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를 통해 반일 독립정신 일깨워주고 싶어”
- 시 소재 구하려 남으로 왔다가 길 막혀 빨치산 활동
- “몽양 선생 존경하지만 그의 비서는 아니었다”
- 여운형은 전투적 지도자, 한용운은 고요한 지도자
- 통일국가 가로막는 말은 ‘빨갱이’ ‘친일보수’
- ‘민족’ 잠시 접고 다문화, 다민족 포용해야
일제강점기를 거쳐 지금까지 이리저리 요동치며 흘러온 굵직굵직한 우리 ‘역사의 무늬’를 새기고 있는 시인이 있다. 올해 94세인 시인 이기형 선생이 그다. 그가 시를 쓰게 된 이유는 러시아 리얼리즘 문예이론을 세운 문예평론가이자 제정러시아를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한 벨린스키(Vissarion Grigol‘evich Belinsky·1811~1848)처럼 “시나 소설을 통해 반일독립운동 정신을 사람들에게 심어줘 일제를 하루빨리 무너뜨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한국 문단에서 ‘21세기 마지막 빨치산’ ‘20세기 역사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가 일제강점기 때 무엇을 했으며,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우리 역사 흐름을 어떻게 보았는지, 광복 이후부터 6·25전쟁을 거쳐 지금까지 어떤 사상으로 무장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살펴야 한다.
‘민주조선’ ‘동신일보’ 등 남북을 가리지 않고 신문사에서 정치부, 사회부 기자생활을 한 그는 여운형, 박헌영, 김구, 한용운, 임화, 박팔양, 오장환 등 광복 전후 우리나라를 이끈 정치지도자와 뛰어난 문인도 많이 만났다.
그래서일까? 그는 “몽양 여운형은 철저한 전투적 지도자요, 만해 한용운은 고요한 지도자”라고 단언했다. 박헌영에 대해서는 “박헌영이 이승만을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세우려 했다. 판결문을 찬찬히 살펴보니 미국의 앞잡이였던 거 같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판결문은 1955년 12월15일 북한에서 열린 박헌영의 재판 판결문이다. 이 판결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데, 이는 인터뷰 중반에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 시인은 또 “통일국가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는 것은 ‘좌우익’ ‘진보 보수’ ‘빨갱이’ ‘공산당’ ‘친일수구’란 말들이며, 이런 말들을 버려야 통일이 앞당겨질 수 있다”면서 “8·15 때 광복이 올 줄 그 하루 앞날까지 몰랐듯이 남북통일도 내일 당장 될 수도 있다”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 12세 때 야학을 통해 항일 독립운동을 알게 됐고, 1933년부터 작가 한설야, 사학자 문석준, 독립운동가 여운형, 시인 임화 등을 만나 조선독립을 위해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만주로 가서 독립군이 될 수도 있었는데 왜 문학을 공부했습니까?
“나는 반일 독립운동 정신을 사람들에게 고취시켜 다 함께 일제를 물리치고 싶었어요. 그때 러시아 리얼리즘 문예이론을 세운 문예평론가이자 제정러시아를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한 벨린스키가 쓴 일본어 평론을 많이 읽었어요. 나도 벨린스키처럼 문학을 통해 조선독립운동을 하면 일제를 물리치는 데 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죠. 내가 강제징용을 피한 학생들과 함께 ‘협동단’을 만든 것도 무장투쟁을 통해 일제를 물리치고 싶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때 협동단 지도자는 고향이 나와 같은 염윤구였는데, 산에서는 그를 청산(靑山)이라 불렀죠(노시인은 당시의 회한이 밀려온 듯 잠시 눈을 감았다). 우리나라 문인으로는 임화가 쓴 평론을 애독했고 가끔 만나기도 했어요. 지금은 시나 소설을 통해 통일문제를 자꾸 이야기해서 사람들을 일깨우고 싶어요. 내 시가 남북통일에 도움 되는 자양분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어요.”
참으로 신기했던 선거를 소재로 첫 시 발표
▼ 1947년에는 ‘민주조선’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죠? 왜 남으로 내려오게 되었나요?
