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호

출입기자가 본 ‘노무현號 청와대 홍보실’

‘업무적 미숙함’ ‘인간적 거리감’ 여전한 386의 城

  • 송국건 영남일보 정치부 기자 song@yeongnam.com

    입력2007-05-07 14: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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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무현 정부에 대한 논란의 근원은 ‘홍보’에 있다. 정부 홍보시스템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변화와 갈등이 있었다. 기자실 폐쇄, 인터넷 브리핑제 신설, 언론을 향한 독설, 급증한 대(對)언론 소송…. 그러나 국정홍보의 사령탑인 청와대는 “국민과 잘 소통하고 있다”고 자평한다. 지난 4년여간 청와대 홍보실을 출입해온 기자가 그 속사정을 전한다.
    출입기자가  본 ‘노무현號  청와대 홍보실’
    “어리둥절하지만 아무튼 고맙습니다.”

    마라톤 협상 끝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된 다음날인 4월3일자 조간신문들은 협상 결과를 상세히 전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추진력을 극찬했다. ‘참여정부’에 비판적이던 신문들도 마찬가지였다. 청와대대변인을 겸하고 있는 윤승용 청와대홍보수석은 이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기자들에게 “어리둥절하지만 고맙다”고 했다.

    노 대통령의 지지율도 치솟았다. 10%대까지 가라앉았던 것이 일순간 30%대로 올랐다. 청와대홍보수석을 지낸 이병완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30%는 아무것도 아니다. 두고봐라. 50%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장담했다.

    “노무현 지지율을 5% 이하로 떨어뜨릴 수 없는 사회는 병든 사회”라고 독설을 퍼붓던 조갑제 전 ‘월간조선’ 사장마저 노 대통령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는 형국이다. 조 전 사장은 “노 대통령과 같은 저항과 도전정신의 소유자는 기득권자와 싸울 때 사명감이 생겨서 용감해지고 때로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고 했다.

    한미 FTA 타결 후 청와대홍보수석실은 사기가 올랐다. “디스카운트됐던 노 대통령의 진면목이 임기 말에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일할 맛이 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들뜬 분위기는 아니다. 홍보수석실 관계자는 “대통령의 인기가 올라갔다고 대통령 홍보에 부산을 떨 생각은 없다. 하던 대로 할 뿐”이라고 말했다. 김정섭 청와대부대변인은 “바른 길로 가다 보니 일이 잘된 것이지 우리가 홍보를 잘해서가 아니지 않으냐”며 “딱히 대(對)언론 기조에 변화가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똑바로 써달라”

    그러나 노 대통령 임기 말 청와대홍보수석실에서 변화가 감지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한미 FTA 타결에 따른 대통령의 인기 상승과는 별개다. 청와대는 참여정부 출범 초 “어미가 젖을 떼는 심정”(문희상 비서실장)으로 언론과 ‘적대적’ 긴장관계에 돌입했다. 이후엔 ‘건강한 긴장관계’라고 정의 내린다. 그런데 지금은 ‘긴장관계’가 조금 느슨해지고 있다는 평이다.

    변화의 출발점은 올 초 단행된 홍보수석실의 체제개편이었다. 윤승용 홍보수석겸대변인 이전에는 홍보수석직과 대변인직을 두 사람이 따로 맡았다. 윤 수석은 취임 후 첫 브리핑에서 “국민의 정부 시스템에서 좋은 점과 개선해야 될 점을 활용하겠다”고 했다. 그는 ‘한국일보’ 정치부장 출신이다. 언론계에 발이 넓다. 노 대통령은 임기 말에 이르러 역대 정권의 일반적인 대변인 상(像)에 근접한 대변인을 앉힌 셈이다.

    윤 수석 취임 후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국가정보원을 방문했다. 국정원에서 사격 체험을 하고 국정원 간부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전임 정권까지는 간혹 있던 일이지만 현 정부 들어선 처음이다. 최근엔 홍보수석이 직접 브리핑한다. 홍보수석은 수석·보좌관회의를 비롯해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자리에 자주 참석하는 만큼 “예전과 달리 무게가 실린다”는 얘기도 듣는다. 이전의 대변인도 회의에 자주 참석했지만 주로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달할 필요가 있는 자리로 제한됐다.

