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저보고 고현정 같대요”
- - 억지로 본 사법시험 합격기
- - 판사이자 주부로 분주하던 젊은 시절
- - 친절한 영란씨, 소탈한 영란씨, 현명한 영란씨
- - “한국적 환경에서 정의의 의미 정립하겠다”
“법의 혜택을 소수자에게까지 넓히는 게 법치주의다.”
“퇴임 후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고 대법관 경험을 살려 사회에 기여할 방법을 찾아보겠다.”
지난 8월 퇴임한 김영란(54) 전 대법관이 한 이야기들이다. 그는 재임 중 여성의 종중원(宗中員) 자격을 인정하고, 종교재단이 설립한 학교가 학생에게 종교행사 참여를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판결했으며, 사형제에 반대하고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 도입에 찬성했다. 퇴임 후에는 대부분의 대법관이 변호사로 개업하는 관례를 깨고 변호사 등록조차 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돌아갔다. 고위층의 비리와 부도덕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요즈음,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음을 울리는 이유다.
“여러 매체에서 한꺼번에 인터뷰 요청이 와서 좀 놀랐어요. 원래 신문은 한 곳에 기사가 나오면 더는 다루지 않는 게 관례 아닌가요. 아무래도 이상해서 인터뷰 하자는 기자에게 물어보니 ‘대법관님이 고현정이라서 그래요’ 하더군요. 제 이름이 들어가면 기사 조회수가 높아진다는 거예요. 저보고 고현정이라는데 어떻게 거절해요. ‘합시다’ 했지요.”
환하게 웃으며 얘기하더니 곧 “농담인 거 아시죠?” 덧붙인다. 2004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법관으로 임명됐을 때도 그랬다. 당시 김 전 대법관은 막내 대법관과 사법연수원 기수로 9년이나 차이가 나는 4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성별과 기수를 깬 파격 인사라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다. 역시 그의 이름만 붙으면 기사 클릭 수가 높아졌을 터, 수많은 기자가 그를 찾았다. 기자도 그 무렵 김 전 대법관을 처음 만났다. ‘사상 최초’라는 무게와 높은 관심 때문인지 조금은 긴장한 모습이었던 게 기억난다. “대법관 생활을 대과(大過) 없이 마무리하고 퇴임하는 게 목표”라며 조심스러워했다. 6년 후 다시 만난 자리에서 우스개를 던지다니, 그때보다 조금은 여유로워진 게 분명하다.
억만년 전부터 이렇게 살아온 듯
▼ 예전에 뵈었을 때보다 훨씬 편안해 보이세요.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 보고 책 좀 읽다가 아침밥 차려서 식구들이랑 같이 먹고, 다 나가고 나면 10시부터 여기 아파트 안에 있는 헬스센터에 가요. 한 시간 요가하고 씻고 책 좀 보다 점심 먹고, 또 책 좀 보다가 약속 있으면 잠깐 나가고…. 얼마 전 전수안 대법관님이 어떻게 지내느냐고 문자를 보내셨길래 ‘억만년 전부터 이렇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라고 답장했어요. 기록 보느라 한창 바쁘실 텐데, 약이 좀 오르셨을 거예요.”
하하, 소리 내 웃는 품이 경쾌하다. 김 전 대법관은 경기도 화성에 산다. 나지막한 산과 논에 둘러싸인 아파트 꼭대기 층이다. 주위 환경으로 보나 집 크기로 보나 고급 주택과는 거리가 먼데, 그는 “집이 정말 좋지 않으냐”고 여러 번 자랑했다. 2008년, 이 단지에 사는 지인의 집을 방문했다가 자연환경에 반해 이사를 결심했다고 한다. 하늘이 맑고 공기가 좋은 건 분명해 보였다. 그는 주위에 아파트가 별로 없어 집 안에서 일출과 낙조를 모두 볼 수 있고 근처에 나지막한 산이 있어 2~3시간 코스로 산책할 수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더불어 난생 처음 그만을 위한 공간이 생기는 것도 설레었다. 현관을 열면 바로 보이는 문간방이 김 전 대법관의 서재. 라면 상자를 덧대 공간을 넓힌 책상과 네 짝의 목조 책장이 방 안을 채우고 있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초가을 바람이 불어오는 그곳에서 김 전 대법관과 마주 앉았다. 책상 위에는 방금 전까지 읽고 있었던 듯 마종기 시집이 펼쳐진 채 놓여 있었다.
