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주 뒤 나는 같은 신문에 ‘십만양병설 조작’ 주장은 ‘율곡전서’ 판본 무지서 비롯’이라는 요지의 반론을 썼다. 아래 글은 그때 썼던 글이다.
먼저 십만양병설이 조작이라는 주장부터 보겠습니다. 이 소장은, 십만양병설의 근거는 이이의 문인인 김장생(金長生)이 편찬한 ‘율곡행장’뿐이고,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에는 나오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십만양병설을 떠올리며 유성룡이 했다는, ‘이문성은 참으로 성인이다’라는 말을 조작의 증거로 들었습니다. ‘문성(文成)’은 이이의 시호이고, 유성룡은 이이의 시호를 내리기 17년 전에 세상을 떴으니, 행장이 조작이라는 것이지요.
한데, 이항복이 쓴 이이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을 보면, ‘이문성’이 아니라, ‘이문정(李文靖)’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이의 시호는 ‘문성’이기 때문에 이항복이 잘못 쓴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항복 역시 이이가 시호를 받기 6년 전인 광해군 10년(1618)에 세상을 떴습니다. 그렇다면 이항복이 쓴 이이 신도비문마저 후일 누가 조작했거나 아니면 뭔가 사연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다시 확인해보니, 같은 김장생이 쓴 행장이라도, ‘율곡전서’에 실린 행장에는 ‘이문성’이라고 되어 있지만, 막상 김장생 자신의 문집인 ‘사계집(沙溪集)’에는 이항복의 신도비문과 마찬가지로 ‘이문정(李文靖)’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그런데 이이의 시장(諡狀)을 지은 이정구(李廷龜)도, 십만양병설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이 문정(李文靖)은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했던 겁니다. 시장을 짓는 사람이 본문에서 당사자의 시호를 잘못 기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문정’은 실수가 아니라 뭔가 이유가 있는 기록이라는 말이라고 보는 편이 더 상식적입니다. 열쇠는, ‘이문정’이 이이가 아니라는 데 있었습니다. ‘이문정’은 바로 이항(李沆)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이항은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진종(眞宗) 때의 명신(名臣)입니다. 송나라가 거란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자, 이항은 나라가 너무 편안하면 오히려 화근이 된다고 걱정합니다. 그리고 가뭄이나 홍수가 나면 꼭 진종에게 보고하여 일부러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항이 세상을 뜬 뒤, 진종은 나라가 태평하다는 것을 믿고 궁궐을 짓고 간신을 등용하는 등 국정을 어지럽혔습니다. 그러자 이항의 옛 동료였던 왕단(王旦)은 뒤늦게 이항의 선견지명을 인정하면서, ‘이문정은 참으로 성인’이라고 칭찬합니다. 이후 이 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상투어가 됩니다. 그러니까, 유성룡은, ‘이이는 참으로 이항 같은 선견지명이 있는 성인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항복의 신도비명, 이정구의 시장, ‘사계집’에 실린 이이 행장은 모두 잘못 쓴 게 아니며, 유성룡의 말에 나오는 ‘이문성’, 아니 ‘이문정’이,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조작하기 위하여 김장생과 송시열이 기록을 날조하였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문성’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이덕일 소장이 ‘조작’의 증거로 인용한 ‘율곡연보’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순조 14년(1814)에 간행된 ‘율곡전서’에는 ‘이문정’이 아니라, ‘이문성’으로 나와 있습니다. 현재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웹서비스를 제공하는 판본도 이 판본이기 때문에 거기에도 자연 ‘李文成’으로 나와 있습니다. 저와 이덕일 소장이 당초 근거로 한 자료가 바로 이 판본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조 25년(1749)에 간행된 ‘율곡전서’에는 ‘李文靖’으로 되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순조 14년판 ‘율곡전서’의 교정자가 이이의 시호가 ‘문성’이라는 건 알고, ‘율곡연보’에서 말한 ‘이문정’에 대한 고사는 몰랐던 까닭에 ‘문정’이 틀린 줄 알고는 ‘문성’으로 덜컥 고쳤던 겁니다.
참고로 위 기사에 인용된 ‘율곡전서’는 영조 20년(1744) 간행된 연세대 소장본과 영조 25년(1749년) 간행된 고려대 소장본, 순조 14년(1814) 간행된 규장각 소장본이 있는데 20년과 25년 판본에는 ‘이문정(李文靖)’이라고 되어 있고, 순조 14년 판본에는 ‘이문성(李文成)’으로 되어 있다. 문정(文靖)은 송나라 이항(李沆)의 시호이고, 문성(文成)은 율곡의 시호다. 순조 14년 판본의 오류가 율곡 10만 양병설 부정론의 빌미가 되기는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닌 듯하다.
다시, 목표를 주시!
지금 우리는 의심증의 오류에 대해 공부하는 중이다. 위에서 내가 율곡의 10만 양병설을 전해주는 사료를 이렇게 검토하는 이유는 새삼스레 ‘율곡이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른 이유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 기회에 몇몇 사료의 특징을 함께 공부해보고 싶었다. 많은 경우 문집, 시장, 행장 등에 대해 언급하지만 막상 그것이 어떤 사료이고, 어떻게 작성되어 지금까지 전해지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기초학습 차원에서 소개해둔 것이다. 자료의 성격을 알면 사실을 이해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이 얘기는 이어서 계속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