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사건의 기원은 2007년 12월1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통령선거 투표일 하루 전날인 이날 노무현 정권의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은 국정원 대북 파트 간부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극비리에 방북, 북한의 정보책임자인 김양건 통일선전부장과 만났다. 김 원장의 방북 사실은 보름 뒤인 2008년 1월3일 외부에 알려졌다. 이른바 ‘대선용 북풍(北風) 기획’ 의혹이 거세게 일었다. 대선 승리로 정권 교체에 성공한 이명박 당선인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국정원에 ‘김만복 원장과 김양건 부장의 대화록’을 제출하라고 했다. 1월8일 국정원은 인수위에 대화록을 전달했다.
그런데 김만복 당시 원장은 인수위에 보고한 이 비밀자료를 1월9일 ‘중앙일보’ 인사에게 넘겼다. ‘중앙일보’는 1월10일 자료의 전문을 대서특필했다. 인수위 측은 국정원 측이 주도한 ‘언론 플레이’로 판단했다. 문건에는 김만복 원장에게 유리한 내용만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국정원 측은 한동안 언론에 “인수위 내부에서 유출됐을 것”이라고 발뺌했다. 1월15일 김만복 원장은 문건 유출자가 본인임을 시인한 뒤 사의를 표명했다. 검찰은 1월21일 김 원장에 대해 공무상 비밀 누설(형법 127조 위반) 혐의로 내사에 착수했다.
나라 떠나갈 듯 요란 떨더니
현직 국정원장에 의한 국가기밀자료 유출 사실이 밝혀진 직후 이명박 정권은 “국기(國紀)를 심대하게 문란케 한 사건” “엄중 처벌해야”라며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검찰도 김 원장에 대해 구속 등 사법처리 가능성을 시사했다. 당시 야당과 언론도 김 원장 성토 일색이었다.
“개인의 사의표명으로 유야무야 넘어갈 수 없는 일로, 사법적 판단에 따라야 한다.”(2008년 1월15일 이동관 인수위 대변인)

2008년 1월10일자 ‘중앙일보’ 1면.
김만복, 내사 결과 ‘흡족’
“국가기밀을 가볍게 처리한 것은 그 책임이 가볍다고 하기 어렵다.”(2008년 1월 15일 우상호 대통합민주신당 대변인)
“놀라운 일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국가 최고정보기관의 수장이 중요한 기밀을 통째로 특정 신문사에 넘겼으니, 도덕적 해이를 넘어 있어선 안 될 범법행위다.”(2008년 1월16일 ‘한겨레’ 사설)
“문건 내용이 일응(一應·일단 보이기에는) 형법 127조에 규정된 ‘공무상 비밀’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돼 내사에 착수한다.”(2008년 1월21일 서울중앙지검 2차장)
“검찰은 비밀누설의 고의성이 인정될 경우 구속영장을 청구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2008년 2월11일 ‘국민일보’ 보도)
그런데 1년여 뒤인 2009년 1월5일 이 사건은 ‘무혐의’에 가까운 ‘입건유예’로 종결된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김만복 전 원장이 공무상 기밀을 누설한 것은 맞지만 해당 기밀이 국가기능을 위협한다고 보기는 미약하고 유출 경위 역시 언론 보도로 의혹이 증폭되자 이를 해명하는 차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했다. 30년간 공직생활을 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사표를 제출한 점도 감안했다”고 설명했다.
김만복 전 원장은 검찰의 이번 내사결과에 ‘흡족’해했다는 후문이다. 김 전 원장의 지인에 따르면 김 전 원장은 “무혐의가 아니어도 괜찮다. 입건유예만으로도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청와대와 한나라당 등 여권은 ‘김만복 입건유예’에 아무런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이 사건의 이 같은 발단-전개-결말은, 한마디로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로 규정될 수 있다. “태산이 떠나갈 듯 요란을 떨더니 튀어나온 건 생쥐 한 마리뿐”인 셈이다. 지난 1년여 사이 새로운 증거나 증언이 나온 것은 없었다. 다만 미묘하게 달라진 건 ‘이명박 정권의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