“살면서 이런 공간을 가진 게 처음이에요. 혼자 책 읽고 글 쓸 수 있는 자리가 생긴 게 참 좋아서 요새는 별일 없으면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아요. 밥 차릴 때만 빼고 종일 이 안에 틀어박혀 있지요.”
그러고 보니 2004년 김 전 대법관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부엌 식탁에서 판결문을 쓴다”고 했었다. “주부가 식당에 있어야 아이들이 뭐 해달라고 할 때 금방금방 해줄 수 있잖아요. 저는 식탁이 편하더라고요” 했다. 대법관이 된 뒤에도 그는 판사면서 동시에 주부였다. 지난 6년 사이 아이들은 다 자랐고, 고된 업무는 끝났다. 김 전 대법관은 비로소 찾아온 생애 첫 자유를 만끽하는 듯 보였다.
빨간색 코팅 머리
김영란 전 대법관이 전수안 대법관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그의 행복이 물씬 묻어난다.
▼ 소속 없이 사시는 것도 처음인 것 같습니다. 늘 바쁘던 삶에서 놓여나셨는데 지루하지는 않으세요.
“전혀요. 굉장히 좋아요. 대법관 때는 출근해서 e메일 체크하고 나면 하루 종일 기록에 묻혀 살았습니다. 오전내 읽다가 12시30분쯤 구내식당에 가서 점심 먹고, 오후가 되면 다시 또 읽었지요. 퇴근할 때는 싸들고 집에 왔어요. 그동안 보고 싶은 책을 많이 미뤄뒀는데, 이제 마음껏 볼 수 있어서 좋아요.”
▼ 그래서인지 퇴임 때보다 훨씬 젊어 보입니다. 그때는 머리가 새하얗게 센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검어지고 붉은 기운도 도네요.
“코팅을 했거든요. 퇴임하자마자 친구들이 미장원에 끌고 가서 이렇게 해놓았어요. 고등학교 동창들인데, ‘김영란 대법관의 퇴임을 기념하며’라고 적은 케이크도 구워 와서 다 같이 파티를 했지요. 주위에서 축하를 많이 해줬습니다.”
▼ 판사 시절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춰 매사 자기 검열을 한다고 말씀하셨죠. 코팅 펌을 하신 건 그동안 갇혀 있던 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을까요.
“대법원 안에 있으면서 나가면 염색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요. 대법관 된 뒤 흰머리가 많이 늘었는데, 저만 염색하는 게 불편해서 안 했거든요. 이제 자연인이 됐으니 상관없다 싶었지요. 금발로 염색하라고 한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까지는 못했어요.”
▼ 30년 만의 자유이니 판사 시절엔 상상도 못한 일탈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드실 것 같습니다.
“일탈은 원래 고백하는 게 아니잖아요. 한들 제가 뭘 했다고 얘기하겠어요? 사실 아직은 일탈해볼 시간이 없었어요. 평생 답답하게만 살아온 것도 아니고요. 여행을 좋아해서 판사 시절 배낭 메고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스페인 같은 데를 호스텔에 묵으면서 돌아다니곤 했어요. 재판연구관들과 네팔 트레킹도 다녀왔고요. 전에 TV 프로그램에 안철수 교수가 나와서, 살면서 해본 최고의 일탈이 극장에 영화 보러 간 거라고 하던데, 저는 어릴 때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도 많이 봤어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살던 부산 집 앞에 동시상영관이 있었거든요. 어른 치마꼬리 잡고 따라 들어가면서 뜻도 모르는 영화를 많이 봤지요. 고등학교 때 수업 빼먹고 연극 보러 간 적도 많고….”
“시험에 붙어버렸어요”
두꺼운 안경테 너머 선량한 눈 속으로 장난기가 번뜩이는 게 보였다. 그는 어린 시절 전형적인 모범생은 아니었다고 했다. 경기여고 시절 교내 신문반에서 문재(文才)를 떨쳤고, 남학생들과 어울려 문학 서클 활동도 했다.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했어요. 교과서만 공부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요. 그때는 나중에 글 쓰는 사람이 될 줄 알았어요. 경기고와 경기여고가 같이 하는 문학 서클에 들어가서 매년 발표회를 했지요.”
