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호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

“나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전원경│주간동아 객원기자 winniejeon@hotmail.com│

    입력2009-05-29 16: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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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보수적인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거센 비난을 샀다. 그럴수록 프로이트는 더 당당해졌다. 유대인으로 갖은 핍박을 받아야 했던 그는 자신에게 반대하고 증오하는 적(敵)이 있어야 더 강해진다고 믿고 살았다. 가난, 나치스의 위협, 제자의 반란, 그리고 20여 년을 괴롭힌 암마저 그의 의지를 꺾진 못했다.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크문트 프로이트<br>● 1856년 모라비아(현 체코) 출생<br>● 1873년 빈 대학 입학<br>● 1886년 개인 병원 개원, 마르타와 결혼<br>● 1900년 ‘꿈의 해석’ 출간<br>● 1902년 빈 대학 부교수로 임명, 수요일 저녁 모임 시작<br>● 1908년 빈 정신분석학회 발족<br>● 1911년 ‘토템과 터부’ 출간<br>● 1913년 카를 융과 결별<br>● 1923년 구강암 수술<br>● 1932년 아인슈타인과의 서신교환집 ‘왜 전쟁인가’ 출간<br>● 1938년 오스트리아, 독일에 합병. 프로이트 일가 영국 망명<br>● 1939년 ‘모세와 일신교’ 출간, 9월23일 83세로 사망

    오래된 도시 런던에는 크고 작은 박물관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대영박물관처럼 크고 유명한 박물관이 있는가 하면, 헨델이나 디킨스처럼 한 위대한 개인에게 바쳐진 박물관도 있다. 이런 작은 박물관들은 대개 그 위인이 생전에 거처하던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경우인데, 위인이 생전에 쓰던 가구는 물론이고 옷과 책들, 모자와 펜 한 자루까지 세심하게 보관해놓은 곳이 많다.

    그 같은 개인 박물관 중에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1856~1939)의 박물관이 있다. 그의 박물관은 학자와 문인이 많이 사는 런던 북부의 햄스테드에 숨듯이 자리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냈지만, 런던에서 눈을 감았다. 유대인인 프로이트는 만년에 오스트리아가 나치스에게 점령당하자, 팔순의 노구를 이끌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런던은 서른 번이 넘는 구강암 수술로 병색이 완연한 노학자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프로이트는 생의 마지막 1년을 런던에서 지내다가 메어스필드 가든 20번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 메어스필드 가든 20번지가 지금의 프로이트 박물관이다.

    필자가 런던에 체류했던 2년 전, 겨울임에도 따스한 햇살을 등진 채 햄스테드의 프로이트 박물관을 찾아 나섰다. 고적한 주택가에 그가 살던 2층집이 있다. 프로이트의 아들들은 이 집을 빈에 있던 집과 똑같이 꾸미려고 애썼고, 프로이트는 ‘우리에겐 참 아름다운 집’이라면서 만족스러워했다.

    프로이트가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은 집만이 아니었다. 국적을 막론하고 뛰어난 재능에 관대한 런던 시민들은 프로이트를 진정으로 환대했다. 영국 왕립협회가 그를 회원으로 받아들였으며 런던의 신문에 늘 그의 동정이 실렸다. 런던 시민들은 산책에 나선 프로이트에게 상냥하게 인사했고 택시기사들은 그가 굳이 목적지를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메어스필드 가든 20번지로 데려다주었다. 임종을 앞둔 프로이트는 자신의 런던 생활에 대해 “내 평생 진정한 명예가 무엇인지 런던에서 비로소 실감했다”고 토로했다. 결과적으로 그가 빈을 떠나 런던을 택한 것은 잘한 결정이었다.

    투쟁으로 점철된 삶



    프로이트가 살던 집 안에는 프로이트가 평생 동안 수집한 이집트와 그리스의 골동품과 장서, 책상, 환자가 정신분석을 받을 때 누웠던 고급스러운 장의자 등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벽에는 달리가 그려준 목탄 드로잉이 걸려 있고, 1층의 책상 위에는 프로이트가 생전에 썼던 동그란 안경이 놓여 있다. 마치 그가 조금 전까지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 창백한 겨울 햇살이 내려앉았다.

