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호

‘돌아온 예진아씨’ 복귀 후 최초 인터뷰 황수정

“좀더 똑똑했으면 안 당했을 일… 두렵지만 새로운 사랑 하고 싶어요”

  • 김순희 자유기고가 wwwtopic@hanmail.net

    입력2007-12-07 17: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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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 연예계를 떠났던 ‘예진아씨’ 황수정. 드라마 ‘소금인형’으로 복귀한 그가 6년 만에 입을 열었다. 아픈 과거를 떨쳐낸 지 오래됐다는 그는 새로운 사랑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상처가 두려워 새로 찾아드는 사랑을 거부하지는 않겠다”며.“
    ‘돌아온 예진아씨’ 복귀 후 최초 인터뷰 황수정
    황수정(35)과 마주앉기까지, 꼬박 6년이 걸렸다. 그는 그동안 말을 아꼈고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입을 열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를 만나고자 하는 기자가 많았고 그의 사소한 언행조차 관심의 대상이 됐다.

    11월6일 오후. 약속시간 20여 분 전 인터뷰 장소에 도착했다. 생각지도 않게 그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그 일’ 이후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첫 자리’였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얼굴에 긴장감이 묻어났다. 조금은 경직된 그의 마음을 풀기 위해 드라마 ‘소금인형’ 이야기부터 꺼냈다. 황수정은 올초 방영된 SBS 금요드라마 ‘소금인형’으로 5년여 만에 TV 브라운관에 복귀했다.

    “벅찼죠. ‘나를 어떻게 봐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어요. 설렘과 떨림이 공존한 거죠. 뭐라고 한마디 말로 심경을 설명할 수 없었어요. 오랜 공백에 따른 어색함을 떨치고 카메라 앞에 잘 설 수 있을지 부담도 됐고요.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게 두려웠죠. 드라마 출연이 결정된 이후론 걱정 대신 좋은 점만 생각하기로 했죠. 그렇게 맘먹었더니 무작정 좋더라고요. 그 어떤 미사여구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황수정의 복귀는 그리 쉽지 않았다.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몇 차례 복귀 시도를 했지만 거센 여론에 밀려 좌절되곤 했다. 그는 ‘소금인형’에 앞서 지난해 10월말 왁스의 뮤직비디오(‘사랑이 다 그런 거니까’)에 출연하며 조심스럽게 복귀 수순을 밟았다.

    ‘돌아온 예진아씨’ 복귀 후 최초 인터뷰 황수정
    “몸에 안 맞는 옷 입은 것처럼”



    SBS는 황수정을 캐스팅하기에 앞서 여론의 추이를 조사했다. 출연에 대한 거부감보다 복귀에 찬성하는 의견이 많자 과감하게 주연을 맡겼다. ‘소금인형’ 방영 초기 ‘연기 베테랑’ 황수정의 연기가 예전만 못하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그는 “드라마 초반에, 내가 봐도 좀 어색했다”고 고백했다.

    “그전에는 드라마를 찍어도 모니터할 시간이 없었어요. 제가 출연한 작품을 TV를 통해 보는 게 부끄럽기도 했고요. 그런데 ‘소금인형’은 놓치지 않고 다 봤어요. 제 연기의 장단점을 파악하려고요. 모니터하면서 얼굴이 굳어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이 굳어 있다는 걸 느꼈어요.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어색하기도 했고. 시청자의 반응, 뭐 그런 생각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아요.”

    ▼ ‘소금인형’ 촬영할 때 마음가짐이 남달랐을 것 같은데요.

    “처음 촬영에 들어갈 때는 조금 어색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솥밥 먹는 식구’라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전에는 스태프나 동료 연기자들과 어울릴 시간적 여유가 없었어요. 그런데 ‘소금인형’ 촬영 때는 달랐어요. 동료애가 뭔지도 알게 됐고,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도 익혔어요. 스태프들이 신경을 많이 써줬어요.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남을 위한 배려가 이런 거구나, 느꼈지요. 고맙죠. 연기자와 스태프 모두.”

    황수정은 ‘소금인형’에서 10년차 주부 차소영 역을 맡았다. 아픈 남편 박연우(김영호 분)의 수술비를 마련하려고 한때 자신을 사랑한 돈 많은 남자 강지석(김유석 분)과 동침을 강행한다. 아내가 딴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이혼을 요구하고 소영은 지석의 끈질긴 구애와 집착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 배역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요.

