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호

토니 라루사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감독

정점에서 퇴장 선언한 ‘라루사이즘’ 창시자

  • 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입력2011-11-22 13: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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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년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의 우승팀은 통산 11번째 우승을 달성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였다. 카디널스는 패색이 짙었던 월드시리즈 6차전에서 9회말 2아웃까지 상대팀 텍사스 레인저스에 뒤졌지만 극적인 동점타와 연장 접전 끝에 승리를 거뒀다. 이 여세를 몰아 마지막 7차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우승 반지를 거머쥐었다. 이 각본 없는 드라마를 쓴 주인공은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불리는 토니 라루사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감독이다. 라루사 감독은 현대 야구에서 보편화한 ‘선발-중간계투-마무리’라는 투수 운영방식을 정립해 ‘라루사이즘’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1이닝 마무리를 필두로 한 불펜투수 분업화는 1920년 ‘몸에 맞는 볼’ 도입과 1960년대 마운드 높이 조정 이후 메이저리그의 혁신을 단행한 일대 사건으로 불린다. 그는 우승 직후 은퇴를 선언해 세계 야구계를 또 한 번 깜짝 놀라게 했다.
    “법조인이 되는 것보다 버스를 타고 마이너리그를 돌아다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바로 제가 야구 감독이 된 이유입니다.”

    이 말과 함께 재판정 대신 더그아웃을 택한 한 청년은 40년 후 메이저리그 최고의 감독으로 변신한다. 바로 토니 라루사(67)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감독이다. 라루사 감독이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긴 발자취는 엄청나다. 그는 1979년 시카고 화이트삭스(1979~1986) 감독을 시작으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1986~1995)를 거쳐 1996년부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감독을 맡아왔다. 그의 통산 승수는 무려 2728승이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그보다 더 많은 승수를 거둔 감독은 코니 맥(3731승)과 존 맥그로(2763승)에 불과하며 현역 감독 중에서는 압도적으로 1위다.

    라루사는 1989년 아메리칸 리그에 속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맛본 후 내셔널 리그에 속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도 2006년과 올해 월드시리즈 정상을 밟았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양대 리그에서 모두 월드시리즈 우승을 맛본 감독은 스파키 앤더슨(신시내티, 디트로이트)과 라루사 단 2명뿐이다. 그는 네 차례나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라 루사 감독의 전략적인 팀 운영은 1990년대 초반 그의 이름을 딴 야구 컴퓨터 게임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2005년에는 라루사이즘으로 대표되는 그의 전술이 ‘8월의 사흘 밤’이라는 책으로 출간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 책은 그 이듬해 영화로도 제작됐다.

    특히 올해 라루사가 발휘한 지도력은 그가 왜 메이저리그 최고 명장인지를 잘 보여준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8월 말까지만 해도 월드시리즈 진출이 불가능해 보였다. 내셔널리그 1위는커녕 디비전 결승에 진출할 수 있는 와일드카드 1위 팀에도 무려 10.5경기로 뒤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31경기에서 23승8패라는 엄청난 승률을 올려 정규시즌 마지막 날 극적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내셔널리그 디비전 결승에서는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꺾었다. 월드시리즈에서는 2승 3패로 몰린 상황에서도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월드시리즈 6차전에서 벼랑 끝에서 극적인 역전 드라마를 쓰면서 우승을 차지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끈 라루사 감독은 2011년 11월1일 33년간의 메이저리그 감독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날 그는 보도자료를 통해 “카디널스의 변화를 위해 내가 물러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며 감독 은퇴를 선언했다. 라루사 감독은 메이저리그 역대 감독 중에서 감독 승수 3위 외에도 포스트시즌 70승(역대 2위), 통산 5097경기(역대 2위), 통산 최다패(역대 2위), 감독 33년(역대 동률 2위), 2728승(역대 3위), 14번째 플레이오프 진출(역대 3위), 3번째 월드시리즈 타이틀(역대 동률 6위)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라루사 감독이 명장인 이유는 단지 성적만이 아니다. 라루사는 현대 야구의 패러다임을 바꾼 개척자이자 혁명가였다. ‘라루사이즘’으로 불린 그의 불펜 운용은 이후 다른 구단들이 뒤를 따르면서, 현대 야구의 표준으로 굳어졌다. 라루사로부터 시작된 1이닝 마무리와 좌타자 전용 투수, 즉 좌완 원포인트 릴리프는 ‘쓸모없는 투수’들의 생명을 연장시켰고, 불펜 투수들의 처우를 개선했다. 또한 야구를 더욱 복잡하고 치열한 두뇌싸움으로 만들어놓았다. 이 때문에 야구계 인사들은 라루사의 퇴장을 “떠나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아는 이의 뒷모습은 언제나 아름답다”며 칭송하고 있다.