초등학교 때 부산시 주최 백일장에서 동시 장원을 하고, 고등학교 때 교내 백일장에서 최고상을 받을 만큼 재능도 있었다. 철들기 전부터 ‘사상계’를 읽고, 실존주의 철학에 몰두했으며, 카프카와 토마스 만을 좋아했던 그의 소녀 시절 꿈은 독문학과에 진학해 문학평론가가 되는 것이었다.
▼ 그 시절 쓴 작품 중에 갖고 계신 게 있나요?
“아니요. 지금은 하나도 없어요. 대학 간 뒤 일삼아 없애버렸거든요. 사법시험을 준비해야 한다는 스트레스 때문에…. 사실 저는 사법시험 보는 게 싫었어요. 법대에 가고 싶지도 않았고요. 하지만 성적이 잘 나오니까 주위에서 권하셨어요. 특히 부모님이 워낙 원하셔서 도리가 없었지요.”
▼ 그런 게 남아 있으면 공부에 방해가 될 거라고 생각하신 건가요?
“어느 날 이제는 절대 이 길로 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다 없애버린 거예요. 미련을 두지 않으려고 한 것 같아요.”
김 대법관은 1남4녀 가운데 셋째 딸이다. 큰언니는 의사, 둘째 언니는 불문학자, 막내 여동생은 피아니스트다. 그 시절로는 드물게 여자 형제 모두 전문직을 갖고 있다. 하나뿐인 남동생은 김 대법관의 뒤를 이어 판사가 됐다.
▼ 부모님이 자식 교육에 남다른 열의가 있으셨나봅니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사를 잠시 하셨어요. 피아노도 좀 치시고 그림도 좀 그리시고 책도 많이 읽으셨지요. 나중엔 공무원을 하셨으니까 학문적으로 일가를 이루신 건 아닌데, 집에 책이 많았어요. 낡은 전축도 있었고요. 형제들이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다 같이 모여서 책을 읽거나 클래시컬한 음악을 듣곤 했지요.”
그는 “공부하라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성적이 잘 나오니 언제부턴가 법대 가라, 사법시험 봐라 권유하셨다”고 했다. 부모님 뜻 거스른 적 없는 착한 셋째 딸에게 거부하기 힘든 요구였다. 그가 경기여고를 졸업한 1975년 당시 서울대는 계열로 신입생을 뽑은 뒤 2학년 1학기가 끝났을 때 전공을 선택하도록 하고 있었다. 인문계열에 가고 싶던 그는 부모와 담임교사의 뜻에 끌려 사회계열에 진학했고, 이듬해에는 다시 사회학과를 가고 싶은 마음을 접고 법학과를 택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고시를 빨리 끝내버리고 그 뒤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자’였다. 해도 안 되면 마음 편하게 새로운 진로를 모색할 수 있을 거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너무 쉽게 삶이 결정되고 말았다. 2학년 겨울방학 때 책을 집어 들었는데 3학년 1학기에 1차, 4학년 1학기에 2차를 내리 합격한 것이다.
▼ 다른 수험생이 들으면 참 열 받을 만한 말씀이에요.
“네. 굉장히 열 받았대요. 그때 TV 인터뷰를 했는데, 철없이 이대로 말했거든요. 고시가 뭔지 알고 포기하든 계속하든 하자는 마음으로 시험을 봤는데 붙었다고. 사실 그대로였어요. 막상 합격하고 나니 영영 다른 걸 못 하게 되더군요. 그때부터 삶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온 거예요. 가끔 아예 고시를 안 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해요. 하지만 일단 법대에 들어간 이상 다른 길로 가기는 어려웠을 거 같아요.”
두 갈래 길
연수원을 졸업하고 많은 이가 선망하는 직업인 판사가 됐을 때도 뭔가 불편하고 어색했다. 단 한 번도 판사가 된 자신을 상상해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유감이라면 유감스러운 것이겠지만 나는 그러한 유혹에 강하게 사로잡힌 기억은 없다. 역시 나는 모범적으로 사고하고 모범적으로 행동하면서 약간의 호기심만을 가끔씩 느끼고 사로잡히기도 하다가 다시 모범적인 제자리로 돌아올 그러한 사람이었다.”
