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호

‘제3의 性’ 여기자의 세계

사체부검 후 내장탕 점심, ‘취업’ 미끼로 포주 취재

  • 글: 이지은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miley@donga.com

    입력2004-12-27 10: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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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드라마 제작자가 말했다. “여기자를 주인공으로 삼는 건 여러모로 유리하다. 어떤 분야의 남자주인공과도 만나게 할 수 있으니까.” 또 누군가 말했다. “여기자는 ‘기생’이다. 다양한 취재원과 만나 대화를 주고받고 정서를 교감할 수 있으니까.” 여기자들은 반발할지도 모르겠다.
    • “극도로 남성중심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제3의 性’ 여기자의 세계
    “집창촌성매매 여성을 취재할 때였어요. 기자라고 신분을 밝히면 진솔한 이야기를 듣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보험설계사인 친구의 고객 중에 성매매 여성들이 있었어요. 친구에게 그들과 술자리를 갖게 해달라고 부탁했죠. 그리고 저도 성매매 여성인 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어요. 일하면서 겪은 온갖 에피소드가 쏟아져 나오는데, 저도 어색하지 않게 구색을 맞추느라 고생했죠. 적당히 추임새도 넣어가면서…. 덕분에 생생한 기사를 쓸 수 있었지만 그때 만난 ‘동료’ 여성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월간지 4년차 기자)

    “가축경매가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엉터리로 이뤄진다는 비판기사를 쓴 적이 있어요. 그 후 한동안 전화공세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칼 쓰는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느냐’는 협박에 등골이 오싹해졌어요. 발신자 번호가 뜨지 않는 전화는 자동적으로 받지 않게 하는 이동전화 서비스에 가입했습니다.”(주간지 5년차 기자)

    “한동안 회사에서 화주(火酒)가 유행했어요. 국장이 먹으라고 하는데, 여자라고 ‘빼고’ 싶진 않았어요. 꾹 참고 마셨는데, 불붙은 술이 입가로 흐른 거예요. 턱 부위를 크게 데었죠. 의사가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다쳤냐’고 묻더군요. 사실대로 말했더니 ‘무슨 회사가 그렇게 군기가 세냐’며 혀를 내두르더군요.”(일간지 2년차 기자)

    “전화기를 두 개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100% 업무용이죠. 사회부에 있다 보니 기자임을 밝히지 않고 위장취재를 하기로 해요. 그때는 업무용 전화를 쓰죠. 그런데 1만원, 2만원씩 충전해서 쓰는 일명 ‘선불폰’이었어요. 대개 전화를 개통할 수 없는 신용불량자들이 사용하는 것인데, 충전하러 갈 때마다 무척 곤혹스럽죠. 이동통신사 직원들의 눈길이 묘하거든요.”(월간지 5년차 기자)

    “경찰서를 돌며 수습기자를 할 때였어요. 캡(언론사 사회부 경찰팀장)이 사체 부검을 보고 오라고 지시했어요. 형사들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실에 들어갔는데, 포르말린 냄새가 지독하더군요. 사체의 표정 없는 얼굴, 갈라져 나온 내장, 식도에 걸린 짬뽕 국수가락…. 시체 같은 건 죽어도 못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시체를 ‘탐구’하려는 나 자신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리고는 형사들이랑 내장탕을 먹으러 갔습니다.”(주간지 3년차 기자)



    일반인이 생각하는 여기자상(像)은 흔히 ‘명예남성’과 ‘팜 파탈’ 두 가지 유형이다.

    명예남성형은 척박하고 터프한 기자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성성을 완전히 버리고 남성과 똑같이 일한다. 선머슴처럼 짧게 자른 머리에 검은색 가죽점퍼와 청바지를 입고, 대부분 ‘노처녀’로 남성 못지않게, 아니 더 악랄하게 취재원을 ‘조진다’. 팜 파탈형은 이와 정반대다. 화사한 외모와 트렌치코트로 상징된다. 취재를 위해서라면 남성 취재원을 ‘유혹’하는 일을 비롯, 꽤 비윤리적인 일도 감당해낼 수 있다.

