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업 활동 담보로 정치하는 건 남북 모두의 수치
- 1980년대 부산처럼 개성을 신발의 메카로 키우겠다
- 남북관계 경색 풀리면 개성은 불황 무풍지대
삼덕통상은 이 공단에서 신발을 만든다. 신발은 ‘1980년대 부산’을 먹여 살렸다. 부산은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세계 유명 브랜드 신발을 만들었다.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으로 거점이 옮겨지면서 부산의 신발산업은 쇠락했다.
“1970~80년대 부산은 신발로 먹고살았죠. 가정의 소일거리도 신발이었어요.”
삼덕통상 문창섭(59) 대표는 30년 넘게 신발 밥을 먹고 있다. 주말이어서인지 운동화를 만드는 공장은 한가해 보였다.
“부산공장엔 160명이 일합니다. 설비를 개성으로 거의 다 옮겼어요. 개성공단서 2800명이 일하죠.”
그는 5월11일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개성공단기업협의회장직을 김학권 재영솔루텍 대표에게 넘긴 것.
▼ 개성공단기업협의회장 임기가 오늘, 내일 딱 이틀 남았습니다.
“경영자 처지에선 과외일은 그만두는 게 득이죠. 명예회장을 맡기로 했습니다. 남북관계가 최악일 때 회장으로 일했어요. 지난해 5월 취임했거든요. 정권이 바뀐 뒤 남북관계가 경색돼 무척 힘들었죠. 수석부회장으로 일할 때도 실무를 도맡아 처리했어요. 개성공단을 현장에서 지켜본 산증인인 셈이죠.”
개성공단은 존폐의 갈림길에 서 있다. 북한은 임금 인상과 토지이용료 지급을 요구하면서 한국 정부를 압박했으며, 현대아산 직원 Y씨를 장기간 억류하고 있다. 북한은 5월15일 개성공단 계약 무효를 선포했다. 새 법규를 못 받겠으면 철수하라는 것이다.
삼덕통상 부산공장.
“보상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기업 생명이 끝나는데. 기업인들은 공단이 폐쇄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다들 전 재산을 쏟아 부었어요. 문 닫는다는 건 꿈에서도 생각하지 않아요.”
▼ 애간장이 타겠습니다.
“기업인들의 몸이 말랐습니다.”
▼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악재를 만났지만 현지는 차분합니다. 생산도 원활하고요. 한국 언론 보도와 공장을 직접 관리하는 사람이 느끼는 분위기는 달라요. 문 닫는 일 없을 거예요.”
▼ 개성공단에 처음 관심 가진 때는 언젠가요?
“2002년 현대아산이 평양을 오갈 때죠. 경제인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지만 봅니다. 정부가 개성공단을 활성화한다고 발표했는데 딱 이거다 싶었어요.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로 설비를 옮기지 않으면 기업 운영이 안 되는 상황이었죠. 개성공단에 다 걸면 되겠다 싶었어요. 노동집약 산업을 운영하는데 개성만한 곳이 없거든요.”
존폐의 갈림길
현대아산과 북한이 개성공단 조성에 합의한 것은 2000년 8월9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요트에서다. 고(故)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을 요트로 부른 김 위원장이 말했다.
“결심했소이다. 개성을 줄 테니 가서 구경해보시오.”
현대아산은 개성이 아닌 해주를 원했다. ‘서해공단’이라는 이름으로 마스터플랜도 짜놨다. 그런데 북한은 신의주를 바랐다. 신의주는 현대아산의 입맛에 맞지 않았고, 해주는 군사적으로 예민한 곳이었다.
“북한은 처음엔 나진, 선봉을 언급하다 신의주 카드를 꺼냈습니다. 윗분이 신의주를 거론했다기에 내가 직접 신의주에 갔죠. 부지는 위화도, 신의주를 아울렀는데 문제가 많았어요. 항구가 몹시 작았고 토사가 흘러 확장도 어려웠습니다. 결국 김 위원장에게 리포트 2개(해주, 개성)가 올라갔는데, 그 뒤 1년간 답이 없었습니다.”(김고중 전 현대아산 고문)
해주와 개성은 모두 군사적 요충. 북한으로선 둘 다 앞마당을 내주는 꼴이었다. 김 위원장은 장고 끝에 개성을 내주기로 결정했다. 현대가 요구한 해주는 북한 해군의 핵심 거점이다. 북한은 개성을 내주면서 주둔하던 군대를 후방으로 뺄 만큼 공단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개성공단을 볼모로 서울을 압박하는 지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2007년 3월 삼덕통상 공장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
▼ 개성공단에 진출한 걸 후회한 적은 없나요?
