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이 배가 아파서 병원을 찾았다고 치자. 의사와 마주 앉아서 증상을 설명하려는 데 갑자기 당혹감이 몰려든다. 배가 콕콕 쑤시듯 아픈지, 묵지근하게 아픈지, 더부룩하게 불편한지, 도대체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까…. 어렵사리 증상을 설명한 뒤에도 당혹감은 여전하다. “별이상은 없는 듯하지만 혹시 모르니 CT촬영 한번 해보자”는 의사의 설명이 영 마땅치 않다. 괜찮다는 건지, 심각하지만 안심시키려는 건지 도무지 오리무중. 당신에겐 이런 경험이 없는가. 이 글은 ‘휴먼 커뮤니케이션(human communication)’의 시각에서 의사-환자간 의사소통 과정에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점을 살펴보고 해결방안을 모색해보고자 시도된 연구의 요약이다. 필자는 다수의 의사와 환자들을 직접 면담해서 의사가 환자에게, 환자가 의사에게 느끼는 의사소통상의 문제점을 치밀하게 분석했다. <편집자>
의사-환자간 의사소통은 환자의 증상 설명과 의사의 진단행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환자는 자신의 상태를 ‘말’로 설명하고, 의사는 이를 바탕으로 환자의 병을 ‘추론’하게 된다. 따라서 의사는 진단에 필요한 자세한 증상 정보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상태를 가장 잘 아는 환자의 설명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환자들 대부분은 자신이 느끼는 신체적 상태를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증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보다는 무작정 고통을 호소하거나 의사의 질문에 답변하는 식으로 일관하게 된다. 특히 우리 사회에 잠재하는 의사(전문직)에 대한 경외감이나 두려움은 ‘의사-환자’간의 효율적인 의견 교환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1999년 미국 의대협회(AAMC)가 실시한 전국조사에 따르면 환자 중 27%만이 의사를 선택하는 데에 출신대학을 감안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85%는 의사의 ‘의사소통 능력’과 환자를 다루는 ‘태도’를 고려하고, 77%는 복잡한 의료절차를 ‘설명해주는 능력’을 보고 의사를 선택한다고 답했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시각에서 보면, 환자-의사의 접촉 형식은 ‘따뜻한 가슴’(warm heart, emotion)과 ‘차가운 이성’(cool head, logic)의 만남이다. 따라서 이런 서로 다른 역할과 기능으로 인해 의사-환자간 의사소통은 ‘숙명적으로’ 어려운 관계에서 출발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의사-환자간 의사소통은 상호행위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철저한 신뢰와 정확성이 요구되는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상황이다. 의사-환자간 의사소통 문제 때문에 발생하는 모호함이나 오해는 곧 오진(誤診)과 직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이 잘 통해야 진료효과도 높다
미국에서는 1998년부터 절반이 넘는 병원들이 외국어 통역 무료 서비스를 실시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즉 영어를 못 해도 미국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한국어를 포함해서 세계 140개 언어를 영어로 옮겨주는 통역전화 덕분에 외국인 환자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의사나 간호사들도 환자와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져 치료 효과가 높아졌다고 말한다. 하버드 의대의 로버트 에버트 학장은 “의사와 환자간의 대화는 곧바로 생명과 직결되므로 이런 서비스는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국내 학계에서는 그 동안 의사-환자간 의사소통이 매우 소홀하게 다뤄져왔다. 실제로 국내 사회과학 분야의 학술논문집 인덱스를 탐색해보면 이 주제와 관련된 논문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국내 의학저널이 다루는 주제도 임상적 진단과 치료법에 관한 연구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1951년에 이미 사회과학자 파슨스(Talcott Parsons)가 의사-환자간 커뮤니케이션 연구를 시작해 의사-환자의 관계를 역할 중심의 사회 기능주의적 관점에서 이론화한 논문을 썼다. 그는 환자의 병을 사회적 역할에서 제외되는 ‘이상(deviance)’ 상태로 규정하고 사회의 정상적 역할로 다시 복귀하는 전환과정을 ‘환자의 역할’로, 이런 전환과정을 통제하고 유도하는 것을 ‘의사의 역할’로 규정했다. 파슨스는 이러한 ‘의사 역할’에 대해 사회적으로 허락받은 것이 ‘사회적 성직(聖職)’으로서 의사직의 자율(autonomy)과 권위(authority)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파슨스의 기능주의적 관점에서 시작돼, 지난 20여 년간 미국에서 진행된 의사-환자간 의사소통 연구는 대개 두 갈래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의사와 의학교육자들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의사소통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운동이다. 이들은 환자로 하여금 ‘병력’이나 ‘걱정’을 말하도록 유도하는 기술, 환자의 상태나 치료의 필요성을 알리는 기술이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에 순응하게 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따라서 마이맨(Maiman)과 베커(Becker)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이 의사의 의사소통 기술 및 상담능력을 증진시키는 방법을 연구해왔다.