    제3의 유형도 있다. 일에는 관심조차 없이 그저 기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채 연애와 결혼에만 열정을 쏟는 경우다. 로맨틱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한다.

    ‘명예남성’도 ‘팜 파탈’도 아니다

    하지만 세 유형은 모두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90% 이상이 환상이다. 2004년 방영된 MBC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방송국 기자 이신영(명세빈 분)이 그나마 실제에 근접한다. 매일같이 데스크한테 ‘쪼이고’ ‘물 먹을까’ 전전긍긍하며, 아이템 찾기에 골몰하고, 좌충우돌하지만 일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 못지않은…. 물론 이신영처럼 항상 곱게 화장을 하고 하이힐에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채 작은 토드백을 들고 취재 다니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1990년대 후반 들어 언론계에도 여풍(女風)이 거세게 불었다. 그 전까지는 각 언론사가 생색내듯 매년 1∼2명의 여기자를 뽑았지만, 이 무렵부터는 5∼6명을 뽑았다. 2000년을 넘어서서는 대다수 언론사가 수습기자의 절반 가까이를 여기자로 뽑았다. ‘중앙일보’는 여기자를 더 많이 뽑은 해도 있다. KBS의 경우 현재 여기자 수가 90여명에 이르고 금녀구역으로 여겨지던 정치부에도 5명의 여기자가 근무하고 있다.

    한국외대 전진양 교수에 따르면 대한민국 최초의 여기자는 1920년 9월 ‘매일신보’에 입사한 이각경씨다. 당시 이씨의 직함은 ‘부인기자’였다(‘시사저널’ 1992년 9월17일자 전진양 교수의 글에 의한 것). 그 동안 최초의 여기자로 알려져온 최은희씨(1924년 ‘조선일보’ 입사)보다 4년 앞섰다. 고 최은희씨는 일제시대에 가장 고통받던 서민 여성들의 삶을 주로 취재한 선구적인 여기자이자 여성운동가였다. 여기자에게 주어지는 상인 ‘최은희 여기자상’은 최씨가 평생 절약해 저축한 원고료를 기금으로 1983년 제정된 것이다.

    그 후 여기자의 역사는 꾸준히 이어져왔다. 수년 전만 해도 구색 맞추기용 홍일점인 경우도 많았고, 임신이라도 하면 암묵적인 퇴사 압력에 시달려야 했으며, 근무부서는 문화부, 생활부 등에 한정됐다. 이들은 남성 중심적 기자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투사’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여기자 채용이 급증하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현재 한국여기자협회에 등록된 여기자는 500여명). 거친 취재 환경이 많이 개선됐고, 취재원이나 사내 차별도 줄어들었다. 핵심 부서로 꼽히는 정치, 경제, 사회부에서 활동하는 여기자도 늘고 있다.

    성기절단사건

    “사회부에 근무할 때 아내가 남편의 성기를 잘라낸 사건이 있었어요. 남편과 아내를 만나보니 사연이 있더군요. 약간 지능이 낮은 아내에겐 심각한 의부증이 있었어요. 그래서 ‘자르면’ 바람피우지 못할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 거예요. 아내에게 ‘자르면 당신하고도 못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상관없대요. 그냥 자기 곁에만 있어주면 된다고. 남편은 아내가 불안해할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잘생긴 사람이었죠. 그런데 남편도 그 지경에 이른 아내가 딱하다는 거예요. 남자 기자가 취재했다면 아내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였을지도 모르죠. 저는 두 사람 모두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기사에 두 사람의 사연과 정신적인 면을 여실히 전달하려 애썼죠.”

    이 사건을 취재한 6년차 주간지 기자 J씨는 사회부에 근무하며 엽기적인 사건을 많이 접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경찰서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지만, 형사들을 ‘형님’ 혹은 ‘오빠’라며 친근하게 부르고 피의자들에게 형사인 양 거친 말을 하며 ‘취조성 취재’를 할 만큼 담력이 커졌다.

