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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모순 키우는 病, 의심증

율곡 10만 양병설은 조작?

자기모순 키우는 病, 의심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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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써 쓴 글이 널리 읽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 그러나 그걸 돈벌이의 대상으로 보는 상업주의는 반성할 일이다.
  • 역사 공부에도 상업주의가 있다.
  • 흔히 역사 상업주의 작가들이 들이대는 이른바 ‘독살설’이 그것이다.
  • 독살이라는 극적 사건을 통해 센세이션을 일으켜 독자를 ‘낚시질’하는 상업주의다.
  • 오늘 논의는 그런 독살설류의 선정주의와 짝을 이루는 의심증으로 시작한다.
자기모순 키우는 病, 의심증

드라마 ‘아이리스 2’. 국가를 초월한 비밀조직을 설정해 인기를 끌고 있다. 음모론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의 원인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을 때 일어나지만, 의심증은 상황을 충분히 다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도 생겨난다.

의심증(疑心症)의 오류(the furtive fallacy)란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 음습하고 불결한 것이라거나, 역사의 대부분이 드러나지 않은 원인과 불공평한 결과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생각은, 현실은 더럽고 비밀스러운 것이고 역사는 크렘린이나 바티칸, 펜타곤의 컴컴한 뒷방에서 일어난다는 전제로 시작한다.

인과를 추론하는 형식에선 공통된 요소들이 있지만, 이런 의심증의 오류는 단순한 음모론(conspiracy theory) 이상이거나 그와 다른 어떤 것이다. 사전은 음모론을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의 원인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배후에 거대한 권력이나 비밀스러운 조직이 있다고 여기며 유포되는 소문’(DAUM 국어사전)이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의심증은 상황을 충분히 다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음에도 의심한다는 점에서 음모론과 다르다. 이 오류는 사물이나 사건은 결코 그것이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는 소박한 인식론적 전제를 원죄(原罪)의 교리와 결합시킴으로써 음모론에 비해 훨씬 심각한 오류를 만들어낸다.

물론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이런 오류를 저지르지만, 성향이나 취향 등 다른 것에서도 그렇듯 병적으로 심한 사람이 꼭 있게 마련이다. 의심증의 오류가 심할 경우 우리는 정신의학자를 부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극단적으로 보면 의심증에서 생기는 오류는 지적(知的) 오류일 뿐 아니라, 흔히 편집증(偏執症·paranoia)이라고 부르는 정신질환이기도 하다.

나는 2009년 이런 의심증을 경험할 계기가 있었다. 먼저 조금 길지만 발단이 된 기사를 인용해보겠다. ‘한겨레’ 2009년 7월 8일자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쓴 ‘노론사관에 일그러진 조선후기사’ 중 ‘노론 뿌리 이이 ‘십만양병설’은 허구’라는 부분의 서술이다.

어떤 의심



현재 국민적 상식 중의 하나가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이다. 한때 국사 교과서에 실려 있었고, 현재도 일부 도덕 교과서에 실려 있다. 이는 국사학계의 태두라는 이병도 박사가 1948년 발간한 ‘조선사대관’(朝鮮史大觀)에 싣고 그 제자들이 국사 교과서에 기재함으로써 국민적 상식이 된 내용이다. 그 요체는 ‘임란 전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창했으나 선조는 말이 없고 유성룡까지 반대하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병도는 ‘조선사대관’에서 “양병십만론의 연월은 미상(未詳)하나 그의 문인 김장생(金長生) 소찬(所撰)의 율곡행장 중에 적혀 있으니 설령 그의 만년의 일이라 할지라도 임란 전 10년에 해당한다”고 서술했다. ‘연월이 미상한데’ 어떻게 ‘임란 전 10년’이라고 특정할 수 있었을까? 십만양병설은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에는 일언반구도 없다. 인조반정 후인 효종 8년(1657)에 서인들이 작성한 ‘선조수정실록’ 15년 9월 1일자에 사관의 논평으로 “이이가 일찍이 경연에서” 이를 주장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1548~1631)의 행장을 보고 쓴 것이다.

십만양병설은 애초 연월 미상이었으나 김장생의 제자 송시열(宋時烈·1607~ 1689)이 ‘율곡연보’에서 ‘선조 16년(1583) 4월’, 즉 임란 발생 10년 전의 일이라고 정확히 특정했다. 후대에 갈수록 날짜가 더 정확해지는 이상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송시열은 이 글에서 실제로 임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이 ‘이문성(李文成·이이)은 진실로 성인이다(眞聖人也)’라고 탄식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이가 ‘문성’이란 시호를 받은 인조 2년(1624)은 유성룡이 사망(1607)한 지 이미 17년 후였다. 사후에 생겼던 문성이란 시호를 유성룡이 사용했다는 기록 자체가 조작이라는 증거이다.

임란 10년 전인 선조 16년 4월 이이는 병조판서였다. 이이는 선조 16년 2월 “양민(養民)을 하지 않고서 양병(養兵)을 하였다는 것은 예부터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백성들이 군역과 공납을 피해 도망가는 상황을 우려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힘든 군역과 수월한 군역을 맡은 자를 서로 교대시켜 도망을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성들이 군역을 피해 도망가는 상황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창할 수는 없었다.

십만양병설의 가장 큰 문제는 유성룡의 반대로 무산된 것처럼 기록한 데 있다. 서인 영수 이이의 선견지명을 남인 영수 유성룡이 반대해 전란이 초래되었다고 주장하기 위한 조작이었다. 잠곡 김육이 쓴 ‘이순신 신도비’에는 이이와 유성룡이 이순신을 등용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이와 유성룡은 당파를 초월해 국사에 협력할 수 있는 사이였으나 당심(黨心)에 찌든 이이의 제자들이 십만양병설을 창조해 그 무산 혐의를 유성룡에게 뒤집어씌우고 둘 사이를 이간질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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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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