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호

목마구민(牧馬救民)으로 선순환 경제모델 개척

이순신의 진중(陣中) 경영

  • 박종평 | 이순신 연구가 goldagebook@naver.com

    입력2015-06-24 15: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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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순신은 해상통행첩을 만들어 어민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받은 세금으로 전비(戰費)를 마련했다. 섬을 개간해 농토를 만들고 식량을 구했다. 동시에 병사도 확보했다. ‘국민 속의 군대’를 경영한 지휘관 이순신은 조선 역사에서 보기 드문 경세가였다.
    목마구민(牧馬救民)으로 선순환 경제모델 개척
    500년 조선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성리학의 나라’다. 혹은 ‘선비의 나라’가 될 것이다. 그래서 조선은 ‘양반 문인의 주도로 사변(思辨) 철학이 지배한 정신문명의 나라’쯤 된다. 주류를 제외한 무(武)와 농공상(農工商) 그룹은 보조자나 그림자로 보일 뿐이다.

    실제 조선 역사에서 ‘무’는 전란이 있던 시기 외에는 거의 부각되지 않았다. 그조차도 세종 때의 북방 개척과 대마도 정벌, 선조 때의 임진왜란·정유재란 시기에나 주목을 받았다. 고려 말 이후 병자호란(1636~1637)에 이르기까지 왜구와 여진족(淸)은 지속적으로 도발했고 끝내 새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조선에서 무는 언제나 변방이었다. 한양은 ‘우물 안의 평화’에 젖어 있었다.

    이순신과 드레이크

    임진왜란 발발 100년 전인 1492년, 이탈리아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그 후 유럽 여러 나라가 무력을 앞세워 지구 곳곳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최신 무기로 무장한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은 대서양과 인도양, 태평양을 경쟁적으로 누볐다.

    임진왜란 4년 전인 1588년, 식민지 침략사에 한 획을 긋는 스페인과 영국의 결전이 벌어졌다. 무적함대(Armada)를 앞세워 세계의 바다를 호령하던 스페인과 신흥 해양 강국 영국 간의 운명을 건 한판 승부였다. 프랜시스 드레이크(1545~1596)가 지휘한 영국 함대는 우수한 전함과 함포로 무적함대를 격파했다.



    영국 함대는 장거리 항해 능력에서 무적함대를 능가했다. 함포도 무적함대가 탑재한 것보다 성능과 대수에서 앞섰다. 무적함대의 장거리포(culverin)는 21문, 중거리포(demiculverin) 151문에 불과했지만, 영국 함대는 장거리포 153문과 중거리포 344문을 보유했다.

    이 승리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뎠다. 드레이크는 200여 년 후인 1805년, 트라팔가에서 세계 정복을 꿈꾸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함대를 몰락시킨 호레이쇼 넬슨(1758~1805)과 함께 영국 최고의 바다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드레이크는 이순신이 태어난 해인 1545년 출생했고,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2년 전인 1596년 병사했다. 그들의 전략·전술은 비슷했다. 이순신이 해적처럼 상대의 배에 올라타 육박전으로 공격하는 일본군의 전략·전술을 간파하고 함포 사격으로 이를 무력화한 것처럼, 드레이크도 다수의 우수한 함포로 무적함대를 격파했다.

    드레이크가 중천에 떠 있던 스페인 제국의 야망을 꺾고 신흥 제국 영국을 세우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면, 이순신은 탐욕에 물든 과대망상증 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제국 일본의 꿈’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이순신과 드레이크는 존재 조건이 달랐다. 그들이 만든 역사는 달랐다. 하지만 그들은 19세기 독일 철학자 니체가 말한 ‘시대의 초인(超人·Superman)’이었다.

