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필 초서본 난중일기’에 기록된 이순신의 한(恨)과 분노, 피눈물과 통곡(痛哭·慟哭)을 엿본 사람이라면 그가 한때는 혁명을 꿈꾸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용꿈’은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난중일기’에는 총 40개의 꿈 얘기가 나온다. 곁에서 이순신을 지켜본 친조카 이분(1566∼1619)이 남긴 최초의 이순신 전기 ‘이충무공행록’에도 꿈에 대한 기록이 5번 나온다. 대부분은 이순신이 직접 꾼 꿈에 대한 기록이다. 이순신의 꿈 중에는 잠재의식 속에서 혁명을 꿈꾼 이순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용꿈’도 있다. 명량해전 전날에는 신인(神人)의 꿈을 꾸었고,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을 예언하는 듯한 꿈도 꾸었다. 출세와 성욕, 불안감과 육체의 병을 반영한 꿈도 여러 번 등장한다. 꿈에 대한 기록은 1594년(10회)과 1597년(18회)에 특히 많다.
1597년은 이순신에게 많은 일이 벌어진 해였다. 한산도에서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됐고 모진 고초를 겪은 뒤 백의종군한 때다. 그해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대패했다. 원균이 죽은 뒤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것도 그해의 일이다. 같은 해 어머니와 아들(이면)이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았다. 그래서일까. 1597년 이순신이 남긴 꿈에 대한 기록 중엔 삶의 고통과 간절한 열망이 반영된 게 많다.
1594년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강화협상 기간 중에 군대는 물론 민생까지 보살피며 행정가이자 경영자로 능력을 발휘하던 시기다. 이 시기의 꿈은 1597년과는 달리 자신감에 넘치고, 무의식 속에서 잠재적 욕망이 분출되는 상징적인 꿈이 많았다. 한쪽 눈이 먼 말, 높은 산봉우리에 말을 타고 오름, 미인의 손짓, 달려오는 외딴섬을 당당히 마주함, 붉고 푸른 용이 하늘에 오르다 벽화가 돼버린 화룡(畵龍) 등이 그것이다.
이 시기의 꿈속엔 이순신이 가졌을 법한 ‘혁명의 욕망’이 숨어 있다. 스위스 정신분석학자 카를 융의 표현대로라면 ‘원형적 꿈’이다. 물론 이순신은 스스로 꿈을 해석하면서 자신의 잠재적 욕망을 외면했다. 하지만 현대 심리학을 적용해 분석하면 ‘은폐되고 억눌린 정치적 욕망’이 확연히 드러난다.
聖人은 聖人의 꿈을 꾼다
명나라 때 편찬된 꿈 해석서 ‘몽점일지’는 “제왕은 제왕의 꿈을 꾸고, 성인은 성인의 꿈을 꾼다”고 했다. 필자가 보기에 이순신은 바로 그런 꿈을 꾼 사람이었다. 그 시대 다른 사람들의 꿈 기록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순신 시대 전후 인물 중 꿈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이는 여러 명이다.
선조 때 예조·공조·이조 참판 등을 지냈으며 경전과 역사에 능했던 유희춘(1513~1577)은 평균 2~3일에 한 번 자신의 꿈은 물론 부인·아들, 심지어 노비의 꿈까지 기록해놓았다. 프로이트의 성욕론으로 해석할 수 있는 꿈, 출세욕과 가족 번영을 기원하는 꿈이 대부분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했던 김종은 왜란 때 경기도 김포에 피란해 있으면서 추의군(秋義軍)에서 막좌로 활동한 인물로 출세욕이나 전쟁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감과 관련된 꿈 기록을 많이 남겼다. 임진왜란의 전쟁 기록인 ‘쇄미록’을 저술한 문신 오희문(1539~1613)도 피란 중 헤어진 가족을 걱정하는 꿈을 많이 꿨다. 1644년 무과에 급제해 무관으로 활동한 박취문(1627~1670)은 함경도에서 1년 동안 의무 복부를 하면서 꿈 기록을 여럿 남겼는데, 고향을 그리워하거나 가족을 걱정하는 꿈이 많았다.
이들과 이순신의 꿈을 비교해보면 공통점과 차이점이 확인된다. 공통점은 △조짐이나 계시라고 생각하며 긍정적으로 해석한 경향 △출세와 가족의 안위에 중점 △계시라고 해석한 꿈 내용이 때로 실현됨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