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호

눈부신 봄 길을 걷다가 펑펑 울었습니다. 선생님 제자라서 참 좋았 어요. 사랑합니다.

불민한 후학이 장영희 교수님을 보내며

  • 이남희│동아일보 역량강화팀 기자 irun@donga.com│

    입력2009-06-04 20: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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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그의 제자라는 사실이 늘 자랑스러웠다. 만년소녀 같은 따뜻한 글에 위로받고, 때론 엄격한 질책을 받으며 나는 성장했다. 우리 사회의 희망 메신저로 불리며 뭉클한 감동을 남기고 떠난 스승, 고(故) 장영희 교수를 추억한다.
    눈부신 봄 길을 걷다가           펑펑 울었습니다. 선생님 제자라서 참 좋았          어요. 사랑합니다.


    알림-장영희 교수님이 오늘 오후 1시에 돌아가셨대요.’봄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던 5월9일. 대학 후배가 보낸 한 통의 문자 메시지를 받고, 나는 길을 걷다 눈물을 쏟았다.

    “스승의 날 연락드리려 했는데, 이렇게 빨리 가시면 어떡해요….”

    때를 놓치고 후회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원고 써 달라” “인터뷰 해달라”며 급할 때만 은사를 찾던 제자는, 속죄의 마음으로 스승을 추억하고자 한다. 봄 햇살보다 환한 스승의 미소를 그리면서 말이다.

    이렇게 빨리 가시면 어떡해요…



    고 장영희 교수(서강대 영미어문·영미문화학부)의 제자라는 사실은 내게 훈장이었다. 소아마비, 그리고 세 번씩 찾아온 암과 싸우면서도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던 스승의 숭고한 삶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으니까. 대학 시절 2주에 한 편씩 영어 소설을 읽을 때마다 ‘공포의 퀴즈’를 치르고, 빨간 펜 코멘트로 너덜해진 영어 리포트를 돌려받으며 치열하게 공부할 수 있었으니까. 제자로, 조교로, 기자로 교수님과 인연을 이어간 건 내게 커다란 행운이었다.

    눈부신 봄 길을 걷다가           펑펑 울었습니다. 선생님 제자라서 참 좋았          어요. 사랑합니다.
    그는 죽어서도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 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살았던 초인적 의지는 나에게, 아니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장 교수의 별세 소식이 알려진 후, 그의 저서는 평소보다 14배 넘게 팔릴 만큼 인기다. 장 교수를 추모하는 열기는 희망에 목마른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뛰어난 영문학자이자 번역작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수필가로 평가받은 그의 삶은 역경과 극복의 연속이었다.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첫돌을 앞두고 소아마비를 앓았다. 두 다리와 오른팔이 불편해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어머니의 등에 업혀 학교를 다녔다. 어머니는 눈이 오면 길에 연탄재를 깔고, 비가 오면 우산을 받쳐 든 채 딸의 등하굣길을 지켰다. 그래서일까. 평소 “죽은 사람들의 유언에 관심이 많다”고 말하던 은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단어는 ‘엄마’다.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그는 중·고등학교에 진학할 때도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마다 버팀목이 돼준 사람은, ‘한국 영문학계의 태두’로 불리는 장 교수의 아버지 고 장왕록 선생(서울대 명예교수·1994년 작고). 일반학교에서 장애 학생을 쉽게 받아주지 않던 시절, 아버지는 딸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교장실을 찾아가 입학을 간청했다. 딸의 문학적 재능과 풍부한 상상력을 일찌감치 알아봤기 때문이다.

    장 교수는 2004년 4월호 ‘신동아’의 ‘나의 삶, 나의 아버지’ 기고문에서 “1급 신체장애를 가진 딸을 이 사회에서 살아남게 한 것은 오로지 아버지의 필사적인 노력 덕분”이라고 회상했다.

    학교 성적은 우수했지만, 대학에 들어가는 과정도 험난했다. 여러 대학이 신체장애를 이유로 시험 볼 기회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그를 두 팔 벌려 맞이한 유일한 학교가 서강대다. “제발 입학시험만이라도 치르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장왕록 선생에게 당시 영문과 과장이던 브루닉 신부는 이렇게 반문했다.

