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금성, 고정간첩 속이기 위해 신용불량자로 위장
- 박기영씨 옆집으로 이사와 자연스럽게 동업 시작
- 北 보위부장 흑금성에게 “인공항문 좀 구해주시오” 부탁
- 北 조사부, 흑금성에게 “100만 달러 줄테니 함께 일하자” 제의
- 두부모처럼 쌓인 돈다발 김포공항 검색대 무사 통과
- YS, “아자의 대북사업 무조건 성공시켜라” 지시
- 흑금성, 북한 대표 접촉한 정치인 자료 안기부에 전달
- DJ 낙선 위해 아말렉 공작·오대산 공작 벌인 권영해
- 구명 위해 비밀파일 작성한 이대성
- 흑금성, “비밀녹음 자료 있다” 위협해 위기 탈출
- 신건 국정원 차장, 흑금성에게 조건 제시하며 녹음자료 반환 요구

김대중 정부와 현대그룹은 지난 5년간 쾌속으로 대북사업을 추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때는 큰 갈채를 받았지만 지금은 양쪽 모두 비난과 위기에 직면해 있다. 왜 이런 사태가 일어났을까.
1998년 2월말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권영해 전 안기부장이 주도한 북풍사건을 수사했다. 이 수사는 남북관계를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였다. 그런데 지금 이 경고가 부메랑처럼 정부 여당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
소설 같은 공작의 세계
1998년 북풍사건 때 터져나온 또 하나의 사건이 ‘흑금성 사건’이다. 흑금성(黑金星)! 무협지에나 나올 듯한 이름이 안기부의 문서에 버젓이 올라가 있었고, 흑금성은 남과 북의 최고 정보기관을 오가며 첩보활동을 한 사실이 밝혀졌다. 흑금성의 정체는 박채서씨(朴采緖·48)인 것으로 밝혀졌다. 세상의 눈은 2중간첩일지도 모를 박채서씨에게 쏠렸다. 그러나 흑금성은 어느 틈엔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기자는 그때부터 흑금성이 어떤 일을 했는지 추적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흑금성의 실체를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설사 만난다고 해도 그가 모든 것을 털어놓을 리는 없었다.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데 한 해 한 해 세월만 흘러갔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흑금성이 관여했던 ‘아자커뮤니케이션’이라는 광고회사가 MBC 방송과 소송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MBC는 아자에 거액을 지불하고 북한에서 TV 프로그램을 찍으려고 했는데 무산됐다며 아자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것.
그러자 아자는 정부가 흑금성 박채서씨의 실체를 공개하는 바람에 대북사업이 무산되었다며, 1998년 정부를 상대로 77억원 배상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아자의 패소를 선고했다.
법원은 박채서씨가 구 안기부의 공작원으로 활동한 것은 사실로 보이나 안기부의 문서나 자료로 확증되지 않는다며 아자에 패소 판결을 내렸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다는 논리인 것이다. 1심 재판부는 안기부에서 작성한 흑금성 공작계획서를 갖고 오거나 당시 흑금성을 지휘했던 관계자를 불러올 것을 요구했으나 안기부는 자료를 제공하지 않았고 관계자도 법정에 출두시키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아자는 엄상익씨(嚴相益)를 새로운 변호인으로 선임해 2심에 도전했다. 엄변호사는 박채서씨가 안기부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주력했다. 오랜 시간 박씨를 인터뷰 한 그는 과거 북풍사건 재판 자료까지 덧붙여 탐색한 후 박씨가 어떤 경로를 거쳐 공작원이 됐고 어떻게 공작을 했는지 알아내 방대한 분량의 준비서면을 작성했다. 기자는 이 서면을 입수했다.
기자는 아자커뮤니케이션의 사장을 지낸 박기영씨(朴起影·45)와 아자커뮤니케이션의 대주주였던 정진호씨(鄭鎭虎·47·미진아이디 대표)를 만나 보강 취재를 했다. 그리고 공개할 수 없는 몇몇 취재원의 도움도 받았다. 박채서씨에게는 여러 번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하지 못해 메시지를 남겼다. 그후 박씨는 단 한번 전화를 걸어와 ‘왜 내 기사를 써야 하느냐’고 물었다.
이미 공개된 공작
흑금성 기사를 쓰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흑금성의 정체가 드러남으로써 북한의 정보기관은 당시 안기부의 공작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여실히 알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정보기관은 흑금성과 비밀접촉을 했기에 여기서 “아” 소리만 질러도 대번에 “야, 어, 여, 오, 요”까지 알아들을 능력이 있다.