    토니 라루사는 누구인가

    이탈리아와 스페인 혈통을 지닌 라루사 감독은 1944년 미국 플로리다 주 탬파에서 태어났다. ‘La Russa’라는 그의 성은 이탈리아어로 ‘러시아 사람(The Russian)’을 뜻한다. 라루사는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스페인어에 대한 재능은 메이저리그 야구 감독이라는 그의 커리어에 크게 공헌했다. 메이저리그의 많은 선수가 중남미 출신이기 때문이다. 중남미 선수들과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할수록 감독이 펼칠 수 있는 작전과 운용 방안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야구에 두각을 나타낸 라루사는 1963년 5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전신인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의 유격수로 메이저리그에 입성했다. 하지만 선수 라루사의 인생은 초라했다. 지독하게 따라다녔던 각종 부상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서른이 되기도 전에 메이저리거의 삶을 접는다. 선수로서 통산 132경기에 출장한 그는 1할9푼9리의 타율에 15안타 2루타 5개, 3루타 2개가 전부인 성적을 기록했다. 홈런은 단 하나도 없었고, 타점도 7개에 불과했다. 초라하다는 말을 하기도 민망한 성적이었다.

    실망에 빠진 그는 은퇴 후 야구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갔다.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법학 대학원을 졸업한 라루사는 1980년 7월 플로리다 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그는 딱딱한 법정보다는 야구를 더 사랑했다. 법대 교수는 그의 결정을 간곡하게 말렸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라루사는 다시 야구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라루사는 1978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더블A 감독을 맡아 야구계에 복귀했다. 1979년 시즌 중도에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감독을 맡으며 메이저리그 감독이 됐다. 라루사는 1983년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지구 우승으로 이끌며 아메리칸리그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됐다. 하지만 영광도 잠시였다. 1984년과 1985년 연이어 부진한 성적을 올린 그는 1986년 시즌 도중 26승 38패를 끝으로 화이트삭스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다.

    라루사이즘의 정립

    하지만 라루사는 불과 3주 만에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라루사이즘(Rarussaism)’, 즉 투수 운영의 분업화를 정립한다. 당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는 ‘빅 맥’ 마크 맥과이어, 호세 칸세코 등 강타자들이 즐비했다. 겉으로 보면 완전한 타격의 팀이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투수력을 바탕으로 하는 짜임새 있는 야구를 추구했다. 바로 라루사 덕분이었다.

    타자들의 체격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기술 발달로 야구공의 반발력과 야구 배트의 성능이 좋아진데다, 야구 분석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과거와 달리 한 투수가 9이닝이라는 한 경기 전체를 책임지는 일은 상상할 수 없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메이저리그 야구단은 불펜 투수들을 마구잡이식으로 운용했다. 불펜 투수는 야구 경기에서 처음 등장하는 선발 투수를 제외한 모든 투수를 일컫는 말로 구원 투수(릴리프)라고도 한다. 불펜진은 선발투수가 물러난 뒤 1~2이닝을 던지는 숏 릴리프, 3~4이닝을 던지는 롱 릴리프, 팀이 경기에서 이기고 있을 때 마지막 9회 1이닝을 책임지는 마무리, 중간 계투와 마무리를 잇는 셋업맨, 좌타자만 상대하는 좌완 스페셜리스트 등이 있다.