특히 콜맨(Coleman)은 전문적인 의학지식을 갖고 있는 의사와 환자간의 관계를 ‘권력(power)’이라는 변인이 작용하는 사회적 상호작용으로 보고, 의사-환자간 일어나는 의사소통의 많은 문제가 권력에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의사들은 의학지식을 갖고 있는 집단일 뿐 꼭 의사소통 능력을 갖춘 집단은 아니라는 사실을 환자들이 상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하버드 의대에서는 1학년 학생에게 중병 환자들을 맡겨서 여러 차례 방문하도록 하여 환자 및 가족과 유대를 강화하는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담당 학생들은 환자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가족과 슬픔을 함께 나누도록 권장받는다. “함께 슬퍼할 줄 아는 것은 의사의 한 덕목”이라고 이 대학의 정신과 부교수인 수전 블록 박사는 말했다. 예일대학에서는 의대 신입생들에게 일명 ‘연민의 망토’를 입힌 다음, 의식을 치르면서 ‘인간관계 행동강령’을 암송케 한다. 뉴멕시코 대학에서는 소아과 수업을 받는 2년차 학생들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의대에서는 학생들을 토론회에 참석시켜 진실·사려·용서·죄·수치심·기도·비극을 알게 하고, 진료인의 능력의 한계 등에 대해 토론하게 한다. 캔자스대학에서는 의대생들에게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게 한다. 그 밖의 대학에서도 의대생들은 병실 방문이나, 자기 안경에 바셀린을 발라 백내장의 느낌을 경험해보는 등 환자 체험을 시킨다.
이런 모든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의사-환자 관계의 핵심인 의사소통, 즉 이심전심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환자의 관심은 담당 의사가 어느 대학을 나오고, 얼마 동안 의료행위를 했느냐보다는 자기들의 고통에 얼마나 귀기울여주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의료 소비주의’의 등장으로 의사-환자 관계를 ‘서비스 제공자-서비스 사용자’, 즉 계약적·대립적 관계로 접근하는 경향이다. 스미스(Smith)와 호프(Hoppe)에 따르면, 이런 경향은 고등교육 인구의 증가가 의학적 권위에 대한 도전을 촉진시켰으며, 의사에 대한 경외감과 존경심에서 나오는 ‘신성한 믿음’을 허물고 ‘서비스 제공자’로 대우하려는 환경을 만들었다.
특히, 의료 소비주의 시각의 연구들은 미국 환자들이 인식하고 있는 의사들의 냉담성·권위·경제적 욕망 등을 지적하고 있다. 몇몇 연구자들은 미국사회에서 의사의 이미지는 ‘희생적 의료행위의 영웅상’이라 분석하고, 의학교육 및 전문의 과정이 오히려 의사들을 ‘인본주의적 환자 돌보기’에 역행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레이(Gray)는 자신의 연구에서 약 25%의 의사가 환자의 증상에 대해서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고 밝히면서, 가정의 의사들은 진찰시간으로 불과 50초 정도를 사용한다고 보고했다.
1995년 플랫(Platt)은 그의 저서인 ‘대화치료: 의사-환자간 커뮤니케이션 사례연구’에서, 수많은 의사-환자간 의사소통 사례분석 결과 의사소통 형태에 따라 치료 결과도 다르게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료행위에 대한 환자의 만족도가 높을수록, 정신신체적(psychosomatic) 증상들이 완화되고, 치료행위에 대한 순응도가 높아져 결과적으로 더 효과적인 치료결과를 얻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환자의 만족도’를 구성하는 주요 요인으로 의사-환자간 의사소통을 강조하고 있으며, 특히 의사-환자간 대화에서 환자의 만족도가 높을수록 의사에 대한 환자의 신뢰가 높게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의료문화가 다른 한국사회에서 이런 외국의 연구결과를 그대로 벤치마킹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의사-환자간 의사소통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문제에서 예외일 수도 없다. 이 글에 소개한 다양한 의사-환자간 의사소통 문제와 해결방안은 바로 한국적 의료문화 속에서 연구된 결과이며, 의사와 환자 집단 모두에게 의사소통의 지침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의사-환자간 의사소통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의사소통의 당사자인 의사와 환자 개인에 의해 통제 가능한 요인(예절, 친절, 신뢰, 화법 등)이며, 다른 하나는 통제 불가능한 요인(의료제도, 병원행정, 시설 및 장비, 사회구조 등)이다. 여기서는 전자에 중점을 두고, 의사-환자간 의사소통 문제의 유형을 정리했다.
의사에게서 나타나는 의사소통의 문제점들
(1) ‘웜 하트(warm heart)’와의 의미적 갈등
여기서 ‘웜 하트’란 이성보다는 감정을 앞세우는 환자의 의사소통 스타일을 지칭한다. 의사를 찾아온 환자는 무엇보다 자신의 신체적 고통을 호소하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의사의 ‘사회적 행위모델’은 응석을 받아주는 어머니처럼 ‘따뜻한 마음’의 실천이 아니다. 오히려 의사는 가급적 감정을 지양하고 의학 지식을 수행하는 ‘쿨 헤드(cool head)’의 역할을 담당한다. 다음 대화 사례를 보면, 이러한 현상이 잘 나타난다
환자 어젯밤에는 얼마나 통증이 심한지 (배를 잡으며) 죽는 줄 알았어요. 밤새 잠을 하나도 못 자고 새벽에야 겨우 잠들었는데…. 십이지장 궤양이 암으로 될 수도 있나요?
의사 근데, 언제부터 이런 증상이 있었고, 십이지장 궤양인 줄은 어떻게 아셨어요(차트를 보면서)? 아주머니.
환자 (명치 부위를 잡고) 아, 여기를 짚으면 싹싹 쓰리고, 신물이 넘어오니 십이지장 궤양이지. 우리 동서도 나하고 증상이 똑같은데(큰소리로), 내시경 검사하고 오더니 십이지장 궤양이라고 그러대요.
