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호

땀과 고민 없는 급조 대선 공약의 실상

  • 이종훈│시사평론가 rheehoon@naver.com

    입력2012-11-21 10: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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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NLL 띄우다 장밋빛 대북공약 - 경제민주화 오락가락 속내 뭘까
    • 문재인 4대강 土木이라 욕하더니 제주해저터널? 무난한 공약 일색
    • 안철수 靑이전-의원 등 ‘축소 시리즈’ 뜬구름 잡는 허경영式 공약인가
    땀과 고민 없는 급조 대선 공약의 실상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11월 5일 외교통일안보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2012년 11월 11일 오전 11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가 정책공약 발표에 나섰다. 먼저 문 후보가 ‘다섯 개의 문, 단 하나의 문, 5대 문’이라는 주제로 지금까지 내놓은 정책을 종합해서 발표했다. 안 후보는 7개 비전과 25개 정책과제 그리고 171개 정책약속과 850개 실천과제를 포함한 정책공약을 내놓았다. 12월 19일 대선 투표일을 38일, 11월 26일 대선 후보 등록 마감일을 15일 앞둔 시점이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아직 종합 정책공약을 발표하지 않았다. 여전히 논의 중이거나 확정이 미루어진 까닭이다.

    종합 정책공약을 발표한 두 후보는 이번 발표가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추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더욱이 그날 안 후보는 문 후보에게 기존에 진행 중이던 새정치공동선언 협상에 이어 경제개혁 공동선언과 안보평화 공동선언 협상을 추가하자고 제안했고 문 후보는 이것을 받아들였다. 모든 정책공약을 협의해서 하나로 만들자는 생각이다. 결국 후보 단일화 이후에나 최종판 정책공약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선수들이 뭘 하겠다는 건지…

    유권자는 답답하다. 선수 명단 확정도 더딘 데다가 그나마 확정된 선수들조차 뭘 하겠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정책공약은 차기 정부의 국정운영 청사진이다. 자신이 대통령이 된다면 어떻게 국정을 운영할 것인지 국민에게 빨리 내놓고 성적표를 받아야 하지만 그들은 성적표 받기를 두려워하거나 평가를 받을 준비조차 안 되어 있는 형국이다. 대선 투표일을 불과 한 달 앞둔 시점인데도 차기 정부의 청사진을 제대로 알 수 없는 현실! 국민을 우습게 아는 모독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좋다.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야 더 기다려줄 수 있다. 제대로 된 청사진만 만들어준다면.

    그런데 이것이 문제다. 이미 공개한 정책공약 곳곳에서 허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먼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대표적인 차기 정부 대표 비전으로 선언했던 경제민주화 관련 공약을 놓고 내홍을 겪었다. 대기업의 기존 순환출자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핵심이다. 박근혜 후보 국민행복추진위원회는 이미 기존 순환출자에 대해 의결권을 제한하는 공약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진다. 새누리당 경제민주화실천모임 소속 국회의원들은 아예 같은 내용을 담은 법안을 지난 8월에 국회에 제출해놓은 상황이다.



    박근혜 후보는 11월 8일 경제5단체장과 만난 자리에서 “기존 순환출자 부분에 대해서는 기업 자율에 맡기는 게 적절하고 앞으로는 순환출자를 하지 않게 하는 게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말했다. 이후 경제민주화의 전도사로 알려진 김종인 위원장과 갈등을 빚었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진정성이 정말 있는지 의심받고 있다. 경제민주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온다.

    개헌 공약도 이랬다저랬다

    박 후보는 11월 5일 외교안보통일 분야 공약을 발표했다. 남북교류협력사무소 설치, 국가안보실 설치, 북한 지도자와의 만남이 핵심이다. 불과 열흘 전인 10월 24일 박근혜 후보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서해북방한계선(NLL)에 대한 비공개 대화록이 존재한다는 의혹과 관련해, “이 문제는 노무현 정권에서 책임졌던 사람들이 명확히 밝히면 되는데 의구심만 증폭시키고 있다”며 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겨냥한 발언을 내놓았다.

