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당국 기록에 따르면 이씨가 L-19이라는 미국제 육군 정찰기를 몰고 북한 상공으로 넘어간 것은 유 중령 사건이 나기 8일 전인 1977년 10월12일이었다. 이유는 도박판에서 진 거액의 빚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L-19은 저공비행으로 적 동향을 관찰해 포병 관측소에 알려주는 구실을 하던 2인승 경비행기. 당시 정비기술만 있었던 이씨는 비행기를 몰 줄 아는 동료 한 명과 함께 월북한 것으로 전해진다.
제보자에 따르면 이씨의 비행기는 서해안 기슭을 따라 저공비행으로 북상하다 유 중령 부대 관할지역 상공을 통해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 그에 따라 이 지역 경계를 책임진 장교들에 대한 문책 분위기가 조성된 가운데 유 중령의 월북사고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예비역 해군 장성 김모씨의 증언에 따르면 이씨의 비행기가 바다가 아닌 내륙을 통해 월북한 것은 해안과 함정의 레이더망을 피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씨는 “바다 위로 날아갈 경우 격추될 위험이 높기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산악지대의 계곡을 통해 넘어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씨에 따르면 당시 진해에서는 이씨의 비행기 월북사고 여파로 대대적인 문책과 간첩소탕작전이 벌어졌다. 사건 직후 진해에 입·출항하는 모든 함정은 한동안 대간첩작전에 시달렸다. 고정간첩인 이씨가 포위망이 좁혀지자 급하게 넘어가느라 비행기를 탈취했다는 둥 그의 월북행에 술집 마담이 동행했다는 둥 확인되지 않는 소문이 돌았다.
어쨌든 유 중령 사건이 군무원 이씨의 비행기 월북사건과 관련됐다는 제보자의 주장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그렇지만 반론도 만만찮다. 유 중령의 병과는 보병이었다. 이를 두고 군정보기관 관계자는 “설령 비행기가 유 중령 부대가 있는 지역의 상공으로 넘어갔다고 해도 포병부대도 아닌 보병부대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며 “두 사건의 발생시기가 비슷한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제보자의 주장을 반박했다.
“유 중령 월북사유는 공금횡령”
이에 대해 제보자는 “당시 군의 분위기는 지금과 달랐다”며 “사고가 나면 직접적인 책임이 없어도 엄하게 책임을 추궁하는 풍토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제보 동기에 대해 “월북사고만 나면 당사자를 범죄자로 몰아붙이던 군당국의 태도에 분개했던 터에 이번 철책절단사고 이후 일부 언론에서 군당국 발표대로 또다시 유 중령의 월북사유를 엉터리로 보도하는 걸 보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제보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군 정보기관 관계자는 유 중령이 부대 매점(PX) 공금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나 월북했다고 말한다. 당시엔 군부대 매점을 대대장이 관리했다.
한편 장성 출신으로 유 중령 사건 당시 전방에 근무했던 한나라당 모 의원은 “유 중령이 근무에 염증을 내고 월북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당시 그의 월북사유를 두고 여러 가지 유언비어가 돌았다”고 말했다.
유 중령 월북사건의 현장이자 지난 10월 철책절단사고가 난 철원 비무장지대는 원래 A사단 관할이었는데 유 중령 사건 이후로는 B사단이 지키고 있다. 군당국이 문책 차원에서 A사단을 후방으로 돌리고 후방에 있던 B사단을 끌어올린 것이다. A사단은 현재 경기 양평에 주둔하고 있다.
철원 비무장지대에는 원래 철조망만 있다가 1965년 목책이 들어섰다. 남방한계선에 3m 높이의 참나무를 줄지어 꽂았다. 아울러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수목을 다 제거하고 그 자리에 임진강에서 퍼온 모래와 부비트랩을 깔았다.
지금과 같은 철책이 세워진 것은 1969년이다. 군사분계선에서 남방한계선에 이르는 비무장지대는 지뢰밭으로 바뀌었지만, 경계임무를 위한 안전통로는 따로 마련돼 있었다. 한탄강 상류에 해당하는 문제의 역곡천은 비가 오면 지뢰가 노출되곤 해 취약지대로 평가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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