    “소영의 행동이 논란을 일으킬 만하죠. 그런데 시청자들이 소영의 행동보다는 지석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반해 그게 크게 부각되지 않았어요. 그 남자, 멋있지 않았나요? 저는 극중 지석의 사랑을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엄마 역도 처음이라 그런지 꽤 어색했죠. 엄마는 연기자의 노력만으로 소화할 수 있는 역이 아니더라고요. 엄마 연기에 한계를 느낀 거죠. 아무리 잘하려 해도 ‘이모 같은 엄마’밖에 안 되더라고요. 극중에서 순간의 실수로 아이를 잃어버린 모습을 연기하는데, 영 어색하더라고요. 자기 눈에서 자식이 사라지면 눈에 뵈는 게 없을 텐데, 그 느낌을 표현하는 게 영 어설펐던 거죠. 아이에게 ‘엄마’라고 불리는 것 못지않게 김영호씨에게 ‘여보’라고 불리는 것도 마치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어요.”

    갈색 니트 스커트와 아이보리색 카디건이 잘 어울리는 그가 맑게 웃었다. 긴장이 좀 풀린 듯싶었다. 웃는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단아한 그에게 “해 떨어지기 전에 사진을 찍자”고 제안해 인터뷰 장소 맞은편 양재천으로 향했다.

    ‘돌아온 예진아씨’ 복귀 후 최초 인터뷰 황수정
    “잊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어”

    사진기자가 카메라를 들자 그가 물 만난 고기처럼 펄떡이기 시작했다. 나무에 기댄 채 가을 냄새 물씬 풍기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늦가을 노을을 바라보는 눈빛에 성숙한 여자의 모습이 묻어났다. 사진기자가 “오~우, 굿”을 연발하면서 “찍는 것마다 작품”이라고 했다. ‘소금인형’ 제작발표회 때와 비교하면 한결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 카메라 앞에 서니 얼굴에 생기가 넘치는 것 같은데요.

    “호호, 그래요?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좋아요. 예전에는 사진촬영을 일로만 여겼는데, 이젠 안 그래요. 일을 즐기면서 하게 된 거죠. 낙엽을 밟고 오솔길을 거닐고. 이 자체가 너무 행복해요. 멋진 가을 풍경을 음미하면서 촬영에 임하고 있어요. 옛날에는 이 맛을 몰랐어요. 이런 즐거움을. 이보다 더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어도 눈에 안 들어왔어요. 전투적인 자세로만 일했죠. 그렇게 투쟁하듯 살지 않으면 인기가 떨어질까 봐. 뭔가에 쫓기듯 촬영하고 서둘러 다른 장소로 이동하고. 그러니 살면서 무슨 여유가 있었겠어요. 정신과 육체 모두 피로에 젖어 있었지요. 이젠 그전처럼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고통의 세월을 감내해서인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일을 대하는 자세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듯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과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히 깨달았다고 했다.

    그를 변화시킨 ‘그 일’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힘든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느냐”고 물었다.

    “사실, 전 그 일을 머릿속에서 애써, 애써서 지워버렸어요. 그러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아서요.”

    ‘돌아온 예진아씨’ 복귀 후 최초 인터뷰 황수정
    그가 마른 입술을 꾹 깨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모님께 너무나 큰 짐과 불효를 안겨줘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러면서 그는 “다시 고통을 딛고 일어서게 된 데는 부모님의 사랑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부모님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에이는 듯하죠. 저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텐데.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어요. 미안함과 고마움을.”

    황수정의 부친 황종우씨는 6년 전 예기치 않은 사건에 연루된 딸을 대신해 수많은 기자를 상대해야 했다. 황수정을 향한 집요한 취재는 그의 가족에게 향했고, 황씨는 추수 끝난 황량한 늦가을 들판에 홀로 선 허수아비처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그는 생업을 포기한 채 딸의 ‘방패’로 자처하면서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의 얼굴과 발언이 신문과 방송에 도배되다시피 했다. 연예인도 아닌데 길 가는 사람조차 그의 얼굴을 알아볼 정도였다. 그는 몹시 지쳐 있었다.

    당시 황씨를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안쓰러운 느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입 다물고 침묵을 지킬 법도 한데, 그는 딸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온몸으로 막아냈다. “남이 뭐라고 하든 수정이는 죽어도 내 딸”이라고 부르짖으며.