    프로이트 박물관을 찾은 이들은 2층에서 그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 프로이트가 망명한 1938년 겨울, BBC 라디오는 이 집에서 프로이트와 마지막 인터뷰를 했다. 그때의 육성이 2층의 비디오 룸에서 흘러나온다. 내용은 대강 이런 것이다.

    “정신분석학을 처음 주장한 이래 나는 많은 이에게 비난과 모욕, 핍박을 받았다. 이제 시간이 흘러 세상은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인정해주고 있다. 나는 이 사실이 자랑스럽다. 그러나 나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My struggle is not over yet).”

    카랑카랑한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영어가 유창하다는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인터뷰를 할 당시 프로이트는 여든둘의 노인이었으며 구강암 수술로 입 안의 치아와 점막이 대부분 제거된 상태였다. 이 때문에 ‘나의 괴물’이라고 부르던 보철기를 입 안에 끼우고 있어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더구나 독일어권에서 평생을 살아온 프로이트가 영어로 유창하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것이 꽤 인상적이었다(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프로이트는 영어 외에 프랑스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등에 능통하고 특히 영어 실력은 셰익스피어 작품을 원문으로 읽을 만큼 뛰어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내게 지워지지 않는 인상으로 각인된 것은 프로이트의 영어 실력이 아니라 그가 남긴 한 줄의 문장이다. “나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그 말은 프로이트의 평생을 압축한 것일지 모른다. 실제로 그의 인생은 탄생부터 사망까지 투쟁으로 점철됐다. 그리고 조용해 보이는 이 남자는 무쇠보다 더 강한 의지로 모든 장애물에 맞섰다. 일찍이 프로이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신념을 가진 인간은 무한정 강하며 결코 죽지 않는다.” 실제로 그랬다. 유대인이라는 태생도, 교수의 길을 포기하게 만든 가난도, 정신분석학에 쏟아진 학계의 비난과 공격도, 빈 시민들의 경멸 어린 시선도, 심지어 죽음마저 그를 무릎 꿇릴 수 없었다. 그는 강한 적을 만나면 더욱 강해지는 사람이었다.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

    1923년 무렵, 손자들과 함께한 프로이트.

    “나는 인도로 걷겠다”

    프로이트의 생애에서 아버지가 차지한 자리는 결코 작지 않다. 프로이트가 인간 사회의 근원을 이룬다고 생각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성(性)적인 환각이 부모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가설에서 시작된다. 즉 ‘아버지를 (어머니를 사이에 둔) 경쟁자로 증오하는 남자아이는 아버지가 자신을 거세할 것이라며 불안해하는데, 여성의 생식기를 관찰함으로써 거세의 실제적인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경쟁하기를 포기하고 대신에 아버지를 자기와 동일시하고 내면화함으로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한다.’(프로이트 ‘여성의 성욕’, 김덕영 ‘프로이트, 영혼의 해방을 위하여’에서 재인용) 사내아이가 최초로 경쟁자이자 분신으로 받아들이는 대상이 아버지인 것이다.

    프로이트의 아버지 야콥 프로이트는 보헤미아에서 빈으로 이주한 상인이었다. 장사는 동유럽에서 유대인들이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으나 아이가 많은 프로이트 일가는 늘 가난에 쪼들렸다. 야콥 프로이트는 지식인은 아니었지만 박학했다. 어느 날 열한 살의 소년 프로이트는 아버지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아버지가 젊을 때, 새 모자를 쓰고 거리를 걷다가 한 독일인에게 모욕을 당한 이야기였다. 독일인은 야콥의 머리를 쳐서 모자를 떨어뜨리며 “이 유대인 새끼, 인도에서 내려가지 못해!” 하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소년 프로이트는 당연히 아버지가 맞서 싸웠을 거라 생각하며 물었다. 아버지는 대답했다. “차도로 내려가서 진창에 떨어진 모자를 주웠지.” 당시 동유럽에서 유대인이 이런 대우를 받는 건 다반사였으나 프로이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소년 프로이트는 그 자신 어떤 일이 있어도 모욕과 억압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차도로 내려서지 않고 인도로 걷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이를 어기지 않았다.

