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호

와이드 인터뷰

김수연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 대표

“책 읽기 씨앗 뿌리다 길 위에서 죽고 싶다”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9-11-04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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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태식 객원기자]

    [홍태식 객원기자]

    김수연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 대표를 만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는 9월 19일 경남 창원에서 열린 ‘바다마을작은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했다. 9월 23일, 27일에는 각각 경북 예천과 전북 전주를 찾아 ‘예성작은도서관’ ‘인후비전작은도서관’ 개관을 지켜봤다. 모두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이 힘써 마련한 공간들이다. 

    일주일 남짓한 시간 동안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른’ 김 대표한테는 다른 일정도 많다. 그는 현재 한길교회 담임목사를 맡고 있다. 대통령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소위원장이기도 하다. 바쁜 스케줄 사이 틈이 날 때는 고속버스를 개조해 만든 움직이는 도서관, 일명 ‘책 읽는 버스’를 탄다. 여름철 해변부터 산천어축제, 단풍축제, 젓갈축제 현장까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불원천리 달려간다. 현장에서 버스 문을 활짝 열어 누구나 들어와 책을 읽게 하는 것, 탈무드·명심보감·논어·도덕경 등 고전 4종을 무료로 나눠주는 것이 그의 일이다.

    전국 방방곡곡 작은도서관

    전북 전주시 인후비전작은도서관(왼쪽), 강원 평창군 방림계촌작은도서관.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 제공,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전북 전주시 인후비전작은도서관(왼쪽), 강원 평창군 방림계촌작은도서관.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 제공,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김 대표는 1987년 서울 강남에 작은도서관을 열면서 본격적으로 ‘책 나누기’를 시작했다. 이후 30여 년간 전국 방방곡곡에 작은도서관 330여 개를 지었다. 최근 충남 남서울대에 신간 5000권을 기증하는 등, 여기저기 선물한 책 권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독서의 계절’을 맞아 서울 강남구 학동로 논현정보도서관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김 대표는 기자를 기다리는 사이, 책이 왜 좋은지 소개하는 신문 기사를 읽고 있었다. 

    “이거 보세요. 50세 이상 남녀를 12년간 조사해보니 책 읽은 사람이 안 읽은 사람보다 23% 더 오래 산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책을 많이 읽으면 GDP(국내총생산)가 증가한다는 연구도 있고요. 국민 독서율은 국제기구가 발표하는 ‘글로벌 경쟁력 지수’ ‘경제적 혁신성 지수’ ‘글로벌 기업가 정신 지수’ 등과 밀접하게 연동된다고 해요.” 

    형광펜으로 표시한 주요 부분을 손으로 짚어가며, 김 대표는 책의 이로움을 하나하나 풀어냈다. 준비한 질문을 채 꺼내기도 전,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됐다. 



    - 책이 정말 좋으신가 보다. 

    “경북 안동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서당에 다니며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등을 배웠다. 커가면서 점점 더 책에 빠졌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기 전, 호롱불 켜놓고 늦게까지 책을 읽던 기억이 난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콧구멍에 시커멓게 그을음이 끼어 있었다. 돌아보면 책 읽는 게 어린 시절 가장 큰 기쁨이었다. 대학 때도 도서관에 틀어박혀 동서양 고전과 문학작품을 닥치는 대로 읽곤 했다.”

    작은아들과의 약속

    경남 창원시 바다마을작은도서관(왼쪽), 강원 강릉시 연곡해변캠핑장에 찾아간 ‘책 읽는 버스’.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 제공, 조종엽 동아일보 기자]

    경남 창원시 바다마을작은도서관(왼쪽), 강원 강릉시 연곡해변캠핑장에 찾아간 ‘책 읽는 버스’.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 제공, 조종엽 동아일보 기자]

    - 그러다 자연스레 작은도서관 만들기 운동에 뛰어든 건가. 

    “나는 사람 사는 곳엔 어디든 책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특히 어린 시절엔 책을 많이 접하는 게 중요하다. 책은 사람이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도 알려준다. 그런데 아직도 좋은 책을 마음껏 접하기 어려운 환경의 아이가 많다. 1980년대 중반, 변변한 서점 하나 없는 농·어촌 섬마을 아이들에게 책을 선물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게 이 운동의 시작이 됐다.” 