“나는 북에 있을 때 프리랜서로 활동하기도 했고, ‘민주조선’ ‘노동신문’의 정치부, 사회부기자를 했지만 글을 쓰기 위해 그만두었어요. 1947년 ‘민주조선’에 발표한 시의 제목은 ‘선거’였는데,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선거란 걸 해본 적이 없었죠. 선거를 하니까 참 신기하기도 해서 그 내용을 시로 써서 발표했어요. 박팔양 선생이 그때 ‘노동신문’ 편집국장을 맡고 있었는데, 선생이 내 시를 ‘민중문화시의 표본’이라며 크게 칭찬했어요. 1950년에는 ‘후방’(당시 전투가 벌어진 곳은 전방, 전투가 일어나지 않는 곳은 후방이라 불렀다고 한다)에서 시나 소설 소재를 구하려고 (남으로) 내려왔어요. 정치적 입장은 없었고요. 그때는 전쟁 중이라도 민간인들이 남북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는데, 9·28 서울 수복을 하면서 남북이 가로막혔어요. 당시 친구 2명과 함께 목포까지 갔다가 정읍을 거쳐 전주로 가는데 경찰인지, 군인인지 언뜻 분간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어요. 우리는 깜짝 놀라 산으로 올라갔는데, 누군가 산에서 내려오라고 해서 내려가는데 가까이서 보니 미군이었어요. 미군들이 무차별 사격을 해 친구 2명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요. 나는 다행히 산자락에 엎드려 고개를 포옥 파묻고 있어서 총을 맞지 않았죠. 다음 날 삽을 들고 친구 2명을 산에 묻었어요. 북으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그냥 산으로 올라갔죠. 산사람(빨치산)들을 만나 함께 지냈죠.”
▼ 여운형, 한용운 선생과 자주 만났고, 또 아주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했는데요. 몽양과 만해는 언제 처음 만났나요?
“나는 그때 조선 청년 학생들을 지도해줄 만한 유능한 지도자를 찾고 있었어요. 그때 누군가 문석준(사학자)을 소개했고, 문석준 선생이 1937년에 여운형 선생을 소개해줬어요. 문석준은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를 나온 수재였는데, 우리말로 우리 역사를 처음 썼던 분이셨죠. 그 원고는 내가 직접 봤어요. 북한에서는 8·15 직후에 그 책을 교과서로 썼죠.”
여운형, “뒤에서 부추기는 사람은 지도자 아니다”
▼ 몽양 선생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몽양 선생이 나를 처음 만나 한 말은 ‘진정한 지도자는 앞에 서서 대중을 끌고 가는 사람이다. 뒤에서 부추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어요. 그때 몽양 선생이 대단한 투사라는 사실을 알았죠. 만해 선생과 몽양 선생 차이점은 몽양 선생은 철저한 전투적 지도자, 즉 투사요, 만해 선생은 고요한 지도자라 할 수 있어요. 당시 문학청년이었던 저는 몽양 선생과 만해 선생을 몹시 존경했어요. 몽양 선생은 자주 만났고, 만해 선생은 가끔 만났어요. 사람들이 그 때문에 나더러 몽양 여운형 선생 비서를 잠시 했다고 그러는데, 그건 사실과 달라요.”
‘몽양 여운형 평전’을 쓰고 몽양 선생과 자주 교유했다는 이유로 많은 언론에서 그를 ‘여운형의 비서’로 소개하지만, 그는 “전혀 아니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 박헌영은 어땠나요?
“박헌영과도 몇 번 만났죠. 그는 이승만을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 내세운 인물이었어요. (1955년) 북한 재판소 판결문을 보니까 미국의 앞잡이가 틀림없더라고요.”
이 시인은 박헌영에 대해서는 주로 판결문을 회고하면서 그를 기억했다. 하지만 판결문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학교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는 ‘신동아’ 2010년 2월호 ‘정진석의 언론과 현대사 산책’을 통해 다음과 같이 썼다.
“1955년 12월15일 열린 박헌영의 재판은 박헌영이 자신의 경력과 범죄사실을 자백하는 순서부터 시작되었다. 박헌영은 자신의 경력을 진술하면서 피소 사실을 모두 시인했다. 1919년 3월 경성고보(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여성계몽잡지 ‘여자시론’의 편집원으로 근무할 때에 언더우드를 만나면서 미국을 숭배하는 사상을 품게 되었다고 말했다. 미국에 의존하지 않고는 조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월북 후에는 강동학원과 해주제일인쇄소를 이용하여 (미군정) 하지가 지령한 대로 남북대립과 불신임, 분열사상을 조성하는 것과 북한 당내에 세력을 부식하고 확장하는 범죄행동을 감행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이에 대해 “당시는 김일성을 향한 어떤 세력의 어떤 도전도 허용되지 않던, 김일성이 절대적 권위를 지닌 신성한 존재였던 때였다”며 “박헌영 일파의 공판기록을 ‘미제국주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권 전복음모와 간첩사건 공판문헌’(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편, 국립출판사, 1956)이라는 제목으로 발행했다. 공판기록은 북한이 남로당을 숙청하면서 대외 선전과 함께 대내적으로는 반대파에게 심리적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남아있는 동조 세력을 완전 무력화하는 동시에 무자비한 숙청사실을 정당화하는 선전 목적으로 공개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다시 인터뷰로 돌아가자.