김 전 대법관이 대학 시절 교지에 실은 자작 소설 ‘덫’의 한 부분이다. 그는 재학중 두 편의 소설을 교지에 발표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소설 속 주인공의 입을 빌려 실은 자신을 묘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튼 원치 않든 그는 자신의 상황에서 ‘모범적으로 사고하고 모범적으로 행동하며’ 모범적인 판사로 살아왔으니 말이다. 질문을 던지자 그는 무척이나 쑥스러워했다.
김 전 대법관은 퇴임 후 경기도 화성에서 독서와 산책을 즐기며 생애 첫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카프카의 소설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시작하는 그 작품은 건축에 미친 두 천재의 서로 다른 삶을 다루고 있다. 한 명은 현실적이고 답이 분명한 방식의 건축에 몰입하고, 다른 한 명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천상의 무엇을 추구하다 미쳐버린다. 극적인 내용에 비해 문장은 간결하다. 형용사가 거의 없는 단문이 이어져 심지어 건조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문체보다는 구조에, 묘사보다는 논리 전개에 집중한 전형적인 법대생의 글로 보였다. 소감을 얘기하자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실은 법대에 가기 전에 쓴 거거든요. 어쩌면 제가 원래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소질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죠. 그래서 제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판사 일에 잘 적응하고 살아온 건지도 모르겠고요. 어릴 때 적성검사를 해보면 늘 수학자, 철학자, 과학자 같은 게 나왔어요.”
▼ 그런 재능을 살려 작가가 될 수도 있었겠죠.
“1학년 때 교지에 실린 ‘문’이라는 소설을 보고 국문과 전광용 교수님이 저를 부르신 적이 있어요. ‘꺼삐딴 리’를 쓰신 분인데, 저한테 ‘소설을 계속 써보라’고 격려해주셨죠. 워낙 오래전 일이라 내용은 잘 기억 안 나지만, 아마 ‘덫’과 비슷한 주제였을 거예요. 그때 제가 고민이 많았거든요. 운동권으로 갈 것인가 고시를 할 것인가. 사회계열 학과를 갈 것인가 법대를 갈 것인가. 당시 사회 현실이 엄혹했잖아요. 자기를 포기하고 운동권에 뛰어드는 친구가 많았는데, 그들을 번연히 보면서 고시 공부를 할 수 있을 만큼 용기 있는 성격이 못 됐어요. 그에 대한 고민을 담은 겁니다. 답이 분명히 보이는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택해야 하나. 두 건축가가 실은 한 자아의 분열인 거고 둘 다 제 안에 있던 모습인 거죠. 결국은 법대를 가고 고시를 봤지만.”
소수자를 위한 법 창조
▼ 대학 시절 고민에 비춰볼 때, 판사가 됐다는 게 마음 편한 일만은 아니었겠군요.
“친구들이 저를 좀 비난하는 분위기였죠. 판사로서 뭔가 내 역할을 하자, 언젠가는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세월을 보낸 것 같습니다.”
▼ 1983년 판사 임용 후 서울대에서 법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으신 걸 봤습니다. ‘모든 법적 문제가 실정법규의 단순한 논리적 해석이나 적용만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법규의 추상성과 사건의 구체성에서 오는 갈등, … 기존 윤리관에 대한 사회생활의 기술화에 따른 새로운 법 감정의 도전 등은 법규의 단순한 교의적 해석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검토하고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이 법해석학의 과제’라고 쓰셨더군요. 그 같은 고민의 내용으로 봐도 될까요.
“네. 법학을 해야 한다고 받아들이고부터 법철학, 법해석학 쪽에 관심을 뒀죠. 내가 판결을 통해 할 수 있는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했고요. 법이라는 게 조문에 다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판결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거든요. 하지만 판사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기 때문에 법 창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나는 무엇을 기준 삼아 판결해야 하나, 판사에 의한 법 창조가 가능하다면 나는 어떤 기준으로 어떤 법을 창조해야 하나, 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어요.”
▼ 30년 판사 생활 동안 답을 찾으셨나요.
