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년 동안 무려 88연승이라는 미증유의 기록을 달성하고, 전미대학 농구선수권대회(NCAA)에서 10차례나 우승한 농구 지도자가 있다. 바로 현대 농구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故) 존 우든 UCLA 농구팀 감독이다.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스포츠 채널 ESPN이 2000년 실시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스포츠 지도자’설문조사에서 압도적인 1위로 뽑힌 우든은 선수와 코치로 농구 ‘명예의 전당’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다. 팀워크, 윤리의식, 자부심, 인격 수양 등을 강조하는 그의 리더십은 농구 코트뿐 아니라 사회 각 분야로 퍼져나갔고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백악관으로부터 미국 최고의 훈장인 ‘자유의 메달’을 수상했다. UCLA 앤더슨 경영대학원은 그의 리더십 요체를 강의하는 ‘존 우든 리더십 프로그램’을 개설하는 등 우든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최고의 지도자로 존경받고 있다.
우든 감독은 1960~70년대 UCLA를 미국 대학 최강팀으로 이끈, 그야말로 전설적인 스포츠 지도자다. 그가 오기 전 평범한 대학 팀에 불과했던 UCLA는 전미대학농구선수권대회(NCAA)에서 역사상 최다 우승인 10회 우승하며 대학 농구의 최강자로 거듭났다. 특히 1967년부터 1973년까지는 무려 7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고, 단일 경기 최고 기록인 88경기 연속 승리 기록도 갖고 있다. 우든 감독의 남다른 지도력과 리더십이 지금까지 미국인들에게 존경과 찬사를 받는 이유다.
우든의 NACC 10회 우승 이후 약 4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를 제외한 NACC 최다 우승이 4회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10회 우승이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지 알 수 있다. 많은 농구 전문가가 우든의 기록을 깨는 감독이 나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예측하는 이유다. 29년의 지도자 생활 중 통산 664승162패로 승률 80.4%의 대기록을 남긴 우든 감독은 1961년에는 선수로, 2006년에는 감독으로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獻額)됐다. 선수와 감독으로 명예의 전당에 오른 사람 또한 그가 처음이다. 그는 현대 농구의 기초가 되는 수많은 전술을 창시했고 빌 월튼, 카림 압둘 자바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슈퍼스타를 직접 지도했다.
그가 거둔 경이로운 성적 덕에 많은 사람은 우든을 UCLA가 위치한 지명을 따 ‘웨스트우드의 마법사(the Wizard of Westwood)’로 불렀다. 평소 소박하고 겸손한 삶을 살았던 우든은 그러나 이 별명을 아주 싫어했다. 자신은 마법사가 결코 아니며 그냥 선수들의 스승일 뿐이라고 늘 강조했다.
사람들이 그를 최고의 지도자로 꼽는 이유는 그가 거둔 성적 때문만이 아니다. 그가 경기의 승리보다 과정을 중요시한 최초의 스포츠 지도자라는 점을 사람들은 높게 평가했다. 한때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도 활동했던 우든은 학점이나 경기의 승리로 인정받는 성공과 실패의 기준을 싫어했다. 그는 “나는 최선을 다했고 그것이 바로 성공이다. 성공은 최선의 노력을 다할 때 얻을 수 있는 자기만족과 마음의 평화”라고 말했다.
단순히 말로만 그친 게 아니라 우든은 이를 그대로 실천했다. 경기에서 이기더라도 과정이 나빴다면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특정 선수가 경기 중 상대편 선수에게 욕을 하거나 반칙을 쓰면 실력에 관계없이 다음 경기에 그 선수를 기용하지 않았다. 선수들에게 고된 훈련을 시킬 때면 중년의 나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10대, 20대 선수들과 똑같이 훈련을 소화했다. 유명 감독이 된 후 나이키 등 수많은 스포츠용품 회사가 거액의 스폰서를 제시했지만 이를 단호히 뿌리쳤다.