이를 수사학적으로 표현하면, 파토스(pathos, emotion)와 로고스(logos, reason)의 대립적 양태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의사소통 당사자간에 ‘가치의 준거틀’이 다르기 때문에 의사소통에서 ‘의미적 갈등(semantic conflict)’이 예견되는 난해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2) 권위적 행위 및 어투
의사는 전문지식을 통해서 사회적 지위를 부여받지만, 이러한 지위가 ‘권위’로 바뀌면서 환자와의 의사소통에서 지배-복종 관계로 변형되어 나타나는 상황이 있다. 환자가 인사를 했을 때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경우,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환자에게도 반말과 존대어를 섞어 쓰거나 반말로 일관하는 게 대표적인 예다.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오면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해도 이에 응답하는 의사가 많지 않으며, 대개 곧바로 “어떻게 오셨나요?” “어디가 불편한가요?” “어디 볼까요” 등으로 반응한다. 환자 쪽에서 보면 이러한 행위는 환자에 대한 무시와 모욕을 의미하지만, 막상 의사의 의학지식과 경험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만 불만과 거부감을 간직하게 된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의사의 권위적 행위와 어투 문제는 환자와 의사를 소통하는 과정에 ‘기형적 관계’로 왜곡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지배 대 피지배’ ‘명령 대 복종’ ‘전문가(유식) 대 비전문가(무식)’ 등의 대립적 형태다. 그 결과 의사는 환자에게 권위자로 군림하는 대립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초래하는 의사소통 문제로 불친절·설명부족·치료-선택권 미제시·반말·전문어 남용 등을 들 수 있다. 한 환자는 의사와의 면담을 이렇게 설명했다.
“의사는 안락의자에 앉아서 작은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청문회 증인이라도 신문하듯이 반말 반, 존대말 반으로 물어보는데, 내가 돈 내면서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3) 경청
의사소통은 참여자가 발화자(發話者)와 청자(聽者)의 역을 교대로 수행해야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일만큼 상대방 이야기를 듣는 일도 중요하다. 특히, 환자의 설명으로부터 정보를 얻어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의사에게는 환자가 한 말은 물론이고 말하지 않은 것까지 들을 수 있는 경청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조사 결과 의사에게는 청자에게 필요한 인내심이 매우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대화 자료에 따르면, 의사가 환자의 진술을 막는 경우가 많으며, 의사 자신이 질문한 내용에 대한 답변도 끝까지 듣지 않는 사례도 많았고, 문진에 대해 “예” “아니오”식의 응답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았다. 환자의 진술을 중지시키는 대화도구로는 “됐습니다” “알았어요” “그만, 알겠습니다” 등이 있었다. 또, 의사는 환자로 하여금 진술을 빨리 정리하도록 유인하기 위해서 다양한 준언어적(paralinguistic)·비언어적(nonverbal) 기호를 사용하는 것도 관찰됐다. 전자의 사례로는 “으음∼” “네∼ 네” 헛기침 및 잔기침 등이 있으며, 갑자기 시선을 돌려 다른 장소나 간호사를 응시하거나, 필기하던 펜을 멈추고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고, 진찰도구나 안경 등 주변 소품을 만지는 행위 등이 후자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대인 커뮤니케이션에서 표현의 문제는 발화자가 상대편의 언어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메시지를 작성할 때에 자주 발생한다. 인터뷰에 응한 많은 환자들은 “진료실을 나올 때까지도 의사가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답하고 있다.
의사가 환자에게서 협조를 얻으려면 우선 설명을 잘 해줘야 하는데, 상당수 의사들은 갖가지 이유에서 ‘환자의 언어(일상적인 언어)’로 쉽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환자의 수준에 맞게 설명하려고 애쓰는 몇몇 의사도 환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먼저 의학용어를 말하고, 그 뜻을 대략적으로 설명하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쥐가 나는 것은 근육경련 현상인데, 지나친 운동이나 탈수, 유산축적, 국소순환 장애, 근섬유의 부분 파열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운동을 갑자기 무리하게 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와 같은 식이다.
의사가 환자에게 해주는 설명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또 다른 문제는 정보과잉 현상이다. 환자의 제한된 의학지식, 신체적 불편함, 병에 대한 걱정, 의사에 대한 두려움, 시간적 압박 등은 환자의 정보처리 능력을 최소화시킨다. 이런 상황에 환자에게 진단 결과나 처방에 대해 너무 많은 정보나 전문용어가 뒤섞인, 복잡한 설명을 해주면 오히려 정보 과부하 현상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러면 환자는 쉽게 ‘정보의 처리’를 포기하거나 수신을 거부하게 된다. 따라서 듣고 있되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며, 의례적인 피드백으로 고개만 끄덕이는 현상이 목격된다.
환자는 전문용어의 나열이나 정보과잉에도 당황하게 되지만, 이보다 더욱 당황스러운 상황은 의사의 설명이 모호하거나 모순적일 때다. “심각한 이상은 없지만 만일을 위해서 CT 촬영을 한번 해봅시다”라고 의사가 말했다면, 환자는 의사의 말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또한 의학적 판단이 항상 명확할 수는 없지만 “이런 것이 원인일 수도 있고, 저런 것이 원인일 수도 있다” “더 악화될 수도 있고, 쉽게 나을 수도 있다” “환자에 따라 다르다”는 식의 모호한 언술은 환자가 이해하기 힘든 메시지가 된다.