“법치주의의 혜택을 소수자에게까지 넓혀가는 것, 그것이 판사에게 주어진 법 창조의 영역일 거라는 게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민주주의 사회는 다수결에 의해 움직이잖아요. 그런 세상에서 판사를 선출직으로 하지 않은 건, 다수결 뒤에 숨어 있는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김 전 대법관은 하리수씨의 호적정정을 예로 들었다. 수술을 통해 여성의 외모를 갖게 된 트랜스젠더가 호적상 성별 정정을 원했을 때, 대한민국엔 그에 적용할 법이 없었다. 국회의 법제정 움직임은 찬반양론 사이에서 한없이 표류하는 상황이었다. 사법부 내에서는 결정을 입법부에 미뤄야 하는지, 아니면 정정 허가를 내줄지에 대해 의견이 갈렸다. 그는 후자의 입장에 섰다. 판사는 다수자의 결정에서 미처 고려되지 못한 소수자를 포용하는 일을 해야 하고, 그래서 모든 사람이 법치주의의 혜택을 보게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판례에는 “현행 호적법에는 성전환자에게 바뀐 성에 따라 호적에 기재된 성별란의 기재를 바꾸기 위한 절차가 마련되어 있지 않지만, 진정한 신분관계가 호적에 기재되어야 한다는 호적의 기본원칙과 아울러 성전환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향유하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고 이러한 권리들은 질서유지나 공공복리에 반하지 아니하는 한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는 헌법상의 원칙(헌법 제10조, 제34조 제1항, 제37조 제2항)을 종합해보면 호적정정에 관한 호적법 제120조의 절차에 따라 호적의 성별란 기재를 바꿀 수 있음”이라고 돼 있다. 법해석을 통한 법 창조의 사례다.
마이너리티 감수성
▼ 제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법은 지배자를 위한 도구’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어요. ‘법치주의의 확대’가 소수자를 위한 것이 될 거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소수자를 위한 법치주의의 확대’라는 논리는 사실 제가 만든 거지요. 대법관으로서 법이라는 게 과연 왜 존재하는가 생각했거든요. 홉스나 로크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법이 제정된 건 모든 사람에게 법치주의가 이익이 되기 때문일 거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면 안 되잖아요.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될 수 있도록 법을 해석해야겠다, 특히 소수자에게 도움이 되도록 해야겠다, 그것이 제가 정한 판결의 기준입니다.”
▼ 법관은 최대한 공평무사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점에서, 지금 하신 말씀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닌가요.
“그렇지 않아요. 다수자는 자기의 대표자를 뽑아서 국회에 보내잖아요. 그곳에서 법을 만들고요. 대의민주주의하에서 소수자는 대표자가 없기 때문에 목소리를 낼 수 없어요. 그 부분을 사법부가 돌봐줘야 한다는 거지요. 사법으로 혁명이나 정치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다만 소수자의 감성으로 다수자의 감성을 자극해 설득할 수 있는 이론과 언어를 개발하는 게 법률가의 역할이라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소수자가 다수자가 되도록, 즉 법치주의에서 누군가가 배제되거나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죠. 다수자가 정말 바꿔야겠구나라고 느끼면 그때 사회가 변화하는 겁니다.”
현재의 김 전 대법관은 명백히 메이저러티로 보인다.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를 나왔고, 누구나 선망하는 직업을 가졌으며, 남편 역시 부와 명예가 보장된 변호사다. 그런 그가 ‘소수자’에 대해 지지와 관심을 지속적으로 표현하는 게 놀라웠다. 그는 “남성이 다수인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며 갖게 된 소수자 감수성 덕분일 것”이라고 말했다.
▼ 대법관님처럼 뛰어난 여성에게도 여성이라는 사실이 핸디캡이 되나요.
“저처럼 여자가 한두 명밖에 없는 환경에서 살아온 여성은 차별은 받지 않아요. 남자들이 많이 배려하고 존중해주죠. 하지만 소수자가 다수자 그룹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면이 있잖아요.”
그는 종이에 벤다이어그램을 그렸다. 여성을 뜻하는 원과 남성을 뜻하는 원이 겹치면서 그 사이에 교집합이 생겼다.