    NLL 문제를 제기해서 북한 당국을 격앙시킨 뒤에 내놓은 장밋빛 대북공약은 그래서 빛을 잃었다. 북한 당국은 지난 9일 “박근혜의 외교안보통일정책 공약이라는 것은 이명박 역도의 대북정책보다 더 위험천만한 불씨를 배태하고 있는 전면대결 공약, 전쟁 공약”이라고 반발했다. 북한의 이런 반응이 선거에 도움이 된다고 박 후보 캠프 쪽에서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권자들로서는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박 후보는 11월 6일에 정치쇄신 공약도 내놓았다. 야권 후보자들이 새정치공동선언을 하려는 데 대한 맞대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개헌 방안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당내 일각의 제안에 대해 캠프가 거의 공개적으로 부인으로 일관하다가 막판에 포함시키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개헌을 하겠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진정성을 의심받고 있다. 잘 포장된 공약, 하지만 실천의지가 없어 보이는 공약은 ‘헛 공약’일 뿐이다.

    안철수 후보가 11월 11일에 발표한 정책공약집 ‘안철수의 약속’의 ‘비전Ⅰ. 문제가 아니라 답을 주는 정치’ 편은 아예 비어 있다. 다만 이렇게 쓰여 있다. ‘새정치공동선언에 의해 결정.’ 새정치공동선언 협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발표했기 때문에 제외했다는 설명이다. 답을 주는 정치라고 해놓고 정작 내용을 비워두다니. 대선 공약이 점점 코미디로 흐르는 느낌이다. 안 후보는 출마선언을 하면서 ‘정치혁신’을 미션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일련의 주목받을 만한(?) 정치공약을 제시했다.

    안철수는 허경영 닮아간다

    청와대 이전, 청와대가 임명하는 자리의 10분의 1 이하 축소, 국회의원 정수 축소, 중앙당 폐지 또는 축소, 정당 국고보조금 축소, 최근의 선거비용 절반 축소가 그것이다. 이른바 ‘축소 시리즈’는 그러나 여기저기 결함을 드러낸다. 청와대 임명 자리를 축소하면 부처 관료의 권한이 비대해지고 국회의원 정원을 축소하면 행정부 권한이 너무 커진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심지어는 단일화 파트너인 문재인 후보 측에서도 “그건 아니다”라는 반응을 보인다. 문제의 핵심은 안 후보 측이 이러한 반론에 대해 적절한 재반론을 내놓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별 심사숙고 없이 후보 취향에 맞춰 급조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 커지고 있다.

    땀과 고민 없는 급조 대선 공약의 실상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가 11월 11일 ‘다섯 개의 문’공약을 밝히고 있다.

    축소 시리즈는 대선 판에서도 전혀 쟁점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안철수 후보는 정치개혁을 모토로 내걸고 있는데 그 정치개혁의 실질적 내용이라는 게 다소 황당한 ‘축소 시리즈’외에는 별 게 없다는 말이 된다.

    안철수 후보의 정치공약 가운데 가장 문제가 많은 공약은 청와대 이전일 것이다. 벌써 세간의 관심으로부터 잊혔지만 세종시 관련 주식까지 반짝 끌어올리기도 했던 이 공약은 청와대를 국민에게 가까운 곳으로 옮기되 새로운 장소는 국민여론을 수렴해 결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옮기려 한다. 하지만 어디로 옮길지는 지금 말 못한다’는 논리다. 역대 대선에서 몇몇 군소 후보가 제기해온 ‘각론 없는 뜬구름 잡는 공약’과 다름없는 수준이다. 심지어 허경영 후보도 ‘유엔본부 비무장지대 이전’ 공약을 내놓을 때 이전될 장소 정도는 밝혔다.