    대신 홍보수석이 주재하는 주례회의는 없어졌다. 윤 수석이 워낙 바빠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그룹별로 언론보도 내용 분석을 위한 회의만 열린다. 청와대는 지난 4년 동안 시행된 정부 부처의 개방형 브리핑제를 전면 재검토하고 개선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청와대가 언론과의 긴장관계 기조를 바꾼 것은 아니다. 일부 언론과는 여전히 한랭전선이다. 윤 수석은 “우리를 우호적으로 대해달라고 바라는 게 아니다. 똑바로 써달라, 팩트를 있는 그대로 전해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먼 수석, 가까운 대변인

    출입기자가  본 ‘노무현號  청와대 홍보실’

    청와대 출입기자실인 춘추관 앞에서 각 방송사 스태프들이 생중계 준비를 하고 있다.

    홍보수석실의 ‘공격수’ 양정철 홍보기획비서관은 3월16일 한국홍보학회가 주최한 참여정부 언론정책 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해 ‘조선일보’ 진성호 기자와 날카로운 설전을 벌였다.

    그 자리에서 양 비서관은 “식민지 시절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부역했던 언론사가 살아남은 사례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이런 언론이 민주주의를 말하고 국회의원 가족관계를 따지는 현실은 난센스다. 그런 걸 보면 우리 사회는 관용과 자유가 넘실대는 사회”라고 몰아쳤다.

    이에 진 기자는 “청와대는 원체 힘이 센 조직이고 조선일보 등 종이신문은 최근 뉴미디어의 등장과 함께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언론의 영향력까지 행사하겠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며 국정 브리핑제를 비판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 청와대 홍보시스템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까진 차관급 공보수석이 대변인을 겸임했다. 그러나 참여정부가 시작되면서 홍보수석은 전반적인 국정홍보를 담당하고, 대변인은 청와대 홍보업무를 맡아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원화됐다. 한 홍보 참모는 “도매상과 소매상을 겸하는 셈이었다. 당연히 역할 충돌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4년 동안 홍보수석이 5명, 대변인이 7명 임명됐다. 청와대 홍보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표류했다는 증거다. 홍보수석은 이해성→이병완→조기숙→이백만→윤승용으로, 대변인은 송경희→윤태영→김종민→김만수→정태호→윤태영→윤승용으로 바뀌었다. 윤승용 대변인 앞의 6명 가운데 재임 기간 1년을 넘긴 대변인은 김만수 전 대변인과 윤태영 전 대변인(첫 대변인일 때)뿐이다.

    “노무현 쪽이 이길 것 같아 왔지”

    홍보수석과 대변인의 면면을 비교하면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홍보수석은 노 대통령이 대선후보이던 시절, 또는 청와대에 입성한 후 발탁한 인사들이었다. 반면 대변인은 노 대통령이 과거부터 끈끈한 관계를 이어온 ‘386 운동권’ 출신이 대부분이다. 직위는 홍보수석이 높지만, 대통령과의 ‘거리’는 대변인이 더 가까웠던 셈이다. 자연히 홍보실 내에서 미묘한 껄끄러움이 있었다고 한다.

    ‘노무현 청와대’에서 홍보수석을 지낸 한 인사는 사석에서 “2002년 대선 때 한나라당에서 나를 영입하려고 애썼다. 내가 움직이면 100만표는 되는데, 내가 예상한 역대 대선 결과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다. 노무현 후보 쪽이 이길 것 같아서 왔다”고 했다.

    청와대에 있어 ‘홍보’란 대통령이 추진하는 국가정책 및 정치행위 전반에 대해 국민과 국제사회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내는 업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며 그 중요성 또한 매우 크다. 홍보수석은 대통령과 한마음 한몸이 되어야 하고, 대통령은 홍보수석에게 터놓고 진실을 얘기해주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될 수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박지원 전 공보수석이 그런 사례다. 홍보수석이 ‘이쪽이 이길 것 같아서 왔다’는 경험담을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홍보수석으로 발탁된 뒤 젊은 대변인 그룹 못지않게 노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한 인물도 있다. 그런데 그는 과(過)해서 탈이 났다. ‘정치적 경호실장’으로 불린 조기숙 전 홍보수석이 그다. ‘과잉충성’이 오히려 조 전 수석의 청와대 생활을 일찍 마감시켰다는 얘기도 있다. 여권 내부에서조차 그에 대한 은근한 사퇴 압박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거침없는 독설과 노 대통령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은 여당 사람들에게는 꽤 부담이었다.