(5) 임상검사에 대한 설명부족
문진 과정에 대체로 동반하는 것이 이학적 검사나 임상검사다. 의사가 환자의 신체 일부분을 직접 검진하거나 다른 의사 또는 담당자에게 세부적인 검사를 받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환자는 대체로 극도로 불안하고 초조한 상태로 접어들게 된다. 어디에 가서 어떤 검사를 받게 되며, 왜 그런 검사를 받아야 하는지 궁금증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많은 의사들은 상황이 이런데도 환자에게 적합한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특히 환자는 의사의 처방이나 임상검사 지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다양한 질문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검사가 오래 걸리나요?” “아까 여기(아랫배)를 누르실 때 매우 아팠는데, 심각한 건 아닌가요?” “피검사를 받으면 정확히 알 수 있습니까?” “소변검사도 여기서 받나요?”
(6) 환자의 질문에 대한 피드백 부족
환자의 질문에 대하여 의사의 반응이 없을 때, 환자는 이를 자신에 대한 무시 또는 불친절과 연관시킬 수 있다. 많은 환자들은 병원을 찾을 때 자신의 증상이 혹시 중병은 아닐까 하고 걱정한다. 특히 병원을 기피하는 한국적 문화 속에서 가벼운 증상으로는 쉽사리 병원을 찾지 않기 때문에, 병원을 찾아온 많은 환자들은 자신의 의료지식 내에서 ‘병’을 추정하고, 의사를 통해서 다양한 의문을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대화자료를 살펴보면, 환자의 질문은 경시되거나 응답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 자주 나타난다. 환자의 언행에 대해 많은 의사가 무감각한 표정(비언어적 기호의 부재)이나 침묵(언어적 및 준언어적 기호의 부재)으로 대응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 보는 환자들은 의사가 자신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고 판단할 것이다.
(7) 접촉시간의 부족
시간은 효과적인 대인 커뮤니케이션에 주요 변수다. 시간의 제약 속에서 표현은 함축되고, 그만큼 의미전달도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또 의사소통의 참여자가 시간의 압박을 받으면 불안감과 초조감에 시달리게 되고, 따라서 의사소통의 목표와 의지가 떨어지게 된다. 국내에서도 이러한 시간의 문제가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떤 일이건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고 힘들지만, 몸이 불편한 환자가 의사 면담을 기다리는 시간은 특히 그렇다.
반면, 의사를 만나서 진료받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너무 짧다. 의사 쪽에서 보면 이런 시간적 제약은 환자와의 의사소통에서 원천적인 한계를 의미한다. 이는 환자에게도 마찬가지여서, 한 환자는 “의사가 시간이 없는 것 같아 내가 꼭 물어보려고 했던 문제를 막상 의사 앞에서는 꺼낼 엄두도 못 냈다”고 고백한다. 의사-환자 커뮤니케이션에서 시간의 제약은 의사와 환자 공히 의사소통의 의지를 낮추며, 이는 결국 의사소통의 기대치를 낮추게 돼 부정확한 의사소통을 초래한다.
(1) ‘쿨 헤드(cool head)’와의 갈등
‘쿨 헤드’란 감정을 배제한 차갑고 논리중심적인 의사의 의사소통 스타일을 의미한다. 이러한 쿨 헤드, 즉 의사가 말하는 환자(웜 하트)들의 문제는 신체적 불편과 고통에 대한 감정적 호소에 편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환자가 자신의 증상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어휘는 교육수준이나 생활환경에 따라 다르다. 특히 증상에 대한 감정적 표현에는 주관적인 요소가 많아서, 동일한 증상에 대해서도 “쑤신다” “잘근잘근 저리다” “꾹꾹 찌르는 것 같다”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 등 모호한 표현이 많다.
언제부터 불편함을 느꼈는지, 과거에도 그런 문제가 있었는지, 원인이 될 만한 주변사항이 있는지 등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이 부족하며, 불편이나 고통을 호소하는 과정에도 신체부위별 고통이나 주요 증상에 대한 우선순위가 없이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대다수 환자가 간과하는 중요한 사실은, 의사가 환자를 돕는 데 필요한 정보는 감정적 호소가 아니라 증상에 대한 사실적이고 체계적인 설명이라는 점이다.
(2) 표현 의지의 부족
많은 의사가 대화하기에 어려운 환자로, 말수가 적거나 표현이 분명하지 않은 환자를 꼽는다. 이런 환자 대다수가 자신의 상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하다 보니까 의사가 부지런히 물어봐도 얻는 정보는 빈약할 수밖에 없다.
자기 상태를 세밀하게 말하지 않아도 의사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는 구태여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필자와의 인터뷰에 응한 한 의사는 “나는 ‘하얀색 가운’이 환자들에게 주는 막연한 기대감과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잘 알지만, 그 자체가 의사를 부담스럽게 합니다. 의사도 환자가 의사에게 말해주는 만큼만 알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3) 비형식적·비체계적·임기응변적 증상 표현
환자의 표현의지 부족도 문제지만, 반대로 조리없이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환자들도 의사소통에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 의사들은 환자의 증상을 시간 순서대로, 경중에 따라, 서로의 관련성에 따라 자기 머리 속에 나열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상황에 환자의 비형식적·비체계적·임기응변적·병렬식 증상설명은 의사들의 진단과정에 혼돈(chaos) 상태를 유발하기 쉽다.
대부분 환자가 의사와 대화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증상을 표현하지만, 정작 그 내용을 분석해보면 증상보다는 ‘신체적 불편함’을 제시하는 정보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내과의사와 50대 여자 환자의 대화 내용이다.
의사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환자 일주일째 밥을 못 먹었어요(한숨). 힘도 없고, 머리와 (목 뒤를 만지면서) 목 뒤가 너무 아파요, 먹으면 속이 메슥거리고 올릴 것 같고, 다리도 쑤시고…(한숨소리)….