상대에게 이미 공개된 공작이라면 그 공작이 제대로 된 것인지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둘째는 흑금성 공작이 진행될 때의 상황이 4억달러 대북지원설이 터져 나온 지금 시점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북풍을 일으키면 뼈아픈 상처를 입는다는 것을 경험했는데도 정치권은 조심성 없이 유사한 실수를 반복했다.
공작은 국익을 위한 공작이어야 하는데, 정치인들은 이를 정치인을 위한 공작으로 바꿔놓으려 했다. 여기에 일부 정보기관장까지 가세해 마침내 국익까지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사태가 반복되는 것을 막으려면 흑금성사건에서부터 북풍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연구해 차단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지금부터 기자가 입수한 흑금성 사건 자료를 토대로 그 어떤 잡지도 시도하지 못한 소설 같은 공작의 세계를 통과한다. 기사를 쓴 것은 기자지만 이 사건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과 교훈은 독자 제위께서 스스로 구성했으면 한다.
◇ 제 1 부 발단 : 3인의 동업자와 편승공작 ”유에서 무를 창조하라”
지금부터 주인공은 ‘흑금성’ 박채서씨다. 박씨는 충청북도의 명문인 청주고를 거쳐 육군 3사관학교(14기)를 졸업하고 직업군인이 되었다. 갓 소령으로 진급한 장교는 육군대학에 입교하는데, 박씨는 3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국군정보사령부에 배치된 그는 1991년부터 정보사령부 공작단의 한미공작대 A-23팀에서 일하게 되었다. A-23팀은 미국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미 CIA와 함께 대북 우회침투공작을 하는 비밀 조직이었다.
A-23팀은 조총련 조직원인 ‘서재호’라는 사람을 통해 대북 우회공작을 폈다. 서재호를 통한 공작이 마무리될 때쯤(1992년쯤으로 추정), 이 팀은 새로운 공작을 준비하게 되었다.
공작은, 공작을 담당하는 각 팀이 ‘이렇게 공작을 하면 좋은 결과가 있겠다’는 기획안을 만들어 상부에 올려 승인을 받으면, 그에 필요한 자금이 내려와 착수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북한 조선로동당의 대남 공작기관인 대외연락부와 조사부, 한국의 국가정보원과 유사한 국방위원회 직속의 국가안전보위부(이하 보위부)도 비슷한 방법으로 공작한다.
동구권과 소련이 붕괴된 1990년대 초 북한이 직면한 사정은 1997년말 한국이 처한 IMF 경제위기보다 더욱 심각했다. 이러한 경제위기는 북한의 공작기관에도 밀어닥쳤다(북한이 맞은 위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공작금을 지급하던 조선로동당은 “각 공작기관은 자체적으로 공작금을 마련해 공작하라”고 지시했다.
A-23팀의 공작, “고첩을 속여라”
정보의 세계에서는, 이상하게도 은밀히 주고받는 정보일수록 상대 정보기관에 재빨리 포착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상대 정보기관에 깊이 침투해 있는 고정간첩(고첩) 때문인데, 고첩의 활약은 생각 밖으로 대단하다고 한다.
보통의 한국인은 누가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국이나 국군기무사 대공처, 그리고 경찰청 보안국 요원인지 알 방법이 없다. 이러한 요원들에 관한 정보는 주민등록 사항부터 거의 모든 것이 위장돼 있기 때문이다. 가족마저도 이들이 어떤 이름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북한의 공작기관에 근무하는 자들은 이를 훤히 꿰고 있다고 한다. 조총련에 포섭돼 대남공작 교육을 받았던 한 인사는 “공작원 교육을 받을 때 남한 각 정보기관에 근무하는 대공요원들의 얼굴을 여러 각도에서 찍은 슬라이드 사진을 수십 차례 보며 눈에 익혔다. 대공 요원들의 얼굴 사진을 정밀하게 찍을 정도로 북한 고첩망은 한국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고 말했다.
박소령 팀은 북한 공작조직이 당면한 자금난을 이용한 공작안을 마련했다. 이때부터 ‘엘리트’인 박소령은 무능하고 불평불만이 많은 장교가 되기 시작했다. 그는 동료 장교에게 수시로 돈을 빌리고 갚지 않아, 신용불량자로 찍히기 시작했다.
