이던 한 교수는 “여러 후보 중 정창영 총장이 아랫사람들로부터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아 적극 밀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정 총장의 학자적, 인간적인 면을 높이 평가하면서 “다만 총장으로서 좀더 공격적이어도 될 것 같다”고 덧붙였다. 대외협력처장을 맡고 있는 박영렬 교수(경영학)는 정 총장에 대해 “지금까지 경험한 총장 중 가장 지적인 분이다. 소리 없이 움직이지만 ‘이거다’하고 확신이 서면 무섭게 밀어붙이는 추진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평소 연세대와 고려대의 관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훌륭한 경쟁자이자 동반자죠. 우리나라에 양대 사학이 있는 것은 큰 자랑이에요. 서로 발전해가는 모습에 자극받고, 세계적인 대학을 목표로 서로 경쟁하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경쟁하되 협력해서 선(善)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죠.”

    -고려대가 ‘글로벌 KU’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연세대 고유의 ‘글로벌’ 이미지가 도전받는 거 아닌가 싶은데요.

    “글로벌 이미지는 우리 대학뿐 아니라 국내 모든 대학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려대의 ‘글로벌 KU’ 프로젝트는 한국 대학교육 개혁을 선도하고 있어요. 그 점은 우리 대학도 배울 겁니다. 대학의 세계화, 국제화는 세계 모든 대학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추세예요. 지구촌 시대에는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Inter-cultural Competence)가 핵심역량이죠. NYU 학생 200여 명이 연세대를 방문했듯이 미국 명문 대학들도 학부학생들을 외국에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인은 미국에 대해서만 알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9·11테러 이후에 달라졌죠. 다른 나라 문화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거예요. 최소 한 학기 정도는 외국 경험을 쌓도록 한다는 게 미국 명문 대학들의 기본적인 방침입니다.”

    연세대의 생명은 다양성

    -고려대가 지난해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 선정 세계 200대 대학 안에 들었는데, 연세대로선 충격적이었을 듯합니다.

    “고려대가 순위에서 좋은 결과를 얻은 건 반가운 일이에요. 물론 연세대 동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죠. 하지만 대학 순위를 매기는 기관이 여러 곳이고 기관마다 평가 기준이 달라서 순위도 다르게 나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그런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아요. 연세대의 저력에 자신이 있거든요. 물론 고려대가 잘하고 있는 건 우리가 배울 점이죠.”

    -수능 점수만으로 대학의 서열을 매기는 것에는 문제가 있지만, 2006학년 정시모집에서 고려대 경영학과가 연세대 경영학과를 눌렀다는 보도가 있었는데요.

    “알고 있습니다. 이번 입시제도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어떻게 하면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할 수 있는지 검토 중입니다. 그러나 수능 점수 1, 2점 차이에 연연하지 않아요. 학생의 다양성이야말로 연세대의 생명이에요. 공부만 잘하는 학생 모아놓아서 뭐합니까. 연세대는 3분의 1은 공부 참 잘하는 학생, 3분의 1은 정말 특출한 재능을 가진 학생, 봉사정신을 포함해서요,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은 소외된 계층, 교육 기회가 봉쇄됨으로써 가난이 대물림될 우려가 있는 학생들로 구성됩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것보다 배경이 다른 사람들한테서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어요.

    기로의 ‘대표 사학’ 연세대    정창영  총장

    ‘좋은 대학’은 모든 대학의 필수 조건이고, 우리 대학의 목표는 ‘위대한(Great) 대학’입니다. 엘리트 교육을 하되 국민을 하늘처럼 떠받들도록 가르치는 게 연세대 교육의 정체성이고, 창립정신이기도 하죠. 학생들에게 늘 그런 점에서 다른 대학과 구별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수능 점수를 분석한 것만으로 우리 경영대학을 평가한다면 그야말로 피상적인 거죠. ‘좋은 대학’은 모든 대학의 필수 조건이고, 우리 대학의 목표는 ‘위대한(Great) 대학’입니다. 엘리트 교육을 하되 국민을 하늘처럼 떠받들도록 가르치는 게 연세대 교육의 정체성이고, 창립정신입니다. 학생들에게 그런 점에서 다른 대학과 구별돼야 한다고 늘 강조합니다.”