“판단이 들어맞았습니다. 경쟁력이 높았어요. 꿈에 부풀었죠.”
개성공단 생산품 1호는 냄비다. 2004년 12월 리빙아트 컨베이어 벨트에서 냄비가 밀려나왔다. 삼덕통상은 2004년 4월 토지를 분양받고, 2005년 4월부터 신발을 생산했다.
“첫 제품이 나왔을 때 감회는 말로 옮기기 힘들어요. 감격이었죠. 언론도 ‘통일 신발’나왔다면서 떠들썩했고요. 허허벌판에 공장 짓고 노동자 교육시켜서 바이어 주문받은 제품이 쏟아져 나오는 걸 보는데…. 너무 기뻤죠.”
▼ 어떻게 교육했나요?
“2004년 7월 북한 노동자를 중국으로 데려가 칭다오 공장에서 가르쳤어요. 북한 당국자가 처음엔 난색을 표했습니다. ‘부산도 아니고 칭다오다, 그런 것도 못 해주느냐’고 다그쳤죠. 수개월 밀고 당기다 어렵게 승인받았어요.”
▼ 당시 연수생과 지금도 친한가요?
“중국에서 그 친구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 녀석들이 지금 반장, 조장입니다.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생산력이 오른 건 그 친구들 덕분이죠.”
문창섭 회장은 ‘개성공단이 정치의 볼모가 돼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불황 무풍지대
“개성은 황금 알을 낳는 거위였습니다. 2000년부터 운영하던 중국 공장을 폐쇄해버렸죠. 부산 공장도 규모를 줄였고요. 중소기업의 활로가 개성에 있다고 확신한 때는 2006년입니다. 중국과 동남아는 개성만큼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어요. 우리가 잘나간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다른 신발기업도 개성에 관심을 가졌죠.”
▼ 개성공단이 경쟁력 있는 이유는 뭔가요?
“북측이 주는 건 땅, 물, 공기가 전부예요. 나머지는 남쪽에서 다 가져갑니다. 중국, 베트남에 공장을 세우면 물류비용 때문에 원부자재를 현지에서 구매해야 해요. 한국에서 중국으로 물류가 가는 데 1주일, 오는 데 1주일이 걸립니다. 개성은 당일치기로 물류가 오갑니다. 우리는 기술력이 뛰어난 부산지역 협력업체의 부품으로 개성에서 신발을 만듭니다. 한국에서 신발 부속을 만드는 회사가 4900개에 달해요. 이들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은 개성공단에 입주한 신발회사들 덕에 먹고사는 거예요. 공장을 지을 때도 한국에서 설비를 다 가져갑니다. 개성으로 원부자재가 올라가 제품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물류업체도 돈을 벌고요. 중국이나 베트남으로 공장을 옮기면 한국에 그런 부가가치가 생기지 않아요. 남북이 모두 혜택을 누리는 겁니다.”
▼ 개성에서 만든 제품의 레이블엔 ‘made in DPRK’라고 적히나요?
“한국 내수용은 개성에서 완제품을 만들어 ‘made in korea’를 답니다. 수출용 제품은 개성에서 반제품을 만든 뒤 부산에서 완성해 ‘made in korea’를 달고요. 한국엔 반제품을 만들 노동력이 없습니다. 신발 기술을 배우겠다는 젊은이가 없거든요.”
▼ 개성공단 제품은 미국 수출이 안 되죠?
“OEM으로 만드는 미국 브랜드 제품은 반제품을 멕시코로 보내더군요.”
▼ 운동화 끈만 부산에서 끼워도 완제품은 한국산인가요?
