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痛恨의 38선, 소련 견제 위한 미국의 정치공작 산물

痛恨의 38선, 소련 견제 위한 미국의 정치공작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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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만주, 북위 38도 이북의 한국 및 사할린에 있는 일본국의 선임지휘관과 모든 육상, 해상, 항공 및 부조부대는 소련극동군 최고사령관에게 항복할 것.

f. 북위 38도 이남의 한국에 있는 일본국의 선임지휘관과 모든 육상, 해상, 항공 및 보조부대는 미합중국한국파견군 사령관에게 항복할 것.

이 초안은 트루먼 대통령의 결재를 얻어 8월15일 처칠, 스탈린, 장제스 등 연합국 수뇌들에게 발송될 때까지 부분적으로 추가 수정됐는데 한국과 관계된 항목도 일본 본토 및 필리핀 점령에 관한 항목과 통합돼 새로운 항이 되고 항복 접수자도 미합중국 태평양육군총사령관, 즉 맥아더 장군으로 변경됐다. 그러나 38선 분할점령 계획 자체에는 아무런 변경이 없었으므로 38선이 획정된 시점은 8월11일, 또는 그 이전이다.

이 문제에 관한 미국 정부의 공식 해명은, 전시 중 급박한 상황에서 극히 짧은 시간에 깊이 고려하지 않고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한 편의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947년 제81차 미의회 하원외교위원회에서 웹 국무차관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했다.

1945년 8월10일 일본이 처음 항복을 제의하자 그 다음날인 11일 육군장관은 … ‘일반명령 제1호’안을 국무장관에게 제출했다. … 이 안은 11일 12일 양일간 3부조정위원회에서 토의되고 14일에는 합동참모회의의 검토를 마쳤으며, 15일에는 대통령의 결재를 얻어 마닐라에 있는 맥아더 사령관에게 타전됐다. … 영국 정부와 스탈린에게도 전달됐다. 8월16일자 회담에서 스탈린은, 그 뒤에 미국 정부가 수락한 모종의 수정을 제안했으나, 38선과 관련된 조항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38선에 관한 일반명령 제1호가 아직 검토 중에 있던 8월12일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웹의 증언은 주로 ‘일반명령 제1호’의 기안과정과 공고의 경위에 대한 것으로, 38선을 획정하게 된 이유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그러나 소련과 사전협의는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어, 38선이 단순히 항복을 접수하기 위한 편의적인 분획선으로 구상됐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이 소련의 한반도 진공과 관련해 이해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미군 어느 부대도 38선 닿기에 멀어

그러나 소련군의 한반도 진군이 시작된 8월12일 ‘일반명령 제1호가 아직 검토 중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38선의 획정에 관해 검토한 결과 분할점령안에는 아무런 변경이 없었으므로 38선의 획정 시점은 초안이 작성된 8월11일이 된다. 그러므로 소련군이 한반도에 진입하던 중에 38선이 획정됐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한편 트루먼의 ‘회고록’에도 38선이 군사적 편의에 따라 획정된 것으로 씌어져 있다.

스탈린이 나에게 보낸 메시지나 안토노프가 맥아더에게 보낸 메시지, 또는 소련이 보낸 그밖의 어떤 메시지에도 한국점령분계선에 관한 언급이나 문의가 없었다. 나중에 큰 문제로 대두할 운명을 지닌 38도선은 양측의 어느 쪽에서도 논쟁이 되거나 흥정거리가 되지 않았다. 일반명령 제1호가 승인을 받기 위해 내게 제출됐을 당시 38도선 이남은 미국이, 그 이북은 소련군이 항복을 받도록 돼 있었다.

나는 번스 국무장관이 미군이 가능한 한 한반도 북쪽에서 항복을 받도록 제안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육군 당국은 거리와 인력이라는 두 가지 극복할 수 없는 장애에 부딪혀 있었다. 38도선조차 만일 소련이 동의하지 않았더라면, 미군의 어느 부대도 닿기에는 너무 멀었다. 만일 (소련의) 반대가 있어, 오직 우리가 얼마나 북쪽까지 군대를 진입시킬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됐다면, 반도의 훨씬 남쪽에 선이 그어졌을 것이다.

육군 당국은 38도선에 따라 분계선을 획정함으로써 한국의 오랜 수도 서울에서 항복을 받을 수 있게 됐음을 자랑했다. 물론 당시에는 일본의 항복을 받는 책임의 편리한 할당이라는 것밖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한국 문제에 관한 기왕의 모든 토의에서 소련은 한국이 독립하기에 앞서 신탁통치를 거쳐야 한다는 데 우리와 같은 의견이었다.

간추려 말하면 ①카이로회담 이래 포츠담회담에 이르기까지 연합국의 모든 전시 회담에서 독립에 앞서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 외에는 한반도의 장래에 관해 (특히 소련과) 아무런 명시적인 합의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②‘일본의 항복을 받는 책임의 편리한 할당’이라는 관점에서 38선이 돌발적으로 획정됐으며 ③‘거리와 인력’의 한계로 38선 북쪽으로는 올라갈 수 없었고 ④38선 분할점령이라는 미국의 제의에 소련이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회고는 38도선 ‘훨씬 남쪽’이나 ‘훨씬 북쪽’이 아닌 바로 38도선을 분획선으로 삼게 된 경위만을 설명하고 있을 뿐, 38도선이건 39도선이건 분획선 그 자체가 왜 ‘책임의 편리한 할당’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회고는, 미국의 (군사적) 능력이 허락했다면 ‘훨씬 북쪽’에 분획선을 그었을 것이며, 소련의 반대가 있었더라면, ‘훨씬 남쪽’일망정 역시 38선과 유사한 분획선을 그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바로 이런 추론 때문에 진작부터 미국이 한반도에 대한 정치적 지배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혹시 미소가 합의해 분할 지배하기로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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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석용 대전대 교수·정치외교학 qintzu@d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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