    조기숙씨는 홍보수석을 퇴임하기 직전 사석에서 “독재자에게 충성하는 것은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국민의 손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것은 곧 국민에게 충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린 퇴임의 변에서 변함없는 충성을 보였지만, 여권에선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라는 얘기가 나왔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안팎으로 힘에 부친 일을 하면서도 제가 기죽지 않고 꿋꿋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의 변함없는 신임과 여사님의 든든한 후원 덕분이었다. 대통령을 가까이서 모시면서 그분의 깊이 있는 철학과 인간미를 직접 느끼게 된 것도 제게는 큰 영광이었지만 대통령 내외분의 포용력과 이해심, 인내심에 더 큰 감동을 받았다.” (조기숙 퇴임의 변)

    조 수석 재임 시절 홍보수석실은 ‘여인천하’였다. 조 수석을 필두로 노혜경 국정홍보, 김현 보도지원, 선미라 해외언론비서관 등 4명이 여성으로 비서관급 이상 7명의 과반수를 넘었다.

    윤승용 청와대홍보수석

    “오보와 낙종이 없는 기자실 만들겠다”


    출입기자가  본 ‘노무현號  청와대 홍보실’
    ▼ 홍보수석과 대변인이 일원화된 지 4개월이 지났는데, 새로운 홍보체제를 평가한다면.

    “장단점이 있다. 대변인은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하는 나름의 임무가 있고, 홍보수석은 전반적인 국정홍보를 하는 자리다. 이 둘을 합치니까 개인적으로 노동 강도가 엄청나게 세졌다. 그렇지만 각 수석비서관실의 업무를 파악할 수 있어서 기자들에게 정확한 내용을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된다.”

    ▼ 한미 FTA 체결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상승했다. 이를 계기로 청와대의 홍보정책 기조에도 변화가 오나.

    “특별한 변화 같은 것은 없다. 지금까지 천명한 내용을 그대로 지켜 나갈 것이다. 오보와 낙종이 없는 기자실을 만들겠다. 지금의 브리핑 제도를 제대로 이행하면 낙종은 없다. 또 취재 인력이나 장비 때문에 오보를 내는 일이 없도록 충실한 자료를 제공한다. 수석이나 보좌관들에게도 자주 춘추관에 들러 기자들을 만나도록 권유하고 있다.”

    ▼ 개방형 브리핑제 개선안은 언제쯤 나오나.

    “내부적으론 검토가 거의 다 끝났다.”

    ▼ 요즘 홍보수석실의 가장 큰 애로사항은 무엇인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긴장상태에서 일 해야 하니 사생활이 없다. 개인적으론 언론계 친구들과 자주 만나지 못하는 것이 가장 아쉽다. 잘못된 보도를 접하면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데, 전화도 잘 못한다. 접촉을 삼가게 되더라.”

    ▼ 참여정부 임기 후반기의 주안점은.

    “4년 동안의 국정 성과를 국민에게 정확하게 알리는 것이 목표다. 홍보수석실에서 국정을 평가하는 책자를 발간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 들어 홍보수석과 대변인의 교체가 잦았던 것은 업무 과부하 때문이기도 하다. 청와대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송경희 전 대변인과 총선 출마를 위해 사퇴한 이해성 전 수석, ‘강남아파트 두 채 소유’가 퇴진의 계기가 된 이백만 전 수석을 빼곤 대부분 건강이 나빠져 ‘쉬고 싶다’는 뜻을 피력해 교체됐다는 게 청와대의 설명이다.

    홍보수석실에서 행정관으로 근무했던 한 참모는 “청와대 홍보파트는 웬만한 신념과 체력으론 버티기 힘든 자리”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3D 업종이다. 따로 출퇴근 시간이 있길 한가, 하루 24시간 기사 체크해야지, 걸핏하면 일요일에도 불려나오지, 나중에는 가족과도 소원해지더라.”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는 전국지와 지방지, 방송사 기자를 모두 합쳐 80여 명 정도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 때도 비슷한 규모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나 박정희 전 대통령 때는 이보다 훨씬 적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들어선 청와대홍보수석실에 등록된 출입기자만 300명을 넘어섰다. 기자단을 해체하고 대신 브리핑룸을 운영하면서 인터넷 매체와 전문지 등 특수매체에도 기자실을 개방한 결과다.