선수들에게도 패스, 풋워크 등 농구의 기술적 측면을 강조하고 가르치기보다 지각하지 않기, 동료를 비난하지 않기, 양말 제대로 신기 등 인생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데 중점을 뒀다. 이에 바로 그가 경기장 안에서만 성공한 스포츠 지도자가 아니라 경기장 바깥에서도 더 존경받는 사람이 된 이유, 그가 남긴 말과 교육관이 전 세계 수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고 리더십의 교본처럼 여겨지는 이유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야 할 7계명
존 우든은 1910년 미국 인디애나 주 홀에서 가난한 농장주 조슈아 휴 우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존을 포함한 4명의 아들에게 어릴 때부터 정직, 성실, 신앙심, 노동의 가치가 지닌 중요성 을 강조하며 훈육했다. 그의 아버지는 우든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2달러짜리 우편엽서에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야 할 7계명’을 적어 선물했다. 바로 ‘자신에게 진실하라, 남을 도와라, 매일을 최고의 날로 만들어라, 좋은 책의 내용을 깊이 소화하라, 우정을 예술 작품처럼 아름답게 가꿔라, 만일을 대비하는 계획을 항상 세워둬라, 기도하고 모든 축복에 감사하라’다.
이런 아버지의 신실한 태도는 훗날 그가 훌륭한 리더가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우든은 훗날 “대공황 시절의 끔찍한 경제적 어려움, 어린 두 여동생의 죽음 등 우리 가족의 불행이 적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불평하거나 남을 비난한 적이 없다. 부자와 자신을 비교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고 거기에 만족했다. 나는 개인적인 삶은 물론 감독으로서도 아버지를 본받기 위해 노력해왔다. 리더로서 내가 이룬 업적의 대부분은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어릴 때부터 농구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던 그는 마틴스빌 고등학교 재학시절 3년 연속 자신의 팀을 인디애나 주 우승팀으로 이끌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29년 퍼듀대에 입학한 우든은‘내가 아는 가장 훌륭하고 소신 있는 코치’라고 평가한 또 다른 멘토 워드 피기 램버트 코치를 만난다.
램버트 코치는 우든에게 팀은 가족의 연장이라는 점을 일깨워준 인물이었다. 램버트 코치는 극성스러운 퍼듀대 동문회 및 팬들로부터 팀의 운영에 관한 여러 가지 간섭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항상 선수들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결정을 내린 인물이었다. 심지어 대도시의 환락적인 환경이 선수들에게 좋지 않다는 이유로 뉴욕 매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열리는 경기 참여를 거절할 정도였다. 자신의 자녀에게 권하지 않을 행동들을 선수들에게도 권하지 않는 램버트 코치를 보며 우든은 지도자는 단순히 팀을 이끄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원의 부모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램버트 코치 밑에서 우든의 기량은 무럭무럭 성장했다. 그는 4년 동안 세 번이나 전미 국가대표 선수로 뽑혔고, 퍼듀대 농구팀도 전국 대회에서 우승했다. 선수로 활약하면서 영문학 학사 학위도 딴 그는 대학 졸업 후 영어 교사와 농구팀 코치 중 어떤 직업을 가질지 잠시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우든은 현 인디애나폴리스의 전신인 인디애나폴리스 카우츠키 등 몇몇 프로팀에서 활동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1942년 해군에 입대했고 3년 동안 해군장교로 복무했다. 종전 직후인 1946년부터 2년간 미국 인디애나주립대 농구팀 감독으로 활동한 그는 1948년 마침내 캘리포니아주립대 로스앤젤레스캠퍼스(UCLA) 농구팀 감독이 되어 본격적인 지도자 인생을 시작한다.