    김나지움(고교) 시절 그리스어로 씌어진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독일어로 번역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학생이었던 프로이트는 빈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교수가 되고 싶었으나 가난과 유대인에 대한 차별 때문에 개업의가 됐다. 하지만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빈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교수가 되기까지 평균 8년이 걸렸다. 프로이트는 무려 17년을 기다렸다. 1902년 마침내 의과대학의 부교수가 됐지만 보수가 없는 명예직이었다. 프로이트 교수는 친구에게 비꼬는 듯한 편지를 보냈다. “황제 폐하께서 어린아이의 성의식이 그토록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라도 하신 걸까, 아니면 의회의 3분의 2 이상이 정신분석학의 존재 의의에 대해 찬성표를 던진 것일까?”

    히스테리 환자의 비밀

    프로이트는 가난 탓에 아름다운 약혼녀 마르타 베르나이스와의 결혼을 4년이나 미뤘다. 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신경과 의사로 개업한 후에야 마르타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8년 사이에 세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이 차례로 태어났다. 프로이트는 아이들과 아내,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처제 민나까지 대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일주일에 6일, 하루 열 시간씩 환자를 진료했다. 끊임없이 환자를 보고, 저녁이면 환자들의 용례를 글로 쓰는 일상이 무려 52년간 지속됐다. 이를 통해 ‘꿈의 해석’(1900년)을 비롯한 저서들이 완성되고, 정신분석학이 탄생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환자를 여럿 만났다. 갑자기 팔다리가 마비되거나 말을 못 하는 등 갖가지 이상증세를 보이는 히스테리 환자들을 진찰하면서, 이들의 꿈에 나타난 상징들을 분석하면 그 사람의 심리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꿈속, 즉 한 사람의 무의식 속에 들어있는 ‘중대한 비밀’은 모든 사내아이가 본능적으로 어머니와 성관계를 맺고 싶어하고 아버지에게 살의를 느낀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 기이한 감정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빈 학계는 ‘어린아이에게도 성욕이 있으며 억압된 성욕이 도사리고 있는 무의식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프로이트의 학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전 유럽에 퍼져나간 자유와 진보 사상이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늙은 황제 요제프 1세는 고집스럽게 절대주의 왕정을 신봉하고 있었으나 오늘날의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에 걸쳐 있던 광대한 제국은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외양은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 화려했지만, 과거의 환상 속에서 죽어가는 도시, 이것이 19세기 말 빈의 실상이었다.

    ‘악명 높은’ 프로이트

    이런 빈이 성에 대해 파격적인 주장을 하고 나온 프로이트를, 더구나 유대인인 그를 환영할 리 만무했다. 학자와 시민들은 일제히 프로이트에게 야유와 비난을 퍼부었다. 프로이트는 결혼하기 전, 함부르크에 머물고 있던 약혼녀 마르타에게 ‘나는 빈과 싸움을 시작했소’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는데, 정말로 그는 인구 200만의 대도시(20세기 초의 빈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였다) 전체와 싸우기 시작했다. 빈 시민들은 프로이트의 집과 진료실이 있는 베르크가세를 피해 다니고, 거리에서 프로이트를 보기라도 하면 일부러 길을 돌아갔다.

    프로이트는 이 같은 경멸과 무시에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항상 친한 친구와 증오하는 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 둘이 있어야 나는 거듭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거기에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지한 대중이 보내는 비난의 화살에 상처 받지 않았다. 유대인이라는 태생 역시 그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유대인들은 박해와 모멸의 역사를 견디며 수천년 이상 살아남지 않았는가! 프로이트 역시 성공과 명예, 무엇보다 가족을 먹여 살릴 경제적 안정을 갈망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대중의 인정과 명예가 아니라 스스로 만족할 만한 연구결과였다.

    프로이트가 보여준 신념의 절정은 런던으로 피난해서 죽기 전 마지막으로 쓴 ‘모세와 일신교’라는 책에서 확인된다. 그가 암과 싸우며 집필한 이 책은 모세가 유대인이 아닌 이집트인이며, 일신교를 최초로 섬긴 이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집트인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히틀러와 게슈타포에 의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던 유대인에게 같은 유대인인 프로이트가 ‘사실 당신들에게는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주장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선언한 셈이다. 이 책의 내용은 실제로 많은 유대인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

    영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프로이트가 살았던 빈 베르크가세의 집.