“그렇죠. 부산에서 한국산으로 세탁하는 거예요. 내수 전문회사도 개성에서 제품을 만드는 게 유리합니다. ‘made in china’보다 ‘made in korea’가 한국에서 인기가 높아요. 우리가 OEM으로 만드는 K회사 등산화가 개성에서 제작한 것입니다. 그 회사, 개성산(産) 등산화로 돈 무지하게 많이 벌었어요.”
그는 “정치적 제약만 없다면 개성은 불황 무풍지대”라고 주장했다.
▼ 중국과 비교하면 제품 질은 어떤가요?
“품질은 앞서요. 생산성은 조금 떨어지는데 끌어올리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요.”
▼ 품질이 왜 좋을까요?
“손재주가 중국인보다 뛰어나요. 의사소통이 잘돼 기술진 설명도 잘 전달되고요. 그리고 직원 대부분이 20대 초반의 여자예요. 그 나이 때 여자들이 제품을 가장 잘 만듭니다.”
막강한 종업원 대표
▼ 중국 공장보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뭔가요?
“숙련도가 정점에 오르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해요. 생산성이 올라가는 속도는 중국 공장보다 빠릅니다. 인사권을 온전하게 부여받지 못했다는 점도 생산성에 일부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종업원 대표를 거쳐서 일을 처리해야 해서 불편하죠.”
▼ 종업원 대표의 권한이 막강한가 봅니다.
“우리는 직장장이라고 부릅니다. 북측에선 종업원 대표라고 일컫고요. 한국의 공장장처럼 노동자를 관리합니다.”
▼ 개성공단 직장장은 북한에서 좋은 직업이겠네요? 나이는 얼마나 되나요?
“공장마다 달라요. 지긋한 사람도 있고, 젊은 사람도 있어요.”
▼ 문제가 있는 근로자를 해고할 수는 있나요?
“개성공업지구 법규는 노동자가 문제를 일으키면 해고하게끔 돼 있어요. 품의를 올려서 절차를 밟으면 됩니다.”
▼ 개성에 주재하는 삼덕통상 직원은 얼마나 되나요?
“13명이요.”
▼ 20대 북한 처자와 눈 맞은 직원은 없나요? 개성공단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국적은 어떻게 되나요?
“국제법상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일 생기면 안 되죠. 막아야죠. 북측도 예방교육을 실시하는 걸로 알아요.”
▼ 사랑하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요. 남측도 그런 교육을 하나요.
“우리야 당연히 하죠. 잘못은 아니지만 그런 일이 생기면….”
▼ 개성에 가면 식사는 어떻게 해결합니까?
“주재원 식당이 따로 있어요. 남측 주재원 식사를 전담하는 북측 직원이 있습니다. 식습관은 남북이 똑같아요. 요리재료는 남측에서 가져갑니다.”
개성공장에서 바이어와 대화를 나누는 문창섭 회장.
“도시락을 싸와요. 국만 끓여서 줍니다. 밥을 주려고 해도 북한에서 음식재료를 구매할 여건이 안 돼요. 한국에서 가져가는 건 경비 탓에 곤란하고요.”
그는 밥 먹는 얘기를 하다 말고 묻지도 않았는데 또 한 번 개성공단의 장점을 설명했다.
“노동집약산업의 경우 개성공단만한 곳을 찾을 수 없어요. 남북이 윈▼ 윈 하는 겁니다. 중국산 원부자재는 색만 비슷하지 질이 낮아요. 신발 부품을 한국이 얼마나 잘 만드는지 아십니까? 우리 회사를 돕는 기업만 230개가 넘어요. 신발 회사가 중국, 베트남으로 가면 많은 회사가 망하는 겁니다. 망한 회사 직원들에게 딸린 식구를 생각해보세요. 개성공단은 지금보다 더 커져야 합니다.”
▼ 정권이 바뀌자마자 분위기가 나빠졌나요?
“처음엔 나쁘지 않았어요. 북측도 새 정부에 기대가 컸나 봐요.”
원칙과 타협
평양은 명목상 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때 보내는 안을 검토할 만큼 호의를 보였다. 한나라당 승리로 대선이 끝난 뒤 과거 연을 맺은 남측 인사가 이 대통령을 욕하면 평양이 그들을 달래는 모습도 포착됐다. 이 대통령은 대선 때 포용정책인 비핵·개방3000을 내놓았다.