    따라서 홍보수석실 직원들의 업무에 하중이 걸릴 수밖에 없다. 4월 현재 홍보수석실은 수석비서관(대변인) 밑에 부대변인, 보도지원·홍보기획·국정홍보·국내언론·해외언론비서관이 있다. 이 가운데 춘추관에 상주하면서 기자들과 부대끼는 사람들은 김현 보도지원비서관(춘추관장) 산하 직원들이다. 10명도 채 안 되는 직원이 300여 명의 기자를 상대하고 있다.

    문제는 홍보수석실의 열악한 근무환경이 해당 청와대 직원 개인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대(對) 언론관계 등 공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야기한다. 게다가 과거처럼 청와대 홍보팀과 기자들의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다. 정권과 언론의 긴장관계가 4년째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양쪽 모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다. 청와대는 초기엔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자주 싸웠지만 지난해부터는 사안별로 전선(戰線)을 다른 언론들에까지 확대시키고 있다.

    춘추관의 ‘병아리’들

    노무현 정부는 국민에게 직접 알리겠다면서 인터넷 국정브리핑을 운영하고 있지만 이 ‘신생 언론’의 방문자는 대개 공무원일 뿐 국민은 거의 찾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도 대통령의 구상이나 통치행위는 현실적으로는 언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국민에게 전해질 수밖에 없다. 홍보실이 모든 정보를 틀어쥐고 있지만 늘 격무와 과로에 허덕이는 구조, 언론과의 불편한 관계는 ‘언론을 통한 대통령 홍보’의 생산성, 효율성을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있다.

    홍보수석실의 업무량이 많아진 것은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비서동(棟) 출입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 때는 기자들이 오전과 오후 1시간씩을 정해놓고 비서실을 다니면서 취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기자들이 갈 곳이 없어 춘추관에만 머문다. 전화취재도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기자들은 홍보수석실만 바라보고 있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병아리’에 비유한 조크가 나돈다. 지나치게 제한된 활동범위를 빗댄 말이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기사 송고실에 모여 있다가 대변인 등이 나타나면 브리핑룸으로 몰려가서 내용을 받아 적는다. 그러다 대변인이 밖으로 나가면 춘추관 앞마당까지 쫓아가서 한 마디라도 더 듣고 다시 기사 송고실로 돌아간다.

    이 광경이 마치 모이를 받아 먹기 위해 주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닭장과 마당을 오가는 병아리떼를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한 청와대 고참 출입기자는 “노무현 정부는 국가의 최고 정책 결정이 이뤄지는 청와대의 출입기자들을 위축시켜 놓았다. 과연 청와대는 이런 홍보정책을 펴서 국민으로부터 더 많은 지지를 받게 됐는가”라고 반문했다.

    노 대통령은 홍보 참모에 대해선 특유의 용병술을 발휘해왔다. 임기의 사실상 마지막 해를 맞은 2007년 1월2일, 윤태영 대변인은 갑자기 대변인직을 내놓고 겸직하던 연설기획비서관 업무만 맡게 됐다. 참여정부에서 두 번째로 대변인을 맡은 지 4개월 만이었다. 당시 노 대통령은 지지율이 한 자릿수로 떨어진 데다, 열린우리당 내 통합신당파와 알력을 빚는 등 사면초가였다. 레임덕의 정도가 과거보다 훨씬 더 심했다.

    그러자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까지 할 말을 하겠다. 앞으로 하나하나 해명하고 대응하겠다”며 배수진을 쳤다. 이를 위해 자신의 ‘복심(腹心)’으로 불리는 윤태영 비서관을 기자 상대 업무에서 빼내 곁에서 보좌에만 전념토록 조치한 것이다.

    홍보 참모들은 업무 특성상 기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지만, 정권과 언론 사이의 미묘한 관계 탓에 거리를 좁히기도 어려웠다. 중간에서 조율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김만수 전 대변인은 유머 감각으로, 윤태영 전 대변인은 진지한 성품으로 기자들과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김만수 대변인은 2006년 초 청와대 참모들이 개각을 비롯한 각종 인사 정보에서 소외됐을 때 출입기자들이 ‘물 먹은’ 이유를 캐묻자 “그냥 대변인을 돌로 치십시오”라고 말하며 넘어갔다. 그러나 그는 각종 현안을 브리핑하면서 성의껏 본질에 접근하기보다는 순발력에 의존한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는 홍보수석실 보도지원비서관과 부대변인을 지내다 2004년 17대 총선 출마를 위해 청와대를 떠난 뒤 낙선하고 돌아와 대변인을 역임했으며 이후 다시 보궐선거에 나섰다가 또 실패했다. 이해성 전 홍보수석의 경우 17대 총선 때 부산에서 출마했다 낙선한 이후 한국조폐공사 사장 자리로 옮겼다.