의사 (기록판을 주시하며) 평소 혈압이 어떠세요?
환자 제가 원래 혈압도 낮고 해서 약을 대놓고 먹어요. 병원 약에 질려서 지금은 인삼녹용 농축액을 먹거든요.
의사 요즈음 신경 쓰는 일 있어요?
환자 신경 쓰는 일이야 많지요… (배와 머리를 만지면서) … 우리 집 아저씨가 술을 하도 많이 먹어서… 밤에 들어오면 잠을 안 자요….
의사는 ‘병의 원인’을 알아야 진단과 치료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환자는 계속해서 자신의 고통과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다. 이 의사는 인터뷰에서 “(환자의) 증상을 치료하는 것보다 (병의) 원인을 알아내서 치료하는 것이 진정한 의사”라고 말했다.
특히 의사가 처음부터 지켜본 환자가 아니라 다른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온 환자인 경우, 환자는 그때까지 다른 병원에서 받았던 치료 정황을 먼저 말하고 자신의 상태를 말해야 한다. 하지만 다급한 나머지 아픈 증세에 대해서만 말하고 그간의 정황을 언급하지 않거나 나중에야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의사들 입장에서 보면 환자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이런 요소들이 오히려 진료에 영향을 끼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4) 증상 표현의 과장성과 모호성
많은 의사가 “환자가 증상을 과장되게 말해 진료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한다. 의사-환자간 대화자료를 보면 “죽겠다” “(허리가) 잘리는 것 같다” “마실 힘도 없다” “(머리가) 뽀개지는 것 같다” “콕콕 쑤신다” 등의 다양한 과장 표현과 모호한 표현이 자주 나온다. 이런 문제는 사실 증상 자체가 모호한 경우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환자가 고통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약해 나타나는 문제인 경우도 많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환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어떤 환자는 작은 병세에도 고통을 심하게 부풀려 설명하고, 그 결과 비용이 많이 드는 검사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고 한 의사는 지적했다.
(5) 전달하는 내용의 우선순위 부재
대부분의 경우 의사와 환자의 접촉 시간은 비교적 짧다. 이번에 필자가 시행한 내과진료 분석자료를 봐도 초진과 재진에 따라서 다양하지만, 평균적으로는 5∼8분이었다. 이런 시간적 제약을 사전에 예측할 수 있는 한국적 의료환경 속에서 환자가 의사에게 전달하고 싶은 내용은 증상, 궁금한 내용(병의 원인), 걱정(치료가능 여부, 후유증, 병의 심각성 등), 치료기간 및 치료비 등 매우 다양하며, 의사에게 전달하려는 정보의 양도 주어진 시간에 비해 많은 편이다.
따라서 환자는 자신이 전달하려는 사항 또는 가장 걱정스러운 사항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 순위에 따라 의사에게 전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으면 두서없는 진술과 질문을 일방적으로 나열하기가 쉬우며, 제한된 시간 내에 의사의 피드백을 받기가 어려워진다.
(6) 의사의 의학적 진단에 대한 회의 및 불신
의사는 의학지식과 경험을 쌓은 사람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전문적 자율권과 권위를 부여받았다. 이러한 사회적 권위는 상호관계의 동의로부터 얻는 것인데, 이러한 의사의 ‘의학적 판단’에 대한 회의나 불신은 의사-환자간 사회적 틀을 깨버리는 것으로 의사소통 양식의 붕괴를 의미한다.
한 의사는 인터뷰에서 “의사의 검사 지시나 처방을 의심하여 토를 다는 환자들이 있는데, 이럴 때는 가끔씩 환자에게 화를 내거나 불쾌한 감정을 드러낼 때도 있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처방전을 받았지만 약을 짓지 않고 그대로 돌아가겠다는 경우, 지어온 약을 늘리거나 줄여서 복용한다는 경우, 처방보다 민간 처방을 더 신뢰하는 경우 등을 목격할 수 있었다. 한 의사는 “무엇보다 환자가 의사를 믿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여러 병원을 다니면서 이 병원 저 병원을 비교한다. 심지어 자기 병을 속이는 경우도 많은데 이런 경우는 진단하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7) 의학상식의 부족
이는 의사의 설명이나 질문이 잘 이해되지 않을 때 흔히 나타나는 문제다. 환자도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사전에 공부해야 한다. 의학용어는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최소한 자기 병에 대한 지식과 일반 의학상식을 넓혀서 의사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어느 정도 범위이며, 과민성이나 신경성이 무슨 뜻인지, 심전도 검사·내시경 검사·혈액검사·CT검사 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 의학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더욱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훌륭한 의학 전문가라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 커뮤니케이터는 아니다. 그러나 훌륭한 의사는 효과적인 문진(問診) 능력을 갖추어야 하고, 환자와의 의사소통 능력을 겸비하고 있어야 한다. 반면 의사소통은 상호적인 것이며, 환자의 적절한 표현력과 의사 지시에 대한 이해력 없이는 의사가 의사소통 능력을 발휘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인간관계는 대화를 필요로 한다. 의사-환자 관계도 본질적으로는 인간관계이며, 상호간에 듣고 알릴 사항은 알려야 한다. 환자는 의사의 조언, 권고 혹은 안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의료행위의 전문화·세분화에 따른 분업적 의료절차의 발달, 고도의 의료장비 투입 등 기술에 대한 맹신, ‘3분 진료’라는 말이 대변하는 진료시간의 부족, 환자의 불충분한 이해심 등으로 의사-환자 사이에 필요한 대화가 단절된 상황이다. 인천사랑병원의 이왕준 원장은 의사-환자간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학자가 반드시 강의를 잘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설명을 잘하는 능력은 사실 환자를 치료하는 실력과는 거의 별개다. 빠르게 발전하는 의학 지식을 좇아가는 일도 어렵지만, 자신의 지식을 환자가 알기 쉽게 설명하는 일은 더 어렵다. 또 환자들이 그 설명을 모두 이해했다고 해도 막상 어떤 ‘결정’을 환자가 직접 내린다는 것도 말처럼 쉽지 않다. 각각의 선택에 모두 장단점이 있고, 그 장단점이란 게 ‘확률’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문장으로 설명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는 또 국내 의학계에서 의사소통 기술에 대한 교육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고, 순전히 개인의 경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의사가 아무리 지식이 많고 실력이 좋아도 환자와 대화를 잘할 수 없다면 의사의 책임을 완수할 수 없다는 인식이 보편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를 위한 의사소통 가이드라인
(1) ‘웜 하트(warm heart)’에 대한 감정이입
이성과 감성의 만남은 원천적으로 갈등을 내포하게 된다. 따라서 수용자 중심의 커뮤니케이션 법칙이 여기서도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다. 환자가 자신의 신체적 불편함을 감정적으로 표현하고 의사의 따뜻한 대접을 기대하는 것도 의사소통에서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의사가 이성적 의료행위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냉담하고 차가운 얼굴로 일관하는 것도 문제가 될 것이다.