    한순간에 늙어버린 아버지

    황수정에게 딸을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자, 눈가가 살짝 젖어드는 것 같았다. 눈물이 쏟아져 내리려는 걸 애써 참으려는 듯 몇 번이나 눈을 깜박거렸다. 목이 메는지 목소리도 갈라졌다.

    “얼마나 맘고생이 심하셨겠어요. 아버지가 연세에 비해 꽤 젊고 잘생기셨는데. 한순간에 폭삭 늙어버리신 것 같더라고요. 그걸 보는 제 마음이 참 많이 아팠죠. 그 일 이후 지금까지 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화 한 번 안 내셨어요. 그저 제가 다시 설 수 있도록 보이지 않게 격려해 주셨죠. 힘든 내색 한 번 안하고 저를 지금껏 지켜주셨죠.”

    황수정은 “가족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자신 때문에 피눈물 쏟은 부모와 남동생을 위해서라도 삶의 희망을 놓지 않고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가족의 힘이 뭔지, 소중함이 뭔지, 사실 예전에는 잘 몰랐어요.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았죠. 그 일을 겪으면서 ‘내 가족밖에 없구나’ 하고 절실히 깨달았어요. 예전엔 사람들이 ‘가족이란 서로 힘들고 지칠 때 지켜주고 도와주는 울타리’라고 말하면 ‘고통당할 때 힘이 되는 친구도 있고 동료도 있지 않으냐’고 생각했는데. 조건 없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존재는 가족밖에 없다는 걸 체험했어요. 다시 일을 하게 된 동기도 부모님 때문이죠. 부모님은 영원한 제 편이더라고요.”

    황수정은 “아버지가 대외적으로 창과 방패가 돼주신 반면 엄마는 상처를 말없이 치유하고 보듬어주셨다”며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힘겨울 때 곁에서 ‘그러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워준 엄마가 있었기에 길거리를 활보할 수 있게 됐다”는 말을 덧붙였다. 황수정은 인터뷰 장소인 카페에서 손님들이 알아보고 손을 흔들자 밝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사진촬영을 할 때 길 가는 사람들이 그에게 눈길을 건네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시선을 고맙게 여기는 듯했다.

    “부모가 자식에게 보낸 무조건적인 사랑과 믿음. 그것에 대해 보답해야겠다고 다짐했죠. 다시 자랑스러운 딸로 태어나고 싶어 이를 악물고 재기하려 했죠. 그것이 부모님께 진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어쩜 그리 잘도 지어내는지…”

    ‘돌아온 예진아씨’ 복귀 후 최초 인터뷰 황수정

    MBC 드라마 ‘허준’에서 예진아씨 역을 맡았을 때의 황수정.

    ▼ 지난 6년 동안 어떻게 보냈나요.

    “안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바삐 살아온 인생에 잠시 쉼표를 찍었다고 생각했어요. 가족과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지냈거든요. 엄마와 쇼핑도 하고 등산도 다녔어요. 가족과 도란도란 대화도 나누고. 예전에는 집이 잠만 자는 공간이었어요. 하숙집 같았죠. 일 속에 파묻혀 있다가 잠시 들러서 씻고 잠만 자는. 오히려 그 일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어요. 잃은 게 많지만 가족의 소중함과 사랑을 얻게 됐으니까요.”

    1994년 SBS 공채 1기 MC로 데뷔한 황수정은 데뷔 초부터 단아한 외모로 인기를 끌었다. SBS 드라마 ‘해빙’(1995) ‘장미의 눈물’(1997) 등에 이어 최고시청률 64.4%를 기록한 MBC ‘허준’(1999)의 예진아씨 역으로 정상의 자리를 밟은 황수정이 연예계를 떠난 것은 2001년 11월. 그가 활동을 중단한 후에도 황수정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끊이지 않았다. 인터뷰 기사가 일부 매체에 실리기도 했다.

    “그동안 인터뷰한 적이 없어요. 저를 만나지 않고도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는 기사를 잘도 내보내더라고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 모 기자에게 자신의 심정을 담은 e메일을 보냈다고 보도된 적도 있는데요.