    -올해 처음 신입생을 받은 언더우드국제학부(UIC)가 준비 단계부터 화제를 모았습니다. 특히 강남 지역의 학부모들과 특목고 재학생들이 UIC에 관심이 많다고 하더군요. 선발된 학생들의 면면은 어떤가요.

    “토플(TOEFL) 점수와 영어 면접, 영어 에세이 시험을 거쳐 외국인 19명, 한국인 79명을 신입생으로 선발했어요. 한국인 중 21명은 12년 교육과정 전부를 외국에서 이수해 외국인이나 다름없고, 나머지 58명도 대부분 외국에서 장기간 교육받은 학생입니다. 토플 성적 평균이 287점(300점 만점), SAT 성적은 1410점(1600점 만점)으로 미국 3600개 대학 중 10위권에 진학할 수 있는 수준이에요.

    -교수진과 커리큘럼은 계획대로 구성됐습니까.

    “총 30개 강좌가 개설됐는데 10개 강좌를 6명의 외국인 교수가 맡고, 나머지 20개 강좌는 원어민 수준의 영어 강의를 할 수 있는 연세대 교수 20명이 합니다. 1학기 중 외국인 전임교원 5명을 추가로 확보하기 위해 현재 지원자들을 심사 중인데, 면면이 아주 뛰어나요. 옥스퍼드대, 존스홉킨스대, 하버드대 등에서 서양사와 서양문학을 전공한 신진 학자들이죠.

    이들을 통해 문학·역사·철학의 기초를 튼튼히 다지게 할 거예요. 창의력 계발에 필요한 인문교양과 과학 기초 교육을 철저히 하는 게 세계 명문 대학들의 추세죠. 그래야 급변하는 세상에 대응할 능력을 배양할 수 있으니까요. 인문교양교육의 특징은 학문간 경계를 무너뜨리고 학제간 교육을 함으로써, 학문의 기초 체력을 강화하는 게 목표예요.

    전공은 비교문화문학, 경제학, 정치학, 국제학, 생명공학 5개예요. 외국인 학생들에겐 한국학을 부전공으로 배울 수 있도록 하는데,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지역학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에요. 한국 IT(정보기술)산업에 대한 관심을 고려해서 IT전공도 개설할 계획이고요.”

    인문교양·학제간 교육 강화

    연세대측은 이밖에 2002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쿠르트 뷔트리히 스위스 연방기술원 교수와 나오키 사카이 코넬대 교수, 고이치 이와부치 와세다대 교수가 봄 학기 강의를 맡고, 가을 학기엔 도널드 존스턴 OECD 사무총장, 데이비드 브래디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석좌교수가 출강한다고 밝혔다.

    정 총장은 “UIC가 한국 대학교육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 “송도캠퍼스의 파일럿 프로그램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충분히 아이비리그에 진학할 수 있는 학생들이 외국 대학이 아니라 국내 대학을 선택했어요. 외국의 우수한 학생들이 입학했고요. UIC는 규모가 크진 않지만 국내외 학생들이 함께 영어로 공부하고, 인문교양교육과 학제간 교육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굉장한 실험이 될 겁니다. 앞으로 UIC 교육 프로그램을 전 대학으로 확장시킬 거예요.”

    -송도캠퍼스 계획에 기대가 큽니다. 다만 좀 갑작스러운 느낌이 있는데요. 언제부터 구상했고, 어느 단계까지 진행됐습니까.

    “십수년 전부터 꾸준히 기숙학교(Residential College)를 건설할 부지를 알아봤어요. 신촌 캠퍼스의 녹지를 더 이상 훼손해선 안 된다는 게 구성원들의 공통된 목소리였기에 신촌 이외의 지역으로 확장하는 게 불가피했거든요. 파주, 아산 지역도 검토했는데, 송도가 가장 적합했어요. 인천시와는 수년 전부터 교감을 갖고 논의해오다 지난해 말부터 구체적으로 협의했죠. 2월에 MOU(양해각서)를 체결했고, 그로부터 6개월 안에 계약을 체결하기로 했습니다.

