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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극복과 점진 개혁 내세운 좌우합작운동의 좌절

분단 극복과 점진 개혁 내세운 좌우합작운동의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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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 강점기 신간회 운동과 맥이 닿아 있는 해방정국의 좌우합작운동은 미국의 反공산화 정책 및 공산정권 수립을 반대한 민족지도자들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현대 한국정치 사상 최초의 점진적 개혁 리더십을 보여준 이 합리적·실용적 민족주의 운동은 비록 현실 정치세력의 벽에 가로막혀 소멸됐지만, 오늘날 전개되는 남북협상의 바람직한 모델로 재평가돼야 마땅할 것이다.
분단 극복과 점진 개혁 내세운 좌우합작운동의 좌절

광복 이후 좌우합작운동에 나선 민족지도자들. 앞줄 왼쪽부터 안재홍, 김붕준, 김규식, 한 사람 건너 원세훈. 가운뎃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강원룡.

광복 이후 3년간의 한국정치는 제1공화국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는 현대 한국민족주의의 최대 과제인 민주적 통일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그것을 위한 정치적 이니셔티브는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빚어진 민족분단, 남북의 첨예한 이데올로기적 대립, 그리고 반민족적 친일세력의 온존(溫存) 등은 이후 현대 한국정치사가 권력의 정당성 빈곤과 사회 통합의 결여로 파행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원인이 됐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남북화해와 평화정착을 위한 각종 구상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실천되고 있는 오늘날, 광복 이후 3년간 전개된, 민주적 통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역동적이고 정치적인 노력은 새로운 관심과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만일 냉전적 고정관념과 그것에 기울어진 편견을 없애고, 한국민족주의의 최대 과제는 민주적 통일국가 건설에 있다는 시각에서 그 같은 정치적 이니셔티브들을 재평가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한국정치의 이상과 현실이 맞닿는 어떤 사상적 맥락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민족통일의 비전과 그 실천을 위한 구체적인 방략을 결정하는 데 유용한 정치사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해방정국에서 빚어진 실패 사례들이 우리 현대사의 어둠이었다면 이 어둠에 대한 성찰을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하나의 지혜일 것이다.

이러한 기대와 문제의식에 터 잡아 필자는 광복 이후 3년간 비록 정치적 경쟁에서 성공하지 못했으나 오늘날 새로이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그간의 각종 비판과 비난, 혹은 의도적인 언급회피나 묵살에 유의하면서, 그것은 첫째로 분단극복을 위한 민족내부의 자주적 이니셔티브였다는 점, 둘째로 좌우합작을 추진했던 정치지도자들은 현대 한국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점진적인 개혁 리더십의 한 유형을 보여주었다는 점, 셋째로 좌우합작운동은 한국민족주의의 합리적이고 실용주의적인 대외 접근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 정치적 성격을 확인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나름의 재평가를 시도하고자 한다. 아울러 해방정국에서 시도된 좌우합작운동이 오늘의 한국정치와 남북관계에 어떠한 함의를 지니고 있는지도 생각해보고자 한다.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추진한 통일정부 수립이 무산된 이후 당시 정치과정에 참여한 지도급 인사나 단체는 누구나 민족대통합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각 세력은 자신을 중심으로 민족대통합을 이루고자 노력했다. 박헌영은 공산당이나 인민공화국을 중심으로, 김구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중심으로 각각 좌우익 모든 정치·사회단체가 대동단결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 모두 조직 차원에서나 이념 차원에서 자기중심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경직된 가운데 경쟁하고 대립한 탓에 국민이 바라던 통합적 정치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김규식과 여운형의 활약



그런데 상하이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과 건준위원장 여운형을 중심으로 1946년 5월부터 전개한 좌우합작운동은 국내 여러 정치세력 간의 권력투쟁적 적대관계를 지양하고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한국민족주의의 대의에 따라 좌우 양 진영 정치지도자들끼리 서로 인정하는 가운데 대화와 협상을 통해 일대 단합을 기도한 민족자주적인 이니셔티브였다.

널리 알려진 대로 1945년 12월27일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해 최소 5년간의 신탁통치로써 한국의 독립을 준비하고 그 구체적 방안으로 조선임시민주주의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보존할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를 설치·운영한다’는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사항이 발표되자 한국의 국내 정치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워졌다. 우익진영은 반탁(反託) 구호와 함께 이승만을 의장, 김구·김규식을 부의장으로 하는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좌익진영은 찬탁(贊託) 프로파간다와 함께 여운형·박헌영·허헌·김원봉 등을 의장단으로 하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을 중심으로 결집함으로써 양 진영의 암투와 대결은 매우 날카롭게 전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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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 tasari@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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