이념 대립 잠시 접고 합작 이끌어내야 통일
▼ 좌우익 혹은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한데요.
손녀와 다정한 한때를 보내는 이기형 시인.
▼ 통일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좌우익’ ‘진보 보수’ ‘빨갱이’ ‘공산당’ ‘친일보수’ ‘수구’ 같은 말들이 통일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봐요. 이제 이런 말을 쓰면 안 돼요. 분열될 뿐이니까요. 이 말은 우리에게 전혀 맞지 않아요. 이런 말을 자꾸 쓰는 사람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숨기기 위해 분열시키려는 의도예요. 지금은 서로 잘잘못을 뉘우치면서 같이 손잡고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진보적인 사람도 상대방을 친일분자라고 무조건 몰아세우지 말고 양보하면서 다독여야 해요. 분단 60여 년, 참 부끄럽지 않아요? 결국은 진보든 보수든 상대방 약점을 들추지 말고 장점을 내세워 함께 나아가면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분단은 영원히 해결되지 않아요. 그런 시대는 낡아빠진 유물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 그렇게 되면 곧 통일이 될까요?
“오늘 이 자리에서 94세 이기형이 젊은 이소리 시인을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그 자체가 아주 중요한 순간이에요. 분단이 수많은 천재를 죽였죠. 임화도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남로당 중심인물들과 함께 북한정권의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미제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잖아요? 오장환도 월북한 뒤 병사했고. 참 가슴 아픈 일이죠. 남북통일은 언제 올지 아무도 몰라요. 광복 전날까지 누가 다음 날 해방될지 알았나요? 남북통일도 그러해요. 내일 당장 될 수도 있고….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남북이 자꾸 만나야 해요. 민간인이든 정치인이든 예술인이든 자꾸 만나야죠. 백두산도 중국을 통하든 어쨌든 자주 가야 합니다. 북한에 도와줄 게 있다면 도와야죠. 그래야 통일이 앞당겨져요.”
“시 한두 편 발표하고 건방떠는 건 싫어”
▼ ‘민족’을 강조하시는데, 요즘은 다문화·다민족 사회라고 하잖아요?
“맞아요. 민족문제를 잠시 접어두고 다른 민족을 끌어안고 통일국가를 세우는 데 함께 힘을 쏟아야 합니다. 이들에게도 통일에 대해 자주 알려야죠. 그렇다고 ‘민족’을 버리라는 건 아닙니다.”
▼ 1947년에 이미 시인으로 등단했는데, 1980년부터 문학평론가 백낙청, 시인 신경림, 김명수, 이시영 등을 수없이 찾아가 시를 보이고 평을 해달라고 했죠? 왜 그러셨나요?
“나는 내 시 공부를 위해 그렇게 열심히 쫓아다녔어요. 다른 사람들은 ‘내가 시인이다’ 해서 건방을 떨지만 나는 그런 게 싫어요. 시 한두 편 발표해놓고 폼 잡는 건 ‘진짜 시인’이 아니에요. ‘진짜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원고를 들고 열심히 뛰어다녀야 해요. 나는 그 때문에 그냥 달려갔어요. 그분들이 귀찮아할 정도로. 시인 신경림은 첫 시집 발문도 썼고, 내 시에 대해 지적도 많이 했어요. 하루는 신경림 시인을 찾아갔더니 밥을 먹고 있어 밖에서 한참 기다리기도 했어요. 그런 과정을 몇 년 거쳐 지금의 시가 된 거죠. 내가 시에서 분단과 통일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사람들은 내 시가 서정성이 부족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어요. 시인은 다정다감하지 않고는 시를 쓸 수 없어요. 정에 겨워 눈물도 흘리고, 분에 못 이겨 주먹도 휘둘러야죠. 내 시가 진짜 그러한가 한 편 들어볼래요?”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의 시 ‘그리움’을 읊었다.
저물녘
흰 빨래 걷힌 백사장에 남은
아스라한 그리움
시냇물은 삼천리를 돌아
대지를 싹틔우는 사월의 넋이여
▼ 좋은 시는 어떤 시인가요?
