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호

‘효녀’ 틀에 담기 힘든 버려진 딸들의 엄청난 에너지

심청과 바리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입력2009-12-08 17: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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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흔히 효성 지극한 딸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심청과 바리공주 이야기는 부모의 기대와 달리 자녀들에게 반발심을 부추긴다. 목숨을 아끼지 않는 희생과 용서가 부담스러운 나머지 강요로 비치기 때문이다. 언뜻 효(孝)를 강조하기 위한 억지로 보이는 두 이야기를 어른이 되어 읽어보면 영웅서사시 못지않은 거대한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
    ‘효녀’ 틀에 담기 힘든 버려진 딸들의 엄청난 에너지

    국립창극단의 창극 ‘심청전’. 심청은 ‘내 아버지’ 한 명뿐 아니라 수많은 맹인을 눈 뜨게 한 지혜와 사랑의 여인이다.

    그래 어허, 저 자손아 부모 목숨 구하러 가겠느냐?”

    “아흔아홉 빗장 속에서 청사 흑사 이불에 진주 안석을 귀하게 기른 여섯 형님네는 어찌 못 가나이까?”

    -아비 오구대왕의 질문에 대한 바리의 대답-

    어릴 적 교과서에서 배운 고전문학 중 가장 ‘투덜거리면서’ 읽은 작품이 바로 ‘심청전’이다. 세상에, 눈먼 아버지와 살며 고생하다 아버지 눈뜨게 해주겠다고 목숨을 파는 심청을 ‘여성 롤 모델’로 만들어도 되는 것인가? 이런 삐딱한 반발심과 함께 죄책감이 밀려왔다. 나는 심청이만큼 부모님을 향해 ‘올인’할 수 없을 것 같아서다. 궁여지책으로 어떻게 부모님을 위해 죽음도 불사할 수 있을까 하는 의혹을 애써 뒤로한 채, 열심히 ‘효’와 ‘권선징악’이라는 교육용 키워드를 우격다짐으로 머릿속에 구겨넣었다. 그러면서도 간교하게 내심 우리 엄마 아빠는 아무리 힘들어도 나를 인당수에 밀어넣지는 않을 거라고, 위안했다. 말하자면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잔혹한 장면이 일종의 트라우마(외상성 신경증)로 자리 잡아버렸던 것 같다.

    안색을 변치 않고 뱃전에 나서 보니 티 없이 푸른 물은 월러렁 콸넝 뒤둥구리 구비쳐서 물거품 북적찌데한데, 심청이 기가 막혀 뒤로 벌떡 주저앉아 뱃전을 다시 잡고 기절하여 엎딘 양은 차마 보지 못할 지경이라.



    심청이 다시 정신 차려 할 수 없이 일어나서 온몸을 잔뜩 끼고 치마폭을 뒤집어 쓰고, 종종걸음으로 물러섰다. 바다 속에 몸을 던지며,

    “애고 애고, 아버지 나는 죽소.”

    뱃전이 한 발이 지칫하며 거꾸로 풍덩.

    -완판본 ‘심청전’ 중에서

    겨우 열다섯 살인, 그러니까 심청전을 읽을 당시 나와 동갑인 심청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그 장면. 이 장면이 유발하는 극한 공포 때문에 나는 심청이 다시 살아나 황후가 된다는 이후의 스토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런 공포는 꽤 오랫동안 무의식 속에서 자가 증식했던 것 같다. 나에겐 부모님을 위해 죽을 용기(?)가 정말 없을까봐, 부모님을 위해 생사의 갈림길에 서야 할 일이 정말 생길까봐 말이다.

    아동착취 아동학대 합리화?