    自閉의 조선

    상업 이익에 눈을 뜬 유럽이 목숨 걸고 탐험하며 세계사를 바꾸던 격동의 시절, 역사를 후진시키고 있던 성리학의 나라, 선비의 나라가 조선이었다. 조선은 우물 안에 뜬 태양 같던 명나라를 ‘하늘의 태양은 하나’라는 신념으로 해바라기처럼 바라봤다. 그런 나라에서 이순신은 특이한 존재다. 문인 집안 출신이면서도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는 무인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는 공평무사한 행정가를 넘어, 탁월한 경영자가 됐다. 이순신처럼 무인, 행정관료, 경영자 세가지 면모를 두루 갖춘 인물은 조선과 중국은 물론, 동양보다 수백 년 먼저 근대화를 이룬 서양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조선시대에는 뛰어난 인물이 많았지만, 대부분이 선비 혹은 문인 관료다. 명장(名將)이나 상인(商人), 장인(匠人) 등은 많지 않다. 명장들은 몇 차례의 전쟁을 통해 혜성처럼 등장했지만 그뿐이었다. 그저 왕과 양반 문인을 지키는 경호원 같은 존재였을 따름이다. 양반 신분인 장수들이 그럴 정도인데 상인과 장인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조선은 성리학의 종주국인 명나라 사람들조차 구시대의 전설로 여기던 노비제도를 유지했다. 고조선 때부터 존재한 노비제도는 1801년 순조 때 공노비 5만 명을 해방하고, 그로부터 93년 뒤인 1894년 사노비를 폐지함으로써 마침내 사라졌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질서는 그만큼 오랜 악습이었다. 그런 사회에서 상인과 장인은 역사의 무대에 올라서기 어렵다.

    중앙과 지방의 행정권을 장악한 문인 선비들은 국가의 재정난과 민생 문제에 직면했지만 해결하려 노력하지 않고 외면했다. 선비들은 그들이 내세운 청빈한 삶과 달리 부유한 삶을 추구했다. 선비들의 목표인 과거 급제는 대부분 일신의 영달과 생계 해결, 부의 유지와 확대를 위한 수단이었다. 공자와 맹자가 말하는 이상적인 정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형이상학인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사회에서 백성들이 먹고사는 경제적인 문제는 부차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에는 ‘경제사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많지 않다. 양반의 먹을거리, 사회와 양반 신분을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는 정도의 부유함만 지키면 됐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경제사상가의 원조는 중기의 토정 이지함(1517~1578)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포천 현감 때 선조에게 올린 ‘이포천시상소(이抱川時上疏)’는 세계 최초의 근대 경제학 저술이라는 애덤 스미스(1723~1790)의 ‘국부론’보다 200여 년 앞선 탁견이다.

    경제에 눈뜬 ‘이단아’들

    이지함은 ‘3대 창고’ 개발론과 해외통상과 광산 개발 등을 주장했다. 3대 창고란 ‘도덕·인재·백용(百用·재화) 창고’이다. 백용창고 개발론은 토정 경제사상의 핵심이다. 육지와 바다의 자원을 적극 개발해 국부를 증진하자는 것이었다. 조선의 선비들이 쳐다보지도 않던 분야가 이지함에겐 새로이 개척해야 할 신세계로 보였다.

    훗날 박제가는 “토정이 일찍이 외국 상선 여러 척과 통상해 전라도의 가난을 구제하려 한 적이 있다. 그의 식견은 탁월하여 미칠 수가 없다”고 평가했다. 이지함의 백용창고 개발론이 조선에서 실행됐다면 조선도 콜럼버스처럼 신대륙의 한 부분을 발견했을지 모른다. 혹은 서구 열강처럼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지함의 문제의식은 쪼그라들었지만 율곡 이이에게 이어졌다. 이이는 당대의 조선을 중년의 위기에 이른 ‘중쇠기(中衰期)’라 보고,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각종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국가의 잘못된 정책과 양반들로 인해 백성이 생업을 잃고 국가는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백성의 삶을 위한 재화(生財)와 백성 살리기(活民)가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관직에서 벗어나 있으면 대장간을 세우고 호미를 만들어 팔았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문신 고위층 출신이 공업과 상업에 종사해 생계를 유지한 유일한 사례다. 하지만 그도 이지함처럼 기득권 세력들의 저항에 막혔다.