    “아니, 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보나요. 장애인이라고 시험 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더 큰 세상을 열어준’ 서강대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했다. 아니, 절대적이었다. “등록금 인상 거부 투쟁 때문에 수업에 빠진다”고 말하는 학생에게 그는 “서강대가 얼마나 훌륭한 학교인데 그렇게 철없는 짓을 하느냐”고 꾸짖었다.

    그가 박사과정에 들어갈 때도 좌절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 A대학의 면접관은 그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우리는 장애인을 학부 학생으로도 선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 그가 부모님께 낙방 소식을 전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늦추려고 찾아간 곳은 영화관. 상영 중인 작품은 ‘킹콩’이었다.

    눈부신 봄 길을 걷다가           펑펑 울었습니다. 선생님 제자라서 참 좋았          어요. 사랑합니다.
    “그때 나는 전율처럼 깨달았다. 이 사회에서는 내가 바로 그 킹콩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단지 내가 그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미워하고 짓밟고 죽이려고 한다. 기괴하고 흉측한 킹콩이 어떻게 박사과정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나 역시 내 운명을 잘 알고 있었다. 사회로부터 추방당하여 아무런 할 일 없이 남은 생을 보내야 하는 삶, 그것은 사형 선고와 다름없었다.”(수필집 ‘내 생애 단 한 번’ 중)

    그는 영화관을 나와 집으로 오는 길에 토플 책을 샀다. 이듬해 8월 장학금을 약속한 뉴욕주립대로 유학을 떠났다.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1985년, 그는 당당히 모교 강단에 섰다.

    그는 교단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철저한 스승이었다. 100명 넘게 듣는 수업의 학생들 이름을 한 달 만에 모조리 외웠고, 시험을 보면 오답까지 일일이 체크해 학생들에게 돌려줬다. 생소한 영문학 작품도 가슴으로 느낄 수 있게 풀어내는 해설은 수업의 보너스 같은 것이었다.

    선친의 뒤를 잇는 영문학자이자 최고의 수필가로 승승장구하던 어느 날. 그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미국 하버드대 방문교수로 일하던 2001년 유방암 판정을 받은 것. 그는 수술 소식을 밖으로 알리지 않고, 그곳에서 홀로 암을 이겨냈다. ‘남들이 무서워 벌벌 떠는 암을 초전박살 냈다’고 자신을 대견해하면서 말이다.

    2001년 어학연수차 미국 보스턴에 머물던 나는 우연히 교수님과 거리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 그는 머나먼 이역(異域)에서 만난 제자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더없이 밝고 명랑해 보였던 교수님이 당시 ‘암과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야 알았다.

    그는 당시 잡지에 연재하던 글에도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고백하지 않았다. “신에게 자신이 불운의 대상으로 선택됐다는 사실에 화가 났고, 동정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존심 상했기 때문”이다.

    3년 후에는 척추암이 찾아왔다. 유방암이 경추 3번으로 전이돼 목과 허리에 지독한 통증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투병 소식을 감추지 않았다. 병을 훌훌 털고 일어나겠다는 의지를 한 신문에 담담히 밝혔다.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넘어질 때마다 번번이 죽을힘 다해 다시 일어났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나는 다시 일어설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넘어져봤기에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몸이 불편하고 아프다보면, 짜증이 잦아지고 의욕도 사라지게 마련. 하지만 그는 암 환자라고는 상상도 못할 만큼 초연한 모습이었다. 2006년 봄 스물네 차례의 항암치료를 마친 고인을 인터뷰할 때도, 그는 오히려 투병생활을 유머러스하게 들려주며 나를 배꼽 잡게 만들었다.

    “병원에 누워서 하루 종일 TV를 보는데 제일 웃기는 게 바로 화장품 광고였어. 예쁜 여배우가 광고에 나와 ‘피부가 촉촉해져요’ 하는데, 사실 피부가 촉촉하고 말고의 문제는 ‘죽느냐 사느냐’에 비하면 정말 사소한 거잖아. 항암치료를 받으며 피부가 거칠어진 나는 아무리 좋은 화장품을 써도 소용이 없는데…. 병실에 앉아서 세상을 보니, 사람들이 가치 없는 것들에 가치를 지나치게 부여하는 한심한 상황이 벌어지더라고. 그런데 더 재밌는 게 뭔지 알아? 퇴원을 하고 보니 나도 다시 화장품 광고에 귀가 솔깃해지는 거야. 호호.”