    그러다 보니 일반인의 상식을 뒤엎는 경악스러운 사건도 막상 취재해보면 나름대로 사연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피해자에게 꼬치꼬치 캐물어 아픈 기억을 들춰내고 더러 미혼 여기자로선 민망한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은 여전히 곤혹스럽다.

    “그 사건이 일어난 직후 의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남편을 만났어요. 의사가 자세하게 남편의 ‘상태’에 대해 설명해주더군요. ‘뿌리까지 잘려서 1cm도 남지 않았다’는 둥…. 한번은 발기부전에 대해 취재한 적이 있는데, 비뇨기과 진료실에 들어가자마자 책상 위에 놓인 커다란 성기모형이 눈에 들어왔어요. 의사에게 적나라한 설명을 듣고 진료실을 나오는데,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환자들이 모두 이상하게 보였죠(웃음). 발기부전이 남자에겐 무척 심각한 문제라는데, 제가 기자가 아니었으면 알 수도 없었겠죠.”

    5년차 월간지 기자인 L씨는 낯선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기자직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성매매 여성과 포주, 노숙자, 불법 브로커 등 사회 밑바닥 인생부터 각 분야에서 최고로 성공한 사람까지 두루 만날 수 있다는 것.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인터뷰 장소에 나가 유명인사와 정해진 시간만큼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는 밑바닥 인생과 가식없이 피부로 접하며 그들의 경험을 공유할 때 생생하게 살아있는 기사를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수습기자 시절 한 성매매 여성이 포주를 고발한 사건이 있었어요. 눈물, 콧물이 뒤범벅이 되어 그 동안 당한 핍박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다른 기자들은 별 관심을 안 보였지만 같은 여성으로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요. 손수건을 건네며 위로했는데 6개월 정도 지났을까. ‘그때 너무 고마웠다’며 그 여성이 전화를 한 거예요. 덕분에 그의 풀스토리를 기사로 쓸 수 있었죠. 대학에 다니다 카드빚 때문에 술집을 전전한 끝에 집창촌까지 흘러간 사례였죠. 지금도 언니, 동생 하며 연락하고 지냅니다.

    기자 신분을 감추고 취재하는 경우도 많아요. 성매매 여성의 실태를 취재하려고 포주를 찾아가 ‘일하고 싶다’고 한 적도 있고, 전화방 아르바이트나 노래방 도우미 노릇을 해본 적도 있죠. 노숙자를 취재할 땐 꼬질꼬질하게 입고 가서 노숙자들이랑 밤새 술을 마셨습니다. 만취한 노숙자가 갑자기 어디론가 끌고 가려고 해서 기겁하고 도망쳤지만요. 힘들긴 해도 그래야 좀더 생생한 기사를 쓸 수 있으니까 도전하는 거죠.”

    포주 찾아가 “일하고 싶다”

    8년차 경제부 기자인 H씨는 “기자에겐 탐정과 같은 분석력과 상황 판단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암행어사처럼 외곽을 때려 여러 사람에게서 들은 조각정보들을 하나하나 맞추다 보면 실체가 보인다는 것. 또한 고위관계자를 야간에 ‘단독’으로 만나 현안에 대한 정보를 선점해서 기사를 써낼 때의 희열은 엑스터시와 같고, 바로 그 맛에 기자를 한다며 웃었다.

    8년차 연예부 기자인 K씨는 종종 자신이 기자인지, 국가정보원 직원인지, 형사인지 헷갈린다고 말한다. 유명 연예인들의 ‘리스트’를 뽑아서 수시로 호적을 떼보는 것은 물론 연예인 집 앞에서 잠복근무를 할 때도 많기 때문이다.

    ‘제3의 性’ 여기자의 세계

    방송국 여기자가 주인공으로 나온 MBC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큰 인기를 끌자 여기자의 삶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은퇴한 여배우 집 앞에서 잠복할 때였어요. 집 뒤에 작은 언덕이 있는데, 그곳에 올라가면 방 안이 보이거든요. 수시로 올라가서 동태를 파악하는데, 도대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회의가 들더라고요. 연예인 집 앞에서 밤을 꼬박 새우며 기다리다가 당사자나 가족, 이웃에게 심한 욕을 먹을 때면 화가 나기도 하죠. 물론 그들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독자가 좋아하고 궁금해하는 스타니까’ 하고 스스로 위안해요.”