    ‘대변인 복’이 없다

    사실 ‘노무현호(號) 청와대’는 ‘대변인 복’이 없는 편이다. 초대 송경희 대변인부터 ‘사고’를 쳤다. 송 전 대변인은 사상 첫 여성 청와대대변인인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의 박선숙 대변인에 이어 두 번째 여성 대변인으로 발탁됐지만 처음부터 위태위태하다가 결정적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취임 후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2003년 3월20일 미국이 이라크 공격을 개시하자 출입기자로부터 “전군에 경계령이 내려졌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송 대변인은 자신 없는 표정으로 “워치콘3, 한 단계 높였다, 그런 말씀이 있었다”고 전했다. 이에 기자들이 “데프콘(Defense Readiness Condition)이 아니냐”라고 물었고, 송 대변인은 “죄송하다. 제가 군사나 작전에 관해 충분하게 답변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이해해주시리라 본다”고 주춤했다. 그러나 “한 단계를 올린 것은 맞냐”고 기자들이 다시 확인을 요구하자 송경희 대변인은 “네”라고 답했다.

    AP 등 주요 외신들은 이를 근거로 “이라크전과 동시에 한반도 긴장도가 높아졌다”는 요지의 기사를 타전했다. 이에 따라 북한측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바람에 노 대통령이 당황했다고 한다. 송 대변인의 ‘워치콘’ 발언은 두고두고 TV 개그 프로그램의 소재가 됐다.

    후임인 윤태영 전 대변인은 ‘실세 대변인’답게 핵심에 접근하기 위해 애썼다. 김종민 전 대변인은 행정수도와 관련한 헌재의 위헌 결정, 일본과의 관계 악화 등 큰 사안이 있을 때 대변인을 지내 스트레스가 심했다고 한다. 당시 하루 300여 통의 휴대전화를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인 정태호 전 대변인은 모든 현안을 너무 진지하게 대하는 스타일 때문에 ‘대변인 자리가 맞지 않다’는 평가를 받고는 얼마 못 가서 정무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까지는 언론사에서 잔뼈가 굵거나 정치적 경륜이 풍부한 인물이 주로 청와대대변인을 맡았다. 대변인이 언론사 선배인 경우 기자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오히려 훈계를 듣거나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에서는 이처럼 ‘386 참모’들이 대변인의 맥을 이었다. 이에 따라 청와대 기자들이 상주하는 춘추관의 분위기도 변했다.

    청와대대변인과 출입기자들의 나이가 비슷하거나 오히려 기자가 선배인 경우도 있었다. 대변인이나 부대변인이 출입기자를 ‘선배’ ‘형’이라고 호칭하는 일도 생겨났다. 지금의 윤승용 홍보수석 겸 대변인은 50세이지만 그 밑의 비서관들은 41세(김정섭 부대변인)부터 44세(정구철 국내언론비서관)까지 비슷한 나이다.

    DJ 시절 청와대 홍보실에선…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홍보실은 ‘출입기자들과의 일화가 별로 없다’는 특징이 있다. 그만큼 대통령과 국가를 위해 헌신적인 ‘홍보 서비스’를 한 적도, 기자들에게 진실하게 접근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집권한 지 4년이나 지났지만 ‘국가의 얼굴’인 청와대 홍보실에 대해 업무적으로는 ‘아직도 미숙함’이, 인간적으로는 ‘아직도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얘기가 출입기자들 사이에서 나온다.

    노무현 정부와 마찬가지로 개혁과 진보를 표방했던 김대중 정부 때만 해도 공보수석과 대변인에 얽힌 일화는 무궁무진했다. 당시 청와대를 출입한 기자들과 공보수석실에 근무했던 참모들은 ‘청춘회(청와대+춘추관)’라는 모임을 만들어 지금도 한 달에 한 번꼴로 만남을 지속하고 있다.

    반론보도문

    본지는 지난 5월호 151~158면 ‘출입기자가 본 ‘노무현號 청와대 홍보실’’ 제하의 기사에서 ‘노무현 청와대’의 홍보수석을 지낸 한 인사가 사석에서 “내가 움직이면 100만표가 되고, 노무현 후보쪽이 이길 것 같아서 왔다”고 말했다고 보도하였으나,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당사자들은 그런 말을 한 사실이 없었다고 밝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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