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사건에서 과연 누가 그토록 깔끔하게 철책을 자르고 넘어갔는지에 대한 의문 못지않게 관심을 끈 것은 사고가 난 철원군 역곡천 비무장지대가 전에도 종종 대남침투 또는 월북경로로 이용됐다는 사실이다. 군당국에 따르면 이 지역은 1970년대 이후 3명의 무장공비가 침투했고 1명이 귀순한 곳이다. 또한 남쪽에서는 1977년과 1980년대 초 현역장병 3명이 이곳을 통해 월북했다.
‘신동아’는 취재과정에서 이제껏 공개된 바 없는 월북사건 하나를 찾아냈다. 경남 진해에서 육군 군무원이 비행기를 몰고 월북한 사건이다. 그동안 북의 비행기가 남으로 넘어온 사건은 몇 차례 있었다. 북한 공군 조종사였던 이웅평·이철수씨의 귀순사건이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남에서 비행기를 몰고 북으로 넘어간 사건이 밝혀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기상천외한 월북사건의 진상은 군 정보기관 기록에서 최종 확인됐다.
이 사건이 더욱 흥미로운 것은, 1977년에 발생한 최초의 현역장교 월북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증언 때문이다. 증언자는 사건 당시 보안사(기무사의 전신)에 근무했던 예비역 군 관계자다.
1977년 10월20일 육군 A사단 62연대 1대대장 유모 중령이 북으로 넘어간 사건은 일반엔 공개되지 않았으나 군내에서 알만한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가 월북한 경로는 이번에 철책사고가 난 곳에서 서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이다.
당시 유 중령은 군용 지프를 타고 철책선 입구에 도착한 후 운전병과 무전병을 권총으로 위협해 그중 한 명을 자신의 월북길에 대동했다. 유 중령이 지뢰가 곳곳에 깔린 비무장지대를 통과해 군사분계선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은 역곡천 덕분이었다. 폭 25m인 역곡천에는 지뢰가 거의 매설돼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북에서 이곳을 대남침투로로 활용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27년 전의 이 사건이 새삼 화제가 된 것은, 지난 10월 이 지역에서 철책 절단사고가 나자 군당국이 일부 언론에 이 사건을 환기시켰기 때문이다.
현역 중령이 월북한 사건은 당시 큰 충격이었다. 군당국은 처음에 이 사건을 감추려 했다. 하지만 유 중령이 미모의 북한 여성과 함께 찍은 사진이 북측 전단에 실려 한국군 최전방에 살포되자 어쩔 수 없이 공개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 사건을 보고받고 재떨이를 집어던지며 크게 화를 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통령의 격노는 지휘선상에 있는 장교들에 대한 대대적인 문책으로 이어졌다. 군단장과 사단장 및 사단 보안부대장이 보직해임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그밖에 사단 작전참모와 정보참모도 징계를 받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당시 사단 보안부대장이던 이학봉 중령의 운명이다. 군에서 그 정도 대형 사건에 연루돼 보직해임을 당하면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중령은 기사회생해 장성까지 진급했다. 하나회 회원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군 주변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2년 후인 12·12 사태 때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심복으로 활약한 이학봉씨는 1980년 준장으로 예편한 후 5공 정권에서 청와대 민정수석과 안기부 2차장을 지냈다.
갑종 182기인 유 중령은 전북 출신으로 여산중, 전주공고를 나왔다. 군당국 문서에는 ‘월북(행불 처리)’이라고 기록돼 있다. 당시 군당국이 발표한 유 중령의 월북사유는 도박빚, 여자문제, 가정불화 등이다.
도박빚 찌들린 군무원의 비행기 탈취
하지만 1977년 유 중령 사건 당시 보안사에 근무했던 예비역 군 관계자에 따르면 유 중령의 월북사유는 알려진 바와 다르다. 그보다 앞서 그 지역 상공에서 발생한 비행기 월북사고에 따른 문책과 관련됐다는 것이 이 관계자의 증언이다. 그는 “과거 월북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군당국에서는 무조건 빚 문제, 여자 문제 등을 월북사유로 들었다”며 “유 중령의 경우도 월북사유가 잘못 알려져 있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의 제보를 바탕으로 당시 사건의 내막을 취재한 결과 실제로 유 중령 사건에 앞서 비행기 월북사고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주인공은 경남 진해 육군 수송기지창에 근무했던 5급 군무원 이모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