특히 따뜻한 말을 절실히 원하는 환자에게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의사는 의학 지식은 이성적 실천에 바탕을 두어야 하겠지만, 대화과정에 환자로부터 충분한 정보를 수집하려면 수용자(환자) 중심의 감성적 대화기법을 개발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환자의 감정적 호소에 대하여 무표정하고 냉담한 반응보다는 적절한 ‘감정이입적(empathic)’ 접근이 필요하다.
(2) 평등 관계의 의사소통 모델 지향
환자들은 권위적 언행 앞에서 대개 심리적으로 위축되며, 따라서 의사표현을 스스로 자제하게 된다. 그 결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증상을 표현하고 의문점을 해결하려는 환자의 기본욕구가 충족되지 못하고, 의사에게 불만을 갖게 되며, 결국 의사와 환자간에 신뢰감이 형성되기 어려워진다. 실제로 한 환자는 “의사가 너무 딱딱해 알고 싶은 것을 물어볼 수가 없다”고 고백했고, 또 다른 환자는 “의사가 하는 말을 잘 몰라도 그냥 알아듣는 척한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려면 의사 자신이 환자를 동등한 인간으로, 고객으로 바라보려는 시각이 필요하다. 따라서 의사-환자간 대인적 관계의 준거틀이 의사라는 사회적 계급에 근거하여 불균형적(asymmetrical)으로 형성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 대신, 환자를 ‘치료’라는 목표를 향해 함께 가는 동반자로 보는 균형적(symmetrical) 관계를 유지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의사-환자의 만남이 한쪽의 인사말로 끝나버리거나, 곧바로 진료를 위한 질문으로 전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물론 아파서 찾아온 환자에게 “만나서 반갑습니다”와 같은 일상적인 인사는 부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의사는 환자의 인사말에 “오래 기다리셨죠?” “편히 앉으시지요” 등의 인사나 적절한 허두(虛頭)로 시작하는 것이 앞으로 전개될 대화에 윤활유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3) 경청 기술의 연마와 실천
한의학에서 전해 내려오는 명의의 등급을 보면, 처방약을 잘 지어 치료하는 약의(藥醫)를 훌륭한 의사로 보았으며, 환자의 맥을 잘 짚어 치료하는 맥의(脈醫)를 이보다 한 단계 높은 의사로 보았고, 환자의 말을 잘 듣고 치료하는 문의(聞醫)를 최고 단계의 의사로 보았다. 환자의 말을 경청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주는 사례다. 적어도 문진 과정에 가장 기본은 환자의 증상과 불편함을 귀담아 듣는 데서 출발한다. 환자와 좋은 관계를 맺는 첫 단계 역시 환자의 말을 잘 듣는 것이다.
물론 국내 의료현실에서 정해진 시간에 많은 환자를 만나야 하는 의사에게 ‘경청’은 매우 부담스러운 요구일 수 있다. 그러나 경청은 연습을 필요로 하는 의사소통 기술임을 인식해야 한다. 의사소통 중 듣는 이의 주의집중이 부족한 경우와 상대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미리 정해진 결정을 갖고 있는 경우에 경청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의사-환자간 경청은 오진과 의료사고를 방지할 수 있는 최고의 장치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4) 수용자 중심의 어휘 사용
궁극적으로 병은 환자가 가진 것이지 의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며, 위기에 놓인 것도 환자의 생명이지 의사의 생명이 아니므로, 환자에게 진단상황을 가능한 한 쉬운 언어로 설명해주는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환자에게 설명하는 과정에 의학적 전문용어의 나열은 피하는 것이 좋으며,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환자에게 전달하기보다는 환자의 보호자에게 전달하거나 여유 있는 시간에 다시 방문하도록 조치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또 의사는 모호한 답변은 되도록 삼가고, 환자가 걱정할 소지가 있는 사항은 환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쉽게 설명하거나 다시 한 번 생각해서 대화에 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의사소통에서 같은 낱말이나 문장을 전달자와 수신자가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 의사소통 당사자간의 지식이나 사회적 지위에 큰 차이가 있을 경우, 그리고 상황에 대해 전달자와 수신자가 서로 다르게 인식하는 경우에 심각한 오해나 의미의 단절이 발생할 수 있다.