박소령의 이러한 행위는 감찰 파트에 체크되었다. 이 자료는 이후 박소령의 진급을 막는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박소령이 중령 진급에 떨어진 것이다. 중령 진급을 1차에서 실패한 3사 출신은 어찌 어찌해서 2차나 3차에서 중령으로 진급한다 하더라도, 대령 진급은 언감생심 꿈도 꿔볼 수가 없다.
박소령의 군대 생활은 먹구름만 가득하게 된 것이다. 희망이 없는데 현실이 만족스러울 수 있겠는가? 자연 박소령은 군대 생활에 대해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신용 불량자에다 불평불만에 가득 찬 사람이 되었으니 그의 운명은 ‘예편’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1993년 3월 박채서씨는 3사 출신의 ‘그렇고 그런’ 소령 중의 한 명으로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박씨의 전역은 정보사에 침투해 있을 북한 고첩의 눈을 속이기 위한 ‘고도의 위장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랫동안 한국에 침투해 있는 고첩들은 맡은 분야를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아주 냉철한 눈을 갖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보는 이들을 속여넘기려면, 공작관은 완벽하게 자신의 운명을 바꿔놓아야 한다. 자신의 운명까지도 바꿔가며 온몸을 던질 줄 알아야 진정한 공작관이다.
삼성 제품을 북한에서 찍는 광고사업비로 320만달러가 거론되고 있었으니 MBC의 250만달러를 더하면, 아자는 북한에 500만달러를 주고도 70만달러를 남기게 된다. 그리고 삼성과 계약이 끝난 다음에는 다른 회사를 선택해 북한에서 제품 광고를 찍을 터이니 아자의 미래는 더 없이 밝아 보였다.
1997년 5월26일 아자와 MBC는 북한을 방문해 달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두 회사는 각각 통일원에 방북신청서를 제출했다. 통일원은 7월4일 아자에 방북허가를 통보했다. 그러나 7월30일 MBC에 대해서는 “언론사의 과당 경쟁이 우려된다”며 방북 보류를 통보했다. 이 일을 계기로 잘 나가던 사업이 꼬이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아자가 북한측에 순차적으로 지불하기로 한 첫번째 중도금 지불 날짜가 도래했다. 첫번째 중도금은 60만달러였는데, 아자와 MBC의 계약대로라면 두 회사는 이 돈을 절반씩 부담해야 한다.
그러나 MBC의 방북이 불투명해서 아자의 정진호 고문이 60만달러를 마련해 먼저 지불하기로 했다. 그해 8월9일 정진호 고문은 60만달러와 기타 비용 등을 준비해 베이징행 비행기에 탔다. 이때 정사장이 가장 염려한 것은 ‘이 많은 현금을 들고 김포공항 검색대를 과연 통과할 수 있을까’였다. 이에 대해 박채서씨는 “염려말고 검색대를 통과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고문은 “검색대에 돈 가방을 올려놓으니 X-레이 화면에 두부모처럼 쌓인 돈 다발이 내 눈에도 보였다. 그런데 검색요원은 아무 말 없이 들어가라고 했다. 박씨의 능력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들었는데, 내 돈 다발을 찍은 X-레이 필름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아예 파쇄되었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로써 정고문은 60만달러를 무사히 북한측에 전달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아자의 박기영-박채서씨와 촬영감독 변승우씨는 북한을 방문할 수 있었다. 8월17일 베이징에 도착한 이들은 리철을 만나 북한 고려항공 티켓을 받아 8월19일 평양에 들어갔다.
순안비행장에 도착한 이들은 번호판에 빨간 별을 붙인 벤츠승용차 석 대에 나눠 타고 제일 먼저 김일성 동상을 찾아가 헌화했다. 그리고 서재골초대소로 안내되어 여장을 풀었다.
다음날 이들은 보위부의 안내를 받아 평양 시내를 답사하며 촬영했는데, 이때 8월15일 밀입북했다는 전 천도교 교령 오익제(吳益濟)씨를 만났다(오익제씨는 15대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북풍을 주도한 핵심인물이 된다). 이후 개성과 백두산을 돌아보며 촬영 후보지를 촬영하고 베이징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당시 서울은 기아사태를 계기로 경제가 나빠지고 있었다. 그러나 15대 대선의 열기는 가일층 달아오르고 있었다.
YS의 친서 전달한 MBC(?)