    그토록 고통스럽다는 항암치료 과정을 얘기할 때도 교수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밝은 표정은 여전했다. 육체적 통증이 그를 괴롭힐수록 그의 정신은 더욱 명징해지는 듯했다.

    “한 번 방사선을 쐬면 식도가 같이 타 들어가. 그래서 물 한 모금을 마셔도 칼 조각을 삼키는 것 같이 괴롭더라고. 암이라는 병 덕분에 요즘 내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공부를 하고 있어. 내 몸이 얼마나 소중한지, 또 나의 아픔을 통해 남의 아픔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거지.”

    정 많은 선배, 엄격한 스승

    암 투병 중에도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글을 왕성하게 썼다. 올해 안식년을 갖기 전까지 학교에서 교양영어 주임을 맡았다.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증을 끊고 나와 교수회의를 주재할 만큼 일처리에 빈틈이 없었다. 그뿐인가. 학교 행사에도 발 벗고 나섰다. 2005년 11월 ‘서강대 영문과 후원의 밤’ 준비위원장을 맡아 행사를 성공리에 마쳤다.

    그는 2006년 7월부터 2008년 6월까지 ‘동아일보’에 칼럼을 쓰기도 했다. “힘든 여건 속에서도 마감 시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 칼럼 편집인의 회고다.

    “교수님,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라고 할 때마다 그는 “글을 쓰던 사람이 갑자기 그만두면 금단증상 같은 게 생긴다”고 말했다. ‘무언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은 그에게 삶의 큰 의미가 됐다.

    그의 죽음 이후, 각종 기사와 인터넷 블로그에는 그의 헌신적 제자 사랑을 회고하는 이야기가 넘쳐난다.

    “잔인할 정도로 빡빡한 수업을 종강하던 날, 교수님이 직접 만든 책갈피를 자신의 책에 끼워 선물로 주셔서 감동했다.”

    “한 번도 수업을 들은 적 없는 제자를 위해 교수님이 추천서를 써주신 덕분에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교수님 방에 청첩장을 놓고 왔더니 ‘너희의 우주 같은 사랑을 축하한다’는 메일과 책 선물을 보내주셨다.”

    작은 부분까지 섬세하게 배려함으로써 주변 사람에게 큰 행복을 선사하는 것은 교수님의 장기다.

    정 많고 따뜻한 교수님. 그러나 내게는 엄격하고 무서운 스승이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난 교수님께 칭찬보다 꾸중을 들은 적이 더 많다. 2000년 학부 조교 시절, 나는 일을 어설프게 처리했다가 교수님께 혼이 빠질 만큼 야단맞았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심장이 콩닥거린다. 당신에게 지독히 엄격했던 만큼, 교수님은 학교 안에서 학생들에게 누구보다 깐깐하게 원칙을 내세웠다. 당시 교수님께 혼나면서 새긴 교훈은 ‘변명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눈부신 봄 길을 걷다가           펑펑 울었습니다. 선생님 제자라서 참 좋았          어요. 사랑합니다.
    “네가 쓴 기사 정말 껄끄럽다”

    ‘여성동아’에 글을 쓰던 2006년 봄, 교수님을 인터뷰한 기사의 초고를 보여드렸다가 당신을 “비극의 여왕으로 그렸다”며 무섭게 혼이 났다. ‘신체장애, 암과 싸우는 극복의 상징’으로만 그려지는 것을 싫어하셨기 때문이다.

    “네가 쓴 기사, 이런 방향이라면 정말 껄끄럽다. 장애나 암 투병 이미지가 많아서 서강대 교수나 학자로서의 이미지가 가려지잖아. 작년 인터뷰에 비해 차별화되는 내용도 없고, 새롭게 내는 책 얘기는 적게 들어가 있네. 난 내가 극복의 상징으로 그려지는 걸 원하지 않아. 나처럼 행운을 많이 가진 사람은 없는데 말이야.”