    - 어떻게 책을 선물했나. 

    “책이 필요해 보이는 곳이 있으면 책을 보냈다(웃음). 당시 나는 KBS 기자였다. 취재, 기사 작성을 하는 틈틈이 시간을 쪼개 좋은 책을 고르고, 곳곳에 부쳤다. 그때는 누가 그걸 읽는지, 읽고 나서 무엇을 느낄지는 알기 어려웠다. 그저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선물하는 것 자체가 기뻤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아쉬움이 커지더라. 아이들이 책을 편안히 읽고 자기 꿈을 키워갈 수 있는 환경도 마련해주고 싶어졌다. 생각 끝에 ‘작은도서관 만들기’에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1996년 회사를 그만뒀다.” 

    - 주위에서 많이 만류했을 것 같다. 

    “사표가 수리되기까지 몇 달이 걸렸다. 많은 분이 말렸지만 내 뜻이 워낙 확고하니 다들 손을 들었다.” 

    - 그렇게까지 이 일을 해야 했던 이유가 있나. 

    “좀 개인적인 이야기다. 책을 좋아하던 작은아들과의 약속. 아이가 여섯 살 때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글씨를 배워 한창 책 읽기에 재미를 붙이던 무렵이다. 그 모습이 기특해 ‘아빠가 다른 건 몰라도 책은 얼마든지 사줄게’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 얘기를 하고 불과 며칠 만에 아이가 눈을 감았다.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이후 어린이 책을 볼 때마다 내가 한 얘기가 생각났다. 그 말을 듣고 활짝 웃던 아이 표정도 떠올랐다. 농어촌 산간벽지에 책을 보내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다. 우리 아이에게 사주지 못한 좋은 책을 다른 아이들한테라도 많이 선물하고 싶었다.” 

    김 대표 눈가가 금세 촉촉해졌다. 30여 년 전 겪은 아픔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듯했다. 아이가 사고를 당한 건 1984년 12월 19일, 세계보이스카우트연맹 총재가 내한한 날이었다. 김 대표는 현장 취재차 김포공항에 나가 있었다. 한창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기자실 직원이 슬쩍 다가와 쪽지 하나를 건넸다. ‘영동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 아들 사고’라고 적혀 있었다. 

    “그걸 보고부터 무슨 정신으로 인터뷰를 했는지 모르겠다. 일을 마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다. 내내 속으로 누군지도 모를 신에게 ‘제발 아들을 살려달라’고 빌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실수로 통지가 잘못 온 건지 몰라. 우리 아이가 아닐 거야’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중환자실에 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 있는 건 우리 아이가 맞았다. 이미 의식이 없었고, 맥박이 점점 약해지는 상태였다.” 

    알고 보니 집에 불이 났다고 했다. 혼자 있던 아이가 가스레인지를 만진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배가 고파 혼자 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려 한 건지 몰랐다. 어린아이의 서툰 손길에 가스레인지가 오작동을 일으켰고, 치솟은 불길이 순식간에 행주 도마 벽지로 옮겨붙었다. 거실이 연기로 가득 차자 아이는 욕실에 들어가 물 적신 점퍼를 뒤집어쓴 채 한동안 불을 피했다. 욕실에서 아이 점퍼를 발견하고 추정한 내용이다. 

    “아마 그 안에서 엄마 아빠를 애타게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달려가 구해주지 못했다. 결국 욕실까지 연기가 스며들자 아이는 불타는 거실을 가로질러 11층 아파트 베란다 너머로 뛰어내렸다.” 

    그렇게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도 아이는 중환자실에서 3시간을 버티다 아빠가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감았다. 생후 6년 80일 만이었다.

    고통 속에 발견한 길

    이후 김 대표의 삶이 어땠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를 더욱 괴롭힌 건 비극이 계속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김 대표는 결혼 전 궁합을 본 일이 있다. “두 사람이 결혼하면 주변 사람이 다 죽는다”는 얘기를 듣고도 무시했다. 그런데 불행한 일이 실제로 연달아 벌어졌다. 아이 사고 몇 해 전, 장인이 폐암으로 사망했다. 이북 출신의 장인은 남쪽에서 가정을 꾸려 딸 넷을 낳았다. 대 이을 아들이 없는 걸 아쉬워하다 전쟁통에 헤어진 조카를 수소문했다. 찾아보니 전과 15범이었지만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살 집을 사주고, 가게도 내줬다. 장인 사망 뒤 그 조카와 다른 가족 사이에 재산 분쟁이 시작됐다. 하루는 술에 취한 조카가 집에 찾아왔다 사달이 났다.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꾸짖는 장모에게 조카가 칼을 휘두른 것이다. 장모는 서른 한 차례나 칼을 맞고 세상을 떴다. 