    대학생이 되어 심청전을 다시 읽었을 때, “이건 ‘효도’를 핑계로 아동학대를 합리화하는 엽기살인극이 아닐까”라고까지 생각했다. 태어나서 겪어본 것은 ‘고생’밖에 없는 심청이 이 꼴 저 꼴 보기 싫어 마침내 자살해버린 것이라고도 상상해보았다. 여하튼 어린 마음에도 분명히 감지하고 있었던 것은, 심청전은, 아니 심청전을 추앙하는 교육 프로그램은 이 세상 모든 ‘딸들’에게 지나친 ‘강요’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청전 이후에 접한 ‘바리데기’ 신화는 이러한 두려움을 더욱 강화시켰다. 말하자면 두 작품은 이 세상 모든 딸에게 일방적으로 효도를 강요하는 일종의 ‘커플 사기단(?)’으로 인식되었고, 나는 늘 심청과 바리의 자발적 선택보다 심청과 바리를 그렇게 만든 ‘상황’에 분노하곤 했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부모를 원망하느라 그들이 모험을 통해 만난 ‘새로운 세상’은 간과한 것이다. 고전문학 속 바리데기와 심청은 머릿속에서 나도 모르게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효성(孝誠) 담론 자체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무럭무럭 키웠다.

    내가 커서 아이를 낳으면 자식들에게 ‘치사하게’ 효심 따위를 바라진 않으리라, 그렇게 코믹하고도 비장한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자식에게 대놓고 효도를 요구하는(!) 부모는 정말 나약하고 무능하고 파렴치해 보였다. 우리 세대는 ‘부모님과 친구처럼 지내는 것’을 이상적으로 보지만, 아직 집안에서는 기존의 ‘수직적 관습’과 최근의 ‘수평적 욕망’ 사이의 균열이 완전히 메워지지 않고 있었다. 미국 드라마 ‘길모어 걸즈’에 등장하는 친구보다 더 친구 같은, 만만하고 친밀한 엄마가 마음속 이상형이지만 현실에서는 찾기 어려웠다.

    나는 심청과 바리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의식 속에서 혐오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혹시 나는 이 사회가 부과하는 장녀 콤플렉스와 ‘엄친딸’ 콤플렉스에 시달린 끝에 효도 자체를 혐오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효도란 자식의 노동력을 합법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고안된, 철저히 부모 중심적인 판타지가 아닐까,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로 심청과 바리의 진정한 테마가 ‘효도’가 아닐지 모른다는 의혹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 날 바리데기 신화를 다시 읽으며 무릎을 치고 기뻐했다. 맞아, 맞아! 바리공주의 스케일이 겨우 효도 따위에 그칠 리 없어. 바리의 무대는 우주요, 그녀의 적수는 운명이고, 그녀의 무기는 사랑이었다. 바리데기의 사랑은 자신을 버린 인간 모두를 구원하고 그 구원의 대가를 한 톨도 바라지 않는, 부피도 경계도 측정할 수 없는 가없는 사랑이었던 것이다.

    효성의 틀로 심청의 캐릭터를 가두지 않으려는 움직임은 각종 문학작품에서 다양한 패러디 형식을 빌려 실현된 바 있다. 김승희 시인의 시에서 현대 여성으로 각색된 심청은 인당수에 빠지는 대신 어머니께 점자책을 사드린다.



    인당수에 빠질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

    저는 살아서 시를 짓겠습니다.

    공양미 삼백 석을 구하지 못하여

    당신이 평생 어둡더라도

    결코 인당수에는 빠지지 않겠습니다.

    (……)

    그 대신 점자책을 사드리겠습니다.

    어머니,

    점자 읽는 법도 가르쳐 드리지요

    우리의 삶은 이와 같습니다.

    우리들 각자가 배우지 않으면 안되는

    외국어와 같은 것.

    어디에도 인당수는 없습니다.

    어머니,

    우리는 스스로 눈을 떠야 합니다.