    특히 5년차 전후의 젊은 여기자들은 기자라서 할 수 있는 온갖 경험에서 재미와 보람을 찾는 듯했다. 새벽까지 일하는 경우도 허다하고, 휴일에도 회사에서 호출하면 당장 출동해야 하며, 혼자서 며칠씩 지방출장을 다녀야 할 때도 많지만 다양한 사건과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재미있다고 했다.

    그들은 자신이 ‘여기자’가 아니라 ‘기자’라고 주장한다. 수습기자로 채용될 때부터 동료 남자기자들과 전혀 다른 대우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여기자는 “여기자이기 때문에 여자문제를 다뤄야 한다는 것은 특정 지역 출신의 기자에게 그 지역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사만 쓰라는 것과 같다”고 했다.

    호의, 오해, 아니면 경계

    그러나 대다수 여기자는 여전히 남성중심적인 우리 사회에서 여기자로 일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고 말한다. 취재원들이 여기자를 기자로 취급하지 않던 시절에 비하면 세상이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취재원과 기자 사이에 공고하게 형성된 ‘이너서클’, 즉 비공식적인 네트워크에선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취재원과의 술자리나 골프, 남성중심적인 접대문화 등이 그 예다. 일간지 7년차 기자 H씨의 이야기다.

    “제가 출입하던 신용카드 회사에서 저와 제 상관인 차장, 부장에게 저녁을 사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홍보관계자 3명과 저희 3명이 자리를 함께했는데, 식사를 마치니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거예요. ‘H기자 데리고 가도 되나?’라면서 은근히 제가 빠져주기를 바랐죠. 그렇지만 이 회사를 담당하는 기자는 난데, 중간에 빠진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함께 북창동의 한 술집에 갔는데, 알고 보니 아가씨들이 접대하는 업소였어요. 아가씨들을 ‘초이스’ 할 때 홍보 관계자는 아가씨와 저를 번갈아 쳐다보며 ‘적어도 H기자쯤은 돼야지, 너무 안 예쁘네’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아가씨들의 야한 쇼를 보면서 ‘내가 여기 왜 있어야 하나’ ‘이렇게 해야만 취재원과 친해지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남성 취재원들이 여기자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도 여기자가 취재원과 돈독한 관계를 만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남자기자들이 쉽게 건네는 ‘저녁이나 같이하자’ ‘술 한잔 하자’는 말도 여기자가 하면 다소 이상하게 받아들여진다. 이럴 경우 취재원들은 지나친 ‘호의’ 또는 ‘오해’ 아니면 ‘경계’의 반응을 내비친다. 여기자를 기자가 아닌 여자로 보기 때문이다. 문화를 담당하는 월간지 기자 L씨도 최근 황당한 일을 겪었다고 털어놓았다.

    “유명한 영화감독을 인터뷰했어요. 약속한 2시간이 다 지나갔는데, 취재가 좀 미진한 듯했어요. 그래서 ‘1시간만 더 내달라’고 했더니 그 감독이 ‘내가 좋아서냐, 아니면 좋은 기사를 쓰기 위해서냐’고 물었어요. ‘좋은 기사도 써야 하지만, 감독님의 팬이기도 하다’고 했죠. 그랬더니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이야기를 계속하자’고 하더군요. 그런데 차에 올라탄 후로 계속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사적인 질문을 던지고, 손을 잡으려 하고…. 문을 박차고 나가야 할지, 기자라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건지 고민에 빠졌죠. 하지만 정도가 심해져 대놓고 싫은 소리를 했더니 감독이 이러는 거예요. ‘L기자가 내가 좋다고 했잖아’….”

    여성지 5년차 기자인 K씨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다.