그해 10월 통일부가 느닷없이 MBC측의 방북을 허가했다. 그러자 아자측과 접촉해온 MBC의 유흥렬(柳興烈) 전무가 “북한 방문 비자를 받아 달라”고 해, 아자는 베이징에 나와 있는 북한 대표단을 통해 황급히 비자를 마련해주었다.
유흥렬 전무와 김윤영 차장으로 편성된 MBC 방북단은 10월25일 베이징을 거쳐 북한에 들어갔다가 1주일 후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과당경쟁을 이유로 방송사의 방북을 허가하지 않던 통일부가 15대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MBC의 방북을 허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자 측의 핵심 인사는 “나중에 북측으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김영삼 대통령의 친서를 북한에 전달하기 위해 MBC의 방북을 황급히 허가한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흥렬씨(대구MBC 사장을 지내고 퇴직)는 “친서는 없었다”고 말했다. 김윤영씨(현 MBC 홍보국장)는 “친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부서의 책임자였기에 정치와 무관한 자연·역사·인문지리 분야를 찍을 만한 곳을 주로 답사했다”고 말했다.
1997년 12월 한국은 IMF 외환위기를 맞고 크게 휘청거리는 가운데, 12월18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해 김대중 후보를 제15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런데 MBC측은 북한을 방문한 후에도 절반을 물기로 한 대금 지불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998년 1월 아자가 MBC에 대해 “계약을 파기하고 다른 방송사와 계약을 준비하겠다”고 하자, MBC는 55만달러를 보내며 계약 유지를 요구했다.
55만달러는 아자가 북한에 지급한 65만달러(계약시 박기영씨가 지불한 5만달러에 정진호 고문이 전달한 60만달러)의 절반인 32만5000 달러와 곧 아자가 북한에 지불하게 될 50만달러의 절반인 22만5000달러를 더한 것이었다. 당시는 IMF 상황이라 환율이 1800원대로 치솟았으므로, 55만 달러는 10억원에 육박했다.
남은 것은 삼성과의 본계약. 삼성이 아자의 첫번째 광고주가 되면 아자의 사업은 순풍에 돛단 듯이 진행된다. 삼성은 안성기씨 등을 모델로 북한에서 애니콜 광고를 찍는다는 계획을 세우고 윤종용 삼성전자 사장 등의 북한방문을 추진했다.
3월12일 통일부는 윤사장 일행의 북한 방문을 승인했다. 윤사장 등은 3월30일 삼성그룹의 광고회사인 제일기획 직원 등과 함께 북한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이 방문이 끝나면 아자는 곧바로 안성기씨 등과 함께 북한에 들어가 광고를 찍을 계획이었다.
이 시기 삼성의 라이벌인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1989년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이 방북했고 1996년에는 비밀리에 북한에 밀가루를 보낸 바 있는 현대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자 조총련계 일본인인 요시다 다케시(吉田猛) 등을 동원해 북한과 접촉을 강화했다.
한편 이 시기 검찰은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안기부와 짜고 북풍을 획책했던 재미동포 윤홍준씨를 구속하고 이어 권영해씨를 비롯한 전직 안기부 간부들에 대한 조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3월17일 사무실에서 인터넷을 통해 한겨레신문을 읽던 박기영씨는 한겨레가 북풍관련 기사로 보도한 ‘이대성 파일’에 관한 기사를 읽다가, 이 파일에 나오는 흑금성의 행적이 박채서 전무의 행적과 똑같은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이를 프린트해 박채서 전무에게 준 그는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이를 읽은 박채서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흑금성에 관한 보도가 나온 것도 충격인데 한겨레는 흑금성을 2중간첩으로 보도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기자들이 아자 사무실과 박채서씨의 집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날 이후 세간의 관심은 15대 대선에서 안기부가 벌인 북풍공작보다는 흑금성의 정체에 쏠리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아자의 대북사업은 올 스톱되었다. 정신없이 흑금성과 아자를 추적하던 언론은 4월10일 정주영 회장이 방북을 선언하고 6월15일 통일소 501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벌이자 일제히 그곳으로 이동해버렸다.
보위부는 말이 없다
광풍이 지나간 뒤 아자 앞에는 남은 게 없었다. 3월30일로 예정됐던 삼성전자 사장단과 아자의 방북은 공수표가 되었다. 박채서씨가 안기부 공작원이라는 사실이 공개됐는데, 방북을 한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형국이었다. 아자는 공중분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MBC가 지불한 돈 문제가 남은 것이다.