    -김승희, ‘배꼽을 위한 연가 5’ 중에서

    알파걸보다 통 큰 바리공주

    바리공주는 현대 사회의 ‘알파걸’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엄청난 통과의례를 거쳐, 자신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아비의 목숨을 구한 후에도, 아직 ‘미션’이 끝나지 않았다고 여긴다. 바리공주의 아버지 오구대왕은 “이 나라 반을 나누어 너를 줄까, 사대문에 들어오는 재산의 반을 나누어줄까”하고 바리공주에게 묻는다. 젖 한 번 제대로 물리지 않고 딸을 버리고선, 이제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권력이나 화폐를 제시하는 무정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제안을 바리는 단호히 거절한다. 그녀는 자신을 버린 가족뿐 아니라 자신을 키워준 바리공덕 할아비와 할미, ‘저승여행’ 도중에 낳은 일곱 아들에게도 골고루 은덕을 베푼다. 그러고는 ‘저승과 이승 사이를 오가는 샤먼’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오냐 나라 반을 주마 국가 반을 주마

    이때에 애기(바리공주)가 나라 반도 싫고 국가 반도 싫고 만화궁도 싫습니다

    저는 어려서 살면서 풀벌레를 친구로 삼고 풀로다가 양식 삼고 뿌리로다 양식 삼고 나뭇잎으로다가 옷을 삼아 살았으니 …사람 죽어서 억만사천 지옥에 갇힐 적에 큰머리 단장 곱게 하고 극락세계 연화대로 보내주는 만신의 몸주가 되게 하여주나니다

    -‘노들제 바리공주’ 중에서-

    문수보살의 몸주(강신무당이 몸의 주인, 즉 수호신으로 섬기는 신)가 되어 죽은 사람들을 천도하고 이승과 저승을 계속 넘나들겠다는 것, 그것이 그녀의 소원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관련된 주변 사람들의 인생 전체를 바꾸는 엄청난 내공을 발휘하고는, 저승과 이승을 오가며 죽은 사람의 길잡이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여전히 재물이나 명예 따위로 자식의 환심을 사려는 오구대왕의 소유욕과 집착을 거부하는 당찬 풍모야말로 그녀의 스케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부모가 품기에는 너무 거대한 딸이었다.

    왕국 정도를 통치하는 부모는 결코 담을 수 없는 도량을 가진 딸 바리의 진짜 재능은 효성이 아니다. 주변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고, 그들의 마음에 쌓인 각종 원한과 분노를 삶에 대한 의지로 바꾸며, 마침내 인간의 가장 커다란 한계인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게 만드는 것이 그녀의 힘이며, 그녀가 선택한 새로운 인생이었다. ‘바리공주’는 부모의 계산과 짐작을 벗어던진 딸의, 아무리 버려지고 짓밟혀도 사그라지지 않는 생의 에너지를 증명하는 텍스트가 아닐까.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극락으로 인도한다면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바리공주가 약수를 뜨러 갈 적에 세상을 떠난 영혼들이 구천에서 헤매고 있는 것을 보고 길동무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영혼을 데려가는 일은 저승의 강림 차사만으로 족하지 않겠소?”

    “강림 차사는 저승으로 가는 영혼들이 달아날까봐 잡으러 다니는 것이지요. 극락으로 가는 영혼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죽은 줄도 모를 때가 많다는 이야기를 바리데기 공주에게 들었나이다.”

    옥황상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부인의 말처럼 일곱 공주를 하늘나라 북두칠성이 되게 하였다. 바리공주는 일곱 별자리를 이끄는 북극성이 되었고, 언니들은 여섯 개의 별이 되어 바리데기 공주의 뒤를 따랐다. 일곱 자매는 하늘을 돌며 눈물 흘리는 사람은 없는지, 한숨 소리 들리는 곳은 없는지, 세상 구석구석을 깜박깜박 비추면서 살펴보았다.