(5) 임상검사에 대한 설명
이학적 검사나 임상검사는 대개 다른 의사나 전문가에게 환자를 보내는 경우가 많으므로, 의사가 이런 검사를 지시하기 전에 어느 부위를 검사하며 왜 하는가를 사전에 환자에게 설명해주는 게 중요하다. 또 임상검사 중에 검사자(의사, 검사 담당자)는 자신의 언어적 및 비언어적 행위를 의식적으로 통제할 필요가 있다. 한 환자는 인터뷰에서 “의사가 검진하는 동안 ‘쯧쯧’ 혀차는 소리를 내 깜짝 놀랐으며, 내가 중병에 걸린 게 아닌가 걱정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의사소통의 핵심은 ‘지각’이며, 지각이란 “사람이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극이나 정보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의미한다. 의사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표현하는 다양한 언어적·비언어적 표현을 환자는 나름대로 선별된 지각과 정보선택을 통하여 받아들인다. 따라서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의사의 언어습관이나 비언어적 반응에 대해서 의학 지식이 부족한 환자가 잘못된 ‘선별적 지각’ 과정을 거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6) 양방향(피드백) 의사소통 모델 지향
대화에서 피드백은 상대의 대화를 촉진시키는 주요 요인이 된다. 따라서 환자가 상황이나 증상을 설명할 때,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네” “그래요” “음∼” “저런” 등으로 환자의 정보를 수신하고 있음을 표시해주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환자는 의사가 자기 말을 듣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고, 그 결과 자세한 증상을 이야기하려는 의욕을 상실하게 된다. 환자 증상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은 환자 자신이다. 의사는 환자로부터 수집한 정보가 많을수록 더 정확하고 과학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환자와의 의사소통에서 피드백을 전시하는 다양한 언어적·비언어적 기술을 습득하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면담시 환자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의사가 사용할 수 있는 대화기법으로는 침묵, 반사, 연민과 공감, 지지, 칭찬, 요약 등이 있다. 침묵은 환자가 자발적으로 진료에 도움을 주는 자료를 제공하는 경우이며, 환자를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단순히 듣기만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반사는 일종의 ‘다시 말해주기’로 “가슴의 통증을 네다섯 차례 느끼셨군요” “밤에 속쓰림이 더하시군요”라는 식으로 환자가 한 말을 다시 말해주는 것이며, 이는 환자의 자발성을 불러일으킨다. 연민과 공감은 의사 자신이 환자와 같은 처지에 서보는 것을 뜻하는데, 이를 통해 의사가 환자를 일방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친 연민은 환자의 지나친 의존심을 낳고 의사로서 객관성을 잃는 요인이 될 수 있다.
(7) 시간적 제약의 극복
의사는 환자의 증상을 듣고 설명해주는 대화 속에서 환자의 불안한 심리도 치료할 수 있고,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도 있다. 따라서 환자가 질문할 시간을 배려해주는 것이 꼭 필요한데, 필자의 조사과정에서 이를 실천하는 의사는 거의 없었다. 환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질병이나 치료의 필요성 및 방법에 대하여 알고 싶어하지만, 의사가 시간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질문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의사는 이런 궁금증을 아예 봉쇄하는 것보다는 진료 시간을 적절하게 분배하여 질문 시간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환자들은 ‘3분 진료’를 받기 위해 3시간을 기다렸다고 불평하지만, 사실 3분 안에 의사-환자간의 만족할 만한 의사소통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한 의사는 인터뷰에서 “개인병원은 예외일 수 있지만 우리처럼 대형병원 전문의는 바쁠 때는 3분 진료로 모든 것을 끝내야 합니다. 선진국의 경우 초진 환자는 15∼30분, 재진 환자는 8∼10분 면담하는데 이것과 비교하면 우리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입니다”라고 진술했다.
의사와 환자의 접촉시간 문제는 당사자들이 통제할 수 없는 외적 변수로서 의료정책의 문제와 관련된다. 한 의사는 “우리 나라는 의료보험제도상 의료비가 턱없이 싸기 때문에 미국처럼 하루에 15명 정도 환자를 보아서는 병원을 경영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의사소통과 관련하여 휼륭한 의사를 만드는 일은 환자에게도 책임이 따른다. 의사소통이란 항상 상호행위를 전제로 한 것이며, 따라서 그 결과도 공동의 책임이다.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먼저 상대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계발해야 한다. 예컨대 다른 문화적 환경에서 성장하고 생활한 두 사람은 의사소통 형식에도 차이를 나타내며, 장애를 가져오게 된다.
의사-환자간 의사소통도 이런 상황에 못지않게 의사소통에 장애가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특히 잘못된 의사소통이 생명과 직결될 수 있음을 감안한다면, 환자도 나름대로 의학 상식을 넓히고 의사들의 의사소통 스타일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1) ‘쿨 헤드’에 대한 접근방안
환자는 의사를 만나는 제한된 시간과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문제나 증상 또는 의사가 알고자 하는 그 밖의 정보를 자세하게 기억해내기가 어렵다. 따라서 의사를 방문하기 전에 이러한 내용을 메모해놓는 것이 필요하다.