카림 압둘 자바와의 만남
우든은 지도자가 된 후 16년 만인 1964년 NCAA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가 미국 대학농구계에 UCLA 왕조를 본격적으로 건설한 건 한 해 뒤 한 선수와 조우하면서부터다. 바로 1960~ 70년대 미국 농구계의 전설 카림 압둘 자바다. 그가 보유한 특별한 기술, 즉 긴 팔과 큰 키를 이용해 하늘에서 사뿐히 공을 던지는 ‘스카이 훅 슛(Sky Hook Shoot)’은 상대 팀이 알면서도 못 막는 무서운 무기였다.
우든과 압둘 자바라, 농구계의 두 전설은 어떻게 만나게 됐을까. 1965년 5월4일 뉴욕 맨해튼에서는 미국 전역의 이목을 모으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뉴욕 파워메모리얼고교에 재학 중이던 촉망 받는 고교 농구선수 페르디난드 루이스 앨신더 주니어(카림 압둘 자바의 본명)가 자신의 진로를 밝히는 회견이었다. 당시 18세임에도 신장이 무려 219㎝에 달했던 그는 모교의 71연승을 이끈 괴물이자 고등학교 3년 동안 통산 2067득점, 2002리바운드의 성적으로 뉴욕시 기록을 갈아치운 주인공이었다. 미국 전역의 수많은 대학이 그에게 농구 장학생 자격을 제의했지만 뉴욕으로부터 5000㎞ 가까이 떨어진 로스앤젤레스(LA)로 건너가 UCLA대학에 입학할 예정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그가 UCLA를 택한 이유는 우든이 선수의 피부색을 차별하지 않는 감독이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선수가 흑인인지 백인인지, 정치적 성향이 어떤지는 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1947년 우든이 인디애나주립대 코치를 맡고 있을 때만 해도 미국 농구계는 흑인 선수들을 심하게 차별했다. 백인 대학생들을 위한 대학 농구 토너먼트에서 흑인 선수는 뛸 수 없었다. 하지만 우든은 이를 개의치 않았다. 그는 주전이 아니었던 흑인 선수 클레어런스 워커를 종종 기용했다. 다른 팀이 이를 문제 삼자 정규시즌 후 유명 대학 농구팀들끼리 벌이는 플레이오프 이벤트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우든이 지도하는 인디애나주립대 팀은 1948년 정규시즌 27승7패라는 훌륭한 성적을 냈다. 결국 당시 대학 농구 스포츠연맹은 인종차별 방침을 포기하고 인디애나주립대를 플레이오프 이벤트에 초대했다. 클레어런스 워커는 여기서 뛴 최초의 흑인 선수가 됐다.
선수의 피부색을 차별하지 않는 우든 감독을 택한 앨신더 주니어의 선택은 탁월했다. UCLA에 입학한 그는 우든의 꼼꼼한 지도를 받은 후 미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센터로 성장했다. 앨신더 주니어가 대학 1학년이었을 때만 해도 당시 1학년 농구 선수들은 대학 농구팀의 정규 경기에 나설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1학년 선수들만을 이끌고 선배들로 구성된 UCLA 정규 팀과 연습경기를 가져 당당히 승리를 거뒀다. 그는 2학년이 되던 해에 UCLA의 30전 전승을 이끌었다. UCLA는 1967∼69년 NCAA에서 3연패했다.
1969년 100만달러라는 당시로선 천문학적 금액으로 프로팀 밀워키 벅스에 입단한 앨신더 주니어는 바로 신인왕을 수상했다. 이듬해 1970년에는 경기당 평균 31.7득점을 기록하며 소속팀 밀워키를 창단 첫 미국 프로농구리그(NBA) 우승으로 이끌고 자신도 MVP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1968년부터 이슬람교에 심취한 그는 1971년 영어식 이름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이후 앨신더 주니어라는 이름은 잊히고 ‘카림 압둘 자바’가 새롭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이 바뀌었지만 타고난 실력은 변함이 없었다. 1975년 LA 레이커스로 이적한 카림 압둘 자바는 이후 14년간 그곳에서 활약하며 5차례나 NBA 우승트로피를 LA시에 안겼다.