    안 후보가 장소는 언급하지 않은 채 청와대 이전 문제를 언급한 데에는 여러 가지 노림수가 있을 것이다. 세종시가 포함된 충청권 민심을 얻고자 했을 것이다. 다른 지역도 관심을 가질 만한 사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캠프 내부에서는 ‘꽃놀이패’라고 자화자찬했을지 모른다.

    따지고 보면 안철수의 정치 분야 공약 중 눈에 띄는 공약 대부분이 이러한 종류다. 현실성은 떨어지지만 환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들이다. 안철수의 약속이 이뤄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하지만 철저한 검증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준비 부족을 시선 끌기로 돌파해나가고 있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유권자 ‘확’ 깨게 만들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신행정수도 이전 공약이나 이명박 대통령의 대운하 공약도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공약이었다. 그러나 청와대 이전은 신행정수도나 대운하만큼 거대 이슈가 아니기 때문에 그만큼의 환상을 불러오지는 못한다. 득표 전략으로도 파괴력이 낮다는 것이다. 더욱이 현실성은 더 떨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유권자의 생각을 ‘확’ 깨게 만든 공약이라고 할 수 있다. 안 후보에게는 이런 조언을 해주고 싶다. ‘어차피 비현실적으로 나갈 거면 차라리 더 환상적인 거대 공약을 제시하라! 그러면 오히려 길이 열릴 지도 모른다.’

    안 후보가 심혈을 기울인 비정치 분야 공약은 어떨까? 최근 진보진영에서는 단연 안 후보의 정책공약이 화제인데, 뜻밖에도 “구체성이 떨어지고 재원조달 계획은 아예 없다”는 볼멘소리만 들린다. 기업인 출신답게 제대로 된 상품을 만들어서 제시해주기를 기대했지만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일 것이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밀실 개혁’이다. ‘88만 원 세대’저자인 우석훈 박사는 안 캠프에 대해 “교수와 변호사끼리의 밀실 개혁은 불가능”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안 후보의 정책공약이 내용 면에서 보수와 진보, 냉탕과 온탕을 넘나들기도 한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대기업의 순환출자 문제와 관련해 신규 순환출자를 우선 금지하고 기존 순환출자의 경우에는 3년 내 해소를 조건으로 만약에 해소하지 않을 경우에는 해당 출자분에 대해 의결권을 제한하겠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반면에 안 후보는 기존 순환출자에 대한 처분 명령 여부는 재벌의 시정 노력에 따라 단계적으로 추진하겠다고 제안했다. 이것은 안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안철수 후보가 놓치고 있는 또 다른 점은 국민이 기대하는 바를 정치 분야로 한정시키고 있는 점이다. 안 후보는 세 후보 가운데 유일한 경제 분야 전문가다. 그런데 정작 경제 분야 공약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없다. ‘혁신경제’라는 구호를 내걸었지만 어떤 경제를 하려 하는 것인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새로운 경제 질서에 대한 비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추가적인 성장을 이끌어낼 미래 산업, 특히 탈(脫) 추격(Post catch-up) 이후의 넥스트 비즈니스(Next business)에 대한 제안도 없다. 중화학 공업이 아닌 무엇, IT가 아닌 무엇, 특히 토목이 아닌 무엇 말이다. 안철수라면 뭔가 획기적인 것을 내놓을 것이라고 국민은 기대했는데 안 후보는 아직 그 기대를 충족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안 후보가 문 후보와 경제복지 분야와 통일안보 분야 공동선언 협상을 진행한다고 하니 유권자들은 결국 안 후보가 민주당에 묻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인식하고 있다.