    “기자에게 e메일은커녕 전화 한 통 한 적 없는데, 어쩜 그리 잘도 지어내서 쓸까요. 없는 일을 꾸며서요. 저는 컴맹에 가까워요. 아직까지 종이 질감이 좋아서 e메일보다는 종이에 쓰는 걸 좋아해요. 나도 모르는 내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잘도 나오더라고요. 나 원 참. 소설도 이런 소설이 없다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특히 몇몇 기자는 소설가로 데뷔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어떻게나 그럴싸하게 지어내던지. 그걸 보면서 ‘아, 내가 이렇게 지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황수정은 ‘그 사건’ 이후 ‘소금인형’ 제작발표회 때 공개적으로 기자들 앞에 나선 것말고는 언론과 접촉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번 ‘신동아’ 인터뷰가 처음이라는 것. 그동안 인터뷰를 꺼린 것은 언론에 대한 불신과 반감이 컸기 때문이라고 했다.

    “방송이나 신문, 잡지 등이 상업성을 벗어날 수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당해낼 재간이 없더라고요. 연일 제 의지와 상관없이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한쪽에서 이 얘기를 쓰면 다른 쪽에서는 그보다 더 자극적인 얘기를 찾아내려 기를 쓰고.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일단 써 놓고 보는 거예요. 언론이 우리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공기’와도 같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정도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없는 사실을 부풀려 흥미 위주로 보도하지 말고.”

    언론에 맺힌 한이 많은 것 같았다.

    ▼ 언론이 하이에나 같다고 생각됐겠네요.

    “하이에나 정도면 다행이게요? 하이에나보다 더한 표범이죠. 그것도 굶주린 표범. 기자라는 직업이 멋있고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무책임하게 쏟아내는 기사가 너무 많아요. 특히 연예인이 먹잇감이 된 경우에는. 오랫동안 굶주린 표범처럼 달려들잖아요.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은 좋지만 막무가내로 물어뜯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공인이니 책임이 따르고 행동을 조심해야 하지만, TV 브라운관 밖에서는 개인 황수정이잖아요. 집에서는 소중한 딸이고. 그런 건 깡그리 무시당한 거죠.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는 “그때 세상을, 사람을 너무나 몰랐다”고 했다. 남의 말을 잘 듣고 믿은 것이 화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거나 남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았다.

    “그때껏 살아오면서 나쁜 일을 당한 적이 없어요. 나쁜 사람을 만난 적도 없고. 그러니 무조건 다른 사람의 말을 믿는 쪽이었죠.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이 누군가로부터 상식 밖의 피해를 당한 적도 없었고요. 그렇게 자라서 그런지 세상 물정을 잘 몰랐고, 세상 사람들이 다 좋다고 생각한 거죠.”

    우물 속에서 살아온 날들

    황수정은 자신에게 남을 쉽게 믿는 바보스러운 면이 있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다고 한다. “내가 좀더 똑똑했더라면” 하고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참 깊은 생각에 잠긴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세상에 절대 용서 못할 일도, 절대 이해 못할 일도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절대’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요.”

    자신을 구렁텅이로 빠뜨린 누군가를 용서했다고 해석되는 발언이었다.

    “남을 미워하지 않고 남 탓하지 않으면서 살기로 마음먹은 거죠.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하니까요. 남을 미워하거나 증오하는 데 시간을 쏟다 보면 제 인상이 찌푸려져 있을 테고, 미움이 가슴에 쌓이면 화가 될 테니까요.”

    인터뷰하는 내내 그가 짓는 미소가 편안해 보였다. 그는 “6년이라는 긴 시간 얻은 게 있다면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라며 그것이 지금의 자신에게 가장 큰 재산이라고 했다. 좋지 않은 일에 대한 기억은 빨리 지워버리고, 좋은 일과 밝은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품고 사는 방법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요. 하루하루 기대감에 눈을 떠요. 예전에는 인터뷰할 때도 마음의 준비 없이 건성으로 했는데, 이젠 안 그래요. 오늘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은 거죠. 과거보다는 다가올 미래를 더 많이 생각해요. 10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11월 달력을 대할 때 ‘벌써 한 해가 가는구나’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텐데, 저는 눈 내리는 겨울이 기다려지고 내년이 기다려져요. 전에는 작품 한두 개 하면 일 년이 후딱 지나갔어요. 계절을 느낄 여유도 없었고 맘 편히 쉴 수 있는 시간도 없었죠. 그저 앞만 보고 달려간 거죠. 아주 좁은 우물 속에서만 살았어요.”