은퇴 후 숨진 아내에게 25년간 연애편지를 쓰다
1975년 10번째 우승을 달성한 우든은 은퇴를 결심했다. 이미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였고 더 이룰 것도 없었다. 처음 NACC 우승을 한 1963년부터 1975년까지 12년간 그는 335승 22패, 승률 0.938 이라는 무시무시한 기록을 세웠다. 그는 여생을 가족에게 좀 더 충실하겠다고 다짐했다.
우든은 16살이던 1926년 부인이 된 넬리 라일리를 처음 만났다. 우든이 퍼듀대를 졸업하던 1932년 결혼한 그들은 아들 휴와 딸 낸시 앤을 뒀다. 은퇴 후 우든은 2명의 자녀, 7명의 손자, 10명의 증손자와 함께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1985년 3월21일 아내 넬리가 암으로 사망하면서 우든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25년간 우든은 매달 21일이면 아내가 묻힌 LA의 포레스트 론 공동묘지를 찾았다. 집으로 돌아와선 “넬리, 정말 보고 싶어. 이승에서의 삶이 빨리 끝나야 당신을 만날 텐데. 사랑해, 넬리”라고 쓴 연서를 죽은 아내에게 띄워 보냈다. 25년간 단 한 번도 거르지 않은 일과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우든의 체력은 급속히 약화됐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우든은 100세 생일을 넉 달 남겨둔 2010년 6월4일 눈을 감았다. 그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 전역은 큰 슬픔에 빠졌다. UCLA는 우든을 기리기 위해 홈코트의 이름을 ‘넬리 · 존 우든 코트’로 명명했다.
우든 감독이 주는 경영 교훈
1)팀의 스타는 ‘팀’이다
우든 감독은 늘 “진정한 리더는 팀원들에게 ‘우리’가 ‘나’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쳐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람들은 내게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많이 우승할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 내 대답은 단순하다. ‘내가 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팀이 한 일이죠. UCLA 감독으로 27년간 재직하면서 저는 단 한 번도 득점하지 않았습니다. 전 다른 사람들이 득점하도록 도와줬을 뿐입니다.”
그는 지도자로서 자신의 능력을 강조하지 않았고 어떤 스타 선수도 특별하게 대하지 않았다. 카림 압둘 자바가 UCLA 소속 선수였을 때 우든 감독은 한 번도 그를 특별하게 대우한 적이 없었다. 우든은 경기에서 승리한 후 기자회견에서 주로 후보 선수들에게 공을 돌렸고, 이들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반면 카림 압둘 자바처럼 뛰어난 선수들은 다른 선수들이 보지 않는 곳으로 따로 불러 많은 칭찬을 했다. 우든 감독은 “후보 선수들로 하여금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끼게 하고, 뛰어난 선수가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도록 하려면 이 방법이 유일했다”고 말했다. 우든 감독은 같은 이유로 유명 선수가 해당 팀을 떠난 후 그 선수의 등 번호를 다른 선수들이 쓰지 못하게 하는 영구 결번도 강하게 반대한 바 있다.
2)시간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리더가 아니다
우든 감독은 리더가 어떻게 시간을 쓰느냐에 따라 해당 조직과 조직원 전체의 운명이 달라진다고 믿었다. 시간은 거미줄처럼 다른 이들의 시간과 얽혀 있어서 끊임없이 좋고 나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지도자로서 선수들의 시간을 가장 의미 있게 해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연습 시간은 쓸데없는 낭비가 전혀 없기로 유명했다. 우든 감독은 항상 작은 카드 한 뭉치를 들고 팀 훈련에 나타났는데, 거기에는 그날의 훈련 계획이 1분 단위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밤마다 코치들과 머리를 맞대고 각 선수의 특성, 상대 팀의 장단점, 거기에 맞는 전략과 훈련 방향을 고려해서 만든 계획이었다.