    이이 이후로는 임진왜란 당시의 최고 경세가이자 이순신의 멘토인 류성룡이 있다. 류성룡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그의 인재 발탁 능력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그는 율곡 이이 이후 조선이 끝날 때까지 이론과 실천에 가장 뛰어났던 인물이다.

    그의 ‘징비록(懲毖錄)’에는 풍전등화에 처한 조선을 구하기 위한 다양한 경제사상과 개혁론이 나온다. 이지함의 해양 개척론에 비하면 한계가 있지만, 조선 경제사상의 최고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기에 그가 추진한 둔전(屯田)과 소금 전매정책, 압록강 중강진의 국제무역은 대표적인 경제개혁 정책이다.

    둔전은 국경지역의 군사들이 방어를 하면서 동시에 농사를 지어 자체적으로 군량을 확보하게 한 정책이다. 류성룡은 명나라 군대에 공급해야 할 군량과 조선 군대의 군량 확보, 농사를 짓지 못해 떠도는 백성들의 생계를 위해 서해의 섬과 육지 곳곳에 둔전을 설치했다. 류성룡이 양민인 신충원(辛忠元)을 발탁한 것도 신충원이 둔전을 개간해 조령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류성룡은 전쟁 중 창설한 훈련도감 직업 군인들의 급료도 둔전으로 조달케 했다.

    그가 제안하고 실시한 소금 전매사업도 주목할 만하다. 황해도의 섬에 백성을 정착시켜 소금을 굽게 하고 이를 풍년이 든 육지에 팔아 생계를 잇게 했다.

    중강진 무역도 전례가 없는 경우다. 조선과 중국의 무역은 조공무역이라 별도의 공·사무역은 없었다. 류성룡은 기근이 심해지자 중강진에 국제무역시장을 열고 조선의 면(棉)과 중국의 곡식을 교환케 했다. 이 같은 전시(戰時) 경제정책들은 전쟁 후반기 기득권 세력의 저항으로 무력화했다. 이후 조선은 과거로 회귀했고, 조선의 개혁적 경제사상은 실학파의 등장 때까지 미뤄졌다.

    전쟁 기간 이순신은 군사 지휘관이자행정가, 경영자로 활약했다. 그가 관할지역에서 실시한 군민(軍民)경영은 매우 혁신적이다. 둔전 사업, 소금 전매사업, 시장 활성화 등은 류성룡이 추진한 정책들과 거의 일치한다.

    둔전은 이순신이 1587년 함경도 조산보(造山堡) 만호 시절 이미 경험한 것이었다. 그는 함경도의 녹둔도 둔전관(屯田官)을 겸임하기도 했다. 전쟁 발발 후 이순신은 류성룡의 둔전 정책에 교감해 한산도 인근의 국영 목장(牧場)에 둔전을 실시해 군량을 확보했다.

    “섬이 시장이 됐다”

    목마구민(牧馬救民)으로 선순환 경제모델 개척

    전남 완도군 고금도(왼쪽)와 신지도(오른쪽)를 잇는 장보고대교(2017년 개통 예정) 조감도. 장보고의 정신이 서려 있는 고금도에서 이순신은 해로통행첩 제도를 실시해 백성을 안정시키고 군량을 확보했다.

    처음 이순신이 둔전을 제안하자 조정에서는 반대했다. 그는 “나랏일이 어렵고 위태로우며 백성들이 살 곳을 잃었으니,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에게 나라의 목장이 있는 섬에서 농사를 짓게 해 전투용 말을 키우고 백성들도 구하자(牧馬救民)”고 주장한 끝에 조정의 승인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것이 이순신의 이른바 ‘목마구민(牧馬救民)론’이다.