“다수자 안에 들어간 소수자는 자신의 세계 전체를 살지 못하고, 교집합, 그러니까 자신의 삶과 다수의 삶이 겹치는 그 부분 안에서만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강제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수자의 시각에서 어긋나게 행동하면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거나, 아예 내쳐짐을 당하기 때문이죠. 저를 예로 들면 지나치게 여성적인 것도 지나치게 남성적인 것도 아닌, 꼭 그 중간의 어떤 지점에 저를 맞추며 살았던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자기 검열이 강해졌고, 개성이 상당히 마모되면서 순치된 면이 있죠.”
▼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는 말씀이군요.
“여고 시절까지는 상상력이 굉장히 풍부했고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어요. 지금은 내가 그랬나, 저 자신도 잘 모르겠어요.”
공감과 연민
▼ 대법관님이 여성이라서 소수자의 상황에 더 쉽게 공감할 수 있다면, 남자 대법관은 그 부분에 한계가 있는 걸까요.
“저는 모든 사람에게 소수자로서의 감수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때로는 다수자이듯이, 남자들도 상황에 따라 소수자그룹에 속하게 되거든요. 지방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판사가 된 분은 서울에서 대학 나온 분에 비해 소수자적 감수성을 가질 수 있고, 서울서 유수의 대학을 나왔다 해도 해외유학을 갔다가 아시아인으로서 소수자적 감수성을 발견할 수도 있는 거지요. 그런 자기 나름의 소수자적인 감수성을 깨워서, 타자에 대한 공감, 재판받으러 오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발휘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 그런 기준에 비춰볼 때 가장 기억에 남는 판결을 꼽아주신다면요.
“글쎄요. 제가 한 모든 판결에서 그러려고 노력했어요. 오히려 지금 떠오르는 건 피해자에게 공감하고, 연민을 느꼈는데도 법적으로 도와주지 못해 안타까웠던 경험이 있어요.”
그는 2006년 초등학교 여학생이 같은 학교 선배 남학생에게 성추행당했다고 주장하는 사건의 주심을 맡았다. 아이가 성추행으로 보이는 상해를 입은 것은 명백한데, 어디서 어떻게 당했는지에 대한 진술이 오락가락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남학생은 처음에 성추행 사실을 시인했다가 뒤에 번복해 부인했다.
“성폭력 사건의 경우 거의 모든 가해자가 부인부터 하고 봐요. 이때 유죄를 입증하려면 정확한 피해자 진술이 필요한데 아이들이 정황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거든요. 유도심문에 금방 넘어가고 주위 반응에 따라 말이 오락가락하죠. 그렇게 증언이 훼손되면 결국 죄를 입증할 수 없어 무죄가 되고 맙니다.”
김 전 대법관은 법심리학자에게 의뢰해 성추행 피해를 주장하는 아동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방법. 성추행 가해 혐의를 받는 아동이 일시적으로 이를 시인하는 진술을 했다가 다시 부인하는 경우 그 자백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방법 등에 대한 기준을 마련했다. “최초로 피해 사실을 청취한 질문자가 편파적인 예단을 갖고 사실이 아닌 정보를 주거나 특정 답변을 강요하는 등 부정확한 답변을 유도하지는 않았는지, 질문자에 의해 오도될 수 있는 암시적인 질문이 반복됨으로써 아동 기억에 변형을 가져올 여지는 없었는지” 등의 기준을 판례에 명시했다. 이 판례는 이후 아동 성추행 사건 판결의 기준으로 널리 인용된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피해자로 추정되는 아이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여성 판사의 리더십
“최초의 진술이 훼손돼 방법이 없었어요. 아주 아쉬운 판결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이 사건이 아니라도 우리 사법체계에서 미성년자나 지적장애인 성폭력 피해자는 참 보호받기 어려워요. 법정에서 상대 변호사에 의해 피해자가 모욕을 당하는 경우도 많지요. 진술의 모순성을 캐내기 위해 어린 여학생들을 재판정에 세워놓고 집중적으로 괴롭혀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가 고민거리였는데, 지금 후배 여자 판사 몇 분이 재판 절차를 개선하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답니다. 좋은 방향으로 해결책이 마련됐으면 좋겠어요.”
그가 말하는 ‘후배들’은 김 전 대법관과 함께 ‘젠더법 연구회’에서 활동하던 판사들이다. 김 전 대법관은 여성 판사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이 모임에서 대모와 같은 역할을 했다. 지난 5월 서울에서 열린 제10회 세계여성법관회의의 산파도 그였다.