    라루사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세계 야구의 새로운 전기를 만들었다. 당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선발 투수였던 데니스 에커슬리를 1이닝 마무리로 활용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마무리 투수는 팀이 이기고 있는 8회나 9회에 승리를 지키기 위해 잠깐 등판하는 투수를 말한다. 하지만 라루사 이전에는 최고 구위를 가진 투수가 마무리로 활동하는 예가 드물었다. 훌륭한 투수일수록 매 경기 5~6이닝씩을 담당하는 선발 투수로 활동해야지, 불과 1이닝만 책임진다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루사의 이 결정은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최고 구위를 가진 투수가 ‘뒷문’을 든든히 지킴에 따라 역전패의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선발 투수로는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에커슬리는 1988년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50세이브를 달성한 투수가 됐다. 당시 에커슬리가 37세로 투수로는 환갑이라 해도 무방한 나이였음을 감안할 때 더욱 대단한 성적이다. 이 성공을 바탕으로 그는 마무리 투수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에커슬리가 은퇴한 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구단은 그의 등번호 43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2011년 한국 프로야구의 우승을 차지한 삼성라이온스 역시 오승환이라는 당대 최고의 마무리 투수를 바탕으로 5년 만에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라루사이즘이 세계 야구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강한 투수력과 화력을 겸비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1988년부터 1990년까지 3년 연속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라루사는 1989년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꼈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의 성과는 그를 메이저리그의 최고 명장 반열에 올려놓은 결정적 계기였다. 1992년 그는 서부지구 우승과 더불어 올해의 감독상을 3번째로 수상했다. 하지만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말년 시절 그의 성적은 좋지 않았다. 라루사 식의 불펜진 운영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구단주도 바뀌었다. 결국 그는 1996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감독으로 이적한다.

    드라마 같은 우승, 드라마 같은 퇴장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뉴욕 양키스 다음으로 많은 우승을 차지한 팀이다. 100년이 넘는 메이저리그 역사 동안 두 자릿 수 이상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팀은 양키스와 카디널스뿐이다. 하지만 1987년 이후 카디널스는 오랫동안 우승에 목말라 있었다. 하지만 명장의 손길은 남달랐다. 라루사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부임 첫해인 1996년 이 팀을 지구 우승팀으로 만들었다.

    2006년에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물리치고 16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포스트시즌 시작 전만 해도 카디널스 불펜은 허약 그 자체였다. 이에 라루사는 신예 애덤 웨인라이트를 마무리로 배치하는 결단을 내렸고, 웨인라이트의 커브는 수많은 강타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마무리의 안정과 함께 세인트루이스의 다른 불펜 투수들까지 덩달아 힘을 내기 시작했다. 당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포스트시즌에 턱걸이로 겨우 진출했기에 여러 전문가는 세인트루이스가 월드시리즈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디비전시리즈에서 탈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디비전시리즈에서 뉴욕 메츠를 7차전 승부 끝에 꺾었다. 디트로이트와 만난 월드시리즈에서도 예상을 깨고 5차전에서 끝내, 역대 정규시즌 최소 승수 월드시리즈 우승 팀이 됐다.

    토니 라루사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감독


    당시 세인트루이스 구단은 라루사 감독에게 선수 관리에 대해 전권을 위임했다. 그래서 선수들이 조금이라도 돌출 행동을 보여 라루사 감독 눈 밖에 나면, 그 선수는 거의 대부분 트레이드 대상이 됐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못지않은 그의 전성기가 다시 도래한 셈이다. 자신의 두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직후 라루사 감독은 세인트루이스의 10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자신보다 먼저 양대 리그 월드시리즈에서 모두 우승한 고(故) 스파키 앤더슨 감독에게 헌정한다고 밝혔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세 번째로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올해 역시 2006년의 행보와 비슷한 점이 많다. 시즌 초만 해도 야구 전문가들은 세인트루이스를 약체 팀으로 평가했다. 크리스 카펜터와 함께 팀의 주축을 맡았던 에이스 투수 애덤 웨인라이트가 팔꿈치에 토미존 서저리 수술을 받고 전력에서 이탈한데다, 다른 팀과 달리 전력 보강도 거의 없었다. 시즌 개막 직전 스포츠전문 케이블 방송 ESPN이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투표에서 세인트루이스의 우승을 점친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실제 8월 전까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성적은 리그 중하위권에 머물렀다.

    하지만 여름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7월 말 세인트루이스는 그동안 팀 내 최고 유망주였지만 라루사 감독 및 마크 맥과이어 타격코치와 줄곧 불화를 빚은 외야수 콜비 라스무스를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보내버렸다. 대신 에드윈 잭슨, 옥타비오 도텔, 마크 렙친스키를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팀 내 불화 요인이 사라지자 선수단에는 ‘뭐든 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피어났다.

