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호

조선의 ‘노라’ 박인덕 이혼사건

‘신여성 선두주자’는 왜 남편과 자식을 버렸나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입력2006-04-10 15: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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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생 때는 이화학당 최고의 인재로 명성이 자자했고 졸업 후에는 모교 교사로 일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기도 했던 박인덕. 그러나 그는 쏟아지는 세간의 기대와는 달리 부유한 유부남을 이혼시켜 결혼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입방아에 오른다. 우여곡절 끝에 6년간의 유학을 끝내고 돌아온 후에는, 어렵게 결혼한 남편과 자식을 찾지 않아 다시 한 번 사람들을 어리둥절케 하는데…. 경성 안 호사가들을 자극했던 이 여인의 행보에 숨은 당대 결혼제도의 그늘과 ‘신여성’이라는 이름의 굴레.
    조선의 ‘노라’ 박인덕 이혼사건

    ‘당대의 여성인재’ 박인덕의 이혼사연은 세간의 대대적인 관심을 끌었다. ‘신동아’ 1931년 12월호에 실린 ‘조선이 낳은 현대적 노라 박인덕’과 ‘제일선’ 1932년 7월호에 실린 ‘돌아오지 아니하는 어머니 박인덕’.

    근대교육과 자유연애의 세례를 받은 1920~30년대 신여성들은 자신의 의지로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첫 세대였다. 부모가 점지해준 남성에게 억지로 시집가지 않게 된 것은 분명 전시대에 비해 진일보한 것이었다. 그러나 스스로의 의지로 배우자를 선택했다고 가정 내에서 ‘아내의 의무’ ‘어머니의 의무’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사회는 개화됐어도 가정은 여전히 가부장적이었다. 많이 배우고 능력 있는 여성, 심지어 교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 여성조차 결혼하면 쪽을 찌고 집안에 들어앉아 전업주부가 되는 게 보통이었다. 어지간히 독한 마음을 먹지 않고는 사회생활과 결혼생활을 병행하기 어려웠다.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배우자뿐, 결혼 후의 삶은 전적으로 배우자의 의지와 능력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신여성에게 결혼은 일생을 건 도박과도 같았다. 한 남자에게 인생의 모든 것을 거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면 평생 독신으로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근대와 전근대가 어정쩡하게 뒤섞인 결혼생활은 자유연애의 이상도 퇴색시켰다. 역설적이게도 자유연애가 일반화된 이후, 능력 있고 돈 많은 남성의 인기는 오히려 치솟았다. 아무리 사랑한대도 무능하고 가난한 남성과 결혼한다면 평생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 큰 탓이었다. 당시 여학교 동창회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갈 정도였다.

    “아이고 저기 저이가 우리 3학년 때 4학년 반장으로 있던 이지?”

    “그런데 어쩌면 쪽을 찌고 왔어! 퍽 예뻐졌는데. 옷도 예쁘게 지어입구…”



    “저이가 신문기자한테 시집갔다지?”

    “시집 잘 갔네!”

    “잘 가긴 뭐가 잘 가. 하인 하나 없이 조석도 자기가 짓는다는데.”

    “아이고 어쩌면! 신문기자가 그렇게 껄렁껄렁한가.”

    “거기다 시어머니까지 있다는 걸.”

    “아이고 징역살이로구려.”

    (…)

    “잘생긴 여왕님 뒤에 시종무관이 없을 리가 있나. 있지, 응? 무엇하는 양반이요?”

    “문학가요, 교육가요, 실업가요, 예술가요, 말을 좀 해요.”

    “몰라! 몰라!”

    “물론 문학가나 예술가겠지. 원래 학생 적부터 취미가 많았으니까. 그런데 제발 월급쟁이나 시어미 있는 데는 연애도 걸지 말아요. 사람이 그냥 썩어요, 썩어!”

    “혼자 살면 살았지 누가 그런 데로 가!”

    (…)

    “그래도 지금 신식살림이라고 누가 와서 보더라도, 피아노나 하나 놓고 라디오나 놓고 커피 한 잔이라도 내놓아야지. 그 정도도 못하면 뭐가 신식이란 말이오!”