이명박 정부를 바라보는 평양의 태도는 ‘기대(대선 이전 및 직후)→의구심(2월25일 취임사 이후)→배신감(3월26일 통일부 업무보고 이후)’으로 바뀌었다. 복수의 소식통은 지난해 3월26일 이 대통령 발언에 평양이 처음으로 발끈했다고 전한다. 이 대통령은 이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면서 6·15(2000년), 10·4(2007년) 공동선언 대신 1991년 체결한 남북기본합의서를 강조했다. 북한은 이 발언을 6·15, 10·4 공동선언을 한국이 부정한 것으로 해석했다. 북한 사람들은 기존 합의를 김 위원장의 업적이라고 여긴다. 이후 평양은 물불 안 가리고 위기를 고조시켰다. ‘역도’ ‘매국역적’ ‘모리간상배’ ‘협잡꾼’이라는 단어가 노동신문에 등장했다.
이명박 정부는 쌀, 비료 지원 협상을 통해 남북관계를 순리에 맞게끔 되돌려놓고자 했다. 원칙을 강조한 것이다. 갈등을 빚더라도 ‘갑(甲)’의 지위에 서겠다는 거였다. 쌀, 비료가 절실한 북한이 고개를 숙이리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쌀, 비료를 중국한테 받았고, ‘서울 길들이기’에 나섰다. 서울도 ‘평양 길들이기’로 맞대응하면서 긴장이 고조했다.
지난해 4월 ‘주간동아’는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북한이 개성공단 폐쇄를 검토한다고 보도했다. 개성공단 폐쇄 가능성을 제기한 첫 보도였는데, 한국의 전문가들은 “북한이 설마…”하는 반응을 보였다. ‘주간동아’는 북한이 임금 인상 요구→태업→파업→철수→통행금지→폐쇄 순서로 액션플랜을 짰다고 보도했다.(‘주간동아’ 631호 ‘뿔난 평양, 개성공단 폐쇄 수순 밟나’ 제하 기사 참조)
▼ 북한은 한국의 지원을 받아 연명하면서 뒤통수를 쳤습니다. 핵무기, 미사일을 만들 때 남쪽에서 흘러간 돈도 쓰였겠죠. 금강산에선 관광객을 총으로 쏴 죽이기도 했고요. 그런 정권과 경제협력을 하는 게 옳은 일인가요?
“개성공단은 퍼주기가 아닙니다. 남한이 누리는 혜택이 더 많아요. 개성공단 입주업체들과 관련된 중소기업이 4800개에 달합니다. 북한에 주는 건 노동자 월급밖에 없어요. 노임은 중국, 베트남에 공장 세워도 줍니다. 노임 주는 걸 퍼주기라고 비판하는 건 옳지 않죠. 기업이 사람을 부려먹으면서 임금을 주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몇 푼 떼먹는’ 수준
▼ 북한 근로자가 임금을 직접 받는 구조가 아닙니다. 북한 당국에 돈을 주고 일부가 근로자한테 가는 거 아닙니까?
“3~4년 전부터 북측에 직불제를 요구했어요. 북측 인사들은 ‘남측도 간호사, 광부를 독일로 보낼 때 정부가 돈을 받아서 개인에게 주지 않았느냐. 베트남전쟁 때도 그랬지 않느냐. 당신들도 그랬으면서 왜 따지냐’는 식으로 말해요. 회사가 지급하는 급료가 얼마인지는 노동자들도 알아요. 직원들이 급료명세서에 직접 서명합니다.”
개성공단을 통해 북한으로 흘러가는 돈은 일반의 생각보다 적다.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는 현재 4만명에 조금 못 미치는데, 복지비를 포함한 근로자 1인당 평균임금을 100달러(현재 적용하는 개성공단 최저임금은 월 55.125달러)로 계산하면 북한에 지급하는 돈은 월 400만달러에 그친다.
중국은 둥베이(東北)3성과 북한 연계 개발에 30억달러 넘는 자금을 준비한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은 신의주 특구에만 차관 형식으로 7억달러를 지원할 것으로 알려졌다.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과 김 위원장은 2005년 평양에서 20억달러의 장기 지원을 포함한 ‘경제기술협정’에 서명했다.