    “당당하게 데이트하고 싶어”

    황수정은 인터뷰 도중 옆 테이블에서 깔깔거리며 수다를 떠는 20대 여성을 바라보면서 “20대에 저런 시간을 가져보지 못했다”며 “나이에 걸맞게 행동하고 경험하면서 사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황수정은 ‘소금인형’에 이어 작가주의 작품으로 명망이 높은 홍상수 감독의 차기작 ‘밤과 낮’에 박은혜와 함께 주연 여배우로 발탁됐다. 지난 8월 프랑스에서 크랭크인 한 ‘밤과 낮’은 40대 화가(김영호 분)가 프랑스에서 겪는 일을 그린 작품이다. 박은혜는 김영호가 프랑스에서 만난 여인, 황수정은 서울에 있는 김영호의 아내 역을 맡았다.

    “영화라는 작업을 통해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내 모습을 발견하고 싶어요. 이제껏 한정된 색깔의 모습만 보여줬거든요. 100% 변신은 어렵겠지만, 적어도 60% 이상 변하고 싶어요.”

    ▼ 예진아씨의 단아한 모습을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데요.

    “많은 사람이 기억해줘서 감사하죠. 그런데 양날의 칼 같은 거죠. 그것은 이미 지나간 역할이거든요. 실제의 제가 아니라 극중 배역일 뿐이고. 다른 역할로 다가서려고 해도 예진아씨라는 이미지의 꼬리표가 따라다녀 쉽지 않아요.”

    “예진아씨 외에 또 다른 ‘꼬리표’도 따라다니지 않느냐”고 지적하자 그가 씨익 웃었다.

    “꼬리표요? 그건요, 제가 진짜 잊어버렸다니까요.”

    미소를 머금은 그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기억 속에서 아픈 과거를 떨쳐낸 지 오래됐다고 다시금 강조했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앞으로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묻자, 그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연애요. 사랑이요. 진짜로 해보고 싶은 게. 웃기는 얘기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당당하게 데이트하고 싶어요. 포장마차에서 어묵도 먹고 싶고. 군밤 까먹으면서 길거리를 거닐어보고 싶고. 보통 사람들처럼, 보통 연인들처럼 진짜 연애다운 연애를 하고 싶어요.”

    “다시 찾아올 사랑이 두렵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는 “사랑이 찾아온다면 거절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제 마지막 사랑을 하고 싶어요. 완성된 사랑을. 영원히 같이 손 맞잡고 머리가 희끗희끗해질 때까지 함께할 수 있는 그런 사랑.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 없진 않죠. 어쩌면 새로운 사랑을 통해 상처 받을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상처가 두려워 사랑을 거부하고 싶진 않아요. 그것 때문에 인간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감정인 사랑을 애써 막고 싶지 않거든요.”

    “손자 안겨 드리고 싶다”

    그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엄마요.”

    그가 짧지만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의 말속에 간절한 소망이 엿보였다.

    “엄마가 되고 아내가 되고. 그렇게 여자로서 행복을 느껴보고 싶어요. 평범한 여자의 삶을 살고 싶은 거죠. 아이 키우는 재미도 맛보면서. 부모님께서 친구들을 만나면 손자 얘기를 많이 하나 봐요. 부담 줄까봐 저에겐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지만. 손자를 안아봤으면, 딸이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으면 하는 바람이 왜 없겠어요. 부모님의 바람을 생각할 때마다 죄송스럽기 그지없죠.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고 아이 낳고 싶어요. 그래서 부모님께 손자 안겨드리고 싶어요. 부모님 얼굴에 웃음꽃 피게 하고 싶어요. 그렇게 살고 싶어요.”

    3시간 동안 이어진 인터뷰 내내 그에게서 진한 ‘사람 냄새’가 묻어났다. “저기요, 배고픈데요. 우리 뭐 좀 먹으면서 얘기하면 안 될까요” 하고 스스럼없이 식욕을 드러내는가 하면 “어쩌죠? 또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하면서 생리현상도 감추지 않았다. 인터뷰할 때면 배고픔도, 화장실 가는 것도 참고 ‘내숭 떠는’ 연예인이 적지 않기에 그의 소탈한 모습이 돋보였다.

    다시 사랑이 찾아온다면 거부하지 않겠다고 고백한 황수정. 인터뷰가 끝난 후 “오늘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하고 밝게 웃으며 뒤돌아서는 그에게 “혹시 사랑이 진행 중이냐”고 물으려다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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