    그 사건은 맏딸인 김 대표 아내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아내는 이후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가 됐다. 낮이고 밤이고 교회에 나갔다. 그렇게 자주 집을 비우는 사이, 혼자 있던 둘째 아들이 숨을 거뒀다. 

    “처음엔 아내가 말할 수 없이 원망스러웠다. 그때 집에만 있었어도 아무 일 안 생기지 않았겠나 싶었다. 좀 시간이 지나고는 이런 사고가 또 벌어질까 봐 겁이 났다. 점쟁이 말이 떠오르고, 큰아들 생각이 났다. 첫째라도 살리려면 헤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도 같은 마음이었다. 이별을 결심한 날 우리는 밤새워 술을 마시며 펑펑 울었다.” 

    한동안 김 대표는 하늘을 원망했다. 예전처럼 회사를 다니고, 농·어촌, 산간벽지 아이들에게 책 선물을 보내면서도 마음 한 곳은 늘 텅 비어 있었다. 그 시절, 우연히 한 후배를 만났다. 목사가 돼 서울 성내동에서 작은 교회를 하고 있었다. ‘한번 놀러 오라’는 말에 들렀다가 생각과 다른 모습에 깜짝 놀랐다. 당시 성내동엔 봉제공장이 많았다. 그중 한 건물 3층에 교회가 있었다. 십자가가 작아서 보일락말락 했다. 먼지 날리는 계단을 올라 교회 문을 열었더니, 후배가 막 라면을 끓이려 하고 있었다. 

    - 그 모습에 왜 놀랐나. 

    “교회라고, 목사라고 다 똑같은 게 아니구나 싶었다. 그전까지 기독교에 대해 편견이 있었던 거다. 농담처럼 ‘건물 좀 번듯한 걸 얻지 이게 뭐냐’ 했다. 후배가 ‘하나님은 좋은 건물에 계시지 않아요’ 하더라. 그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이후 김 대표는 신학대에 입학했고, 1987년 서울 강남에 작은 교회를 세웠다. 그 교회 한쪽에 조그맣게 도서관을 만든 게 김 대표가 세운 제1호 도서관이다. 한동안 낮에는 방송국으로 출근하고, 밤에는 목회 활동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이듬해 근처 건물 지하를 빌려 도서관으로 꾸미고, 교회를 아예 그 건물 2층으로 옮겼다. 책을 3만 권 소장한 동네 도서관이 생기자 주변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점점 도서관 관련 일이 늘었다. 

    - 어떻게 건물을 빌리고 그 많은 책을 샀나. 후원자가 있었나. 

    “나 혼자 힘으로 했다. 그때 나한테 돈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나. 그동안 모아온 것을 전부 이 일에 썼다.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김 대표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한 얘기다.

    거칠 것 없던 젊은 시절

    그가 자세히 밝히지 않았지만 김 대표는 젊은 시절 재운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70년대 후반 해외 건설 붐으로 관련 주식이 호황일 때 이에 투자하는 등 여러 기회로 돈을 벌었다. 기자 시절 한때 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출퇴근할 정도였다. 언론계 선·후배들은 그를 호방하고 지갑을 잘 열던 동료로 기억한다. 

    - 대학 다닐 때부터 큰 돈을 만졌다는 소문을 들었다. 

    “내가 6남매 중 셋째다. 대학 입학 후 돈 쓸 곳이 많은데 고향에 있는 동생 셋을 생각하면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가 없었다. 열심히 아르바이트하며 학교를 다녔다. 그걸 보고 한 선배가 정보를 줬다. ‘한 출판사에서 월부로 책 파는 임시 직원을 뽑는다. 잘만 하면 한 학기 등록금은 거뜬히 벌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일이 워낙 잘됐다.” 

