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호

돌봄, 각자도생에서 상부상조로 나아가는 가교

[성지연의 21세기 문화 뉴노멀 지도]

  • 성지연 에세이스트

    입력2025-01-09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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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세기 한국 사회는 ‘돌봄 위기 시대’

    • 가족 아닌 국가가 돌봄 책임져야

    • 돌봄과 디지털 기술 결합에 주목

    • 정신 건강 살피는 심리적 돌봄도 중요

    • 외국의 모범 사례 적극 벤치마킹해야

    고령화, 저출생 기조가 이어져 돌봄이 필요한 노인인구는 갈수록 늘고, 이들을 부양해야 하는 청년세대의 부담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Gettyimage]

    고령화, 저출생 기조가 이어져 돌봄이 필요한 노인인구는 갈수록 늘고, 이들을 부양해야 하는 청년세대의 부담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Gettyimage]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쓰러졌다. 아버지를 돌볼 사람은 아들밖에 없었다. 중환자실 입원을 위한 연대보증인이 될 수 없는 어린 나이였다. 아들은 자신과 아버지의 삶 모두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아들은 아버지의 보호자를 자처하게 됐다.

    ‘영 케어러(Young carer·가족을 돌보는 청소년이나 청년)’ 조기현이 쓴 논픽션 ‘아빠의 아빠가 됐다’(2019)의 내용이다. 아들이 보호자로서 아버지를 9년 동안 돌본 이야기다. 읽는 내내 마음이 시렸다. 동시에 돌봄이 도덕이나 의무로 강제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의미 있는 행위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이 갔다.

    우리나라에는 영 케어러 인구를 전국적으로 조사한 통계자료가 아직 없다. 국회 입법조사처가 2022년 내놓은 현안 분석 자료가 가장 참고할 만했다. 이에 따르면 국내 11~18세 영 케어러는 18만4000명에서 29만5000명 사이로 추정됐다. 이들은 일반 청년에 비해 우울감이 높고 미래 계획에도 작지 않은 어려움을 겪는 등 삶의 질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많은 이가 현시대를 ‘저출생·고령화 시대’라고 말한다. 동시에 이 시대는 ‘돌봄 위기 시대’이기도 하다. 고령화로 돌봄이 필요한 사람은 점점 늘어나는데 저출생으로 개인에게 부과된 돌봄의 몫이 갈수록 커지고 있어서다.

    ‘영 케어러’ 조기현 작가가 2019년 출간한 논픽션 ‘아빠의 아빠가 됐다’(위). 작가는 아들이 보호자가 되어 9년 동안 돌본 이야기를 그린 이 책에서 가족을 돌보는 청년의 고충을 호소했다. 이매진 출판사, [동아DB]

    ‘영 케어러’ 조기현 작가가 2019년 출간한 논픽션 ‘아빠의 아빠가 됐다’(위). 작가는 아들이 보호자가 되어 9년 동안 돌본 이야기를 그린 이 책에서 가족을 돌보는 청년의 고충을 호소했다. 이매진 출판사, [동아DB]

    ‘사회현상’으로서의 돌봄

    돌봄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됐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간은 모두 돌봄이 필요한 존재다. 누군가의 돌봄을 받고 누군가에게 돌봄을 주며 살아간다. 돌봄이 이렇게 중요한 데도 큰 주목을 받지 않은 것은 그 돌봄이 대개 가족 안에서 해결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돌봄이 ‘사회현상’으로 부상한 데는 세 가지 변화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첫째, 가족 형태가 바뀌고 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핵가족에서 1인 가구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2023년 현재 1인 가구의 비중은 전체 가구의 35.5%에 달한다.

    둘째,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돌봄 의무와 책임은 관습적으로 어머니·며느리 등 여성에게 부과됐지만 21세기 들어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꾸준히 상승했다. 2023년 현재 15~64세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63.1%에 달한다. 유(有)배우자 가구 중 맞벌이 가구는 2022년 기준으로 46.1%에 이른다.