노무현 정권 때 북한 인사들은 “군대까지 뺐는데, 개성은 몇 푼 떼먹는 임가공 수준”이라고 불평하곤 했다. 북▼ 중 경협과 비교하면 개성공단에서 북한이 얻는 실익은 크지 않다.
▼ 개성공단이 문 닫으면 중국이나 베트남으로 공장을 옮기면 되지 않습니까?
“4월21일 개성공단 문제로 남북 당국자가 만났을 때 북측 인사가 ‘남측 기업들은 한 해에 수억달러의 이익을 얻지만 북측이 얻는 건 거의 없다’고 말했죠. 개성공단은 남측에 더 도움이 되는 프로젝트입니다. 중국, 베트남으로 옮겨도 노임은 똑같이 나가요. 세금도 그 나라에 내고요. 한국 기업이 중국에서 야반도주하고 그러는 게 세금 문제 때문입니다. 개성에 진출한 기업은 세금을 한국에 냅니다.”
개성에 진출한 104개 기업 중 북한 당국에 세금을 낸 업체는 아직 단 한 곳도 없다. 북한 최고인민회의가 2003년 9월 ‘결정 제1호’로 채택한 ‘개성공업지구 세금규정’은 이렇다.
‘공업지구에서 기업소득세의 세률은 결산리윤의 14%로 한다. 그러나 하부구조건설부문과 경공업부문, 첨단과학기술부문의 세률은 결산리윤의 10%로 한다.’(제19조)
‘리윤이 나는 해부터 5년간 (기업소득세를) 면제하고, 그다음 3년간 50%를 덜어준다.’(제29조)
4월23일 ‘조선일보’는 “개성공단 입주기업 대부분 적자. 인건비마저 오르면 철수 불가피”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국회에서도 개성공단 입주기업의 적자 문제가 거론된 적이 있다. 이 같은 보도 및 문제 제기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성공단 입주기업의 상당수가 적자인 것은 실제로 손실을 본 게 아니라 적자가 나게끔 회계를 관리해서다. 기업들은 별도의 법인을 세워 개성에서 공장을 운영하는데 이 법인이 본사와의 거래에서 적자를 본 것이다. 흑자가 나고 5년 뒤부터 세금을 내는 것으로 돼 있기 때문에 별도 법인의 수지를 적자로 처리하는 게 기업에 유리하다.
“20대 처녀 달라는 대로 대주겠다”
▼ 위기를 처음으로 감지한 건 언젠가요?
“이 대통령의 기숙사 발언이 나왔을 때입니다.”
지난해 9월 이 대통령은 “개성공단에 기숙사를 지으면 근로자의 집단화로 노사갈등을 유발할 수도 있다”면서 합숙소 건설에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약속한 기숙사를 짓지 않겠다는 식으로 말한 이 대통령 발언이 분수령이었어요. 북측 당국자 10명이 있으면 10명 다 합숙소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남측 정부가 과연 개성공단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있느냐는 거였죠. 기숙사 건설은 남측 기업의 필요에서 비롯한 겁니다. 북한 당국자는 ‘사장들이 20대 처녀만 요구하는데 처녀를 달라면 대주겠다. 그런데 출퇴근이 가능한 지역에 사는 20대 처녀가 많지 않다. 기숙사 지어주면 달라는 대로 다 대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난해 추석 무렵 한 중소기업인이 이 대통령한테 ‘10만명가량 수용하는 기숙사를 지으려고 한다’고 잘못 설명했어요. 10만이란 숫자에 대통령이 놀란 것 같습니다. 실제로는 1만5000명 규모의 합숙소를 짓는 겁니다.”
▼ 북한은 약속을 잘 지키나요?
“뱉은 말은 지키는 편이에요. 약속을 두루뭉술하게 하는 게 아니라 딱 필요한 것만 하죠. 되도록이면 말을 안 뱉으려고 하고 뱉은 말은 지킵니다.”
▼ 위기를 고조하거나 도발할 때도 ‘뭘 하겠다’고 하면 결국엔 그렇게 하더군요. 4월 장거리 미사일 발사 때도 그랬고요.
“식언을 잘 안 하는 편입니다.”
