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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백 과부’, 이 여인이 사는 법

“돈은 써야 값을 하지, 안 쓰려면 모아 뭐해”

평양 ‘백 과부’, 이 여인이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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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여섯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아낙네는 온몸이 부서져라 일을 해 평양에서 손꼽히는 갑부가 되었다. 과부라고 우습게 보고 덤벼든 강도와 협잡꾼들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평생 자신을 위해서는 한푼도 쓰지 않던 그는, 환갑을 맞은 그날부터 마을 사람들을 위해 돈을 펑펑 쓰기 시작하는데…. 여자에게는 이름이 없던 시절에 태어나 말년의 공덕으로 ‘선행’이라는 이름을 얻고 장안의 조화(弔花) 값을 들썩이게 만들 정도로 세인의 존경을 받기까지, 한 여인이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
평양 ‘백 과부’, 이 여인이 사는 법

백선행의 삶을 다룬 ‘신여성’ 1933년 2월호 기사와 평양공회당 건축계획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7년 3월16일자(왼쪽).

1933년 5월13일, 평양 대동강 기슭의 3층 석조건물 ‘백선행기념관’에는 아침부터 조문객이 줄을 이었다. 화창한 봄날 토요일이었음에도 대동강 강변에는 상춘객의 발길이 뚝 끊겼다. 광성보통학교, 숭인상업학교, 숭현여학교, 창덕보통학교는 일제히 휴교하고 전교생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15만 평양시민은 살아생전 고인의 아름다운 행적을 추억하며 한마음으로 영면을 기원했다.

이 조선 최초의 여성 사회장(社會葬)은 오후 1시 정각 ‘백과부집’ ‘백선행기념관’ 등으로 불리는 평양공회당에서 거행될 예정이었다. 장례식의 주인공은 사재(私財) 14만6000원(현재가치 146억원)을 쾌척해 백선행기념관을 세운 ‘백 과부’ 백선행이었다. 오전 11시 박구리 자택에서 발인한 그의 영구는 오후 1시 정각 영결식장인 백선행기념관에 도착했다. 오윤선의 집례로 거행된 백선행의 영결식은 이훈구의 애사, 200여 통에 달하는 조전(弔電) 낭독, 각 학교 학생대표의 애도가 합창, 묵념 등의 순으로 한 시간 남짓 이어졌다.

장지인 당상리로 향하는 장의행렬은, 광성보통학교 900여 명, 숭인상업학교 500여 명, 숭현여학교 450여 명, 창덕보통학교 200여 명 등 각 학교대표 2200여 명을 선두로 각 사회단체 대표 등 1만여 명이 참례했다. 300여 개의 화환, 조기, 만장이 늘어선 장의행렬은 길이가 5리에 달했다. 평양시내 중심가에서 보통강 건너편에 이르는 연도에는 10만여 시민이 도열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평양시민 3분의 2가 참석한 ‘백선행 여사 사회장’은 오후 5시30분 남편 안재욱의 묘소에 합장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백선행은 과부생활 70년 만에 오매불망 그리던 남편 품으로 돌아갔다.

과부 2대

1848년 헌종 15년에 백지용의 외동딸로 태어난 ‘백 과부’는 이름이 없었다. 조선시대 여성치고 이름 가진 여성은 흔치 않았다. ‘아가’로 불리길 14년, ‘새댁’으로 불리길 2년, 나머지 70성상을 ‘백 과부’로 불렸다. 환갑이 넘어서야 착한 일을 많이 했다고 ‘선행’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생겼다.



아버지 백지용은 평양 박구리(?九里·현재의 중성동)에 살던 가난한 농민이었다. 그나마 외동딸이 일곱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모친 김씨는 죽은 남편이 남긴 가난과 고독 속에서 하나뿐인 딸을 애지중지 길렀다. 편모 슬하에서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어렵게 성장한 백씨는 열네 살에 가난한 농민 안재욱에게 출가했다.

모친 김씨는 사위에게 모녀의 일생을 의탁하려 했으나 병약한 사위는 결혼 직후 병석에 누웠다. 백씨는 어려운 살림에도 좋다는 약이면 백방으로 구해 써보았지만 남편의 병세는 날마다 악화되었다. 죽음에 임박한 남편을 살리기 위해 왼손 무명지를 칼로 그어 흐르는 피를 입에 떨어뜨려도 보았으나, 남편은 겨우 닷새를 더 버텼다. 안재욱은 아내에게 아이 한 명 안겨주지 못한 채 결혼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열여섯 살이 된 백 과부는 남편을 잃고 다시 과부 어머니를 찾아 친정으로 돌아왔다. 개가하여 팔자를 고치라는 동네 사람의 권유도 있었으나 스무 살 전의 과부는 세 번 남편을 갈지 않으면 불행을 면치 못한다는 미신이 주는 공포와 어머니 과부의 신세를 생각하여 과부 모녀는 죽기까지 떨어지지 않기로 맹세하고 새 생활을 개척했다. 우선 그날그날 먹을 것이 문제였다. 그들은 청대(쪽으로 만든 검푸른 물감) 치기와 간장 장사, 베 짜기 등으로 새 생활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고 백선행 여사 일생1’, ‘동아일보’ 1933년 5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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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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