    이순신은 머릿속으로만 가능성을 검증하지 않았다. 조정이 둔전을 승인하자 그는 먼저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늙고 병든 군사들을 농사 인력으로 활용했다. 그들에게 둔전을 설치할 섬의 토질이 농사에 적합한지 검증케 한 뒤 군사들을 적극적으로 투입해 농사를 짓게 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영남에서 피난와 떠도는 백성들을 섬에 안착시켜 농사를 짓게 했다. 이순신의 둔전은 현대 경영자들처럼 철저한 계획과 계산을 바탕으로 한 결과물이었다. 그는 둔전으로 군량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을 정착시켜 군사도 확보할 수 있었다.

    류성룡이 중강진 국제무역을 제안할 즈음인 1593년 이순신은 섬진강 기슭에 시장을 열어 재화가 유통되게 했다. 1597년 명량대첩 이후 고금도로 진을 옮겼을 때도 시장을 열었다. 윤휴(1617~1680)에 따르면 “섬 안이 시장이 됐다(島中成市)”고 할 정도로 활성화했다.

    신경(申炅·1613~1653)은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 “(이순신이) 집을 지어 피난민들에게 팔아 살게 하니, 섬 안에서는 피난민들을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라고 번성한 광경을 묘사했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쓴 ‘이충무공행록’도 이순신의 고금도 진영에 대해 “군대의 위세가 강성해져 남도 백성들 중 공(公)에게 의지해 사는 자가 수 만 호에 이르렀고 군대의 장엄함도 한산진보다 열 배나 더했다”고 기록했다.

    군량과 군자금 확보를 위한 이순신의 소금 전매사업, 어업과 물고기 판매 활동은 ‘난중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595년 5월 17일. 쇳물을 부어 소금 가마솥 한 개를 주조했다. △1595년 5월 19일. 소금 가마솥 한 개를 주조했다. △1597년 10월 20일. 김종려를 소음도 등 13개 섬 염장(鹽場·염전)의 감자도감검(監煮都監檢·염전에서 소금 굽는 것을 관리 및 감독하는 관리)으로 임명했다. △1595년 2월 19일. 송한련이 와서 “고기를 잡아 군량을 사겠다”고 했다. △1595년 12월 4일. 황득중과 오수 등이 청어 7000여 두름을 실어왔다. 그래서 김희방의 곡식 판매 배(貿穀船)에 계산해줬다. △1596년 1월 6일. 오수가 청어 1310두름, 박춘양은 787두름을 바쳤다. 하천수가 받아다가 말렸다. 황득중은 202두름을 바쳤다.

    일기에 쓴 대로 이순신은 군사들과 함께 어부가 되기도 했고, 소금 굽는 노동자가 되기도 했다. 군사와 백성의 생존을 위한 ‘경영자 이순신’의 선택이다. ‘이충무공행록’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계사년(1593, 49세). 진영에 있으면서 매번 군량을 걱정해 백성들을 모아 둔전을 짓게 했고, 사람을 시켜 물고기를 잡게 했고, 소금을 구웠고, 그릇을 만드는 일까지 하지 않는 일이 없었으며, 그것을 배에 실어 내다 팔게 해 몇 달이 못 돼 곡식 수만 석을 비축했다.

    이순신이 둔전을 만들거나, 시장을 활성화하거나, 집을 지어 팔거나, 소금을 제조·판매했다는 것은 ‘장수 이순신’만 아는 사람들에게는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경영정책은 류성룡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됐기에 독창적이라고 할 수 없다. 류성룡과 무관한 ‘혁신 경영자 이순신’의 면모는 이순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세히 기록한 ‘징비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명량대첩 이후 이순신의 군사는 8000여 명이었다. 고금도로 진을 옮겼다. 이순신은 군량 확보를 위해 ‘해로통행첩(海路通行帖)’을 만들었다. “삼도(三道, 충청·전라·경상)의 연안 바다를 통행하는 공선(公船)과 사선(私船)이 해로통행첩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간첩으로 보고 통행치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자 배를 타고 피난하던 백성들이 모두 통행첩을 받아갔다. 이순신은 배의 크기에 따라 통행첩의 대가로 곡식을 받았다. 작은 배는 1석, 중간 배는 2석, 큰 배는 3석을 지불해야 했다. 피난민들은 재물과 곡식을 배에 싣고 피난했기에 곡식 내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어 기뻐했다. 10일 만에 군량 1만여 석을 확보했다.