자동차를 관리하는 데에도 차계부가 필요하다. 언제 오일을 갈았는지, 언제 어떤 문제가 발생했고, 어떤 부속이 교체됐는지를 알려준다. 마찬가지로 환자의 병력은 의사에게 유용한 정보가 될 수 있다. 특히 이런 메모는 의사를 만나는 짧은 시간 안에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데에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고, 환자가 염려하는 사항의 리스트를 미리 작성함으로써 상담시 궁금한 사항을 차분히 해소할 수 있는 장치가 된다. 이런 메모나 메모장을 작성하기 어려운 환자라면 그 환자의 증상이나 병력을 잘 아는 사람과 동행하는 것도 좋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의사는 의학적 지식을 수행하는 ‘냉철한 머리’의 소유자다. 따라서 환자는 의사를 만나기 전에 의사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실(정보)을 미리 정리해보는 게 중요하다. 병의 증상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환자 자신이다. 의사도 사람이며, 환자가 말하지 않은 내용까지 알아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환자가 간과하는 것은 “병을 진단하는 것은 의사지만, 진단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환자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2) 의사소통의 의지 창출
많은 의사가 환자에 대해 “의사가 물어보기 전에 스스로 증상에 대한 표현을 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진찰행위에 대한 두려움, 부끄러움, 당혹감 등으로 진찰시 정확한 피드백 표현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 사실 환자 쪽에서 보면 말을 해서 손해볼 것은 없다. 오히려 환자의 말이 진단에 중요한 정보가 된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환자가 알고 있다.
따라서 환자는 의사 앞에서 자신의 증상을 표현하려는 의지와 자신감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환자는 의사에게 “모든 것을 완전하고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는 부담을 버려야 한다.
한편 의사의 설명을 침착하게 듣는 경청의 의지도 표현의 의지만큼이나 중요하다. 의사들은 많은 환자들이 “의사보다 앞질러 생각하고, 의사의 설명을 듣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처방은 이미 환자 자신이 내려놓고, 마치 그것을 확인하고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아온 듯한 태도는 의사소통에 단절을 초래하는 큰 요인이 될 수 있다.
(3) 형식적·체계적·준비된 증상설명
환자가 보기에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유일한 상대는 의사다. 반면 의사 쪽에서 보면, 한 환자는 같은 날 자신이 맞는 수십 명 중 한 사람일 뿐이다. 따라서 환자는 의사의 입장을 고려한 ‘증상 설명’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환자들은 말은 많지만 조리가 없고 장황하며, 자신의 고통이나 느낌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의사의 판단을 위해서 자신의 증상을 시간대별로, 경중에 따라, 환자 나름대로 서로의 관련성을 머리 속에 정리하여 나열해보고, 자신의 ‘건강 메모’를 작성해서 의사를 만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환자는 의사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질병의 원인이 됐을 만한 주변 상황, 최근 섭취한 음식, 약물복용 상태, 타 병원의 진단 및 진료 여부, 과거 병력, 가족 병력 등을 기록하여 의사를 만나면 훨씬 효과적인 의사소통 환경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4) 신체적 증상의 표현 어휘 및 기술 습득
많은 환자들은 자신의 신체적 고통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이런 문제는 언어 자체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발화자(發話者)의 표현능력과도 관련된다. 환자가 자신의 증상을 의학용어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표준화된 일상적 언어로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교육과 훈련이 사회적 차원에서 필요하다.
신체적 증상은 매우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느낌으로 좌우되며, 따라서 의미와 표현에 오차가 매우 클 수 있다. 이렇게 오해의 범위가 큰 특정 영역에 대한 표현기술은 사회적으로 합의되고 공유되는 게 매우 유익하다. 특히 환자는 자신의 증상을 과장해서 표현하면 의사가 더 세심하게 배려해줄 것이라는 잘못된 기대감을 버려야 하며, 자신의 고통과 느낌을 되도록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어휘를 평소에 습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5) 의미적 우선순위에 따른 전달형식
환자가 의사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제한돼 있지만, 그 제한된 시간에 환자가 알고자 하는 정보는 증상의 의미, 병의 심각성, 질병의 원인, 치료가능 여부, 후유증, 치료기간, 치료비 등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환자는 자신이 궁금한 내용의 리스트를 정리한 후, 그것들의 우선순위를 결정해놓는 게 필요하다.
(6) 의사에 대한 신뢰
환자는 일단 의사와 병원을 선택했으면 그 의사를 신뢰하고, 병을 치료하는 책임을 나누어 진다는 태도를 갖는 게 필요하다. 의사-환자간 효과적인 의사소통은 어느 한쪽만의 노력으로는 어렵다. 의사와 환자는 서로에 대한 믿음과 존중이 필요하며, 특히 환자는 의사의 지식을 신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 의사는 인터뷰에서 “의사를 테스트하는 환자가 많다”며 “다른 병원에서 진단 받은 사실을 숨기고 진단이 같은지를 시험해보고, 진단이 다르게 나오면 왜 다르냐며 한바탕 소란을 피우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7) 기초 의학상식의 습득
대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의사소통의 기술(skill)·동기(motivation)·지식(knowledge)을 기초로 한다. 의사-환자간 대화능력을 위해 환자 자신이 의학적 지식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도 의사소통 능력을 배양하는 방법이다. 또한 의사의 설명이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다시 설명해달라고 요구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환자는 의사에게 의학용어를 물어보고 일상적인 용어로 재설명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데도 많은 환자들은 의사에게 질문하기를 주저한다. 환자는 이렇게 의사의 설명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질문함으로써 오해의 소지를 줄일 수 있고, 중요한 정보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확인 질문은 또 의사의 지시를 기억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