    “취재중 알게 된 고위공무원이 있는데, 이른바 프리섹스주의자였어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중요한 취재원이었기에 꾸준히 연락해왔죠. 어느 날 맥주 한잔을 함께했는데, 갑자기 ‘K기자가 원한다면 내가 성과 섹스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싶다’고 하더군요. 순간 내가 이 사람과 계속 연락을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어요. 그 동안 다양한 분야의 지인들을 소개해주는 등 취재에 많은 도움을 줬거든요. 이 사람이 날 도와준 이유가 ‘그런 것’ 때문이었나 싶더군요.”

    여러 달 전 온라인매체 ‘브레이크 뉴스’의 B편집장이 연예산업의 권력화를 비판하며 “연예인을 취재하기 위해 여기자가 매니저에게 뒷돈을 주고 몸을 파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해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당시 여기자들은 여자로서, 그리고 기자로서의 자존심을 크게 훼손하는 발언이라며 분노했고 사태가 확산되자 B편집장은 “여기자를 모욕할 생각은 없었다”는 사과문을 게재했다. 그런데 한 연예담당 여기자는 이 파문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봤다.

    “연예인 취재가 어려워진 것은 사실입니다. 연예인 취재를 제대로 하려면 매니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해졌어요. 이들은 대부분 남자이기 때문에 남자기자는 같이 술도 마시면서 친구처럼 지내죠. 하지만 여기자들은 사정이 좀 다르죠. 그래서 ‘여성성’을 이용하는 경우가 왕왕 있어요. 몸을 판다는 건 허무맹랑한 얘기지만, 웃음을 팔고 애교를 팔고 아양을 파는 거죠. 연예권력이 그처럼 비대해진 것은 분명 비판받아야 하고 B편집장은 그것을 강조하려다 무리수를 둔 것 같은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아 아쉬웠어요.”

    여기자를 기자가 아닌 여성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언론사 안에서도 종종 ‘배려’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여기자는 힘들고 어려운 일보다는 부드럽고 여성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간지 7년차 기자인 K씨는 결혼과 임신을 거치면서 사내에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됐다고 한다.

    “사회부를 지원했어요. 그런데 부서별 여자 TO(정원)가 있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에요. 사회부는 TO가 2명이어서 동료 여기자를 ‘밀어내야만’ 들어갈 수 있었죠. 그렇게 어렵게 사회부에서 근무하게 됐는데 임신을 한 거예요. 그랬더니 회사에서는 바로 ‘간지 부서’로 보내더군요. 물론 배려 차원이었지만, 몇몇 남자 선배기자는 ‘객기를 부리더니 이제야 제자리를 찾았군’ 하는 반응을 보였어요.”

    기혼 여기자는 회사일과 가사를 병행해야 하는 2중고에 시달린다. 물론 직장을 가진 기혼여성이라면 모두 그렇겠지만, 출퇴근 시간이 일정치 않고 외근과 야근이 많으며 업무시간 외에도 사람을 만나야 하는 기자직은 가사와 병행하기가 더욱 힘들다. 일곱 살짜리 아들을 둔 일간지 18년차 기자는 부서 특성상 취재원들과 골프를 치지 않으면 취재가 불가능할 때가 많다고. 그래서 골프를 배웠고, 1주일에 한 번 쉬는 토요일마저 취재원들과 골프를 치러 나가는 적이 많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내뱉은 한마디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취재원 조지고, 아들 조지고”

    “아들이 ‘엄마는 어떻게 회사 안 가는 날에도 나랑 놀지 않고 골프를 치러 가냐’며 울음을 터뜨리는 거예요. 너무 미안하고 속상했죠. 그렇지만 그날도 골프를 치러 나갔어요. 부장을 모시고 취재원을 만나는 자리였거든요.”

    주간지 15년차 기자인 이모씨는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이 엄마의 부재로 상처 받지 않도록 항상 전화로 대화를 나누려 노력한다고 했다.