그해 5월22일 MBC는 그들이 추진했던 2차 방북을 자진 철회하고, 아자측에 그들이 지불한 55만달러를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정진호씨는 “아자와 MBC는 비용을 절반씩 물기로 하지 않았나. 22만5000달러는 돌려줄 수 있어도 이미 북한에 65만달러를 지불했으니 MBC는 그 절반인 32만5000달러를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양측의 대립은 소송으로 비화해 2000년 3월 MBC는, 55만달러를 1998년 환율로 계산한 10억원 반환소송을 제기했다. 이 재판은 현재 진행되고 있다.
MBC로부터 소송을 당하기 전 아자는 정부가 흑금성 박채서씨의 실체를 공개했기 때문에 대북사업이 실패했다며 정부를 상대로 북한에 지급한 65만달러와 삼성의 광고 촬영이 무산됨으로 인해 소진된 비용 등 각종 경비를 더해 ‘77억원을 배상하라’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맡은 서울지법 제22 민사부는 아자측의 패소를 선고했다. 이에 불복한 아자는 엄상익 변호사에게 2심을 맡겨 서울고법에 항소를 준비하게 되었다.
아자에서 제공한 65만달러를 가져간 것은 한국의 국정원에 해당하는 보위부다. 베이징에 각종 위장 명함을 들고 나와 있는 보위부 직원들은 아자로부터 술값·밥값·숙박비는 물론이고 용돈까지 지급받았다. 그러나 65만달러는 정식 계약에 의한 것이라 손대지 못하고 고스란히 평양으로 보냈다. 보위부는 이 돈을 어디에 썼을까. 미끼를 따먹은 보위부는 말이 없다.
◇ 제 3 부 파국 : 공개된 비밀공작, 완패한 편승공작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남북 공작전과 남한에서 정치공작의 관계다. 흑금성의 공작과정은 전직 안기부 간부들이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과정에 아주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이 부분을 시차별로 추적해 들어가 보기로 한다.
15대 대선을 앞둔 1995년 여러 정당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북한과 접촉하기 시작했는데, 박채서씨는 북한과 접촉한 남한 정치인을 보위부를 통해 확인해 안기부에 보고했다. 그가 파악한 첫번째 정보는 이인제(李仁濟)씨와 관계된 것이었다. 박채서씨는 1997년 8월경 김정일이 자신보다 젊은 이인제씨가 남조선의 대통령에 당선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고 보고했다.
그해 10월 조평통 부위원장인 안병수(실제 직책은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와 참사인 강덕순(실제로는 보위부 과장으로 계급은 상장)이 베이징에서 이인제씨의 동서인 조철호(趙哲鎬) 동양일보 사장을 만났다.
대선 앞두고 북한 접촉하는 政黨들
북한측을 통해 이 사실은 물론이고 대화내용까지 알게 된 박채서씨는 안기부에 이를 보고하였다. 그때까지도 조철호씨는 통일원에 북한인 접촉신고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박채서씨가 국내 정치인의 북한 접촉과 관련해 안기부에 보고한 것에는 특히 김대중 대통령과 관계된 인물에 관한 첩보도 적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전 평민당 의원인 최봉구씨(崔鳳九)가 1997년 10월 베이징에서 안병수와 전금철을 만난 것이다.
박씨는 역시 북측을 통해 최씨가 한 말을 전해 듣고 안기부에 알렸다. 최씨 역시 그때까지 북한인 접촉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서울에 돌아온 후 안기부 요원들로부터 조사를 받게 되었다.
1997년 11월20일 한나라당의 정재문(鄭在文) 의원은 베이징 장성호텔에서 북한의 안병수와 강덕순·권민, 그리고 박채서씨를 만났다. 11월22일 박채서씨는 이 만남에서 정의원이 한 말 등을 안기부에 보고했다.
이 보고 때문에 서울에 돌아온 정의원은 서울 르네상스 호텔에서 안기부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어 박채서씨는 ‘정재문 의원을 만났던 북한의 강덕순이 갑자기 평양으로 소환되었다’는 첩보도 함께 보내왔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후 세 사람은 모두 남북교류협력법 위반혐의로 기소돼 벌금 1000만원을 부과받았다.
각 정당이 북한과 비밀리에 접촉하는 것을 보면서 박채서씨는 스스로 한 정당을 선택하게 된다. 북한과 접촉하면서 그가 내린 결론은 북한은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박씨는 실제로 북한은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첩보를 안기부에 보냈다.