    시즌 초 부진을 면치 못하던 강타자 알버트 푸홀스도 불방망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9월 초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대결에서 세인트루이스의 베테랑 투수 크리스 카펜터는 밀워키의 중견수 나이젤 모건과 신경전을 벌였다. 모건의 지나친 세리머니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카펜터는 모건을 삼진으로 잡은 후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는 모건에게 한마디를 했다. 이에 모건이 발끈했고, 알버트 푸홀스가 카펜터 대신 나서 모건과 충돌했다. 경기가 끝난 후 모건은 자신의 트위터에 푸홀스를 여자 이름(알베르타)으로 부르며 세인트루이스를 ‘포스트시즌에도 나가지 못하는 팀’이라고 조롱했다. 이는 세인트루이스 선수들의 승부욕에 불을 붙였다. 세인트루이스는 이어진 애틀랜타와의 3연전을 싹쓸이하는 것을 시작으로 12승2패를 질주했다. 결국 정규시즌 마지막 날 극적으로 와일드카드를 따냈다.

    하지만 세인트루이스가 가을 야구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둘 거라고 보는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디비전시리즈에서 만난 팀이 최강 선발진을 보유하고 있으며 메이저리그 최다승(102승)을 거둔 필라델피아 필리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인트루이스는 필라델피아를 순순히 꺾었고,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는 밀워키 브루어스도 이겼다.

    월드시리즈에서 만난 팀은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진출에 성공한 텍사스 레인저스였다. 월드시리즈가 시작되기 전 25명의 ESPN 전문가 중 세인트루이스의 우승을 점친 사람은 단 4명뿐이었다. 그만큼 텍사스의 전력은 탄탄했다. 결국 세인트루이스는 텍사스에 2승3패로 밀리기 시작했다. 배수의 진을 치고 맞이한 6차전에서 세인트루이스는 경기 직전까지 7-4로 지고 있었다. 월드시리즈 우승컵은 완전히 텍사스의 손으로 넘어간 듯 보였다.

    그러나 세인트루이스는 월드시리즈 패배에 단 하나의 아웃을 남겨둔 상황에서 2번이나 동점을 만들어내면서 6차전을 이겼다. 그 여세를 몰아 7차전도 승리하며 월드시리즈 역사에 남을 대역전승을 만들어냈다. 전력이 약해 우승이 어렵다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깼다는 점에서 세인트루이스의 이번 우승은 2006년과 대단히 흡사하다.

    이번 우승은 또한 라루사의 절묘한 투수 운용이 다시 한 번 빛난 경기이기도 했다. 그는 승부처에서 늘 빠른 투수교체를 단행했고 이는 대부분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라루사 감독은 상대 타자가 느끼는 부담감, 책임감의 크기를 철저하게 계산한 불펜 운영을 했다. 그는 2011년 월드시리즈 7차전 동안 무려 31명의 불펜 투수를 투입했다. 경기당 평균 5명의 불펜 투수를 투입한 셈이다. 그의 존재를 세계 야구계에 다시 한 번 각인시킨 라루사는 월드시리즈 우승 사흘 후인 11월1일 전격적으로 은퇴를 발표했다.

    라루사 감독이 주는 교훈

    1)조력자를 잘 활용할 줄 알아야 진정한 리더다

    라루사 감독의 성공의 절반은 현재 메이저리그 최고 투수코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데이브 던컨으로부터 나온다. 라루사와 던컨은 1983년부터 28년간 호흡을 맞추며 라루사이즘을 정립했다. 라루사 감독이 거둔 통산 2235승 중 던컨 코치와 함께 이룬 것이 무려 1997승이다. 즉 라루사이즘을 고안한 사람은 라루사지만 이를 실제로 선수들에게 접목한 사람은 바로 던컨 투수코치다.

    라루사와 던컨은 1960년대 초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 마이너리그 팀에서 만났다. 유격수였던 라루사와 포수였던 던컨은 둘 다 선수로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무명의 설움을 알았기에 둘은 더 가까워질 수 있었고, 메이저리거가 되는 꿈을 꾸며 친하게 지냈다.

    토니 라루사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감독
    라루사보다 먼저 지도자의 길을 걸었던 던컨은 투수코치로도 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1982년 시애틀 매리너스의 투수코치로 재직했던 던컨은 연봉 인상 요구를 거절당하자 당시 시카고 화이트삭스 감독이던 라루사를 찾아가 자신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다음 날 라루사는 당시 시애틀 매리너스의 르네 래치맨 감독에게 양해를 구했다. 시즌 중 다른 팀의 감독이나 코치를 영입하려면 반드시 신사협정을 거쳐 상대 팀의 동의를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두 달 후 던컨은 시애틀 매리너스를 떠나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투수코치로 변신했다. 그 후 29년간 이 둘은 야구 시즌이면 단 하루도 떨어져본 적이 없다.