    “전화로 취재원을 열심히 ‘조진’ 후 바로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숙제를 제대로 했냐’고 ‘조질’ 때가 많아요(웃음). 미혼일 때는 회사에서 가사를 챙기는 이른바 ‘설거지 냄새 나는’ 선배들을 경멸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제가 그렇게 하고 있죠. 한 선배는 1년에 여러 번 해외출장을 다녀왔더니 딸아이가 ‘엄마는 언제든지 나를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쏘아붙였다고 해요. 딸이 자신에게는 마음을 열지 않으면서 (아이 봐주는) 아주머니에게는 살갑게 대하는 것을 보고 상처를 받았다고 해요. 일만큼 육아도 중요한 것인데…. 그래서 저는 전화로라도 꾸준히 아이를 챙기려고 해요. 그래도 이제는 기사만 제때 넘기면 여기자가 가사를 돌보는 것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지 않으니까 그나마 다행이죠.”

    집단과 융화하는 유연성 필요

    하지만 취재중 만난 여기자 대부분은 취재환경이 많이 개선됐고 앞으로 더욱 좋아질 것이라고 낙관했다. 10년차 이상의 중견 기자들은 “‘좋은 세상’이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언론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여성의 진출이 늘어나면서 여기자가 남자기자보다 더 수월하게 취재할 수 있는 분야도 많아지고 있다. 방송국 정치부에 근무하는 5년차 여기자의 이야기.

    “요즘은 정치인 집에서 밥 먹고 술 마시는 관행이 많이 줄었죠. 여기자로서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또 여성 의원이 크게 늘었는데, 이들을 취재하기는 남자기자보다 여기자가 수월하죠. 그들이 내는 법안 역시 여성, 교육, 복지 등과 관련된 게 많아요. 자연 여기자들이 더 관심이 있고요.”

    여기자들은 나름의 생존전략으로 치열한 삶의 전투를 헤쳐가고 있다. 2004년 5월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 편집장이 된 유인경 기자. 정치, 경제, 사회 등 ‘하드 부서’가 아닌 문화, 생활 등 ‘소프트 부서’ 출신 여기자가 시사지의 편집장이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오히려 부서 분위기가 부드럽고 재미있어졌다고 좋아하던데요. 먹을 것도 많이 사주고. ‘따뜻한 카리스마’라나(웃음). 사실 여자 동료와 잘 지내는 법도 모르는 기자가 많은데, 여자 상사를 모시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그래서 저는 기자가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편이에요. 또 무언가를 지시하기보다는 그들이 발제한 내용을 믿고 맡기죠.

    물론 제가 ‘하드 부서’ 출신이 아니라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요. 그럴 때면 저는 대놓고 물어봐요. 모르는 것은 잘못이 아니니까. 그런데 ‘짬밥’이라는 게 있어서 왕년의 유명인사들은 제가 더 많이 알거든요. 기자들이 ‘어? 생각보다 아는 게 많네’ 하며 놀라는 것 같아요.”

    그는 “똑똑하고 야무지게 일을 잘하는 여자 후배들을 보면 뿌듯하다”면서도 “여기자들도 고쳐야 할 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자 사회는 기본적으로 ‘공주’ 집단이에요. 자라면서 부모나 학교의 기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도 없죠. 그만큼 잘났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하는 불의에 대해서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편이죠. 또 자신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은 남자 동료보다 못한 대우를 받거나 취재원에게 무시당하면 견디지 못해요. 하지만 사회생활이라는 건 그렇지 않거든요. 또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게 정말 옳은 일이 아닐 수도 있고요. 어느 정도는 집단과 융화해 넘어갈 줄 아는 유연성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현재 여기자협회장을 맡고 있는 입사 29년차의 홍은희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중앙일보’ 편집국 최초의 ‘아이를 낳은 여기자’다. 당시만 해도 임신은 곧 퇴사를 의미했지만 그는 출산 후에도 꿋꿋이 출근했다. 그런데 얼마 후 자신이 동기들과 함께 승급되지 않았음을 알게 됐다.

    “퇴사 압력이구나 싶었죠. 그리고 바로 윗선을 찾아가 물었어요. ‘내가 이 회사에 필요없는 인력이냐’고. 당황한 그들은 ‘아니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알겠다. 그럼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한 후 문을 닫고 나왔습니다. 퇴사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거죠. 물론 승급 누락은 말도 안 되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당시로서는 퇴사만 강요하지 않는다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어요.”