    -‘바리공주’, 최창수 지음, 대교출판, 2005년, 178쪽

    버려지고 난 뒤의 삶

    ‘효녀’ 틀에 담기 힘든 버려진 딸들의 엄청난 에너지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는 가혹한 시련을 ‘긍정’하고 새 삶을 열어가는 현대판 바리데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바리데기는 단지 ‘또 딸’이라는 이유로 처절하게 버려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다. 그녀는 풀벌레를 친구로 삼고 풀뿌리로 연명하고 나뭇잎으로 옷을 삼으면서도 당차고 명랑하게 성장한다. 그녀는 자신을 버린 아비를 살리기 위해 저승세계를 여행하며 죽을 고생을 한 후 더욱 ‘나처럼 버려진 것들’에 대한 커다란 사랑을 키운 것이 아닐까. 그녀는 아비를 살리기 위해 떠난 저승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며 그들의 삶과 죽음을 함께 아파한다. 바리의 진정한 재능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몸에 난 상처처럼 아파하고 공감하는 데 있었다.

    저승의 길잡이가 되려는 그녀의 꿈은 ‘한 나라의 공주’에 안주하지 않는, ‘세속의 부귀영화’에 그치지 않는 바리공주의 원대한 꿈이 아니었을까. 그 꿈은 단지 남녀 간의 사랑이나 부모의 사랑을 넘어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모든 존재에 대한 더 큰 사랑이었다. 바리데기는 죽은 사람의 죄를 징벌하는 공포의 사도가 아니라, 타인의 죄악도 타인의 원한도 자신의 품 안에서 보듬으며 죽음으로 가는 길이 외롭지 않도록, 저승으로 가는 길이 무섭지 않도록 일일이 손잡아주는 따스한 안내자가 된다. 결점 많은 필멸의 인간들을 호통치고 야단치는 죽음의 신이 아니라 보듬어주고 달래주고 구슬리는, 따스하고 자비로운 여신의 이름, 바리.

    바리와 심청은 철저하게 버려진 존재였다. 바리는 단지 딸이라는 이유로, 심청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그들이 죽음의 위기를 극복하고 부모님의 질병을 치료해주는 것은 두 이 이야기의 중요한 공통점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후에’ 펼쳐지는 그들의 삶이다. 심청은 바닷속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바리공주는 서천에서 무엇을 체험했을까? 우리는 그들의 ‘고난’에 눈이 팔려 그들의 눈에 비친 세계의 참혹함과 그들이 고통의 문턱을 넘어 만난 세계의 오아시스를 놓친 게 아닐까?

    ‘효녀’ 틀에 담기 힘든 버려진 딸들의 엄청난 에너지

    심청은 인당수에 몸을 던짐으로써 부모와 맺어진 인연을 집착이 아닌 사랑으로 변화시킨다.

    오이디푸스는 운명을 거부함으로써 더 큰 운명의 복수에 휘말렸고, 아버지의 짐을 피하려다 오히려 아버지보다 더 큰 짐을 떠안았다. 심청과 바리의 용맹은 ‘순종’이 아니라 그 가혹한 운명을 ‘긍정’했다는 데 있다. 바리와 심청은 오이디푸스 못지않게 처절하게 버려졌지만 부모에게 복수를 하거나 부모를 죽이는 우를 범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버린 이들을 껴안아 새 삶을 열어준다. 바리가 공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혜택을 거부하고 저승의 안내자가 되고 싶다 했을 때, 그녀의 꿈은 단지 효도나 출세가 아닌, 그보다 더 큰 것, 그 어떤 수량적 척도로도 계산되지 않는 훨씬 더 큰 세계를 향해 있었다. 바리는 목숨을 건 모험이 끝나자 더 크고 위험천만한 모험 속으로 자신을 던진 것이다.