    셋째,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돌봄 위기 상황에 대한 경각심이 커졌다. 그 때문에 유치원이 문을 닫고 초등학교가 개학을 연기해 당시 학부모들은 집에서 자녀를 돌봐야 했다. 노인과 장애인을 돌보는 공공시설이 문을 닫아 가족이 직접 이들을 집에서 돌봐야 했다. 돌봄 문제가 해소되지 않으면 정상적 생활이 어려운 지경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회현상으로서의 돌봄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대응이 두 방향에서 나왔다. 하나는 ‘돌봄 사회론’의 문제 제기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을 지낸 김용익 재단법인 돌봄과 미래 이사장은 “돌봄은 특별한 것이라기보다 인간의 기본 조건”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독립적 인간이더라도 자립하기까지는 돌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족이 더는 돌봄의 주체가 되기 어렵다’는 것이 돌봄 사회론의 문제의식이다. 김진석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돌봄 사회의 네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 가족이 아닌 개인 중심의 돌봄 사회, 지역사회 기반의 돌봄 사회, 공공 중심의 돌봄 사회, 지자체 책임의 돌봄 사회가 그것이다. 돌봄은 흔히 노인 돌봄, 보육 돌봄, 장애인 돌봄, 환자 병구완 등으로 나뉜다. 기본적으로 보건·의료·복지·주거·노동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 게 바람직하다. 또 돌봄은 장소에 따라 집에 머무는 ‘지역사회 돌봄’과 요양원 등에 머무는 ‘시설 돌봄’으로 구분된다. 김용익은 지역사회 돌봄과 시설 돌봄이 보완 관계를 이루는 ‘순환적 돌봄’을 새로운 대안으로 내놓는다.

    사회적 돌봄의 현주소

    다른 하나는 ‘돌봄 경제론’의 부상이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 등이 집필한 ‘트렌드 코리아 2024’에 따르면, 돌봄 경제란 돌봄을 둘러싼 새로운 사회적·기술적 움직임을 말한다. 이 돌봄 경제는 크게 ‘배려 돌봄’ ‘정서 돌봄’ ‘관계 돌봄’으로 나누어진다.

    배려 돌봄이 환자·장애인·영유아·어린이·고령자 등 혼자 생활하기 힘겨운 사람들의 신체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을 뜻한다면, 정서 돌봄은 신체적 불편함을 넘어 심리적 상태까지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 관계 돌봄은 일방적 의존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서로 돌봄을 주고받는 것을 지칭한다.

    돌봄 경제는 디지털 대전환(DT)이 낳은 정보기술의 적극적 응용을 주목한다. 방문요양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 ‘케어링’이나 아이 돌봄 연결 플랫폼 ‘맘시터’가 대표 사례다. 특히 맘시터는 부모 40만 명, 시터 80만 명이 연결돼 있는 국내 최대의 매칭 서비스다. 앱을 통해 부모와 시터 간 투명한 정보 공개부터 돌봄 비용 결제까지 가능한 것이 장점으로 꼽힌다.

    그동안 국민 다수가 대면한 돌봄 유형은 노인 돌봄이다. 특히 치매 노인 돌봄은 작지 않은 어려움이 뒤따른다. 노인 돌봄은 갈수록 힘겨워지고 있다. 2010년에는 노인 1명을 생산가능인구(15~64세) 6.7명이 부양했지만, 2030년에는 2.6명이, 2050년에는 1.3명이 부양해야 할 것으로 추산된다. 생산가능인구가 부담해야 할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재정이 날로 커지는 것도, 돌봄을 제공할 수 있는 인구 자체가 계속 줄어드는 것도 문제다.

    독일 영화감독 미카엘 하네케의 ‘아무르’(2012)는 노인 돌봄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성심성의껏 돌보던 남편은 지쳐가기 시작하고, 결국 아내를 베개로 눌러 죽이고 만다. 제목 ‘아무르(amour)’는 ‘사랑’을 뜻한다. 영화는 간병의 고통이 사랑하는 마음마저 병들게 할 정도로 치명적임을 보여준다.

    간병 살인은 우리 사회에서도 심각한 문제다. 2019년 서울신문이 보도한 ‘간병 살인 154인의 고백’은 2006년부터 2019년까지 간병 살인 108건의 판결문을 분석한 기사다. 이에 따르면 죽임을 당한 피해자의 질병 가운데 노인성 질환 비중이 가장 높았다. 가해자는 아들(35.2%), 남편(23.1%), 아내(14.8%), 딸(2.8%) 순으로 나타났다. 가해자의 59.3%가 혼자서 간병을 책임졌다. 지금도 비극적 간병 살인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마주한 노인 돌봄 문제의 핵심은 그 돌봄을 더는 가족에게 맡길 순 없다는 점이다. 설령 가족이 맡는다 해도 아무런 도움 없이 감당하는 것은 개인에게 가혹한 짐이 된다. 가족이 아닌 사회가 돌봄을 떠맡아야 한다. 여기에는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노인 돌봄뿐만 아니라 보육 및 장애인 돌봄에도 적용된다.

    같은 맥락에서 부상한 것이 ‘사회적 돌봄’이다. 사회적 돌봄이란 이제까지 주로 가정에 전가된 돌봄의 책임을 정부를 위시한 사회가 떠맡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회적 돌봄에서 최근 주목할 것은 사회서비스에 대한 논쟁과 정신 건강을 위한 ‘심리적 돌봄’이다.