우든 감독은 밀도 있게 보낸 일 초, 일 분, 한 시간이 합쳐져서 위대한 인생을 만든다고 믿었다. 그래서 선수들에게도 늘 최선을 다하라고 주문했다. “이 순간 너의 100%를 나에게 다오. 오늘 최선을 다하지 못하면, 내일 101% 한다고 해도 메워지지 않는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너의 100%를 원한다.”
그는 일단 선수들을 모았으면 함께하는 시간을 알차게 채우기 위해 지도자는 정말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고 믿었다. 밀도 있게 시간을 쓸 때 60분을 120분으로 늘릴 수 있다. 리더십의 성공은 주어진 시간을 지혜롭게 쓰는 데 달렸다고 생각한 사람이 바로 우든이다.
우든이 철저한 시간 관리를 중시하게 된 건 퍼듀대 시절 은사 램버트 코치의 영향이 크다. 우든은 “램버트 코치는 한 번도 연습 시간에 연습을 중단시키고 선수들 전원을 모이게 한 적이 없었다. 특정 선수를 불러내 필요한 지침을 전달할 뿐이었다. 단체 연습 외에는 각자 포지션에 필요한 훈련을 끊임없이 하도록 해서, 아무도 시간을 대충 보낼 수 없었다. 그분이 지도하는 연습 시간에는 모두가 늘 생산적으로 움직였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가 가장 싫어한 건 선수들의 지각이었다. 우든이 인디애나주립대 감독으로 재직하던 당시의 일화다. 경기를 위해 오후 6시 정각에 출발할 예정이던 버스가 두 선수 때문에 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선수는 팀의 공동 주장이었고, 한 명은 우든 감독을 해고할 수도 있는 교장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우든 감독은 1분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버스를 출발시켰다. 그 사건을 계기로 우든 휘하의 모든 선수는“지각하지 말라”는 감독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게 됐다. 우든은 늘 “시간은 시계 이상의 그 무엇이다. 시간을 부주의하게 관리하는 리더는 리더 자격이 없다”고 강조했다.
3)완벽하지 못해도 완벽을 추구하라
우든 감독은 언제나 첫 번째 팀 미팅에서 선수들을 모아놓고 양말과 신발부터 늘어놓았다. 공격이나 수비 전술은 입에도 올리지 않고 선수들 앞에서 양말을 바로 신는 법, 신발 끈을 제대로 묶고 신는 법을 선보였다. 심지어 선수들로 하여금 자신의 신발을 직접 사지도 못하게 했다. 대신 그는 트레이너로 하여금 선수들의 오른발과 왼발 크기를 정확하게 재라고 지시했다. 각자 딱 맞는 신발을 신어야 경기력이 극대화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선수들은 언제나 단정한 차림새를 해야 했다. 윗옷이 밖으로 삐져나오는 일도 용납되지 않았다. 우든 감독이 1948년 UCLA 감독으로 부임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새 유니폼과 운동화를 주문한 일이었을 정도다. 그는 “신발 끈 같은 사소한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실전 경기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돌발 상황에 대비할 수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상태일 때 선수들이 ‘나는 특별한 팀의 일원이며 지금 이 순간 이 팀에 소속됐다’는 자아 정체성과 단결심을 느낀다”고 강조했다. 마더 테레사는 “이 세상에는 큰일이란 없습니다. 작은 일들을 사랑으로 할 뿐이죠”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든 감독도 늘 같은 점을 강조했다. 사소한 일을 완벽하게 하려고 노력할 때 큰일도 성취할 수 있으며 작은 문제가 하나 둘 모이다보면 결국 큰 차이점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참고문헌
● , 존 우든 · 스티븐 재미슨 지음, 유영만 옮김, 한양대학교 출판부, 2011
● , 존 우든 · 스티븐 재미슨 지음, 올댓번역 옮김, 지니넷,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