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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빈에서 대비까지…조선 왕후의 일생

세종, “왕세자빈은 婦德이 중요하나 자세 또한 아름다워야…”

세자빈에서 대비까지…조선 왕후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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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세자빈으로 입궁한 왕비 6명, ‘우회상장’으로 왕비 된 경우 18명
  • 왕세자빈 위한 공식 교육 전무…동성연애와 푸닥거리로 무료함 달래
  • 왕비가 관리하는 살림은 왕도 손 못 대
  • 내외법 강조한 세종 이후 왕과 왕비 별거 생활
  • 성종 비 윤씨, “눈 도려내리라” “손목 자르리라” 하며 왕과 싸워
  • 정치교육 못 받은 왕비·왕대비의 섭정, 왕권 약화로 이어져
세자빈에서 대비까지…조선 왕후의 일생
필자는 최근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왕세자빈이나 왕비로 책봉됐던 여인들의 생활상을 살펴본 ‘조선의 왕후’(일지사)를 펴냈다. 이 책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에서 정치가로 일생을 보낸 여성의 생활과 활동에 대한 연구이며, 동시에 조선의 결혼과 상례 등을 다룬 풍속사이기도 하다. 이 중에서 조선 왕후의 간택과 입궁 과정, 왕세자빈, 왕비, 왕대비 시절을 간추려 소개함으로써 조선의 정계에 몸담은 여인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생활했는지 살펴보려 한다.

조선시대 왕은 27명인 반면 왕비는 37명으로 10명이나 더 많다. 이는 훗날 왕비로 추증(追贈)된 경우는 빼고, 왕비로 책봉됐으나 폐비가 되어 선원계보(왕실족보)에는 기록되지 않은 왕비를 더한 수다. 이 중 어린 나이에 왕세자빈으로 가례를 치르고 남편인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왕비가 되고, 왕이 죽은 뒤 자신의 친아들이 즉위함으로써 대비가 되어 죽은, 전형적인 왕후의 삶을 산 이는 현종 비 명성왕후 김씨 단 한 명뿐이다. 이를 포함해 왕세자빈으로 가례를 치르고 궁에 들어가 왕비가 된 경우도 6명에 불과하다. 반면 결혼 후 남편이 변칙으로 왕이 되는 바람에 왕비가 된 이는 11명, 왕의 후궁으로서 왕비가 된 경우도 7명이나 된다. 이러한 통계는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하는 것이 미래에 대한 아무런 보장이 되지 않으며, 궁궐 내 생활이 얼마나 불안하고 살벌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元에 처녀 조공하면서 간택 시작

조선시대에 대부분의 왕은 10세 안팎에 나이가 비슷한 처녀와 결혼을 했다. 따라서 왕세자빈도 대개 10세 전후에 입궁했는데, 그전에 ‘간택’이라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조선 왕실은 왕세자의 결혼을 앞두고 왕세자의 나이와 비슷한, 9∼13세 처녀의 금혼령을 내린 후 전국의 처녀들 중에서 왕세자빈을 뽑았다. 초기에는 간택사를 지방으로 내려보내 처녀를 뽑아 서울로 데려오도록 한 후, 다시 왕궁에서 왕실의 인원과 정부요인들이 모여 오늘날 미인대회를 하듯이 이들의 인물을 보고 그중에서 왕세자빈을 뽑았다. 중종 때부터는 부모의 성명과 아버지의 관직 혹은 작위를 적은 처녀단자를 받아 그중에서 1차로 뽑힌 처녀를 궁중에 모아놓고 세 번의 간택을 했다.

17세기 유학자 유형원(柳馨遠)은 그의 저서 ‘반계수록(磻溪隨錄)’에서 조선 태종 때 간택이 시작됐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간택은 이미 고려 때 원나라에 처녀 조공을 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게 맞다. 조선이 선 후에도 명나라가 계속 처녀 조공을 원해, 사신이 올 때마다 간택사들이 전국에서 간택한 처녀들을 서울로 데려오면 왕이 이들을 경복궁에 모아놓고 직접 뽑아서 명나라로 보냈다. 태종은 한 번에 250∼300명의 처녀 중 40∼50명을 뽑았는데, 이들은 명에 보내져 왕후공작들의 첩으로 분배됐다. 이를 본떠 태종도 간택사를 각 지방으로 보내 처녀를 간택,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다.



그러나 간택은 처음부터 논란이 많았다. 세종이 간택을 통해 3년간 고르고 골라 맞아들인 왕세자(문종)빈 휘빈 김씨를 2년 만에 투기죄로 이혼시키고 다시 왕세자빈을 간택하려 하자 “간택은 인물만 보는 것이지 부인의 덕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관리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세종은 “왕세자빈은 부덕(婦德)이 중요하나 자세 또한 아름답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반박했다.

그 뒤로도 정부 대신 중에는 간택제도를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있었다. 선조의 결혼을 앞두고 이이(李珥)와 오건(吳健)이 나서 “가법이 올바르며 인자하고 현명한 이의 딸을 왕비로 맞이해야 하는데, 간택은 단지 인물만 보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하지만 선조는 “왕망(王莽)의 딸도 아버지는 역적이나 효부였으니 반드시 부모를 들출 게 없다”며 간택을 고집했다.

반면 정조는 간택제도에 회의적이었다. 정조는 왕세자빈을 간택할 때 “이제 간택의 제도를 버리고 중매를 통해 명문의 숙녀를 널리 구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는가. 어느 집안의 처자인지 알지 못하니 하늘이 정해주지 않는 것이 없다. 어찌 인력이겠는가. 오직 하늘의 도움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경들은 인척 중에 서로 전하여 알아보라”고 명했다. 간택제도는 이처럼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나 세종 이후 하나의 형식으로 굳어져 조선 왕조가 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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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원림 재독(在獨)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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