이러한 보고는 권영해 부장을 중심으로 한 안기부 세력이 북풍을 기획하는 단서가 되었다. 북한은 왜 김대중 후보가 차기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김정일이나 북한 최고 정보기관인 보위부의 간부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북한의 세 가지 대남전략 중 북한이 이 시기에 선택한 전술이 셋째 ‘대남 정치공작’이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북한이 왜 김대중 후보의 낙선을 희망했는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북한은 북한에 대해 유화적인 김대중 후보 세력이 야당으로 남아 계속해서 보수 여당을 흔드는 것이, 오히려 한국의 여러 정당으로 하여금 대북 접촉을 강화케 하는 요소가 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반대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면 김대중 세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업과 정당은 반(反)북한으로 돌아 오히려 북한의 선택지가 줄어든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김대중 후보를 돕기로 한 박채서씨는 비밀리에 국민회의측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가 선택한 국민회의의 창구는 정동영(鄭東泳)·천용택(千容宅) 의원이었다. 박채서씨는 두 의원을 각각 10회·5회씩 만나 북풍 관련 첩보를 제공했다.
이러한 박채서씨의 협조는 오익제·윤흥준을 이용한 안기부의 북풍을 막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앞서 밝혔듯이 박기영·박채서씨 일행은 1997년 8월20일 평양에서 우연히 오익제씨를 만났다. 안기부는 흑금성의 보고를 통해 오익제씨가 평양에 와 있는 것을 알았다.
15대 대선의 파고가 높아가던 그해 11월20일 서울국제우체국은 10월31일 평양시 중구역에서 오익제씨가 김대중 국민회의 대통령 후보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해 안기부에 알렸다. 국과수가 필체를 조사한 결과 편지를 쓴 사람은 오익제씨로 판단되었다.
안기부는 이를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했는데, 김대통령은 ‘정치적 파장’을 고려해 편지 내용은 공개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때 공개되지 못한 오익제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이북에서는 후광(後廣: 김대중 대통령의 아호)의 대승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이북의 영도자와 합의하여 통일을 성취하겠다는 소신을 표명하였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후광 선생님이 집권하면 금세기 안에 반드시 통일 성업을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보낸 편지를 잘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흑금성의 보고와 오익제 편지를 통해 북한이 김대중 후보 당선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안 안기부는 바로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 구사를 계획했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의 반대로 편지 내용 공개가 좌절되는 바람에 제2안 마련에 들어갔다.
권영해 부장은 즉각 고성진(高星鎭) 대공수사실장(103실장)을 불러 ‘오익제가 미국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는가’ 등을 내용으로 하는, 김대중 후보에게 보내는 질의서를 작성케 했다. 그리고 12월2일 고실장으로 하여금 국민회의의 천용택(千容宅) 의원을 만나 오익제 편지 사본과 질의서를 건네주며 답변을 달라고 요구했다.
안기부에는 김대중 후보에게 강한 거부감을 갖는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철저한 반공주의자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누구보다도 소신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권영해 부장을 중심으로 한 이들은 YS의 제지를 무릅쓰고 오익제씨에 대한 수사를 하는 쪽으로 의견을 굳히고, 12월4일 오익제씨의 월북 경위를 수사하자는 압수수색영장을 만들어 올렸다. 권영해 부장은 이 영장에 김대중 후보가 오익제씨를 만나 찍은 사진 등에 관한 내용을 추가로 넣으라고 지시했다.
아말렉 공작과 윤홍준의 협박
12월5일 서울지법은 안기부에서 청구한 수색영장을 발부했는데,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대통령선거를 13일 앞두고 터진 이 사건에 정치권, 특히 국민회의측이 경악했다.
국민회의 조세형(趙世衡) 총재권한대행과 DJP 연대에 참여한 김종필(金鍾泌)씨는 즉각 “안기부가 북풍을 획책하고 있다”고 맹비난하고 나섰다. 언론 또한 안기부가 기대한 대로 움직이지 않고 매우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로써 안기부는 오히려 북풍을 획책하려는 세력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권부장은 김대중 후보와 오익제씨가 같이 찍은 사진과 오익제 편지를 각각 260매, 60매씩 복사해 각 공작팀으로 하여금 주요 기관에 뿌리게 했다. 이어 자유총연맹·재향군인회 등을 동원해 김대중 후보는 오익제 편지와 관련된 의혹을 해명하라는 성명을 발표케 했다.
그러나 이 공작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다(이 내용은 洪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