    그는 “요즘 후배 여기자들에겐 건의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 겁먹고 자기 의견을 피력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꼬집었다. 오히려 여기자가 많아진 1990년대 후반 들어 이런 경향이 강해졌다고. 한두 번 안 되더라도 계속하면 낙수가 바위를 뚫듯 남성 중심적인 지면과 조직문화가 바뀔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논설위원실에서 저는 ‘투사’나 다름없었어요. 최근 논란이 된 성매매 특별법에 대해서도 다른 남성 위원들과 생각이 많이 달랐죠. ‘생존권 보장’이라고 포장해 은연중에 성매매 특별법 단속을 반대하는 뉘앙스를 풍기던 대다수 기사와 달리 저는 이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칼럼을 썼지요. 그것도 ‘투쟁’의 결과였어요. 저 역시 여성 권익과 관련된 발제만 하면 주변 남자기자들로부터 ‘여성단체 홍보지 만드냐’고 구박을 들었어요. 그럴 때는 화를 내기도 하고, 머리를 써서 ‘다른 데(타언론사)서 쓴대요’라며 설득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 기사화 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더라고요.”

    “이진숙 아니면 비자 못내준다”

    중동지역 종군기자로 유명한 MBC 이진숙 기자는 전문성을 가지는 순간 여성이라는 ‘핸디캡’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대학시절부터 중동문제에 관심을 가졌다는 그는 1986년 입사 후 문화부, 사회부에 근무하면서도 끊임없이 중동 관련 문제를 연구했고 관련인사들을 꾸준히 만나왔다. 그 결과 1990년과 1993년 1·2차 걸프전 취재 때 아랍국가에서 “이진숙 기자가 아니면 비자를 못내준다”고 할 정도의 중동 전문가가 됐다.

    “당시에는 여기자가 종군기자로 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방값이 더 나온다’며 여기자를 지방출장도 보내지 않던 때니 종군기자로 보낼 리 만무했죠. 기자로서 전쟁만큼 큰 기사를 쓸 기회가 없는데, 또 그토록 관심이 많던 중동지역 전쟁을 그냥 멀리서만 지켜봐야 한다는 게 너무나 서글펐죠. 그런데 다른 기자들에게는 계속 비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동안 인맥을 쌓아온 아랍국가 관계자들이 제가 아니면 비자를 내줄 수 없다고 한 거죠. 곁다리로 낀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필요해서 취재기회가 생겼구나 생각하니 너무나 기뻤죠.”

    그는 1990년 이후 중동지역을 20여차례 방문했고 종종 2∼3개월씩 머물면서 아랍어를 배웠다. 1993년부터 2002년까지 미국 하버드대, 이라크 무스탄스리아대,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학대학원에서 중동지역과 국제정세에 대해 공부했다. 그는 2003년 이라크전쟁 당시 바그다드 현장에서 취재를 한 유일한 한국 기자였으며, 비아랍권 언론 기자로서는 처음으로 이라크 무자헤딘(이슬람전사)을 인터뷰했다. 그에게 종군기자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전쟁은 참 끔찍한 일이에요. 특히 연약한 여성과 아이들이 가장 참혹한 피해자죠. 온몸에 화상을 입고 팔다리가 잘린 채 실신해 있는 아이와 그 옆에서 울부짖는 어머니를 본 순간 그보다 더한 고통이 없었어요. 일곱 살 난 제 딸아이의 모습과 겹쳐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들의 모습을 담은 화면이 많이 방송되었을 거예요. 이처럼 남성이 잡아낼 수 없는 섬세하고 디테일한 부분을 취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여기자의 강점이 아닐까요? 또 이건 여기자뿐 아니라 21세기가 원하는 기자상이라고 생각해요.”

    타고난 여성의 눈 유지해야

    이젠 여기자에게 ‘아니무스(여성에 내재된 남성성)’를 강조하던 풍토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 오히려 남자기자들에게 ‘아니마(남성에 내재된 여성성)’가 경쟁력이라고 말하는 시대다. 타고난 여성의 눈을 유지하면서 기자로서의 열정을 잃지 않고 부단히 노력한다면 21세기는 여기자의 전성기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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