    현실의 더 지독한 아버지들

    누구나 바리가 되고 누구나 심청이 될 수 있다. 아버지가 장님이라거나 폭군이라는 식의 상황은 ‘메타포(비유)’다. 현실엔 그보다 더 지독한 아버지가 많으니. 심청과 바리는 우리가 언제고 마주칠 수 있는 운명의 사슬, 부모와 자식 간에 놓인 필연적 덫을 그 딸들이 어떻게 지혜롭게 ‘끊었는가’를 보여준다. 바리와 심청의 이야기는 ‘부모의 은혜를 갚는’ 보은(報恩)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부모와 맺어진 인연을 집착이 아닌 사랑으로 바꾸는, 이제 더는 부모에게 진 마음의 빚 때문에 사사건건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서사’였던 것이다.

    얄궂은 효도의 압박을 끊어내고 심청과 바리를 다시 읽어보니 그녀들의 이야기는 웬만한 영웅서사를 압도하는 흥미진진한 스케일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부모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진정 자유로워지는 이야기, 운명의 사슬을 이빨로 물어 끊는 이야기, 나아가 내게 주어진 운명보다 더 큰 운명을 움켜쥐고 날아오르는 여인들의 이야기로.

    심청은 단지 ‘내 아버지’ 한 명을 살린 것이 아니라, 잔치까지 벌여 맹인들을 불러 모은 뒤 그 모두를 눈뜨게 하고 운명을 바꿨다. 그녀의 임무는 단지 ‘한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만백성을 눈뜨게 하는 지혜의 카니발이 아니었을까. 옛사람들이 이 판소리의 마지막 장면에서 얼마나 크게 웃고 떠들었으며 신바람 넘치는 카니발의 열기에 후끈 달아올랐을까.

    “아버지, 제가 바로 인당수에 빠져 죽었던 심청이오.”

    심 봉사가 깜짝 놀라,

    “이게 웬 말이냐?”

    하고 소리쳤다. 그 때 어찌나 반갑던지 뜻밖에 두 눈이 갈라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두 눈이 활짝 밝아졌다. 심 봉사 눈 뜨는 소리에 그 자리에 가득 앉아 있던 맹인들의 눈들이 일시에 ‘헤번덕 짝짝’, 갈치새끼 밥 먹이는 소리같이 요란하더니 한꺼번에 눈을 떠서 밝은 세상을 보게 되었다. 집 안에 있는 소경, 집 밖에 있는 소경, 남자 소경, 여자 소경의 눈이 다 밝아졌다. 또, 배 안의 맹인, 배 밖의 맹인, 반소경, 청맹과니까지 모두 다 눈이 밝았다. 이것은 맹인에게 천지개벽과 같았다.

    심 봉사는 기쁘고 반갑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보니, 도리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딸이라 하니 딸인 줄 알겠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라 오히려 어색하기까지 하였다. 심 봉사는 하도 좋아서 죽을 둥 말 둥 춤추며 노래하였다.

    얼시구 절시구 지화자 좋을시구.

    홍문연 높은 잔치에서 항우가 아무리 춤을 잘 추었어도

    내 춤을 어찌 당하며,

    한고조 무력으로 천하를 얻었을 때

    칼 춤 잘 춘다 할지라도 내 춤 당할쏘냐.

    세상 사람들아, 아들 낳기를 중히 여기지 말고,

    딸 낳기를 중히 여기시오.

    죽은 딸 심청이를 다시 보니,

    양귀비가 죽어 환생하였는가.

    우미인이 도로 환생하여 왔는가.

    아무리 보아도 내 딸 심청이지.

    딸의 덕으로 어두운 눈을 뜨니,

    일월이 환하고 아름답게 빛나서 더욱 좋도다.

    하늘의 뜻을 얻으면 나타난다는 상서로운 별이 나타나고,

    구름이 이니 백공이 서로 화답하여 노래한다.

    요순 때 같은 태평한 시대를 다시 보니

    해와 달이 더욱 빛난다.

    ‘아들 낳기를 중히 여기지 말고

    딸 낳기를 중히 여기라’는 말은 나를 두고 이름이로다.

    -판소리 ‘심청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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