    눈길 끈다 싶더니…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불행하다. 국민은 박근혜 후보에게서 아버지 시절의 강한 리더십을 떠올린다. 자연히 고도성장에 대한 기대감을 갖는다. 안철수 후보에게는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유의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어떤 것을 바란다. 그러나 문 후보에게는 특별히 기대할 만한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문 후보의 정책공약은 과거 민주당이 해온 바의 연장선에서 무난하게 만든 모양새다. 특별히 지적할 점도 없지만 딱히 와 닿는 것도 없다. 문 후보의 공약은 문 후보의 아바타인 양 밋밋하고 싱겁다. 가장 큰 문제는 국민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기 어렵다는 점이다. 정치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비전의 제시와 이를 이뤄내는 실천력이라고 할 때 문 후보는 현재까지 비전 제시 능력에서 한계를 보이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문 후보는 눈길을 끌 만한 공약을 내놓았다. 제주 해저터널 건설이 그것이다. 11월 7일 민주당은 ‘광주·전남 발전을 위한 문재인 후보와 민주당의 약속’16개 항을 제시했는데 이 가운데 전남 발전 공약 가운데 하나로 목포∼제주 간 해저터널 건설을 내놓았다. 그러나 제주발전연구원이 환경 훼손 우려가 있는데다 사업 타당성도 낮은 만큼 제주 신공항 건설 이후 장기과제로 논의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내놓은 것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실현 가능성에 대한 회의론까지 제기되자 문 후보는 황급히 말을 바꿨다. 제주 신공항 건설이 우선이고 해저터널은 장기 과제라고 한 것이다. 이후 제주지역에선 문 후보 말 바꾸기 논란이 확산되는 분위기다.

    진보정당 공약 베끼기?

    땀과 고민 없는 급조 대선 공약의 실상

    무소속 안철수 후보가 11월 11일 ‘안철수의 약속’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문 후보가 접은 공약 중에는 무상의료 공약도 있다. 무상의료는 민주당이 4·11 총선 당시에 내건 무상 시리즈의 완결판이다. 하지만 엄청난 재정 부담에 더해 보험료 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자 결국 문 후보는 이를 의료비 상한제 도입 공약으로 대체했다. 환자의 본인 부담이 연 100만 원을 넘어가면 초과분은 건강보험이 부담하도록 하는 방안이다. 그런데 같은 날 진보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입원 본인부담금 50만 원 상한제와 연간 의료비 100만 원 상한제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문재인의 의료비 상한제 도입은 진보정당의 공약을 차용한 것으로 봐야 한다.

    문 후보가 내건 공약 중에서 그나마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통일 분야 공약이다. 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추진위원장을 담당했기 때문에 더 그랬다. 김대중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로 이어진 교류협력을 잘 알고 그 전통을 이어서 경직된 남북한 관계를 풀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세 후보 모두 북한의 김정은을 만나겠다고 밝히고 있고 교류협력을 약속하는 상황에서, 분명 이 분야에선 문 후보가 가장 앞서 있다고 봐야 한다. 새누리당 측이 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비밀대화록을 거론하며 문 후보의 NLL 수호 의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도 실은 이런 그의 강점을 겨냥한 공세였다.

    그러나 문 후보는 오히려 이 분야에서 수세적이다. 이 분야로 다른 후보와 차별화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좌파로 몰려 지지세력 확장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이 역시 역발상의 묘미를 모르는 모범생 문재인의 한계가 아닐까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같았으면 어땠을까?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분명히 승부수를 던졌을 것이다. 문재인의 무난함은 이렇게 통일 분야 공약에서도 그대로 묻어난다. 특별히 내세울 만한 간판이 없다.

    문재인 후보 측은 대신 일자리 분야 공약에서 승부수를 던졌다고 말한다. 그런데 관전자들이 보기엔 일자리 공약도 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일자리 공약의 핵심은 ‘만-나-바’다. 일자리를 만들고, 나누고, 좋은 일자리로 바꾸자는 것이다.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와 청년일자리 특별위원회를 설치해서 고용률을 70%로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다. 문 후보는 특히 노동시간을 연평균 2000시간으로 단축해 일자리를 나누겠다고 제시했다. 일자리 나누기 정책이 본래 민주당이 오랫동안 주장해온 대안이긴 하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써먹은 뒤라서 신선도가 떨어지는 것이 문제다.