    ‘동아일보’에 들어와서 “기사 작성은 기자 고유의 권한이다” “취재원을 장악하라”고 배웠지만, 그 모든 원칙이 교수님 앞에서만큼은 힘없이 허물어졌다. 교수님과의 초반 ‘기(氣)’ 싸움에서 난 이미 져버렸다. 그 어떤 글보다 잘 쓰고 싶었던 교수님 인터뷰 기사에 대한 처참한 혹평. 나는 교수님의 지적을 들은 뒤 기사를 새로 썼다.

    두 번째 원고를 본 교수님은 “새로운 팩트가 강조돼야 한다”며 제목까지 바꿔 달아주셨다. 마치 학창 시절 교수님의 무시무시한 빨간 펜 코멘트로 채워진 영어 리포트를 돌려받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교수님은 당신이 가르쳐 사회에 내보낸 학생을 ‘애프터 서비스’ 하는 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좋은 글을 귀신같이 알아보는 교수님께 “괜찮게 썼더라”고 칭찬받는 것이 내 목표였다. 하지만 교수님이 떠난 지금, 그 목표는 ‘영원한 미완성’으로 남았다.

    교수님의 삶에서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부분은 바로 번역가로서의 업적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살아있는 갈대’ ‘톰 소여의 모험’ 등 수많은 번역서를 남겼다. 김현승의 시를 번역해 ‘한국문학 번역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교수님의 번역 문장은 영어의 묘미를 정확한 한국어로 맛깔스럽게 표현해낸다. 뉘앙스를 최대한 살리고, 군더더기는 줄인 살아 꿈틀대는 문장! 그의 가르침을 삼분의 일도 흡수하지 못한 건 내가 불민한 탓이다.

    교수님에 대한 나의 기억은 몇 가지 두드러진 이미지로 요약된다. 목발을 짚고 강의실 문을 당당히 들어서던 모습, 반짝이던 눈망울과 웃음 띤 얼굴, 소녀적 감성이 묻어나는 따뜻하고 담백한 글, 다소 높은 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병마와 싸우면서도 밤을 새워 책을 읽고 글을 쓰던 정력적인 모습…. 그 무시무시한 에너지와 열정에 나는 늘 압도되고 말았다.

    살아 꿈틀대는 문장

    나는 5월10일 빈소에 들러 교수님과 작별인사를 했다. 무심한 제자가 연락 한 번 제대로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세상과 삶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늘나라에서는 자유로운 두 다리로 마음껏 뛰고 날아다니시라고.

    5월13일 서강대 성이냐시오 성당에서 열린 장례미사. 교수님의 오랜 친구인 이해인 수녀의 추모시는 나를 또 한 번 감복시켰다.

    “많은 이에게 희망 전하는 명랑 소녀로 살자고 나와 다짐했던 영희. 천국으로 가는 계단에서 ‘미안해요’ 하고 웃고 있네요. 꽃을 든 천사여. 편히 쉬소서. 지상에 두고 간 그의 향기 속에 슬픔 중에도 위로 받으며 그리움을 달랩니다. 영희야 잘 가, 그리고 사랑해!”

    봄이 오면, 나는 장영희 교수님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것이다. 서강대 캠퍼스에서 교수님을 처음 만난 것도, 스물네 차례의 항암치료를 마친 교수님을 인터뷰한 때도, 교수님과 영별(永別)한 계절도 모두 햇살이 눈부신 봄이다. 세 번째 쳐들어온 간암과 맞서 싸우며 교수님이 그토록 기다린 계절도 푸르른 봄이 아니던가.

    “희망의 힘이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듯이 분명 희망은 운명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이라고. 그 말은 어쩌면 그 학생보다는 나를 향한 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여전히 그 위대한 힘을 믿고 누가 뭐래도 희망을 크게 말하며 새봄을 기다린다.”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중)

    ‘나의 선생님’은 어느덧 ‘우리 모두의 스승’이 되셨다. 고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 희망의 메시지는 영원히 남아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용기를 불어넣을 것이다.

    눈부신 봄날 영면한 고 장영희 교수

    그는 마음을 어루만지는 법을 가르치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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