    “그러게 말이야.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혼자 산다면 모르지만 10년 동안이나 학교를 다니고 나서 신식결혼이라고 해 가지고 누가 시어미 버선 짝이나 꿰매고 아궁이에 불이나 때고 있단 말이오!” (‘신여성과 결혼하면’, ‘별건곤’ 1927년 12월호)

    남성중심주의에 젖은 남성이 신여성을 악의적으로 매도한 글을 가지고 신여성 전체의 결혼관을 가늠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혼여성의 사회활동이 금기시되던 1920~30년대 신여성에게 부잣집에 시집가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아무 생각 없이 겉멋으로 여학교에 다니던 여성뿐 아니라 사회지도자급 여성도 곧잘 돈의 유혹에 넘어가곤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경제적인 여유를 누리며 살자는 것이 크게 잘못된 생각은 아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부잣집에 시집가 행복하게 잘살았다면 바람직하지는 않아도 ‘성공적인’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그렇게 계획대로만 풀려나가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박인덕의 화려한 귀국

    1931년 10월, 온 나라의 이목은 6년간의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박인덕에게 쏠렸다. 박인덕은 이화학당에 다닐 때부터 ‘노래 잘하는 박인덕’ ‘연설 잘하는 박인덕’ ‘인물 잘난 박인덕’이란 평판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3·1운동 때에는 모교인 이화학당의 기하, 체육, 음악담당 교사로 재직하면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학생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경찰에 연행돼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유관순 열사가 그의 제자다.

    재색을 겸비해 뭇 남성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박인덕은,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배재학당 출신 청년부호 김운호와 결혼했다. 김운호는 박인덕을 아내로 맞기 위해 동대문 밖 홍수동(지금의 창신동)에 저택을 짓고, 다이아몬드 반지와 만원짜리 피아노까지 선사했다. 당시 만원이면 고급주택 한 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청년부호와 결혼했다고 민족과 여성을 향한 박인덕의 열정이 식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을 향한 열정은 결혼 후 더 커졌다. 박인덕은 맏딸 혜란을 출산한 직후 배화학교와 여자신학교 교사로 사회활동을 재개했다.

    박인덕은 얼굴만 잘났는가? 아니 그보다 더 칭찬할 만한 것은 그의 재주고 그보다 더 부러운 것은 그의 건강이다. 그가 얼마나 건강한가 하면, 배화학교와 여자신학교의 영어와 음악 선생으로 가정교사로 하루 평균 5시간 이상을 가르치면서 두 아이를 젖을 먹여 기른다. 해산하기 전 하루나 이틀, 해산한 후 2~3주 동안 학교를 쉬는 이외에 하루도 학교를 쉬는 일이 없다. 그렇게 건강에 무슨 비결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비결요? 아무 비결도 없습니다. 시간 맞추어서 하루 세 번 밥 먹고 시간 맞춰 하루 8시간 이상은 꼭 자고 힘써 일하고 유쾌하게 노는 동안에 자연히 건강한 몸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아이 나은 지 2주일쯤 되면 나는 벌써 학교에 갑니다. 갑갑해서 더 들어앉아 있을 수 없어요. 어린아이에게는 꼭 젖 주는 시간을 정해놓고 아침에 나갈 때 충분히 배불리 먹이고, 점심 때 돌아와 또 잘 먹인 다음에, 네 시에 돌아와 또 먹입니다. 그렇게 습관을 해오면 으레 그 시간이 되기 전에는 젖을 찾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정신이 들기 시작하여 내 얼굴을 익숙히 알게 되면 잘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지만 아침이면 으레 나가는 것이 습관이 되면 아침에 떼놓고 나가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돌이 지나서 걸어 다니게 되면 으레 아침이면 엄마는 학교 갈 줄 알고 갈 때 따라 나와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합니다. 주일날이나 국경일에는 오늘은 왜 나가지 않느냐고 묻지요. 아이들이 다 건강합니다. 큰 아이는 유치원에 다니는데요, 창가를 곧잘 해요. 창가선수로 뽑혀 다닌답니다.” (‘재주 있고 인물 잘나고 좋은 건강을 가진 박인덕 여사’, ‘동아일보’ 1926년 1월27일자)

    박인덕은 청년부호와 결혼하고도 하인 한 명 부리지 않고 두 아이를 낳아 손수 키웠다. 학교 두 곳에서 가르치는 것도 모자라 개인교습까지 했다. 어지간한 열정과 체력 없이는 감당하기 벅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