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낫으로 추수
모내기와 추수시기에 도시 사람들이 동원되는 이유는 농촌의 기계화 사정이 상당히 열악하기 때문이다. 기계화 수준이 가장 높았던 때는 1980년대 중반경이었다. 이후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되고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닥치면서 북한 농촌은 1940~50년대로 회귀했다. 농기계가 있어도 연료가 없어 무용지물이고, 기계가 가동되지 않으니 부속이 녹슬어버리고, 공장이 멈춰서다보니 새 부속도 구하기 힘든 악순환이 이어졌다.
대부분의 모내기는 옛적부터 해오던 대로 사람들이 논에 죽 늘어서서 모를 꽂는 식으로 이뤄진다. 벼 추수도 수확기는 꿈도 못 꾸고 낫으로 베야 한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협동농장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도시사람들을 불러다 농사짓던 일은 없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농사는 농민들이 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협동농장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농민들의 근로의욕이 사라졌고, 그 결과 도시에서 막대한 인력이 투입됐음에도 농장의 생산량은 시원치 않다. 농민이나 지원노(동)력 모두 주인의식과는 거리가 먼 탓이다.
북한은 정전(停戰) 직후인 1953년 8월부터 1958년 8월까지 개인들의 토지를 모두 합쳐 협동농장을 만들었다. 오늘날 협동농장은 관리위원회 산하에 여러 개의 작업반이 있고, 작업반 아래 다시 분조가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한 개 협동농장에는 지역에 따라 5~20여 개의 작업반이 있다. 한 개 작업반은 5~8개의 분조로 구성되고, 분조의 인원수는 대개 10~20명 정도다. 그러니 한 개 작업반에 속한 인원은 50~150명쯤 된다. 작업반은 다시 일에 따라 농산반, 남새반, 축산반, 과수반, 기계화반 하는 식으로 나눠진다. 군대가 보병, 포병, 기계화병, 공병 등으로 세분화돼 있는 것과 비슷하다. 이중 지원노력들이 주로 가는 곳은 농산반이다. 지역의 특성을 고려해 수산반, 임업반, 누에반, 주택보수반과 같은 작업 단위가 있는 농장들도 있다.
군 사령관에 비유할 수 있는 농장의 총책임자는 관리위원장이고, 정치위원 역할은 리당비서, 참모장 역할은 기사장이 수행한다. 농장의 실권자는 인물에 따라 관리위원장이 될 수도 있고 리당비서가 될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사장이 쥐락펴락 하는 곳도 있다.
협동농장원들은 일한 양을 공수로 따져서 평가받는다. 북한에는 그날 한 노동의 성격과 양에 따라 몇 공수를 줘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이 자세히 마련돼 있다.
실례로 소를 이용한 밭갈이는 농촌에서도 가장 힘든 작업에 속하는데 150평을 갈면 1공수를 주는 식이다. 농촌에서 가장 많은 작업 중 하나인 김매기는 면적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하루에 보통 1~1.2공수를 받는다.
공수를 매기는 사람은 말단 책임자인 분조장이다. 이렇게 공수를 모아보면 1년에 농장원당 대략 300공수 정도를 받는다. 오래된 은어이긴 하지만 북한에선 몸이 튼튼하고 일 잘하는 농촌여자를 가리켜 ‘600공수’라고 한다. 600공수는 몸도 아프지 않고 남보다 2배, 3배씩 일해야 받을 수 있다. 도시에서 온 지원노력도 그날그날의 실적에 따라 분조장이 매겨준 공수를 가지고 일을 잘했나 못했나를 평가받는다.
‘600공수 여자’
북한의 협동농장에서는 탈곡까지 끝난 12월 말경에 결산분배라는 것을 한다. 그해 농장이 생산한 전체 알곡 생산량 중 국가에 내는 것을 뺀 나머지 알곡과 생산물을 국가에서 수매하거나 도시에 판매해 얻은 현금수입, 이 두 가지를 농장 소속 전체 농장원이 받은 공수로 나눈다. 그러면 1공수당 알곡은 몇 kg, 돈은 얼마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를 다시 각 농장원이 1년간 모은 공수만큼 곱해 알곡과 현금으로 지급한다.
농장이 국가계획을 초과 수행하면 잉여 몫이 커져 농민들 몫도 덩달아 커진다. 그러나 계획에 미달하면 쪽박을 찬다. 이 때문에 협동농장이 생겨난 초기에는 농장 간에 알곡 및 현금 분배에 많은 차이가 났다. 그러나 최근에는 국가계획을 집행하는 농장이 거의 없기 때문에 분배에 기대를 거는 농민도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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