    이순신의 ‘혁신 5원칙’

    해로통행첩은 오늘날 면허증을 받을 때 내는 수입인지대나 수수료 같은 것이다. 그때껏 존재하지 않던 제도로 이순신이 처음 시도했다. 그 성과는 ‘징비록’에서 보듯이 대단했다.

    이순신은 명량해전 직후 그들을 따라 이동하던 피난선들과 함께 몇 차례 진을 옮겼다. 1597년 10월 29일 고하도에 도착했으나 군량과 군사가 태부족했다.

    그때 이순신의 참모 이의온(李宜溫·1577~1636)이 해로통행첩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놨다. 그는 백성들에게 통행첩을 제공해 어업 활동의 자유와 이동의 편의를 보장하는 대가로 곡식을 받자고 제안했다.

    현대 경영학의 구루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혁신을 가리켜 ‘기존에 있던 것을 개선하거나 변형시키는 것을 넘어서 새롭고도 다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라 정의했다. 이순신은 이의온의 제안을 받아들여 드러커가 정의한 혁신과 혁신의 5원칙을 수백 년 전에 적용했다.

    ①수군과 피난민의 상황을 철저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해 각자의 욕구를 파악했다. 수군은 군량이 필요했고, 식량을 싣고 다니던 피난민은 안전이 필요했다. ②피난민에게는 생업을 위한 땅이 필요했는데 이것도 제공했다. ③본래의 과업에 집중했다. 일본군의 서해 북상 저지를 위한 수군 재건이 이순신에게는 과제였다. 재건의 기초가 되는 군사와 군량 확보를 위해 백성이 필요했다. 그래서 통행첩을 만들어 그의 부대가 주둔한 섬과 인근 섬에 백성이 정착게 했다. ④수군과 백성 모두가 동의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했다. 통행첩의 대가는 합리적으로 정했다. 피난선의 크기에 따라 징수량을 3등급으로 나눴다. 공정한 기준으로 공평하게 징수하자 백성들이 수긍했다. ⑤실천 가능한 범위에서 단계적으로 확대했다. 처음엔 고하도에서 소규모로 시작해 검증을 거쳤고 이후 환경이 개선된 고금도에서 확대했다.

    혁신의 5원칙을 지키며 실시한 이 전례 없는 제도는 모두에게 이익이었다. 조선 수군은 일본군 간첩을 식별해 정보 유출을 막을 수 있었다. 백성들은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섬의 땅을 개간할 수 있었기에 군사와 백성 모두 스스로 먹을거리를 생산할 수 있었고, 백성이 안정되자 조선 수군은 그들 중에서 군사를 모집해 활용할 수 있었다.

    진중 경영자 이순신

    7년 전쟁 동안 이순신은 불패의 명장으로 활약했다. 불패의 배경에는 거북선을 만든 발명가 이순신, 빼어난 전략·전술을 활용한 명장 이순신이 있다. 그러나 7년이라는 장기 전쟁에서는, 군사와 백성의 먹을거리와 군수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해결책을 마련해 운영한 ‘진중 경영자 이순신’을 더 높이 평가해야 할지도 모른다.

    목마구민(牧馬救民)으로 선순환 경제모델 개척
    박 종 평

    1964년 충남 보령 출생

    서강대 정외과 졸업, 고려대 석사(정치학)

    저서: ‘진심진력 : 삶의 전장에서 이순신을 만나다’ ‘흔들리는 마흔, 이순신을 만나다’ ‘이순신, 꿈속을 걸어 나오다’ 외 2권


    이순신은 백성에게서 일방적으로 세금을 걷어 운영하기보다 스스로 생산하면서 보급했다. 불가피하게 세금을 걷더라도 세금을 내야 하는 정당한 이유를 제시해 동의를 이끌어냈다. 혁신 경영자 이순신은 공존과 공생의 선순환 경제모델을 개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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