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5년에 태어나 2025년 탄생 340주년을 맞는 위대한 작곡가 바흐와 헨델은 서로 만난 적이 없다. 바흐가 독일 쾨텐 궁정에서 일하고 있던 1719년, 헨델이 새로운 오페라 가수를 찾기 위해 여행하던 중 할레에 잠시 머물렀다. 바흐는 바로 옆 도시인 할레에 헨델이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할레로 갔으나 그를 만나지 못했다. 당대 두 작곡가가 누린 명성으로 미뤄 보아 두 작곡가는 서로의 음악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살아서 만난 적은 없어도 하루하루 쌓아 이룬 일이 별처럼 빛나게 되면, 후세 사람들이 우정이라 부를 만한 관계가 만들어지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바로크음악의 정수를 보여준 독일의 위대한 작곡가 바흐(왼쪽)와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하며 당대 최고 작곡가로 이름을 떨친 헨델의 초상. [위키피디아]
“우리는 서로 다른 목적지와 항로를 가진 두 척의 배다… 전능한 힘이 우리를 서로 다른 대양으로 갈라놓았고, 우리는 서로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서로 다른 대양과 태양이 우리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지상에서 우리가 서로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일지라도, 우리는 별들의 우정을 믿기로 하자!”
같은 해 독일서 탄생한 두 별
1685년 바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라이프치히의 중간쯤 위치한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났고, 헨델은 라이프치히 근처 할레에서 태어났다. 서양음악사에서 이처럼 뛰어난 두 작곡가가 같은 해에 태어난 일은 찾아보기 어렵다. 심지어 음악사상 가장 뛰어난 두 작곡가가 한 해에 태어났다고 해도 수긍할 음악 애호가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두 작곡가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바로크음악의 정점에 올랐기 때문이다.1618년부터 1648년까지 이어진 30년 전쟁은 거의 모든 전투가 현재의 독일 지역에서 벌어져 독일을 폐허 상태로 만들었다. [위키피디아]
르네상스 종교음악으로부터 발전한 교회음악과 베르사유의 기악모음곡, 이탈리아의 협주곡은 바흐에게로 이어져 페허가 된 독일에서 꽃을 피웠다. 몬테베르디의 성악곡 마드리갈과 오페라로부터 시작돼 비발디로 계승된 세속음악은 헨델에게로 이어져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의 영국에서 완성된다. 한 음악 사조의 정점에 서서 별처럼 빛나기 위해선 음악의 형식이나 규모를 완성하고 확장하는 것을 넘어서, 이전에 없던 새로운 음악에 이르는 길을 개척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바흐는 단 한 대의 악기를 품고 신 앞에서 고독한 단독자로 서는 길을 열었다. 헨델은 제국으로 발전하려는 영국에서 왕들의 이야기를 다룬 오페라와 오라토리오로 도시 수준을 뛰어 넘어 국가적 규모의 음악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바흐 선호하는 우리나라, 당대에는 헨델이 훨씬 유명
바흐와 헨델이 태어난 시기에 독일은 이전까지 한 번도 유럽 음악의 중심지로 부상한 적이 없는 변방이었다. 유럽 음악의 변방에서 태어난 빛나는 두 별은 성장 환경과 사생활, 다루는 음악 분야도 전혀 달랐다.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으로부터 클래식 음악을 수입한 우리나라는 일본의 동맹국이던 독일 음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헨델의 오페라보다는 바흐의 기악음악을 선호하고, 심지어 바흐를 더 심오한 음악 작곡가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클래식 음악 방송에서도 헨델의 오페라보다는 몇 안 되는 헨델 독주 기악곡을 더 많이 소개하기도 한다.
하지만 두 작곡가가 살았던 시대에는 헨델이 훨씬 잘 알려지고 성공한 작곡가였다. 헨델은 당시 유럽 음악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도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바로크 기악 음악으로 이름을 날린 세계적 작곡가였다. 반면, 바흐는 대가족을 이끌고 독일의 중북부 도시들을 옮겨 다니며 교회음악과 오르간곡, 소규모 기악 음악을 작곡하며 교회와 시의회의 변변찮은 대접에 불만을 토로하던 작곡가였다.
헨델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베토벤과 브람스도 결혼하지 않았지만 이 두 작곡가는 소심한 성격이 미혼의 원인인 듯하다. 헨델의 경우에는 음악적·사회적으로 성공하겠다는 야망이 이유였던 것 같다. 오페라 작곡가로서 엔터테인먼트업계의 성공한 작곡가였던 헨델의 주변에는 천재 작곡가와의 인연을 통해 오페라 무대에서 성공하고 싶어 하는 재능 있고 매력적인 여자 가수가 많았다. 그러나 헨델은 결혼해서 가정을 부양하고 아이를 교육하는 것보다는 음악을 창작하는 일에 열중하고자 했다. 덕분에 그는 고향 할레를 떠나 한자동맹의 중심지 함부르크를 거쳐 이탈리아 로마, 베네치아에서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과 교류하며 명성과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결국에는 산업혁명 직전 당시 세계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한 영국에서 성공했다.