    먼저 사회서비스 논쟁에서 국민적 관심을 끈 것은 2024년 9월 서울시가 시작한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이다. 시범사업은 현재 최저임금제로 운영되고 있지만, 앞으로의 방안에 대한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서울시는 최저임금 차등 적용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보는 반면, 고용노동부와 시민사회단체는 이를 차별로 여기며 반대하고 있다.

    외국인 가사관리사에 대한 논쟁은 돌봄 노동자의 처우 문제를 환기시킨다. 남우근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요양보호사, 보육교사, 가사서비스노동자, 간병인, 장애인활동지원사, 사회복지시설종사자, 노인생활지원사, 아이돌보미, 산모신생아서비스종사자 등 100만 명을 훌쩍 넘는 이들이 돌봄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돌봄 노동자는 50~60대 여성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나 시간제 일자리이며, 법적 보호와 소득 보장 또한 미흡하다. 돌봄이 사회적 약자를 보듬는 귀한 일이라면 돌봄 노동자에 대한 처우는 이에 상응해야 한다.

    2006년부터 2019년까지 간병 살인 108건의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죽임을 당한 피해자의 질병 가운데 치매를 비롯한 노인성 질환 비중이 가장 높았다. [Gettyimage]

    2006년부터 2019년까지 간병 살인 108건의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죽임을 당한 피해자의 질병 가운데 치매를 비롯한 노인성 질환 비중이 가장 높았다. [Gettyimage]

    지속 가능한 돌봄 위해

    심리적 돌봄은 정신 건강을 살피는 것을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정신 건강의 적신호가 크게 켜진 두 그룹은 청소년과 노년층이다. 일부 청소년은 학업·가족·교우관계 문제 등으로 우울증, 학교폭력, 자살 충동 등의 위기를 겪고 있다. 은둔형 외톨이 역시 점점 늘고 있다. 또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우리나라가 1위를 기록한 노인자살률은 노년층의 정신 건강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노인 자살은 노년층이 마주한 빈곤과 외로움이 낳은 결과다.

    이런 심리적 돌봄을 위한 공공과 민간의 지원은 현재 다양하게 운용되고 있다. ‘청년마음건강지원사업’ 같은 청년층에게 제공하는 정부의 심리상담 지원 프로그램도 있고, 청소년과 노년층 모두 이용할 수 있는 ‘마인드 카페’ 같은 민간 비대면 심리상담 플랫폼도 있다. 앞으로 이런 심리적 돌봄의 확충은 물론 이에 대한 정부와 민간의 효율적 협업 또한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사회현상으로서의 돌봄이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유엔은 2023년 7월 총회에서 10월 29일을 ‘국제 돌봄과 지원의 날’로 지정했다. 우리나라에서도 2024년 10월 28일 시민사회단체들이 참여한 ‘10·29 국제돌봄의날 조직위원회’가 돌봄 공공성과 지속 가능한 돌봄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지속 가능한 돌봄을 위해 세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 그동안 가족과 여성이 떠맡았던 돌봄은 이제 정부와 시민사회가 대신해야 한다. 돌봄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경제적 비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고, 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정치세력 간에 타협이 이뤄져야 한다. 돌봄이 여야를 초월하는 국가적 과제라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둘째, 미래의 돌봄은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 최근 새로운 플랫폼과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점점 더 늘어나는 돌봄의 수요를 담당하는 돌봄 경제가 부상해 왔다. 21세기 현재 돌봄은 사회적으로 공동체의 통합을 일구기 위한 조건인 동시에 경제적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영역이다. 돌봄 사회론과 돌봄 경제론 둘 다 중요한 이유다.

    셋째, 다른 나라의 돌봄 정책을 눈여겨봐야 한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치매(癡呆)라는 말에 담긴 ‘어리석다’는 부정적 의미에 주목해 ‘치매’ 대신 ‘인지증(認知症)’이란 말을 사용해 왔다. 영국에서는 650만 명에 달하는 비공식 돌봄 활동가 조직인 ‘케어러스 유케이(Carers UK)’가 정부의 돌봄 정책 개선에 기여해 왔다. 보육 돌봄에서 노인 돌봄까지 다양한 외국 프로그램을 적극 벤치마킹해야 한다.

    돌봄이 부상한 저변에는 21세기의 뉴노멀이 놓여 있다. 그것은 ‘가족 중심 사회’에서 ‘탈가족 사회’로 향해가는 도도한 물결이다. 이 탈가족 사회에서 20세기적 각자도생을 넘어 21세기적 상부상조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는 우리 사회에 부여된 중대한 과제다. 돌봄이란 화두가 그 출발의 한 축을 이루고 있음은 분명하다.

    성지연
    ● 에세이스트. 전 연세대 국문학과 강사
    ●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동 대학원 국문학 박사
    ● 여성동아에 ‘성지연의 다시 만난 그녀들’ 연재
    ● 저서: ‘어른의 인생 수업’, ‘다시 만난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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