▼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법관으로서, 후배 여성 판사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게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제가 대법관으로 임명된 2004년부터 여성 판사 수가 크게 늘기 시작했어요. 사법부 안팎에서도 말이 많이 나왔지요. 지금 방향을 어느 정도 잡아주지 않으면 점점 힘들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문득 고등법원 배석판사 시절이던 1992년 우연히 참석했던 세계여성법관회의 기억이 떠올랐지요. ‘우리나라는 언제 여성 판사 수가 늘어나 이런 대회를 할 수 있게 될까’ 부러워했는데 이제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후배들한테 이걸 한번 해보자고 제안했지요.”
김 전 대법관의 서재 한쪽에 마련된 ‘시부모님 자료관’. 시어머니가 쓰던 옷장 안에 두 분을 추억할 수 있는 물품을 넣어두었다. 김 전 대법관은 결혼 후 두 어른이 돌아가실 때까지 20년간 시부모를 모셨다.
“대외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우수한 사법체계와 여성의 사회 참여를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대내적으로는 여성 판사들이 직업적인 정체성을 확립하고 리더십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됐죠. 제가 판사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여성 판사의 리더십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었어요. 워낙 드물었으니까 롤 모델도 남자였고, 그들의 문화를 그냥 따라 했죠. 하지만 여성 판사 수가 늘면서 그들이 추구해야 할 리더십을 정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법정에서도, 직원을 대할 때도, 부장판사가 되면 배석 판사들 사이에서도 늘 리더십이 필요하거든요. 이 대회를 준비하며 판사들끼리 토론을 많이 했어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뒤 ‘마더 트랙’에 들어가버릴 것인가, 아니면 조직 내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의사결정 지분을 확보할 것인가, 법원 행정에는 어느 정도까지 관여해야 하는가 같은 주제였죠. 사실 여자 판사도 집에 가면 애를 봐야 하고, 가사 노동도 해야 하잖아요. 그런 고충을 공유하면서 함께 토론하니까 모두에게 좋은 경험이 됐어요.”
▼ 대법관님 자신도 큰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사직을 심각하게 고려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고등법원 배석판사 시절인데, 그 몇 년이 정말 힘들었어요. 일이 정말 많은데 한 달에 몇 번씩 아이 급식하러 학교에 가야 하는 거예요. 버스를 타고 점심시간에 다녀오면 두 시간 이상 날아가는데 그때마다 너무 괴로웠어요. 그렇게 챙겨야 하는 일이 참 많았죠. 시부모님이 편찮으실 때도 힘들었어요. 아버님 병 수발은 남편이 많이 알아서 했지만, 그래도 제 역할이 필요하니까요. 집에 가면 쉴 수 있고 밥 차려주는 부인 있는 결혼한 남자 동료들이 부러웠습니다. 결혼한 남자가 결혼 안 한 여자에 비해 두 배의 효율을 낸다면, 결혼한 여자는 그 반밖에 못하니까 결국 결혼한 남자에 비해서 네 배를 노력해야 같은 수준이 될 수 있잖아요. 똑같이 경쟁하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지요.”
힘들 때는 마음속으로 ‘이 또한 곧 지나가리라’를 되뇌었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조금씩 문제가 해결됐다. 그는 후배들과 이 경험을 나누며 여성 판사가 ‘안주하려는 유혹’을 떨쳐낼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는 멘토가 되고자 했다.
▼ 너무 여성 판사에게만 신경 써준다고 남자 후배들이 불평하지는 않았습니까.
“아니요. 리더십에 관한 책을 봐도 여자들은 좀 더 특별히 키워줘야 한다는 말이 나와요. 현실적으로 여자들은 해야 할 일이 상대적으로 많으니까 적당히 안주하려는 유혹에 시달리게 된다는 거죠. 사법부에 신규 임용되는 판사 가운데 절반 이상이 여성이에요. 그들이 안주하면 조직이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계속 그들을 격려하고 자극하며 훈련시키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데 대해 다른 판사들도 공감한 것 같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김 전 대법관은 인터뷰 말미, 퇴임 당시 후배 판사들에게 선물 받은 문집을 꺼내 보였다. ‘사랑하는 대법관님의 퇴임 즈음에 후배들이 마음을 모아 드립니다’라는 제목의 책 안에는 후배 판사들이 김 전 대법관에게 보내는 편지가 빼곡히 담겨 있었다. 여성 판사의 ‘큰언니’로서 살아온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행간에 읽혔다.