신 앞에 홀로 서는 심오한 음악 세계 연 바흐
바흐는 두 명의 아내에게서 스무 명의 자식을 뒀다. 그 가운데 네 명의 아들이 작곡가로 성장했는데 둘째 아들인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와 막내인 크리스티안 바흐가 아버지 바흐의 명성을 이어받았고, 각자 활동하던 지역의 이름을 붙여 함부르크의 바흐와 런던의 바흐로 불렸다. 뛰어난 아들들을 둔 덕분에 아버지 바흐의 이름과 음악은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에 전해졌고, 바흐의 대위법은 브람스에 이르러 낭만음악에도 뿌리를 내린다.
음악가 가문에서 성장한 바흐는 자녀 교육에 열심이었다. 바흐 음악을 대표하는 작품인 무반주 첼로 모음곡, 평균율 클라비어, 바이올린 파르티타는 교회와 궁정에서 활동한 바흐가 생계가 아니라 자녀 교육을 위해 작곡한 것이다. 바흐가 독주 악기를 위해 작곡한 이러한 기악 모음곡들은 알레망드, 쿠랑트, 사라방드, 샤콘느 같은 프랑스 궁정의 춤들로 구성돼 있다. 교회와 궁정음악을 작곡하기 위해 늘 분주했던 바흐는 일과가 끝난 늦은 밤, 클라비어 앞에 홀로 앉아 자신과 자녀들 외에는 아무도 연주하지 않을지도 모를 작품들을 작곡했을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엔 모든 첼리스트에게 경전처럼 여겨지는 작품인 무반주 첼로 모음곡조차 1899년 첼리스트 카잘스가 스페인의 어느 헌책방에서 악보를 발견하기까지 수백 년 동안 존재 자체가 잊혀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기 위한 곡이 아니라 바흐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작곡한 작품이었기에, 카잘스는 이 놀라운 악보를 발견하고도 스스로 만족할 수준으로 익혀 능숙하게 연주할 수 있을 때까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지 않았다. 바흐가 1720년 첫 번째 아내와 사별한 후 작곡한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의 샤콘느도 바이올린 하나로 연주하는 바흐의 대표 작품이다. 이 곡을 연주하기 위해선 연주자가 자기 내면의 슬픔을 오롯이 홀로 마주해야만 한다.
왕들 이야기로 국가 정체성 만들어낸 헨델
영국 국왕 조지 1세와 헨델이 런던 템스강에서 보트를 탄 모습을 그린 그림. [Gettyimage]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독일과는 달리 산업혁명이 시작되려고 하는 영국은 나날이 발전하는 나라였다. 왕실과 귀족들의 후원까지 등에 업은 헨델은 당시 유럽 최고 수준의 오페라 가수들을 영국으로 데려와 무대에 올렸다. 나중에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인기가 떨어지자 영어로 된 오페라와 오라토리오도 작곡했다. 이 오페라와 오라토리오들은 왕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입헌군주제 국가로 발전하고 있던 영국에서 왕의 권위와 상징성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고대의 위대한 왕들과 그를 중심으로 영웅적 승리를 거두는 신하들이 등장하고, 아름다운 왕실 여인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헨델의 오페라는 영국 왕을 중심으로 한 귀족과 상류층에 질서와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또한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유럽 최고의 오페라 가수들이 직접 선보이는 아리아와 연주는 유럽에서 문화적으로 변방 국가이던 영국 국민의 자존심을 고취시켰다, 아름다운 아리아를 만들어내는 헨델의 재능은 영국에서 보고 듣는 왕들의 오페라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이야기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1727년 10월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영국 국왕 조지 2세와 그의 아내의 대관식을 새긴 동판화. [위키피디아]
바로크음악의 두 정점이 다다른 곳
음악은 항상 그 시대에 가장 융성했던 곳에서 발전했는데 바흐의 음악은 매우 드문 예외에 속한다. 아마도 그가 남긴 가장 내밀한 작품들이 권력자의 공간에서 연주하기 위해 창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인 듯하다. 오히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연주가가 자신의 내면을 살펴 성숙해지는 시간을 가져야 비로소 만족할 만한 연주를 할 수 있는 음악이란 점이 오늘날 바흐의 음악이 헨델의 화려한 오페라보다 더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18세기 전반에 이미 국가적 높이에 다다른 헨델 수준의 음악이 독일에서 등장하기까지는 또 다른 100년이 필요했다. 19세기에 바그너가 고대의 전설과 영웅들의 이야기로 독일 낭만 음악의 전성기를 열고서야 독일은 국가를 이룰 수 있었고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개인 내면의 심연을 살피고, 또 한편으론 인간 정신의 최종 구현이라 여겨지는 국가에 이르기까지 바흐와 헨델, 바로크의 두 별은 다른 목적지와 항로를 가진 두 척의 배처럼 서로 다른 음악의 대양에서 스스로 변화시켜 음악사의 별이 됐다. 우리는 별들의 우정을 믿기로 하자!
김원
● 1970년생
● 서울대 심리학과 졸업
● 2023년 제1회 대한민국언론인대상 수상
● ‘당신의 밤과 음악’ ‘노래의 날개위에’ ‘명연주 명음반’ 등 KBS클래식 FM에서 다수의 프로그램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