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2004년 11월19일 정치발전위원회 연찬회에 참석, 참가자의 말을 듣고 있다.
“당명을 뭐 하러 바꾸나. 지금 당명을 바꾼다면 대통령선거 앞두고 또 한번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 당명을 바꾼다고 당이 얼마나 변하겠나. 국민은 그런 쇼 없이 편안하게 살고 싶어한다.”
그는 이어 “나는 줄곧 한 자리를 지켰는데 그동안 당 간판만 4, 5차례 바뀌었다”며 “나중에 내 손자들은 당 간판이 숱하게 바뀐 것을 보고 나를 ‘변절자’라고 하지 않겠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당명 개정 논의에 불만을 토로한 그는 명시적으로 대상을 거명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 과녁이 당명 개정을 주도하는 박근혜 대표 등 지도부에 맞춰져 있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박 대표는 17대 총선을 치른 지 8개월이 지난 요즘 당명 개정 드라이브에 재시동을 걸었다. “모든 것을 바꾸겠다”는 총선 공약의 일환이라는 것. 일부 보수 성향 의원들이 “왜 한나라당 간판을 내려야 하냐”며 반발하고 있지만, 박 대표는 “당명을 바꾸겠다는 국민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며 물러서지 않을 태세다.
이것이 한나라당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당내 곳곳에선 파열음이 들려온다. 변화의 당위성엔 공감하면서도 성향에 따라 제시하는 ‘로드맵’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당내 전선(戰線)도 다각화하는 추세다. 박근혜 대표의 리더십을 둘러싼 갈등도 있지만, 국가보안법을 놓고 벌어진 이념적 스펙트럼은 좀처럼 좁혀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당의 향후 진로를 둘러싼 시각차는 오히려 해묵은 이슈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최근 국가보안법 등을 둘러싼 첨예한 여야 대치 국면에서 한나라당의 내홍(內訌)은 잠시 숨을 고르는 듯 잠잠해졌다. 그러나 잠복기는 그리 길지 않을 듯싶다. 전국 단위 선거가 없는 2005년이 내부 노선 투쟁의 분기점이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얼마 전부터 한나라당 내에서는 당 선진화 프로젝트가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이 프로젝트는 당의 개혁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지만, 정치적 함의(含意)가 거기에만 머무를 것 같지는 않다.
박근혜 대표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경제, 교육 등 분야별 선진화 과제를 마련중”이라고 했지만, 실무라인에선 선진화 프로젝트를 당 변화의 ‘기폭제’로 삼으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선진화 프로젝트는 당 정체성 문제와 직결된다. 정체성 문제는 곧바로 당내 이념적 갈등의 골에 불씨를 던져 노선투쟁에 불붙일 공산이 크다. 노선 투쟁의 핵심은 인적 쇄신 문제로 불똥이 번질 수밖에 없다. 그만큼 ‘인화성’이 큰 이슈라는 얘기다.
한 핵심당직자는 “당헌·당규 개정을 통해 당 정체성을 재정립할 것”이라며 “핵심은 중도 성향 유권자들에게 다가서려는 당 차원의 의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당직자는 이어 “당의 노선을 중도 쪽으로 옮기는 문제가 본격화할 경우 이를 주도하는 세력과 이에 반발하는 세력의 충돌이 불가피하지 않겠냐”며 “자연스럽게 인적쇄신 문제로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당 지도부는 선진화 프로젝트를 통해 당명 개정을 비롯한 변화의 카드를 제시하며 당의 변화를 주도한다는 전략이다. ‘수구꼴통’으로 굳어진 당의 체질을 획기적으로 바꿔 집권 기반을 다지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노선투쟁을 내다보는 접근법은 미묘하게 갈리고 있다. 당내 입지와 정치적 성향에 따라 편차가 크다. 여기에 2007년 대통령선거를 내다보는 정치적 셈법이 깔려 있는 것은 물론이다.
우선 당권을 쥔 박 대표 진영은 공개적으로 ‘온건개혁론’을 표방하고 있다. 이른바 ‘자산과 부채 승계론’이다. 과거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이어진 당의 역사를 잘못된 것은 고치고 이어갈 것은 계승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박 대표는 최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당내 일각의 ‘당 청산론’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 때문에 당 선진화 프로젝트가 폭발성을 띠기는 어려운 것 아니냐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영남권 중심의 보수 성향 의원들은 이런 변화의 움직임에 시큰둥한 반응이다. 이들은 섣불리 중도로 옮기다가는 ‘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도 놓치는 꼴’이라며 당의 보수적 정체성을 분명히 할수록 지지층을 더욱 결집시켜 집권 기반을 다질 수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들에겐 뿌리깊은 ‘영남 적자(嫡子)론’이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