    송도경제자유구역은 세계를 향한 한국의 창(窓)이에요. 정부도 이곳을 중국 상하이(上海)나 푸둥(浦東) 지역처럼 만들겠다는 건데, 경제학자로서 송도경제자유구역이 한국의 21세기를 좌우할 거라고 생각해요. 인천시가 대한민국의 국제경쟁력을 끌어올리는 핵심 역할을 한다고 하면 연세대는 그중에서 교육·연구 분야의 세계 중심 역할을 할 계획입니다.

    송도국제화복합단지라는 정식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 캠퍼스만 있는 게 아니라 캠퍼스와, 캠퍼스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거주할 글로벌 아카데믹 빌리지가 함께 만들어집니다. 이곳에 학생, 교수, 교직원 등이 머물게 되죠. 그리고 과학단지(Science Park)도 생깁니다. 스탠퍼드대를 핵으로 하는 실리콘밸리가 좋은 예죠. 중국도 싱가포르도 대학이 이런 식으로 변해가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선 처음 시도하는 거지만 외국에선 일반화된 개념이죠.”

    학습량 3배로 늘린다

    -기숙학교 개념이 예비 수험생과 학부모들에겐 생소할 듯합니다만.

    “기숙학교는 영국의 이튼스쿨,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대에서 발전해 지금은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들에 보편화되어 있어요. 하버드대는 1년, 예일대는 4년 동안 기숙학교 생활을 합니다. 지금까지는 학교가 학생들에게 강의와 평가만 했지만 기숙학교는 학생들의 학업뿐만 아니라 생활교육까지 감당하는 적극적인 교육체제라고 볼 수 있죠.

    우리 대학생들의 학습량이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것은 널리 알려져 있잖아요. 우리 학교만 해도 신촌의 대학문화가 소비적인 문화로 변화하면서 신입생들이 귀중한 시간을 유흥에 낭비하고 있어요. 지금 같은 상황으로는 선진국의 학생들보다 우수한 실력을 갖추기가 어려워요.

    제가 총장으로 취임한 후 학부대학에서 ‘공부 2배하기 운동’을 시작해 학습량이 전보다 좀 늘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세계 우수 대학의 학생들 수준에 못 미쳐요. 특히 독서량에서 절대적으로 뒤지죠. 그래서 기숙학교가 필요한 거예요. 신입생 전원 기숙사 생활로 학습량을 지금의 3배로 늘리고, 단체 생활을 통해 협동심과 리더십도 키우도록 할 거예요. 문과·이과 학생들이 공동체 생활을 함으로써 자기 전공 이외의 분야로 폭넓게 안목을 키울 수 있고, 인간관계도 훨씬 광범위해질 거라고 기대해요.”

    -말씀을 들어보면 구상은 오래 전부터 해왔고 다만 부지가 이제 와서 정해진 건데, 학생들은 전혀 뜻밖이라는 반응이잖습니까.

    “부지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이 계획이 일부 선생님들껜 알려졌는데, 학생들에게 공개할 단계는 아니었어요. 보안의 문제죠. 양해각서를 체결한 뒤로는 교내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어요.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분위기예요. 다만 학생들이 동아리 활동이 잘 안 될까봐 걱정하는데 그 점을 보완하려고 해요.

    송도에 캠퍼스가 생기면 서울에서 멀어져 우수한 신입생 확보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 아닌지 걱정하는 것도 알아요. 송도경제자유구역은 서울과의 접근성이 아주 좋을 겁니다. 성남과 강남에서 직접 연결되는 도로가 건설 중이고, 서울로 연결되는 전철역도 학교 정문에 들어섭니다. 또 1학년을 마치면 신촌캠퍼스로 돌아와 전공 과정을 마무리하게 되니까 크게 달라질 게 없죠.”

    학교 욕심만 생각할 수 없어

    -부지 55만평 매입비용만 2750억원, 거기에 강의동(棟)과 기숙사, 부대시설 등을 건립하려면 수천억원이 필요할 텐데,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계획입니까.

    “프로젝트 파이낸싱으로 충분히 충당할 수 있어요. 몇 군데 컨설팅 회사에 사업타당성 검토를 의뢰했는데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가 나왔어요. 일부 학생들은 등록금을 인상해서 송도캠퍼스 짓는데 쓰는 것 아니냐고 하는데, 송도캠퍼스 건립에 필요한 예산은 본교 재정과는 별도로 꾸려집니다.”