▼ 3통(통행·통관·통신)을 풀어나가겠다던 약속은 지키지 않던데요.
“통행만 자유로워도 좋을 것 같아요. ‘1통’만 해결돼도 경쟁력이 배가됩니다. 외국 바이어가 오늘 한국에 들어와서 바로 개성으로 올라가고, 또 다른 바이어가 내일 개성에 들어가고 그러면 오더를 더 많이 받을 수 있어요. 통행만 풀려도 확 바뀌어요.”
“공포가 밀려왔다”
▼ 지난해 12·1 통행제한 조치 때가 가장 험악했죠.
“전 재산을 다 걸었는데 문 닫는다는 건…. 공포가 밀려왔어요. 삐라 때문에 무슨 일 생기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기감이라고나 할까요. 당시 북측 사람들이 굉장히 격앙해 있었습니다. 삐라가 개성공단으로도 날아왔어요. 평생을 바친 사업이 마지막으로 가는구나 싶었죠. 12·1 통행제한 조치가 11월 말 발표됐는데 그 때 가장 긴장했습니다. 북한 군부가 경영자는 모두 모이라고 하더군요. 군부가 폐쇄를 통보할 줄 알았죠. 발표를 기다리던 순간은 뭐랄까, 사형선고를 받을 사람의 마음이랄까, 심정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막상 발표를 듣고 안도했어요. 비기업 활동과 관련해선 통행을 제한한다면서도 기업활동엔 특례를 보장하겠다고 말했거든요. 예단은 금물이지만 북한은 개성공단을 닫을 생각이 없습니다.”
▼ 3월9~20일엔 한미 합동군사 연습 ‘키 리졸브’를 빌미로 개성공단 통행을 세 차례나 차단했잖아요. 당시 주재원들이 사실상 억류되지 않았습니까?
“북측에서 내보내도 우리가 안 나왔지요. 기업인은 현장을 지켜야 해요. 공장을 놔두고 어떻게 나옵니까?”
북한은 4월21일 개성공단 근로자 임금 인상과 토지사용료 조기 지급을 요구했다. 임금 인상 요구→태업→파업→철수→통행금지→폐쇄의 개성공단 폐쇄 시나리오에서 1단계를 밟고 있는 셈이다.
조봉현 기업은행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12·1 통행제한 조치 이후 북측이 개성공단 전면 중단과 단계적 중단을 놓고 고심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국가안보전략연구소 남성욱 소장은 “북한이 합리적으로 판단할 것으로 보지만 군부의 입김이 강한 상황이어서 잘못된 선택을 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 임금 인상 요구는 받아들일 수 있나요?
“북측의 주장이 얼토당토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급여인상 한도를 연 5%로 정한 규정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다만 생산성의 변화에 따라 공정별로 기능수당 같은 걸 신설할 수는 있어요.”
볼모가 된 개성공단
▼ 북한이 폐쇄 수순을 밟지 않을 거라고 보는 이유가 뭔가요?
“노동자 4만명이 개성에서 일해요. 공단이 문 닫으면 그 사람들을 배치할 곳이 없어요. 북측도 경제활동엔 의지가 강해요. 당국자 접촉이 시작된 것도 고무적이고요. 4월23일 개성에서 독일 신발유통업체와 양해각서(MOU)를 교환했어요. 그 회사 CEO도 개성 올라가기 전엔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죠. 위험하지 않느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현장을 둘러보더니 평온하다면서 놀라더군요. 외국인 바이어가 개성에서 MOU에 서명한 건 이번이 처음일 겁니다. 북측 당국이 독일 바이어 출입을 승인한 걸 보면 개성공단이 어떻게 될지 짐작이 가지 않나요. 기업인은 정치를 잘 모릅니다. 알 필요도 없고요. 하지만 현장만큼은 확실하게 파악합니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아요. 고비를 넘겼습니다. 개성공단은 계속됩니다.”
한국이 먼저 개성공단 폐쇄 수순을 밟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12·1 통행제한 조치, 한국인 Y씨 억류, 계약 무효 선포 등 북한이 ‘바닥 수준’으로 행동하는데도 이 대통령은 “개성공단 폐쇄와 같은 극단적 조치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밝혔다.