▼ 이제 겨우 50대 중반이신데, 너무 일찍 대법관이 되시는 바람에 한창 일할 나이에 사법부를 떠나는 게 아닌가 안타까워하는 분도 많을 것 같습니다.
“저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나이잖아요. 지금껏 제가 무슨 판결을 했는지 돌아보고 그것의 잘잘못이나 철학적인 기초도 따져보면 좋을 것 같아요.”
▼ 변호사를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게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죠.
“전관예우를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저 자신이 변호사 업무와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지요. ”
긴 문답이 이어지는 동안 어떤 질문에든 차분하고 분명하게 답을 내놓던 그가 처음으로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다른 분들과 비교할 것 없는 개인적인 선택으로 봐달라”며 말을 아꼈다. 하지만 그가 이 결정으로 수십억원 의 잠재 수입을 포기한 것만은 사실이다. 지난 2월 한나라당 사법제도개선특위는 이용훈 대법원장이 대법관을 마치고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5년 동안 변호사 수임료만 60억원을 신고했다고 밝혔다. 박시환 전 대법관 역시 22개월 만에 20억원의 수입을 올린 것으로 드러났다.
▼ 남편이 변호사니까 그런 결정을 한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오던데, 사실 강지원 변호사도 변호사 사무실을 접은 지 오래되셨죠.
“네. 사무실을 그만둔 지는 꽤 됐고, 지난해부터 새로운 사건은 맡지 않고 있어요. 지금은 봉사활동 하느라 바쁘죠. 그렇다고 사는 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에요. 남편이나 저나 연금이 나오고, 생활비도 크게 들지 않거든요. 돈을 버는 것보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겁니다.”
▼ 지금까지의 판결을 돌아보겠다는 게 그 ‘하고 싶은 일’인 건가요.
“네. 제 것뿐 아니라 다른 대법관분들이 판결한 것도 분석해보고 싶어요. 한 가지 기준을 정해서 이 판결이 정의로웠나 정의롭지 않았나 구분해보는 겁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정의는 어떤 기준으로 판별되는지를 정리해볼 수 있겠지요.”
▼ 장래 계획이 공부이신 거군요.
“네. 남편은 사람이 어떻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느냐고, 사회봉사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해요. 저도 그 말은 옳다고 생각하고요. 기회가 있으면 봉사도 하겠지만, 주된 관심은 공부 쪽에 두고 싶어요.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속으로 ‘아, 이거 내가 하고 싶었던 건데’라고 생각했거든요. 저 혼자 하기 어렵다면 정치학과, 사회학과, 법학과, 철학과 교수님들과 함께 이런 주제를 연구해보고 싶어요. 꿈이 크죠?”
그는 “정치학과 교수님과 함께 공부하고 싶다는 얘기, 정의에 대한 얘기 등을 하다 보니 가끔 정치에 뜻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며 “이렇게 뜬구름 잡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현실 정치를 하겠느냐”고 웃어넘겼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그의 집을 두 번 찾았다. 첫날 ‘마종기 시집’이 놓여 있던 책상 위에 둘째 날에는 ‘사법통치의 정당성과 한계’가 놓여 있었다. 책 옆에 공책을 펼쳐놓고 연필로 메모를 해가며 읽는 듯했다. 그는 “시집을 읽고 싶은데 자꾸 마음이 이쪽으로 간다. 나는 천성이 이런 모양”이라며 또 한 번 웃었다. 김 전 대법관은 차분한 첫인상과 달리 참 잘 웃었다. 그 미소 안에서 딸, 아내, 며느리이면서 동시에 판사로 자신의 삶을 단단히 살아온 한 여성의 친절함과 소탈함, 현명함이 읽혔다.
“판사 생활을 하면서 늘 내가 슬픈 사람들의 눈물을 얼마나 닦아주고 답답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얼마나 풀어주었는지 자문했어요. 정의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도 그런 노력의 연장선에 놓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계속 이런 책에 손이 가는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