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선행이 재산을 모을 당시의 일화를 담은 ‘동광’ 1931년 1월호 ‘철창 속의 백선행’.
구차한 살림살이를 겨우 면하게 된 그 때 모친 김씨가 세상을 떠났다. 봉양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모친을 저세상으로 보내는 것도 서러운 일이지만, 모친의 상여 뒤를 따를 상주 한 사람 없는 게 더 원통한 일이었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찾아온 친척들은 백 과부에게 사후 양자를 들여 상주로 삼으라고 권했다.
장례도 장례지만 제사가 더 문제였다. 모친이 죽은 해는 조선 왕조의 수명이 37년이나 남은 1873년이었다. 딸자식은 상주(喪主)도 제주(祭主)도 될 수 없었다. 생전에 따뜻한 밥 한 공기 배부르게 먹어보지 못한 모친은 제삿밥조차 대접받지 못할 처지였던 것이다. 백 과부는 친척들의 권유에 못 이겨 조카뻘 되는 친척을 모친의 사후 양자로 삼아 장례를 치르게 했다.
양자의 음모
그러나 양자는 장례나 제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장례가 끝나기 무섭게 상속 문제를 들고 나왔다. 사후 양자라도 아들은 아들이었다. 남녀의 구분이 엄격하던 시절, 상속은 아들의 당연한 권리였다. 양자는 모친의 전 재산은 아들인 자신이 상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 과부는 그때서야 속은 것을 알았다. 모친과 함께 10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하며 마련한 150냥짜리 집과 현금 1000냥을 어려운 시절에는 아는 척도 하지 않던 친척들에게 고스란히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백 과부는 끝까지 반항했다. 그러나 양자의 배후에는 유산을 나눠먹기로 약속한 문중 사람들이 있었다. 결국 끝까지 반항한 값으로 소녀 과부로 개가치 않고 어머니를 모시어 임종한 것이 기특하다는 이유로 살고 있는 150냥짜리 집만은 백 과부의 소유로 인정받았다. 현금 1000냥은 문중의 대여섯 사람이 나눠먹었다. 백선행 여사는 지금껏 친척들이 나눠먹은 재산기록을 보관할 만큼 그때 일을 원통하게 여긴다. (‘철창 속의 백선행’, ‘동광’ 1931년 1월호) |
10년 고생 끝에 모은 재산과 모친을 일시에 잃고도 백 과부는 오히려 용감했다. 재산을 빼앗은 양자 일파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집을 떠나자 백 과부는 문간에 콩을 뿌렸다. 악귀를 쫓을 때 하는 평안도 풍속이었다. 여자를 대놓고 무시하는 조선의 인습도, 파렴치한 친척도 악귀처럼 몸서리가 쳐졌다. 스물여섯 젊디젊은 과부 백씨는 흐르는 눈물을 속으로 삼키며 다시 생활전선으로 나섰다.
앞뒤 마당에 봉선화를 심어 꽃을 따고 씨를 받아 닷새에 한 번씩 열리는 장터에 내다팔고, 질동이를 머리에 이고 음식점을 순회하며 잔반을 얻어다가 돼지를 길렀다. 뽕밭을 가꾸어 누에를 치고, 물레와 베틀을 장만해 밤새도록 실을 뽑아 무명과 명주를 짰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20대 한창 나이에도 얼굴에 분 한번 바른 적이 없었고, 자기 손으로 짜는 옷감이건만 화사한 옷 한 벌 지어 입지 않았다. 단오에도 동산에 한 번 올라가지 않고 1년 365일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했다. 모친과 재산을 한꺼번에 잃은 후, 다시 10년을 ‘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고’ 살다보니, 50여 석 추수의 땅문서가 생겼다. 그때부터 백 과부의 재산은 기름 부은 불꽃처럼 불어났다. 생활비는 일해서 생긴 돈으로만 충당하고, 땅에서 나오는 수입은 땅을 늘리는 데만 썼다.
1883년 과부생활은 벌써 20년째에 접어들었지만, 백 과부의 나이 이제 겨우 서른여섯이었다. 부모도 자식도 남편도 가까운 친척도 없는 백 과부의 삶은 적막과 고독의 연속이었다. 고집 그만 부리고 한 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 개가하라는 이웃들의 권유는 듣는 자리에서 흘려버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귀를 씻었다. 이제 와서 개가할 것이었다면 20년 전 수절(守節)을 결심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20년 세월이 덧없이 흘러갔어도 사진 한 장 없는 남편 얼굴만은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2년 남짓한 결혼생활이래야 병든 남편 수발이 전부였지만, 서른여섯 해 인생에 그때만큼 행복한 시절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