▼ 개성에 자주 가나요?
“1주일에 이틀가량 머무릅니다. 기업가는 현장에 있어야 해요. 바닥을 소상히 파악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어요. 2005년엔 개성에서 살다시피 했죠.”
▼ 북한 사람들과 술도 마시나요?
“허허벌판에 공장 지을 때는 가끔 마셨습니다.”
▼ 남북 당국에 섭섭한 마음이 있겠습니다.
그는 준비한 문건을 기자에게 건네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남북 근로자가 개성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희망의 불씨를 살리고 있어요. 기업활동을 담보로 정치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에요. 어떤 나라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개성공단의 중심은 기업의 경제활동입니다. 그런데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형국입니다. 남북 당국이 정치적 수단으로서 개성공단을 악용해서는 안 되죠. 개성공단은 정치의 노리개가 아닙니다. 남북 당국은 투자기업의 판단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 지금도 개성 진출이 잘한 선택이라고 여기나요?
“대단히 잘한 선택입니다. 노동집약 산업은 한국에서 못 버텨요. 원가, 타산 못 맞춥니다. 자본이 들어가는 산업은 메리트가 없지만 노동을 투입하는 산업은 개성공단이 최적지입니다. 개성 간 전자, 반도체 기업도 잘나갑니다. 자본말고 사람 필요한 업종은 무조건 개성으로 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기숙사 문제가 해결되면 여건이 더 좋아질 거고요. 우리가 북한 노동자용으로 신발 교과서 1~5권 1만5000부를 제작했어요. 처음 5개월은 노동자 교육만 시켰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신발입니다. 삼덕통상의 성공 사례를 널리 알릴 생각이에요. 5년 겪은 걸 묶어보려고요. 남북관계 경색이 풀리면 모든 일 제쳐두고 발표할 겁니다. 우리의 사례를 바탕으로 다른 기업이 성공하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개성공단의 규모가 지금보다 훨씬 커지면 남북 당국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어렵습니다.”
“신발로 개성 먹여 살리겠다”
▼ 나이키 운동화를 만드는 박연차 태광실업 전 회장은 베트남에서 칙사 대접을 받는다고 합니다. 농 득 마잉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과도 친하다더군요. 북한에서 대접은 잘 해줍니까?
“3,4년 전엔 종업원들이 인사를 안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저 사람이 투자한 덕분에 일터가 생겼다고 생각해요. 돈 벌게 해줘서 고맙다는 거죠. 인사도 잘 하고요. 지금은 사장이 뭐 하는 사람인 줄 알아요. 사장을 무서워하기도 하고요. 근무시간에 담배 피우다가 나한테 들키면 도망갑니다. 일을 게을리 하는 직원에게 쌍욕은 안 해도 고함은 지릅니다. 베트남에 태광실업의 이름을 딴 도로‘태광로’가 있다더군요. 북측도 남측의 도움을 받으면 베트남처럼 신발산업을 일으킬 수 있어요. 부산을 먹여 살린 게 신발입니다. 개성도 신발이 먹여 살릴 수 있어요.”
▼ 그렇게 되면 ‘삼덕로’가 생기는 건가요?
“규모를 계속 늘려갈 겁니다. 개성은 세계적 신발 단지로 성장할 조건을 갖췄어요.”
삼덕통상의 개성공장은 개성에 진출한 기업의 공장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스타필드’라는 자체 브랜드로 이름난 이 회사는 국내외 유명브랜드의 운동화를 OEM으로도 제작한다.
“스타필드는 수출량이 상당해요. 가장 성공한 한국 운동화 브랜드일 겁니다.”
인터뷰를 마친 뒤 그가 택시를 불러줬다. 강을 건너면서 그가 여러 번 강조한 말이 떠올랐다.
“그동안 인터뷰를 잘 안한 것은 기업인으로서 득 될 게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기업인이 정치 문제에 휘둘려선 안 돼요. 기업인은 사업만 잘 꾸리면 됩니다. ‘신동아’는 북한에서도 읽습니다. 북측을 자극하는 얘기가 실리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는 천생(天生) 기업가다. 을숙도의 황혼은 아름다웠다. 갈매기가 높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