    대충 만들고…땀 냄새 안 느껴져

    이번 대선과 과거 대선을 비교할 때 정책공약의 측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거대 공약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 사례는 거대 공약이 단기간에 급조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명박 후보의 한반도 대운하 건설 공약은 그가 서울시장재임 중이던 2005년부터 본격 준비된 것이다. 이때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 대운하 타당성 검토 연구 용역을 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 문제가 됐고 2007년 한나라당 경선은 물론 대선 본선에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2002년 16대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가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내건 시점은 9월이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지방분권에 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는 1993년이었다. 그해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설립한 뒤 10년 넘게 연구해온 결과물로서 행정수도 이전 공약이 탄생한 셈이다. 이 연구소에 초기부터 참여한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에 따르면 행정수도 이전은 노 전 대통령의 평생 주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8대 대선의 세 후보 공약을 보건대 누구도 이 대통령이나 노 전 대통령처럼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다. 투표일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음에도 눈길을 끌 만한 공약, 치열한 논쟁을 벌일 만한 공약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준비된 대통령 후보, 뭔가를 준비해온 대통령후보가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의 공약집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땀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다.

    대통령후보에게 가장 중요한 요건 가운데 하나는 ‘권력의지’라고 한다. 권력의지? 참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이전에 왜 내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 대통령이 되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에 대해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 잘 포장된 출마동기 말고 향기 물씬 풍기는 생화 같은 진짜 출마동기 말이다.

    제대로 된 공약이 사라진 대선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잘 만들어진 국정운영 계획이다. 야권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공동선언을 만드는 것에 일부 국민이 관심을 두는 것도 실은 이 때문이다. 그들이 내놓을 대안을 살펴본 다음 정권교체 여부를 결정하려는 국민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런 국민에게 겨우 항목만 나열한 몇 쪽짜리 선언문만 내보인다면 아마 실망감이 클 것이다.

    대선의 참담함, 준비된 후보 없다!

    후보 단일화에 나선 문 후보와 안 후보가 가치연대로 국민이 바라는 방향과 수준의 국정운영 계획을 내놓는다면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 반대로 방향도 뒤죽박죽에 수준까지 미약하다면, 국민은 불가피하게 ‘안정’을 택할 수밖에 없다.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 캠프는 단일화에 대해 정치적 야합이자 후보사퇴 협상이라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 후보 측에 정치쇄신추진실무협의를 하자면서 그 판에 끼어들려고 애쓰는 모습이다. 또 연일 분야별 정책공약을 발표한다. 두 후보보다 훨씬 전에 후보로 확정되었지만 캠프 구성도 늦어졌을 뿐만 아니라 정책공약도 여전히 종합판을 내보이지 못하는 상황. 여당이라는 사실이 무색하다.

    땀과 고민 없는 급조 대선 공약의 실상
    이종훈

    1959년 경남 출생

    성균관대 정치학 박사

    국회도서관 연구관

    前 CBS 라디오 ‘이종훈의 뉴스쇼’ 진행자

    現 아이지엠컨설팅(주) 대표

    저서 : ‘정치가 즐거워지면 코끼리도 춤을 춘다’ ‘사내정치의 기술’


    더욱이 ‘가치’를 보여주는 데에도 서투르다. 얼마 전 새누리당은 선진통일당과 합당했다. 사실상 흡수라고는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가치연대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2008년 선진통일당의 전신인 자유선진당이 창조한국당과 공동으로 국회교섭단체를 구성할 당시 심대평 대표가 한 말이 떠오른다. “독일 사민당과 녹색당이 1998년과 2002년 연정을 할 때 합의문이 무려 130페이지에 달했는데 우리는 A4용지 한 장이 전부였다.” 이번 새누리당과 선진통일당의 합당엔 정책합의문을 포함해 달랑 2장이었다.

    야권 후보는 단일화를 할 거면 빨리 해 최종적인 단일 공약을 내놓아야 한다. 여권 후보도 빨리 종합판 정책 공약집을 공개하고 검증을 받아야 할 것이다. 기본적인 알권리도 외면하는 현실에 좌절하게 되는 그런 묘한 대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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