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 장기체류하는 여성들은 자식과 헤어진 채 ‘나홀로’ 한국행에 나서는 경우도 있다.
빚 갚으려 한국행
필자는 2001년 8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2년여에 걸쳐,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서 생활하는 탈북여성 100명을 대상으로 심층질문지와 개별면담을 통해 이들의 생활 실태를 파악했다. 북한 탈출 후 짧게는 1~2년, 길게는 7~8년에 걸쳐 바뀐, 이들의 생활과 가치관, 심리적 변화 등을 관찰한 결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탈북자들의 현실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동안 우리는 한국행에 성공한 탈북자들의 입을 통해서 ‘포장된’ 현실만을 접했기 때문이다.
조사 대상 탈북여성의 연령은 30대가 전체의 40%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60대 이상(19%), 20대(17%), 40대(14%) 순이었다. 60대 이상 탈북여성의 비율이 높게 나타난 것은 이들이 중국에서 태어났거나 중국에 친인척이 많아 탈북 루트를 가진 때문이다. 1960년대 초반 중국의 대기근과 중반의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북한으로 망명한 사람이나 그들의 2세가 중국으로 되돌아오는 현상도 눈에 띄었다.
교육수준을 보면 고등중학교(한국의 중고등학교) 졸업 학력을 가진 여성이 78%를 차지했다. 대학을 졸업한 여성도 16%나 됐다. 게다가 북한에서 자신의 생활수준을 ‘상’이라고 응답(인민반을 기준으로 삼음)한 사람도 12%나 되는 것을 보면 이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서 탈북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경제적으로 좀더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기 위해서 북한 탈출을 감행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특히 한국으로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 중에는 한국행 루트를 알아보기 위해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썼기 때문에 정착지원금을 받아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한국으로 올 수밖에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이 북한을 처음 탈출한 시기를 보면 식량난이 극심했던 1998년과 1999년이 각각 29%를 차지해 가장 많았다. 설문 결과에 따르면 2000년 이후로는 탈북자 수가 줄고 있다. 식량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국경을 넘어야 했던 시기가 지나고 북한 경제가 다소나마 호전되면서 북한을 탈출하는 사람의 수가 줄어든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으로 들어오는 탈북자 수가 급증한 것은 북한을 탈출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기보다 식량난 때 탈북한 사람들이 중국에 장기 체류하다가 최근 이른바 ‘기획망명’ 등을 통해 대규모로 입국하기 때문인 듯하다. 실제로 필자가 2001~2003년에 만난 탈북여성 100명 중 한국으로 들어온 여성은 대부분 2002년 말~2004년 사이에 입국했다.
“몸 버리고 인생 타락”
탈북 동기를 살펴보면 ‘먹고 살기 곤란해 무작정 탈북했다’는 응답이 31%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먹고 사는 문제는 없었지만 중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북한을 탈출했다는 응답(16%)과 ‘중국이나 한국의 친척을 찾아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는 응답(13%)이 뒤를 이었다.
생존을 위해 북한을 탈출한 경우가 가장 많았지만, 돈을 벌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또 범죄를 저지르고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탈북한 경우도 상당수 있었다. 특히 조직적 체계를 갖춘 브로커들의 꾐이나 인신매매범들에 의해 강제로 북한을 벗어나게 된 경우도 다수 있었다.
탈북횟수로는 처음이 가장 많았으며(60%), 2회(28%), 3회(7%) 순이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에는 강제송환된 탈북자에 대한 처벌이 완화되어서 재탈북하는 사례가 많았다. 북한으로 송환되기 전에 중국 공안에게 돈을 주고 풀려나온 일도 있다. 1998년에 탈북해 북으로 강제송환된 뒤 재탈북한 최정희(가명·40)씨는 이렇게 말했다.
“도강쟁이(탈북자)들에게 ‘안착한’ 생활을 시켜주라는 상부 방침이 떨어졌더랍니다. 자기 거주지에 정확히 보내서 집을 주고, 직장을 주고 안착한 생활을 시켜주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사회질서가 그렇지 못하다 보니까 그걸 집행하는 안전원(경찰)들도 할 수 없이 (이 사람들을) 그냥 내놓는단 말입니다. 그리고 말로는 중국에 가지 말라고 하지만, 직업도 없지, 장마당 가서 장사하자니 밑천도 없지, 그러니 이 사람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다시 중국땅으로 올 수밖에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 갔다가 다시 오고, 또 갔다가 다시 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