    유대인인 과학사가 찰스 싱어는 ‘모세와 일신교’의 내용을 미리 알고 책을 출판하지 말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프로이트에게 보냈다. 프로이트의 응답은 냉랭했다. ‘나는 평생 과학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지하며 살아왔소. 그것이 설사 내 동료들에게 불편하고 기쁘지 않은 일이라 하더라도 말이오. 나는 그걸 부정하며 인생을 끝낼 수 없소… 나는 어떤 위험도 감수할 것이오.’ ‘모세와 일신교’는 프로이트가 죽기 4개월 전인 1939년 5월 출판됐다. 판매는 호조를 보였으나 유대인 지식인들이 격렬하게 그를 비난했다. 프로이트는 책이 잘 팔린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비난은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노학자는 오히려 이 같은 격렬한 찬반양론 덕분에 조금 젊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 자신의 말마따나 프로이트는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악명 높은’ 사람이었고, 그 악명 높음을 즐길 정도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황태자 융의 반란

    프로이트가 1911년에 출간한 ‘토템과 터부’는 부족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절정은 자식들이 봉기해서 아버지를 잡아먹는다는 데 있다. 즉 ‘아들들은 아버지를 마법이라 믿었고, 그의 초자연적인 힘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아버지를 이상화하고 그를 숭배했다. 이 과정에서 종교가 생겨났다.’(마크 에드문슨 ‘광기의 해석-프로이트 최후의 2년’)

    프로이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진료와 학문이었고 가정생활은 그 다음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가족에게 무관심한 아버지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아들들을 제치고 막내딸 안나에게 정신분석학을 가르치고,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안나는 아버지 프로이트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이자 학문적 동지였으며, 프로이트가 만년에 가장 의지한 사람이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간에 아내 마르타가 아닌 안나의 동의를 구했다.(아동정신분석학자가 된 안나는 아버지가 타계한 후 메어스필드 가든 20번지에서 43년을 더 살다 1982년 세상을 떠났다. 결혼하지 않고 평생 ‘안나 프로이트’로 살았다.)

    애당초 프로이트가 후계자로 점찍어둔 이는 스위스 출신의 신경정신과 의사 카를 구스타프 융이었다. 정신분석학은 오로지 프로이트라는 한 천재에 의해 태동한 학문이었으며, 그것도 학교가 아닌 임상에서 태어난 사생아 같은 학문이었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을 배우려는 사람은 대학이 아니라 프로이트의 병원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정신분석학을 배우려는 젊은 의사들이 빈 베르크가세 19번지에 있는 프로이트의 집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1902년부터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베르크가세의 집에서 맥주를 앞에 둔 토론회가 열렸다. 이 모임이 훗날 ‘국제정신분석학회’로 성장했다. 프로이트는 국제정신분석학회의 초대 회장으로 융을 지목했다. 융 외에 카를 아브라함, 산도르 페렌치, 어니스트 존스 등도 프로이트가 총애한 제자들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첫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기 전, 그들에게 직접 정신분석을 시도했다.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몇 년까지 걸린 이 정신분석 과정을 통해 프로이트는 제자들의 무의식을 파악했고, 그 결과 그들의 심리상태와 일거수일투족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프로이트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처럼 군림했다. 1909년 클라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미국을 방문할 당시 위풍당당하게 이 ‘아들들’을 이끌고 감으로써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로이트 자신이 ‘토템과 터부’에서 예고했던 것처럼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주동자는 프로이트가 ‘황태자’라고 부른 융이었다. 융은 무의식이 욕망의 근원지가 아니라 지혜의 보고라고 주장했다. 융은 무의식이 의식보다 한결 더 분별력 있고 창조적이라고 본 것이다. 프로이트는 학문적 ‘아들들’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쏟았지만 아들들이 아버지의 권위, 즉 학문에 도전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거인의 어깨에 앉은 난쟁이는 더 멀리 볼 수 있습니다”라고 반박하면, 프로이트는 시가에 불을 붙이며 거만하게 말했다. “그렇군, 하지만 천문학자의 어깨에 앉은 사람은 뭘 볼 수 있지?” 융은 격렬한 토론 끝에 1913년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했다. 20여 년 후 노령의 프로이트가 나치스의 체포 위협을 받고 있을 때, 융은 히틀러의 열성적 추종자가 되어 있었다.