    -최근 연세대가 등록금을 12% 인상한 것 때문에 학생회와 갈등을 겪자 송자 전 총장이 동문회보에 “대학등록금이 1000만원은 넘어야 한다”고 썼다가 논란을 빚었죠. 이 점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 대학이 최근 2∼3년간 계속된 재정 적자를 개선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등록금을 12% 인상했지만, 대학등록금 1000만원엔 동의하지 않아요. 등록금 얘기가 나오면 흔히 미국 대학과 비교해서 더 올려야 한다고 하는데, 국민소득과 학부모의 경제 형편을 생각해야죠. 어떻게 학교 생각만 하겠어요. 교육·연구 환경의 질을 높이고 싶은 욕심을 다 채우자고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죠.”

    기로의 ‘대표 사학’ 연세대    정창영  총장

    3월 새학기부터 첫 강의를 시작한 언더우드국제학부(UIC) 학생들과 함께. 정 총장은 UIC가 송도캠퍼스의 파일럿 프로그램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연세대는 ‘부자 학교’, ‘강남 출신이 많이 다니는 대학’이라는 이미지가 있는데요.

    “오해예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야 한다는 게 우리 학교의 기본 철학인 걸요. 제가 총장이 된 뒤로 성적 우수자에게 주던 장학금 제도를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주는 걸로 바꿨어요. 전체 등록금의 20%를 장학금으로 쓰는데도 여전히 부족하죠.

    등록금을 인상하면서 교직원 임금을 동결했는데, 교수들이 보직수당을 반납해서 제자사랑장학금을 모았어요. ‘장학신문고’제도를 만들고, 형편이 어려워서 등록하지 못하는 학생이 있으면 알리라고 했더니 지금까지 110명이 신청해 그중 80명을 도와줬어요. 나머지 30명은 자격을 검토 중이고요. 연세 공동체 안에서는 가정형편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는 학생이 없어야 한다는 게 제 신념이에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어려운 학생들 사정을 살필 겁니다.”

    연세대는 또 2006학년도 2학기 수시모집부터 기초생활수급 대상자 자녀 120명을 선발해 4년간 전액 장학금과 책값 등을 지원하는 ‘한마음 장학전형’을 도입했다.

    대학은 ‘왕관의 보석’

    -한국 대학들이 저마다 ‘세계적인 대학’을 목표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목표가 너무 추상적인 거 아닌가요.

    “미국 주립대학 수준을 목표로 한다고 보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미국이 50개 주(州)니까 적어도 세계 50위 안에 들어야죠. 총장이 되고 보니, 한국 대학들이 외국 대학에 비해 여건이 열악한데도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는 걸 알겠더군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장점이나 노력을 인정하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데 인색하잖아요. 그래서 국내 대학들의 진면목이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거예요.

    이공계만 해도 연구에 매달리느라 건강을 해친 교수가 적지 않아요. 특히 교수로 승진하려면 정해진 SCI 등재 논문 수를 채워야 하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실험실이 많죠. 국가 전체적으로 볼 때 SCI 등재 논문 수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어요. 우리 대학만 해도 2004년 의과대를 포함한 이공계 SCI 등재 논문 수가 세계 132위예요. 그런데 지금 추세대로라면 2010년에 50위권에 들 수 있어요. 대학들이 굉장히 노력하고 있는데 국민이 아직까지 대학을 신뢰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죠.”

    정 총장은 1994년 ‘뉴욕타임스’에 실린 ‘왕관의 보석(Jewel in the Crown)’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소개하며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기 위해선 대학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미국에선 대학이 경제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얘기합니다. 미국 대학이 세계 1등이기 때문에 미국의 국제 경쟁력이 세계 1등일 수 있다고 보는 거죠. ‘뉴욕타임스’가 미국의 좋은 대학 20곳을 선정하면서 ‘Jewel in the Crown’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쓴 건 대학이 그 나라의 보석이라는 의미죠.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려면 적어도 10개 정도의 대학이 세계적인 수준에 진입해야 해요. 그래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을 지속적으로 사회에 공급해야죠.”

    정 총장은 “그런 점에서 연세대가 잘된다, 고려대가 잘된다 하는 건 그 대학만의 성과가 아니라 나라 전체의 명운(命運)이 걸린 것”이라며 다시 한 번 “서로 경쟁하되 협력해서 선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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