“민족의 운명을 노래하는 시, 시적 기교에서의 압축, 시어의 취사선택, 내용의 퇴고가 잘된 시가 좋은 시라고 봐요. 좋은 시는 내용과 현실이 잘 짜여 있어야 해요. 나도 그런 시를 쓰고 싶은데, 잘 안 돼요(웃음). 누군가 그런 시를 쓰기를 바라는데 불행히도 아직 그런 시인을 찾지 못했어요. 우리나라 자연을 노래하든 인간을 노래하든 ‘읽고 졸도해야 할 시’를 써야죠. 나도 사람들이 넋을 놓을 정도의 그런 시를 쓰고 싶어요.”
▼ 요즈음 젊은 시인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를 쓰는 시인은 시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아요. 요즈음 젊은 시인 대부분이 그것에 취해 있는데, 그건 안 돼요. 리얼리즘 시를 써야죠. 독자가 취해 엎어질 정도로. 이게 시에 대한 저의 주장입니다. 임화가 쓴 시를 단편 서사시라고 하는데, 그런 단편 서사시나 장편 서사시를 써야 해요. 포스트모더니즘으로는 분단 상황을 이야기하지 못해요. 요즘 젊은 시인들이 엉뚱한 곳에 재능을 소모하고 있는 거 같아요. 그 재능을 리얼리즘에 쓰면 좋을 듯해요. 서정시를 쓰더라도 독자가 취해 까무러칠 정도로 써야 해요. 요즘 제가 가장 고민하는 것은 시사(詩史)에 남을 만한 시를 쓰고 죽는 겁니다. 단 한 편이라도.”
▼ 남북통일이 된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뭔가요?
“통일이 되면 우리 식구부터 먼저 찾아야 하지 않겠어요(웃음)? 그 다음에는 임화의 아들인 원배, 은주를 찾아 만나고 싶어요. 아마 임화의 부인 지하련씨는 죽었을 거예요. 김남천 시인도 만나고 싶고요.”
▼ ‘구순 시인’이신데, 특별한 건강비결이 있나요?
“‘1초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는 것이 내 건강 수칙이에요. 음식은 김치와 된장국을 즐겨 먹죠. 이 음식은 세계 어느 곳에 내놔도 자랑거리가 될 겁니다. 그밖에 뭐 먹을 게 있겠어요?”
“통일 되면 가족과 임화 아들 만나고 싶어”
▼ 시집을 낼 계획은 있나요?
“네. 한두 권 더 낼 계획이에요. 한 권은 이미 원고를 다 썼고, 나머지 한 권도 반쯤 준비됐어요. 내 일생이 담긴 자서전도 쓰고 싶지만 요새 기력이 좀 달려요. 누군가에게 부탁하고 싶기도 하지만 내 마음에 들 정도로 문장력이 뛰어난 이가 눈에 잘 띄지 않아요. 출판사 몇 군데서 자서전 대필 이야기도 오갔지만 승낙하지 않았어요.”
시인 이기형은 1917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나 1938년 함흥고보를 졸업했다. 1942년 도쿄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에서 2년 동안 공부했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지하협동단’ ‘학병거부사건’ 등 지하 항일투쟁 관련 혐의로 수차 피검되어 1년여 옥살이를 했다.
1945년부터 1947년에는 ‘민주조선’ ‘노동신문’ ‘동신일보’ ‘중외신보’ 등 언론사에서 정치부·사회부 기자로 일하며, 김구 선생을 비롯해 이승만, 박헌영, 김삼룡, 이주하 등을 자주 만났다. 1947년 7월19일 정신적 지도자로 여기던 여운형 선생이 암살당하자 그는 공식적인 사회활동을 모두 끊고 이후 33년 동안 칩거했다.
6·25전쟁이 터진 1950년에는 ‘후방’(남한) 사람들 삶을 글로 쓰기 위해 목포 등지를 떠돌다가 9·28 서울 수복 이후 북한으로 가지 못하고 빨치산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투옥됐다. 그 뒤 구멍가게, 학원강사, 번역, 사설학원 운영 등 여러 가지 일을 했다. 1980년 시인 김규동, 작가 남정현 등을 통해 시인 신경림, 문학평론가 백낙청 등을 만나 ‘분단조국하에서 시를 쓰지 않겠다’던 생각을 바꾸게 된다. 1980년부터 1990년 중반까지 재야 민주화 통일운동에 참여했으며, 1989년 시집 ‘지리산’ 필화사건으로 발행인이 구속되고, 이 시인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대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시집으로 ‘망향’ ‘설제’ ‘삼천리통일공화국’ 등이, 전기로는 ‘몽양 여운형’ ‘도산 안창호’가 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고문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