    모든 아들이 ‘아버지를 잡아먹은’ 것은 아니었다. 나치스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오스트리아의 유대인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자 영국인 제자 어니스트 존스는 스승의 영국 망명을 위해 백방으로 손을 썼다. 결국 영국 정부가 프로이트 일가의 망명을 허가했지만, 나치스는 거액의 배상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프로이트 일가의 출국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발목을 잡았다. 이때 또 다른 제자 마리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의 동생 루시앙 보나파르트의 증손녀)가 나서 배상금을 지급함으로써 스물네 명에 이르는 프로이트 일가족이 무사히 오스트리아를 벗어날 수 있었다.

    자유로운 죽음

    프로이트 일가처럼 온 가족이 망명에 성공한 것은 당시로선 극히 드문 일이었다. 유대인에 대한 나치스의 증오는 저명인사라고 해서 누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저명인사의 씨를 말리려고 했다. 실제로 슈테판 츠바이크, 발터 벤야민 등 많은 유대인 학자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죽거나 자살했다. 프로이트 역시 온 가족이 죽기에 충분한 양의 독약을 지니고 다녔다. 애당초 그는 빈을 떠날 생각이 없었으며 빈에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38년 3월22일, 게슈타포가 딸이자 후계자인 안나를 연행해가자 프로이트의 생각이 바뀌었다(연행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이날 저녁 늦게 안나는 베르크가세의 집으로 돌아왔다). 나치스가 원하는 대로 죽음을 택한다면, ‘삶이 지속되는 동안 그 어떤 것에도 억압받지 않겠다’는 자신의 신념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비록 자신이 가망 없는 암환자이지만, 적어도 나치스의 손에 죽거나 그들의 강압에 의해 죽음을 택해선 안 된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1938년 5월, 프로이트는 먼저 영국에 가 있던 아들 에른스트에게 편지를 보냈다. “두 가지 희망 때문에 나는 이 잔인한 시간을 견딜 수 있다. 하나는 너와 다시 합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유롭게 죽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1938년 6월4일 마침내 빈을 떠나 런던으로 향했다. 그의 나이 82세였다.

    세상에 알려진 프로이트의 사인(死因)은 구강암이다. 1923년 처음 구강암 진단을 받은 이래 프로이트는 16년간 재발을 거듭하는 암과 싸웠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암으로 죽은 게 아니다. 1939년 9월23일에 프로이트는 모르핀 과다 투여로 인한 쇼크로 사망했다. 그에게 생명을 끊을 정도의 다량의 모르핀을 투여한 사람은 주치의 막스 슈어. 슈어는 프로이트와 한 약속을 지켰다.

    암 발병 이래 프로이트는 20년 가까이 죽음을 준비했다. 그는 지성을 유지한 채로 존엄성을 잃지 않으며 죽기를 바랐다. 프로이트가 가장 원한 죽음의 방식은 연구실에서 죽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1929년, 마리 보나파르트의 추천으로 만난 의사 슈어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면 편안하게 죽게 해줄 것. 슈어는 환자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1939년 여름 들어 프로이트의 종양은 더는 손쓸 수 없는 상태로 악화됐다. 이미 청신경이 마비돼 소리를 들을 수 없었고 암세포는 턱과 눈, 뇌에까지 침입했다. 마침내 조직이 괴사하며 뺨에 구멍이 뚫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턱뼈가 썩으며 악취를 풍기자 파리 떼가 몰려들었다. 안나는 아버지의 침대 주변에 방충망을 쳐야 했다.

    가끔 정신을 잃긴 했지만 프로이트의 의식은 또렷했다. 프로이트의 바람대로 그의 병실은 메어스필드 가든 1층의 서재 겸 연구실에 꾸며졌다. 40년 이상 환자들이 누워 그가 개발한 ‘자유연상법’에 따라 이야기하던 장의자에 이제 프로이트 자신이 누웠다. 아마도 그는 삶을 돌이켜보았을 것이다. 소원은 모두 이루어졌다. 빈을 탈출해 자유로워졌으며 1920년 인플루엔자로 사망한 딸 소피를 제외하면 다섯 명의 아들딸이 모두 곁에 있었다. 몇 년 동안 써온 ‘모세와 일신교’도 출판됐다. 프로이트는 더 이상 고통을 견뎌야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9월21일 발자크의 소설 ‘상어가죽’을 끝까지 읽고 난 뒤 주치의 슈어를 불렀다. “우리가 처음 나눴던 대화대로 해주게. 이제 고문받는 느낌말고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네.”