    라루사와 던컨 코치는 별 볼일 없는 투수를 데려다 훌륭한 불펜 투수로 개조해 뛰어난 성과를 거뒀다. 앞서 언급한 데니스 에커슬리가 대표적이다. 또한 라루사-던컨 듀오는 라마르 호이트부터 크리스 카펜터까지 4명의 사이영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각각 4차례나 리그에서 가장 낮은 팀 평균자책점을 합작하며 마운드 운용 능력을 뽐낸 바 있다. 라루사는 세 번의 월드시리즈 우승 직후 항상 그 공을 던컨에게 돌렸다. 그는 “던컨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터득하는 데 항상 다른 사람보다 앞서갔다. 그것이 야구든 인생이든 마찬가지였다. 우리 투수진에 대한 모든 칭송은 100% 던컨의 공이다”라고 칭찬했다. 던컨 또한 감독 라루사에 대한 존경이 대단하다. 그는 “최종 결정은 항상 감독이 내려야 한다. 그는 한두 명의 선수가 아니라 팀원 전체가 뭉쳐야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다. 선수단 전체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데 그 이상의 감독은 없다”고 강조한다. 심지어 던컨 투수코치는 휴스턴 애스트로스 등 여러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감독직을 제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했다. 라루사 밑에서 코치로 지내는 것이 더 좋다는 이유에서다.

    고도의 분업화가 이뤄진 현대 야구에서 유능한 조력자가 없는 감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야구단이라는 방대한 조직을 이끌려면 한 사람의 감독만 유능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업무의 전문화, 분업화가 가속화된 현대 기업에서 훌륭한 리더는 조력자를 잘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유능한 참모를 알아보고, 그의 능력을 100% 활용하는 일이야말로 훌륭한 리더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다.

    2)리더는 상식 파괴자다

    라루사 감독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전략과 전술 운용에서 탁월한 재주를 보인 감독이다. 특히 투수와 타자 간의 상대 기록에 따라 선수를 달리 기용해 ‘메이저리그판 김성근’으로 불리기도 한다. 잦은 투수 교체와 한국식 벌떼야구 도입으로 큰 성과를 낸 김성근 전 SK감독과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김성근 전 감독과 라루사는 놀랄 만큼 닮은 점이 많다.

    하지만 라루사는 결코 데이터에만 얽매이지는 않았다. 데이터를 중시하지만 그는 자주 상식을 파괴했다. 그는 “승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이든 바꾸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면 기존의 틀을 깨기를 주저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이 창시한 라루사이즘의 기초도 무시했다.

    2011년 시즌 초반 마무리 투수 라이언 프랭클린이 무너지면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뒷문 불안으로 고전했다. 확실하게 마무리를 맡을 선수가 없는 상황에서 라루사가 꺼내 든 카드는 ‘집단 마무리’였다. 올 시즌 24세이브의 신예 페르난도 살라스를 비롯해 제이슨 모트, 에두아르도 산체스, 미첼 보그스 등이 경기 상황에 따라 번갈아가며 9회를 책임졌다. 이들은 때로는 8회부터 나와 종종 2이닝을 막기도 했다. 라루사는 ‘마무리 투수는 한 명이어야 한다’ ‘마무리 투수는 9회에 나온다’는 자신이 만든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파괴했다. 포스트시즌에서는 정규리그에서 마무리를 맡았던 페르난도 살라스와 ‘셋업맨’ 제이슨 모트의 보직을 맞바꾸는 변칙 작전으로 철벽 계투진을 완성하면서 5년 만의 정상 탈환에 성공했다. 상식과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리더 라루사의 성과였다. 시시각각 바뀌는 21세기 ‘초경쟁’ 환경에서 기업이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은 변화다. 과거의 성공을 고집하면 망할 때가 많다. 필름 분야에서 독보적인 세계 1위를 고수하던 코닥이 변화된 디지털 환경을 무시하고 필름에 집착하다 밀려났지만, 만년 2위이던 후지는 필름에서 이미지와 표면처리로 사업 영역을 전환해 살아남았다. 즉 현대 기업이 망하는 이유는 해당 기업의 약점 때문이 아니라 강점 때문일 때가 많다. 바로 ‘성공의 덫(success trap)’이다. 훌륭한 리더는 자신의 조직이 지닌 강점이 변화된 환경에서 유효한지 아닌지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할 줄 알아야 한다. 변화된 환경을 무시하고 기존의 강점만을 고수하면 ‘성공의 덫’에 빠지기 쉽다. 리더가 상식 파괴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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