    -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달라. 

    “요즘은 온라인으로 책을 사지만 당시엔 책 외판원이 많았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때라 집집마다 전집을 구비해두곤 했다. 내게 그 일을 소개해준 선배는 특히 책 판매가 잘될 장소까지 일러줬다. ‘요즘 울산에 공단이 새로 조성되고 있다. 우리 학교 선배들이 거기 많이 갔는데 낯선 동네에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어 심심해한다더라’고 귀띔해준 것이다. 당장 울산에 내려가 선배들을 찾아다녔다. 놀랍게도 세계문학, 중국고전 등 온갖 전집을 턱턱 사줬다. 신규 공단이라 문화 기반이 취약한 곳에 갑자기 발령받아 온 탓에 다들 외로웠던 모양이다. 나중엔 서로서로 나를 소개해줬다. 여러 술자리에 불려 다니며 전집 계약서를 돌렸다. 한번은 30명쯤 모인 자리에 있던 거의 전부가 전집을 하나씩 산 일도 있다.” 

    김 대표는 “그 시절 사람들이 그렇게 책을 열심히 읽었다는 게 신기하지 않으냐”며 웃음 지었다. 나중에는 아예 휴학을 하고 본격적으로 일에 뛰어들었다. 김 대표에 따르면 당시 그가 하루에 받는 전집 주문량이 보통 직원 20명의 한 달 판매량과 맞먹었다고 한다. 상상하기 힘든 수준이다. 

    - 그 덕에 돈을 많이 벌었나. 

    “당시엔 다 현금 아닌가. 내가 출판사에서 큰 봉투 가득 돈을 받아온 걸 보고 우리 아버지가 삼촌한테 ‘쟤 은행 털었느냐’고 하셨다더라. 그때 식구 수대로 금반지 만들어 돌리고 그랬다(웃음).”

    천사의 선물

    김수연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 대표는 평생 책과 도서관의 가치를 알리는 일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홍태식 객원기자]

    김수연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 대표는 평생 책과 도서관의 가치를 알리는 일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홍태식 객원기자]

    김 대표의 첫인상은 ‘크다’ 였다. 그는 키가 크고, 덩치가 크고, 목소리가 우렁우렁했다. 거기에 막대한 재력을 갖추고 잘나가는 방송사 기자까지 했다. 젊은 시절 그는 아마 두려운 게 없었을 것이다. 이 질문에 김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랬다. 체격 좋지, 돈 있지…. 한때는 양주를 냉면그릇에 부어 마실 정도로 술도 잘했다. 아이 일이 없었다면 그렇게 살다 벌써 죽었을 거다.” 

    수많은 사람에게 책을 선물하고, 산간벽지 방방곡곡에 작은 도서관을 짓는 일 또한 상상조차 안 해봤을 공산이 크다. 어쩌면 아이는 큰 고통을 통해 김 대표에게 완전히 다른 삶을 선물한 것이다. 그는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아이가 나를 인도한 것”이라고 말하다 또 한 번 눈물이 핑 돌았다. 

    - 30년 넘게 이 일을 해오는 동안 힘들 때도 많았을 것 같다. 

    “작은도서관 만들기 운동 초기엔 사람들이 도서관의 가치를 잘 몰랐다. 농·어촌, 산간벽지, 섬마을 학교에 전화해 ‘도서관을 만들어드리겠다”고 하면 하나같이 나를 책장사쯤으로 여겼다. ‘책 안 사요’ 하면서 전화를 뚝 끊어버리기 일쑤였다. 간신히 설득해 도서관을 지어주기로 하고 공사를 시작하려 했을 때, 저쪽에서 갑자기 ‘짓지 말아달라’며 일을 틀어버린 일도 있다. 도서관이 생겨도 관리할 사람이 없다는 거다. 당시엔 학교에 도서관이 생기면 잡무가 하나 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종종 계셨다. 그런 일을 겪으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회의가 들곤 했다.” 

    - 그래도 작은도서관 짓기 운동을 계속했는데. 