    고문받는 느낌. 그것이 프로이트가 대한 죽음의 얼굴이었다. 안나는 슬퍼하며 아버지의 선택에 동의했다. 슈어는 치사량에 이르는 모르핀을 9월21일과 그 이튿날, 세 번에 걸쳐 투여했다. 프로이트는 독일어로 “고맙네”라고 말한 뒤 곧 의식을 잃었고, 이틀간 혼수상태에 있다 23일 새벽 사망했다. 유대인임에도 평생 무신론자로 산 프로이트는 죽음의 순간에 어떤 종교 의식도 청하지 않았다.

    전쟁 같은 인생의 보호자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불굴의 의지로 죽음마저 자신의 방식대로 통제한 프로이트가 끝내 이기지 못한 대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담배다. 프로이트의 아버지는 여든한 살까지 담배를 피웠다. 프로이트는 스물네 살에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잠시 코카인을 맞은 적이 있는데(당시 코카인은 금지 약물이 아니었다), 이때를 제외하고 늘 시가를 물고 살다시피 했다. 많게는 하루 스무 개비 이상의 시가를 피웠다. 구강암이 한참 진행되어 스스로 입을 벌리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도 집게로 입을 벌리고 시가를 물었다.

    프로이트는 1917년에 처음으로 입천장에 종양이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시가를 못 피우게 될 게 두려워 6년이나 종양을 방치했다. 1918년, 아직 한창 나이인 62세에 안나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은 그 스스로 입천장의 종양이 치명적인 것임을 예감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무튼 프로이트는 6년 동안 종양 발병 사실을 의사에게 알리지 않았고, 시가도 계속 피웠다. 그 대가는 가혹했다. 1923년 4월 프로이트는 구강암 진단과 함께 첫 수술을 받았다. 안나가 정신분석의로 개업한 해였다. 첫 번째 수술 이래로, 프로이트는 16년간 무려 서른두 번의 수술을 더 받았다. 종양이 온 얼굴과 턱뼈를 뒤덮고 뺨에 구멍이 뚫리는 지경이 될 때까지 아스피린 외의 어떤 진통제도 거부하면서, 끝끝내 시가를 포기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암과 싸우는 동안 프로이트가 보여준 용기는 실로 영웅적인 것이었다. 그는 암을 ‘내 오랜 친구’라 불렀으며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나와 암 중에 누가 더 강한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네”라고 썼다. 암의 고통이 격심하게 몰려올 때면 아스피린을 먹은 후 시가를 입에 문 채 글을 썼다.

    프로이트에게는 중요한 세 가지 취미가 있었다. 골동품 수집, 개 키우기, 그리고 시가가 그것이다. 이집트와 그리스, 인도 등의 골동품은 지금도 프로이트의 진료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런던으로 급히 망명할 때 프로이트는 수집품들을 빈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런던 망명 후 ‘프로이트 박사가 평생 모은 골동품들을 빈에 남겨두고 왔다’는 신문기사가 나가자, 영국 전역에서 갖가지 골동품이 프로이트의 집으로 배달됐다. 프로이트는 영국인들의 이 같은 마음씀씀이에 감복했지만, 그것으로 허전한 마음을 채울 수는 없었다. 보나파르트를 비롯한 제자들의 도움으로 빈의 수집품들이 고스란히 영국으로 건너온 것을 보고서야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골동품에 대한 집착이나 시가 중독은 결국 욕망의 다른 모습이다. 프로이트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시가를 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보다 훨씬 더 무섭고 맹렬한 상대들도 이겨온 프로이트가 아닌가. 그러나 그는 흡연을 포기할 마음을 먹지 않았다. 프로이트의 말에 따르면 ‘시가는 전쟁과도 같은 인생의 보호자이자 무기’였다. 남겨진 사진 속의 프로이트를 보면, 죽기 한 해 전인 여든두 살까지 시가를 피우고 있다. 담배는 그가 투쟁할 대상이 아니라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위안이었다.

    담배나 골동품이 주는 안식이나 개들의 충직함 같은 소박한 감정에 의지했다고 해서 프로이트가 나약한 인간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이 없었다면 프로이트는 하루 10시간의 진료와 밤 시간의 집필이 계속되는 빡빡한 일상, 그리고 수많은 반대와 경멸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강철 같은 의지를 지녔더라도 그 역시 한계가 있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었다. 무의식을 분석해 인간 심리의 저변을 해석해내고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던진 프로이트도 욕망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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