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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아버지

세대차 벽 허문 부녀간의 영어 편지

  • 글: 이인호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세대차 벽 허문 부녀간의 영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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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와 바로 아래 두 남동생이 당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면 으레 가는 것으로 알던 경기 대신 사대부중에 진학한 것도 아버지가 경복을, 어머님이 숙명을 나오신 우리 집에 경기는 친일파 자녀들이 가던 곳이라는 약간의 편견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경기여중이 아닌 서울사대부중엘 입학한 것은 내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본래 수줍은 성격 때문에 초등학교 2학년 때에는 성적으로는 1등을 하고도 반장 자리는 2등이지만 활발한 친구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내가 남녀공학에 다니게 되면서 남녀 전교생 앞에서 예사로 ‘호령’할 수 있도록 단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1915년 충남 홍성군 홍천에서 태어나신 아버지는 독립투사도 반공투사도 아니셨고 그렇다고 그 시대 많은 지식인들처럼 마르크주의에 심취하셨던 적도 없으신 듯하다. 낙향한 지 오래된 양반집이라 집안 살림이 넉넉하지는 않았어도 뿌리깊은 남존여비 사상에 젖어 있는 유교 집안에서 종손에 대한 기대와 대우는 유별난 것이어서 어릴 적부터 조용하면서도 총명했던 아버지는 어느 귀공자 못지않은 사랑과 촉망을 받고 자라셨다 한다.

일찍부터 책을 좋아하셨기 때문인지 그 시골에서 서울의 경복중학교엘 합격할 수 있었고 결혼을 하신 후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대 상대 전신)를 다니셨다. 당시로는 최고의 학벌을 지녔던 셈이지만 아버지는 평생을 조흥은행 한곳에서 봉급 생활자로 일하시며 그것을 만족스럽고 자랑스럽게 여기셨고 퇴직한 후로도 아버지의 은행은 그곳이었다.

내 마음 속의 전지전능한 분



그렇게 한 우물만 판 덕분인지 아버지는 항상 심리적으로 여유 있는 삶을 사시며 우표 수집과 독서 등 조용한 취미를 즐기셨고 겉으로는 자식들에게도 거의 무관심한 듯 보일 정도로 욕심이 없는 분이셨다. 세 아이가 대학과 대학원에 다니던 때 어느 자리에서 “요새 대학이 3년이지” 하는 말씀을 하셔서 친구분들 사이에서 놀림감이 되시기도 했다.

그런 욕심 없는 평온한 성격 때문인지 그 분은 그 시대 사람으로는 드물게 굴절이 없는 평탄한 삶을 살다 가셨다. 사람이라면 누구인들 내면적 야심이나 갈등이 없을 수 있으랴만,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유달리 평탄한 삶을 끝까지 이어갈 수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우리 한국의 실정에서 어쩌면 그 분의 생애를 오히려 비범한 것으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자식들이 더할 나위 없는 심리적 안정감을 누리며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그러한 생활 철학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아버지의 생애에 단 한 번의 굴곡도 없었던 건 아니다. 6·25 때 우리도 하마터면 아버지를 잃을 뻔했다. 조흥은행 영업부 차장으로 근무하는 35세의 청년으로 이미 슬하에 5남매를 두고 있던 아버지는 6·25 전쟁 발발 후 한달 쯤 되었을 때 북으로 강제 이송을 당했다. 다행히 의정부 근처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대열이 흩어지는 바람에 도망쳐서 집으로 숨어들어 오긴 했지만 매일 가택수색이 벌어지는 한달 넘는 기간 동안 마루 밑에 숨어 지내셔야 했다.

당시 부모님의 심정이 어떠하셨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하지만 그런 끔찍한 시련과 부산에서의 피란 생활을 겪고 난 뒤에도 부모님을 마치 전지 전능한 존재인 양 믿고 의지하는 내 어린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버지 작아 보이게 한 미국 유학

환갑이 훨씬 지나서까지 부모님을 모시는 행운을 지니고 살아온 내가 부모님을 나와 독립된 인격체로 인식하게 된 것은 대학 2학년 때 미국 유학을 가게되면서 부터였다. 당시 나는 우연한 계기로 기숙사비를 포함한 전액 장학금을 받고 미국 유학을 갈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나는 그리도 믿어왔던 아버지의 힘이 실제로는 얼마나 미약한것인가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내가 입학하게 된 웰즐리대학의 1년 학비와 기숙사비가 1900달러였는데 아버지의 연봉은 그것의 몇분의 일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때마침 미국에서 1년간의 은행간부 연수를 마치고 귀국 예정이시던 아버지께서 나를 보스턴 근교의 학교까지 데려다 주셨다. 그리고 얼마간의 용돈을 주셨는데, 이역 멀리 딸을 떼어놓으면서 아버지가 주고 가실 수 있는 돈이란 연수생으로 받은 용돈에서 조금씩 저축하신 몇 백 달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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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인호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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