    “우리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마음이 컸다. 동시에 이 일의 가치에 대한 확신도 있었다. 나는 기자 시절 해외 취재를 자주 다녔다. 독일 프랑스 영국 일본 등 선진국 어디를 가도 마을 곳곳에 공공 도서관이 보였다. 그 나라 아이들은 일찍부터 도서관에 다니며 책 읽는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런 풍경을 보면 도서관의 필요성을 인식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자면 일단 도서관을 많이 만들어야 했다. 선진국은 물질적으로 풍요한 나라가 아니라 국민의 문화 지식 정보 수준이 한발 앞선 나라 아닌가. 나는 작은도서관 운동을 통해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는 데 기여하고 싶었다.”

    건강한 작은도서관

    그래서 김 대표는 전국 곳곳 학교, 마을회관 등에 작은도서관을 꾸며주는 일을 계속했다. 그 지역 사람들이 도서관을 친근히 여기도록 개관일이면 다양한 이벤트도 열었다. 

    “주민들이 특히 좋아하는 게 무료 건강검진이다. 나와 알고 지내는 의료진이 내시경 장비를 들고 현장까지 와서 도움을 주곤 했다. 박준미장을 운영하는 박준 선생도 동료들과 함께 개관식에 참석해 무료 이·미용 봉사를 해줬다. 나는 나대로 고급 제과업체 빵, 화장품 세트, KBS 매점에서 파는 각종 기념품 등을 산더미처럼 챙겨 가서 선물로 나눠드렸다. 그때는 도서관 하나가 생길 때마다 마을 잔치가 열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작은도서관 수가 점점 많아졌다. 김 대표에 따르면 도서관 하나를 만드는 데 적어도 수천만 원이 든다. 2004년이 됐을 때, 김 대표는 스스로 한계에 부딪혔다고 느꼈다. 경제적 어려움이 찾아왔고, 정신적으로도 힘에 부쳤다. 그는 강원도 평창군 산골짜기에 작은 집을 마련하고 거처를 옮겼다. 그저 쉬고 싶었다고 한다. 

    - 아이를 떠나보내고 20년이 흘렀을 때다. 

    “돌아보면 그때까지는 정신없이 내달렸던 것 같다. 잠시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니 더는 이 일을 계속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여기서 멈춰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생겼다. 인터넷 포털사 네이버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네이버 측은 내가 해온 작은도서관 만들기 사업을 조건 없이 지원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렇게 다시 활동이 시작됐다.” 

    지금은 KB국민은행이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을 적극 돕고 있다. 그사이 도서관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크게 달라졌다. 김 대표는 “요즘 공직자 선거를 보면 주요 공약에 반드시 ‘도서관 설립’이 포함된다. 사람들 사이에 ‘도서관이 우리 동네에 생기면 좋다’는 공감대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직 아쉬운 부분도 많다. 전국 도서관 중 상당수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있는 게 특히 문제라고 한다. 

    - 관련 통계를 보니 우리나라 작은도서관 수가 2018년 기준 6330개에 달한다. 이들이 제 구실을 한다면 독서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텐데. 

    “그 점이 안타깝다. 우리나라 작은도서관 설립 기준은 면적 33m²(10평), 책 1000권, 열람석 6석 이상이다. 이 규모 도서관 중 상당수는 교회 내부 등에 설치돼 있다. 각종 통계에 잡히지만 일반인이 접근하기는 힘든 구조다. 전담 직원이 없어 내내 문이 잠겨 있는 곳도 적잖다. 우리한테 필요한 건 좀 더 건강한 작은도서관이다. 나는 작은도서관을 짓기 전 해당 지방자치단체, 학교, 군부대 등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철저한 사후 관리를 약속받는다. 정책 당국도 도서관 수를 늘리는 것 못잖게 내실 있는 운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김 대표의 당부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향후 목표를 물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책 버스’를 타고 다니며 책 읽기의 씨앗을 뿌리다 길 위에서 죽고 싶다”며 싱긋 웃었다. 

    “내가 절재공 김종서 장군 18대손이다. 우리 집에는 할아버지 말씀이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사람은 저마다 재물을 탐하지만 나는 오직 내 자녀가 어질기를 바란다. 삶에 있어 가장 보람된 것은 책과 벗하는 일이며 더없이 소중한 것은 부지런하고 알뜰함에 있다. 이를 너희의 가훈으로 삼으라’는 내용이다. 돌아보니 내가 이 말씀을 따라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이 말씀을 품고 책과 벗하며 욕되지 않게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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